서양사 연구
러시아 史
러시아의 역사
러시아 연방 Российская Федерация Rossiyskaya Federatsiy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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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5,407㎢(크림반도 포함)[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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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3, RU, RUS[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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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대사관 / 총영사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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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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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유의 | 러시아•북한 국경 50km 이내[14] |
1. 개요[편집]
2. 설명[편집]
세계에 현존하는 국가들 중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한 나라답게 접경 국가도 매우 많다. 서쪽으로 노르웨이,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와 접경하고 있다. 월경지인 칼리닌그라드까지 포함하면 폴란드, 리투아니아와도 접경하고 있으니 국토 서부의 접경국만 8개국이다. 그뿐 아니라 남쪽으로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몽골, 중국, 북한까지 6개국과 접경하니 총 14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또 남쪽으로 사할린 섬에서 오호츠크 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과 마주보며[15] 동쪽으로 베링 해를 사이에 두고 미국과 마주보고 있다.[16]
1945년 UN 창설 당시 원년 회원국이며, 1991년에 소비에트 연방을 승계[17]한 이후 현재 UN 상임이사국으로 있다. G20의 참가국이다. 기존 G8의 라스트 멤버이기도 했다. 또한 중국,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상하이협력기구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독립국가연합의 창설국 중 하나이며, 2012년 1월에는 유라시아 연합을 창설했다. 브릭스 (BRICS)에서 R이 러시아다.
병력수는 징병제로 84만의 상비군 대군을 유지하고 있다(5위) 액티브 국방비 지출은 4위다. # (연합뉴스 기사에서도 4위라고한다#)
핵무기 보유량 1위 국가고 # ICBM SLBM 기술 모두 가지고 있으며 #, # 미국과 마찬가지로 유인우주선, 우주도킹#, #도 자력으로 할 수 있는 나라다[18].
군사무기 수출은 2위이다.[19] 특히 이 나라가 개발한 아이돌급 인기의 총기는 최고의 히트상품으로 정평이 나있으며, 모잠비크의 국기에도 그려져 있을 정도로 반서방 저항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GDP는 12위 정도인데 다음 GDP IMF 순위 우크라이나 유로마이단 사태로 인한 서방의 제재와 셰일가스와 사우디의 증산에 따른 유가 파동 여파가 크다. PPP는 6위다. IMF 투표권 9위 영어위키백과 IMF Voting power, 금 보유고 5위 영어위키백과 Officially reported holdings, AIIB에서 중국과 인도 다음으로 발언권이 높다. 외환보유고 5위 #
3. 상징[편집]
3.1. 국호[편집]
러시아라는 명칭은 전통적으로 국명이라기보다는 지역명이었으며 루스와 구별되는 이름은 아니었다. 이는 벨라루스를 일컫는 다른 이름인 백러시아, 우크라이나 남부를 일컫는 소러시아, 벨라루스 서부 지역을 가리키는 흑러시아 등의 이름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동슬라브족 국가 중 하나였던 모스크바 대공국이 15세기 이후 동슬라브족이 중심이 된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고 지역을 거의 통일해 '루스' 혹은 '러시아' 지역의 대표 국가가 됨으로써 자신들의 지배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국호를 루스 차르국(Царство Русское)으로 바꿨고, 이후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의 일환으로 그리스어 어원의 이름인 '로시아'를 채용해 러시아 제국(Российская Империя)을 선포했다. 이후 '러시아'가 지금까지 국명으로 이어졌다.
한국 표준어에서는 영어식 표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러시아라는 표기를 쓴다. 2005년 제정된 러시아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로시야로 쓰는 것이 맞겠지만 이미 정착된 표기라 뒤집을 수 없어서인지, 지금도 표준 표기는 러시아이다. 북한 문화어로는 로씨야를 쓴다.
러시아의 한자 음차로는 노서아(露西亞)와 아라사(俄羅斯)가 알려져 있다. 전자는 일본어 한자 음차, 후자는 중국어 한자 음차에서 비롯된 것이다. 노서아란 음차는 '러시아'를 옮긴 것이고, '아라사'란 음차는 몽골어로 러시아를 뜻하는 'Орос'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렇게 대부분의 언어에서는 루스에서 따온 말을 쓰지만 소수 언어에서는 다른 유래의 단어를 쓰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핀란드어에서는 러시아를 Venäjä라고 하는데 이는 게르만인들이 슬라브인을 부르던 말인 Wend(벤드)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정작 루스에서 따온 말인 Ruotsi는 스웨덴을 가리킨다.
한국어에서 한 글자로 줄여쓸 땐 '러'를 쓰거나, 노서아에서 따온 '노'(露)라고 한다.[20] 아라사에서 따온 俄(아) 도 있지만, 아관파천 한 단어를 제외하고는 사장된 표현이다. 1990년대 후반까지 신문에서 한자를 자주 병용했을 때만 해도 신문기사 표제에서는 이 나라의 약칭을 '露'라고 적었고
공식 국호는 '러시아 연방 공화국'이 아니라 '러시아 연방'이다. 러시아에서는 구 소련 이래로 공화국이라는 용어를 독립 국가의 한 형태로 사용하기보다 정치적 연합체(주로 연방 국가)를 구성하는 단위로서 사용하였다. 소련부터가 소비에트라는 사회주의 체제를 수용한 공화국들의 연합체(그래서 국호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였지 스스로를 공화국이라고 지칭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련은 15개의 공화국으로 구성되었고, 이들 중 일부는 필요에 따라 다시 내부에 공화국을 설치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구 소련이 해체되고 그것을 구성하던 공화국이었던 러시아가 독립국이 되자, 독립국이면서 스스로를 공화국으로 부르는 건 기존의 관행과 충돌하기에 '러시아 연방'이 공식 국호로 채택되었다. 어차피 지금 러시아 연방 내에도 공화국들이 연방을 구성하는 단위의 한 형태로 유지되고 있어서 국호에서 뭔가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22]
3.2. 국기[편집]
러시아 연방의 국기는 하양, 파랑, 빨강의 삼색기이다. 위에서부터 하얀색, 파란색, 빨간색 등의 가로형 3색순이다. 하얀색은 고귀함, 순결함, 진실, 자유, 독립을 상징하고 파란색은 정직함, 충성심, 헌신, 순수함을 상징하며 빨간색은 용기, 지혜, 슬기로움, 사랑, 국가와 자신에 대한 희생정신을 나타낸다. 전통적으로는 천상세계, 푸른 하늘, 속세를 가리키는 해석도 있으며,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러시아 동슬라브 3개국의 단합을 가리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원래는 국기가 아닌 상선(商船)에서만 사용하였던 전용깃발이었다. 그러다가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가 이 깃발을 국기로 제정함에 따라 공식적으로 국기로 승격되었으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낫과 망치가 그려진 소련 깃발로 대체되었다. 이후 소련이 해체된 1991년, 러시아 연방의 출범과 함께 국기로 재지정되었다.
이 국기를 썼던 러시아 제국이 슬라브족의 나라 중 가장 강력하고 범슬라브주의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만큼 러시아 국기의 파란색, 흰색, 빨간색 조합이 범슬라브주의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구 유고슬라비아 등의 국기가 러시아와 유사한 것은 이러한 이유. 이런 나라들은 국기에 자신들의 국장을 반영해 러시아 국기와 구분한다.
3.3. 국가[편집]
- 러시아 연방 국가 문서 참조.
4. 지리[편집]
4.1. 영토[편집]
다른 건 몰라도 이런 특징은 사회간접자본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인 도로기반시설을 상당히 열악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기후적 특성도 더해졌는데, 러시아의 구불구불하고 복잡한 하계망이 겨울에 죄다 얼었다가 봄에 녹을 때 물이 땅으로 스며들어 길을 다 엉망으로 만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고대 루시인들은 겨울에는 언 강을 썰매로 다니는 등 도로의 필요성 자체도 느끼지 못했다.
하여간 이런 도로 정비 문제는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지금도 러시아의 도로 대부분이 엉망이며 나아질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국내 제조사가 러시아에 수출하는 차들은 방청과 극악의 도로 상황, 혹한에 대비한 처리를 하여 만든다. 이는 다른 국가의 회사들도 마찬가지다.
이게 한국식으로 따지면 일반국도급인 도로다. 한참 라스푸티차(распу́тица/Rasputitsa) 중에 찍은 모습. 오죽하면 농담으로 러시아의 3대 불량품은 도로, 날씨, 루스키(러시아 남자)라는 말도 있겠는가. 다만 혹독한 국난의 시기에는 이 3대 불량품이 3대 수호신으로 돌변한다! 중세 이래 폴란드의 윙드 후사르들[29]도, 스웨덴 카를 12세의 군대[30]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그랑 다르메[31]도, 아돌프 히틀러와 베어마흐트 및 슈츠슈타펠[32]도 처음에는 위풍당당하게 러시아 땅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곧 거지같은 도로에 묶여서 오도가도 못 하며 혹한에 시달리다 끝내는 죽음을 향해서 묵묵히 전진하는 러시아 남자들과의 격전 끝에 도륙당했다. 앞으로도 이 3대 수호신을 꺾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는 점이 그들의 존재 의의다.[33]
지역적으로 크게 보면 우랄 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의 동유럽에 포함되는 유럽 러시아(Европейская часть России, European russia)와 동쪽의 북아시아로 나뉘어진다. 우랄 산맥 동쪽을 전부 시베리아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시베리아의 범위는 북아시아 중부 지역에 해당하고 북아시아 서부는 우랄지역, 북아시아 동부는 러시아 극동에 해당된다. 유럽 러시아 지역은 러시아 전체 면적의 25%에 불과하지만 사실상 러시아의 발원지이자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제1의 도시이자 현 수도인 모스크바와 러시아 제2의 도시이자 옛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한 러시아 대도시 대부분이 위치해 있으며 러시아 전체 인구의 77%가 거주하고 있다. 반면 러시아 국토의 75%에 해당하는 북아시아지역에는 러시아 전체 인구의 불과 23%만이 거주하고 있다.
큰 규모의 운석이 잘 떨어지는 지역이기도 하다. 지구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으니 확률적으로 운석이 잘 떨어질만하다. 가장 유명한 건 퉁구스카 대폭발과 2013년에 일어난 첼랴빈스크 운석우 사건[34]
전체적으로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지는 평탄한 지형이 대부분이나 캅카스 산맥, 알타이 산맥, 캄차카 반도 등 일부 지역은 험준한 산악지역이다. 유럽 대륙 최고봉이자 러시아 최고봉인 옐브루스 산이 러시아 서남부에 있다.
2011년에는 동서로 펼쳐진 거대한 영토 덕분에 설정된 다수의 시간대에 부분적인 변경을 가했다. 가장 큰 변화는 동쪽 끝에 위치한 추코트-캄차카 지역의 독자 시간대를 폐지하고, 서머타임을 없앤 것.#
2014년 10월 26일 대대적인 시간대 조정을 단행했는데:
- 사마라 주, 우드무르티야 공화국, 캄차카 반도, 추코트카는 종전의 시간을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에, 사마라 주는 결과적으로 모스크바보다 1시간 빨라지게 되어 '사마라 시간' 이 부활했고, 한국보다 3시간 빠른 시간대인 '마가단 시간'은 '캄차카 시간' 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4.2. 행정구역[편집]
- 러시아/행정구역 참고.
4.3. 기후[편집]
물론 북극권에 가까운 시베리아 북쪽으로 올라가거나 동쪽으로 갈수록 극단적으로 추운 기후를 자랑한다. 야쿠츠크의 1월 평균 기온은 -40℃, 베르호얀스크는 -45.9℃, 오이먀콘은 -51.3℃다. 각 도시의 위엄에 대해서는 문서를 참조.
러시아는 9월 중하순부터 5월까지 겨울일 정도로 추운 나라인데도 워터파크가 있다. 물론 100% 실내이다.
5. 역사[편집]
- 러시아/역사 문서 참조
기본적으로는 슬라브 문화를 바탕으로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와 함께 들어온 동로마 문화와 몽골 지배로 흘러들어온 몽골 문화는 러시아인들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다. 동로마 문화는 러시아인의 종교관에 큰 영향을 끼쳤고, 황제=하느님의 대리인이라는 관념이 뿌리깊게 차용되었다. 대조적으로 서구에서는 교황권 때문에 성과 속의 구분이 일찌기 자리잡았다는 사실과는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정교분리는 꽤 오랜 후에 자리잡지만. 몽골의 지배(킵차크 칸국)는 서구화를 지향하는 러시아인들에게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되곤 했으나, 러시아 역사에서 전반적으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여기에 표트르 대제의 급격한 서구화에 맞물려 러시아는 여러 문화가 혼합된 매우 특수한 문화를 갖게 되었다. 이렇듯 다양한 러시아의 모습은 바로 이런 역사적 특수성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아시아인들은 러시아를 가보면 서구적이라고 느끼지만, 서양인들은 러시아에 오면 아시아적이라고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유럽인들과 미국인들 중에서는 러시아를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오랜 시간 동안 서유럽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역사적 과정을 밟아 왔으며,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아시아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나폴레옹이 러시아와의 전쟁 때 러시아인을 타타르족이라고 불렀으며, 2차대전 때 나치 독일도 소련을 몽골이라고 불렀다. 미국 등 서구권에서 만들어진 중, 근세 러시아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물에서는 러시아로 결혼해서 살러가는 유럽의 왕녀나 귀족 여성이 "동토의 아시아 국가로 가게 됐다."고 말하며 중얼거리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40] 러시아인들도 서유럽인들의 이런 인식을 모르는 게 아닌지 러시아에서 제작한 사극 드라마에서도 러시아 제국 황태자에게 시집가는 독일인 여주인공이 아시아 국가 운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20세기 초까지 '유럽'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지리적 요소보다는 문화적 요소에서 분류되는 측면이 강했다. 가령 유럽에서는 '유럽' 문화와 이질적이거나, 혹은 낙후된 국가들을 아시아라고 분류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대표적으로 핀란드인들은 20세기 초반까지 유럽에서 황인종으로 분류되었으며 헝가리는 19세기까지 아시아라는 소리를 들었다. 발칸반도와 그 인근 국가들 역시 19세기까지 유럽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41] 터키와 카프카스 지역의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에 관한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다. 덤으로 스페인은 나폴레옹에게서 "유럽이라기보다는 아프리카에 더 가깝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42] 이 시기 유럽에서는 '이성적, 합리적, 근대적, 과학적인 유럽의 문화'와 '감정적, 비합리적, 전근대적, 미신적인 아시아의 문화'라는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 꽤 강한 시절이었다.
당연히 이 문제를 두고 러시아 내부에서도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가령 러시아를 유럽의 일원으로 여기던 유럽주의자들과 "러시아는 러시아다."라며 러시아 자체적인 특수성을 신봉하던 러시아주의자로 나뉘어 논쟁하기도 했다.
일례로 나폴레옹 시대의 러시아는 왕족과 귀족들이 프랑스에 조그마한 땅이 있거나 잠시 활동하고 온 걸 자랑하기도 했으며 러시아어보다 프랑스어를 쓰는 것을 더 자랑스러워했다. 일부러 하층민들이 자기네들끼리 하는 말을 못 알아듣게 하면서 무시하려고 사생활에서 자기들끼리 프랑스어를 쓰는 러시아 귀족들도 흔했다. 당시 러시아에서 프랑스어는 상류층의 상징이며 필수 교양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5인조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유럽권 국가에서 서유럽이 이끌던 클래식 음악과는 다른 자신들만의 음악을 시도하고 그것을 기존의 클래식 음악과 같은 위상으로 올려놓은 국가이기도 하다.
소련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레닌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권력투쟁을 유럽주의자와 러시아주의자의 투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트로츠키는 신생 소련은 세계혁명, 우선적으로는 서유럽에서의 혁명이 없다면 생존할 수 없을 것(세계혁명론 또는 영구혁명론)이라고 봤고, 스탈린은 러시아가 독자적으로 공산주의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일국사회주의론)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광범위한 러시아주의자의 지지를 업은 스탈린이 승리했으나, 소련 말 고르바초프, 옐친같이 서방에 유화적인 지도자가 나오는 한편, 푸틴같이 친서방을 취하다가 다시 독자노선을 걷는 등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럽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사방으로 세력 확장을 갈망하는 패권주의 국가였다.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팽창을 정말 필사적으로 견제했다. 당장 영국만 해도 그레이트 게임에서 처럼 러시아의 흑해(크림 전쟁), 중앙아시아(영국-아프간 전쟁), 만주 진출(러일 전쟁)을 기필코 저지하려고 했으며, 윈스턴 처칠의 경우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중앙 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몰아내기 위해 소련군을 전면 공격하는 언싱커블 작전(Operation Unthinkable)을 계획할 정도였다. 특히 나폴레옹, 히틀러 같은 패권주의적 지도자들은 이러한 인식을 러시아를 침공하는 명분으로 적극적으로 악용했다. 사실 오늘날 컴퓨터 게임이나 영화에서도 '러시아가 유럽/미국을 침공한다'는 종류의 시나리오를 가진 게임이 꽤 많은 것에는 이러한 역사적인 인식이 어느정도 작용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러시아는 유럽으로 진출하려는 의지를 자주 보여왔다. 가령 19세기에는 범슬라브주의와 같은 민족주의와 부동항 획득을 명분으로 독일, 오스만 제국의 영역을 자기 영토로 흡수하려 했다. 또한 20세기에는 공산주의 전파라는 명목으로 유럽 국가들의에 공산주의 정부 수립을 지원했다. 그래서 동유럽 국가들은 2차대전 이후 대부분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이 때문에 동유럽에서는 러시아와 전통적으로 친했던 세르비아나 불가리아 같은 나라를 제외하면[43] 오늘날까지도 반러 감정이 꽤 있는 편이다. 특히 소련 내에서도 소련 시절 탄압받은 기억을 가진 국가들(대표적으로 발트 3국)은 적극적으로 서방에 협조, 러시아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하고 있다.
반면 러시아 입장에서는 위에서 말한 서방의 인식과는 반대로 러시아 자국을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는 20세기 초의 러시아 제국 붕괴, 20세기 말의 소련 붕괴를 겪으면서 영향력을 크게 상실했다. 또한 적백내전과 독소전쟁 같은 전쟁을 통해 참혹한 피해를 입으면서 '주변국이 러시아를 침공/식민화하려 한다.'는 공포감이 생겼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2000년대 푸틴 집권 이후 패권주의적인 행보를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러시아의 행보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은 주변국 입장에서는 러시아가 또다시 무력으로 흡수하려는 야욕으로 여겨져 적극적으로 서방편에 선다.
어쨌거나 이러한 전란의 역사 속에서 광대한 시베리아를 포함하여 세계에서 가장 넓은 국가를 건설해 낸 러시아인들의 조국에 대한 사랑은 엄청나며, 이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단어가 '어머니 러시아(Матушка Россия)'다. 단순히 위대한 조국을 넘어서 러시아 사람들에게 있어 러시아는 마치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는 뜻. 러시아 혹은 소련, 특히 독소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나 영화, 게임과 같은 매체 뿐만 아니라 현대 러시아 사람들의 언어 관습에서도 마더 러시아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6. 정치[편집]
- 러시아/정치 참조.
7. 국방[편집]
8. 경제[편집]
- 러시아/경제 문서 참조.
9. 사회[편집]
9.1. 인구[편집]
면적과 인구를 대비해 보면 인구 밀도는 km²당 8.36명으로 한국의 1/60 정도로 굉장히 낮은 편이다. 물론 국가 전체로 일반화하면 곤란하다. 사하 공화국은 인구밀도가 km²당 0.3명에 불과하며 싱가포르보다 4,300배나 큰 땅에도 불구하고 인구는 싱가포르의 1/5에도 못 미치는(…) 수준인 데 반해 유럽 부분의 평균 인구밀도는 km²당 27명으로 비교적 높다. 다만 한국 같은 국가들과 비교하자면 인구밀도가 낮긴 낮아서 서울, 델리와 마닐라의 km²당 인구밀도가 각각 17,000명, 25,500명, 42,000명인 것과는 달리 모스크바 시의 인구밀도도 km²당 4,000명에 불과하며 그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모스크바 주 (오블라스트)의 인구밀도도 km²당 150명 정도다. 참고로 충청북도의 인구밀도가 km²당 210명이다.
영토에 비해 인구가 적은 이유는 대부분의 국토가 미국, 유럽에 비하면 무척이나 척박한 데다[44]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지속된 인구감소도 한몫하고 있는데 1987년 2.23명선이었던 출생률이 1988년부터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1991년 소련 붕괴 후 의료보건체계와 사회보장제도의 붕괴, 고물가에 따른 예금가치의 추락이 겹치면서 출생률 감소가 가속화되고 평균수명도 같이 줄어들어 1993년엔 출산율 1.5명선이 붕괴되고 사망자수도 연 200만 명선을 넘음에 따라, 매년 -0.4%~-0.6% 정도의 인구감소 추세[45]가 2008년까지 이어졌다. 어찌나 정도가 심했는지, 한때 2050년이 되면 러시아의 총 인구가 8,000만 명대로 줄어들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나올 정도였다. 2009년부턴 출산율의 증가와 평균 수명의 증가, 구 소련 지역으로부터의 이민자 유입으로 인구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2013년부터 이민을 제외하고도 인구가 증가세로 돌아섰으나 2016년부터 다시 감소 추세이다.#[46]
그러다가 1999년 1.17명으로 저점을 찍은 출산율은 2000년부터 다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고, 때마침 고유가로 재정이 풍족해지면서 적극적인 출산장려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침에 따라 출산율 상승에 가속도가 붙어 2009년에 다시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출산율도 2014년 기준으로 1.75명대까지 회복했으나 이후 서방 국가들의 경제 제재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다시 출산율이 감소하기 시작해 2017년 기준 1.62명까지 떨어져 버렸다. 비슷한 시기에 출산율이 막장을 찍은 나라와 비교해보면[47] 석유빨이 크게 작용했어도 해도 출산율이 밑바닥에서 이 정도까지 올라온 건 분명히 성과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출산율이 큰 폭으로 올랐다고 해도 이 수치는 여전히 낮아서 대체출산율(2.1명)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다. 거기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 출생한 베이비붐 세대가 노년이 되어서 은퇴하고 있고, 수가 적은 1990년대-2000년대 중반 출생자들이 노동인구로 편입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출산율의 추가적인 증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출생아수가 다시 일정 수준 아래로 떨어질 수 있어서 인구가 일정 기간동안 감소될 수도 있는데다가 앞으로 2020년대까지는 적은 노동 인구로 늘어나는 아동층과 노년층을 부양해야 하며, 그래서 러시아의 인구학적 위기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1990년대~2000년대의 파멸적인 인구 감소 이미지에 비하면 출산율은 생각보단 높은 편인데, 2015년 러시아의 1,000명당 출생율은 13.3명[48]으로, 한국(8.6명)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12.1명), 미국(12.4명)보다 높았다. 여성 1명당 출산율도 2015년 기준 1.78명으로 미국 1.84명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경기침체가 다시 시작되면서 출산율은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2015년까지는 출산율이 계속 상승 기조였다가 2016년에 다소 감소한 데 이어 2017년에 출생자수가 20만명 이상 감소하여 1.62명까지 출산율이 크게 떨어져 문제가 심각해졌다. 2018년 6월의 출생자수 역시 2017년에 비해 1만명 이상 감소하여 러시아를 더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사망률은 지속적으로 낮아지는 편이라는 점 뿐이다. 2015년 UN의 예측에서는 2050년 인구가 2015년 대비 18% 감소해 14% 감소하는 일본을 인구감소에서 앞지를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 정부는 저출산에 대한 대책에 나섰고, 푸틴 대통령은 젊은층 가구에게 64억 파운드에 해당되는 금액을 지급한다고 밝혔다.#
인구 구조를 보면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28%를 차지하는 고령 사회이다. 그래도 같은 고령 사회인 대한민국과 비교하면 0세~14세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17.12%로 노인층 인구보다 많다는 점이 위안. 중위 연령의 경우 39.6세로 40대 직전인 상황인데 여성의 중위 연령이 42.5세, 남성의 중위 연령이 36.6.세로 차이가 엄청난 편이다.
9.1.1. 평균 수명[편집]
러시아 여성들의 평균 수명은 77.1세로 꽤 높은 편이지만 남성들의 평균 수명은 겨우 65.3세에 불과해 남녀 평균 수명이 12년이나 차이 난다. 즉, 평균적으로 러시아 여성들은 결혼하면 무려 12년 동안 혼자 살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다른 나라의 4~5년보다 훨씬 높다.[49]
그래도 평균 수명이 70세는 넘기에 노인 인구는 꾸준히 늘어 어느새 전체 인구의 14.3%나 되어 벌써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0~14세 유년층 인구는 전체의 17.1%로 아직은 노인 인구가 유소년 인구를 추월하지는 않았지만 그 격차가 불과 3% 이내로 많이 좁혀진 상황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노년층 인구가 유년층 인구를 추월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러시아의 합계 출산율은 1,000명 당 12명 정도의 수준이고, 합계 출산율은 1.7명 대 정도이지만 결혼을 빨리 하는 편이라 그런지 여성들의 초산 연령은 2009년 기준 24.6세라고 한다. 즉, 러시아 여성들은 결혼을 빨리 하지만 애는 잘 안 낳는 편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영아 사망률은 1,000명 당 6.8명이다.
9.1.2. 성비[편집]
실제로 러시아의 신생아와 0~14세 유년층 성비와 15~24세 청년층 성비는 106:100, 105 : 100으로 정상에 가깝다. 그런데 25~54세 장년층의 성비는 96 : 100, 55~64세 중년층 성비는 75 : 100이며 65세 이상 노년층 성비는 45 : 100까지 벌어진다. 이 또한 남성의 수명이 여성의 수명보다 압도적으로 짧은데다 노년층은 독소전쟁으로 90대 이상의 남성이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9.2. 민족[편집]
- 러시아인 문서 참조.
흔히 다민족 국가라 하면 미국, 캐나다를 떠올리는데 러시아도 대략 200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다.[50]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것과 같은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으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 러시아인들의 이름만 살펴보아도 아시아계 이름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51] 이것도 스탈린의 강력한 러시아 동화 정책, 강제 이주와 굴라그로 대표되는 억압으로 조금 줄어든 수준이다.
2010년 인구조사 결과 러시아인[52]이 인구의 81%, 약 1억 1,500만 명 정도를 차지하며, 타타르인, 우크라이나인, 바시키르인, 추바시인, 체첸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벨라루스인, 불가리아인, 폴란드인, 카자흐족, 타지크족, 우즈베크족, 투르크멘족, 키르기스족, 아제르바이잔인, 핀란드인, 독일인, 사미인, 아디게이인, 발카르인, 조지아인, 아람인, 쿠르드족, 몽골족, 루마니아인, 부랴트족, 투바인, 인구시인, 아바르탄인, 다르기인, 칼미크인, 코미인, 마리인, 네네츠족, 나나이족, 에벤키인, 축치인, 야쿠트인, 에스토니아인,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 크림타타르족, 아이누족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고려인도 50만 명 정도 거주해 인구의 약 0.3% 정도를 차지한다. 러시아 내에는 그 넓은 영토에 걸맞게 모두 160개 소수 민족이 거주하고 있으며 550만명에 달하는 타타르인과 200만명의 우크라이나인부터 98명이 거주하는 콜라 노르웨이인[53]까지 그 수도 다양하다.
아프리카인[54], 5만 명의 인도인, 일부 파키스탄인, 심지어는 아프가니스탄 내전 당시에 러시아에 피난 온 일부 아프가니스탄 피난민[55]도 살고 있다. 러시아 흑인들의 역사는 의외로 길어서 18세기에 이미 장군을 배출했을 정도였다. 유명한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바로 흑인의 후손이다. 곱슬머리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조상이 에티오피아의 귀족이었는데 푸시킨도 자기 집안의 이러한 내력을 자랑스러워 했다고 한다. 현재 러시아에 거주하는 흑인의 규모는 약 4만에서 7만 정도 수준. 그 외 러시아에도 구소련출신의 우크라이나, 몰도바,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 상당한 편이다. 특히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이주 노동자들은 러시아에서 3D업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러시아내에서 차별을 받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는 러시아내 스킨헤드에 의해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러시아 내 중국인이 증가하면서 2050년까지 두 번째로 러시아 인구의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관측이 나왔다. 링크
9.3. 언어[편집]
- 러시아어 문서 참조.
공용어이자 국내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러시아어다. 하지만 전부가 러시아어를 모어로 하는 것은 아니라서, 러시아 인구의 약 92%인 1억 3천만명만이 러시아어를 모어로 삼는다. 이는 러시아가 다민족 국가인 특성상 러시아인을 제외하고도 소수민족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이 소수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어족도 인도유럽어족, 북서캅카스어족, 우랄어족, 고아시아어족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또한 러시아가 연방 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연방을 구성하는 각 주체(공화국, 민족 자치구 등)는 러시아어 이외에도 따로 공용어를 지정하여 사용한다. 타타르 공화국의 타타르어, 사하 공화국의 야쿠트어가 대표적인 예.
하지만 러시아어의 세가 워낙 강력하다보니 지금은 소수민족 상당수가 자신의 민족어를 점차 잊어버려서 언어학자들은 발등에 불이 붙은 심정이라고 한다. 그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죽으면 그 언어는 그대로 사멸하니까. 2009년 유네스코는 러시아 내 언어 136개(!)가 사멸 위기에 처해있다고 밝혔다. 그러다보니 러시아내 소수민족들의 언어들은 러시아 정부의 특별 기금으로 보호를 하는 것을 마련하고 있다.#(러시아어 원문)
관련 자격증으로는 러시아 교육부가 주관하는 공인 시험인 토르플(ТРКИ, Тестирование по русскому языку как иностранному)이 있다. 토르플은 한국슬라브문화원 산하 토르플센터, 계명대학교 등에서 응시가 가능하다. 그외 기타 기관에서 실시하는 시험으로는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외국어능력시험인 FLEX,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 주관 언어능력시험 SNULT, OPIc 러시아어가 있다.
9.4. 종교[편집]
(러시아의 4대 대표 종교 : 유대교, 정교회, 이슬람, 불교)
소련이 1991년 붕괴되고 고르바초프의 등장 이후 세워진 러시아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종교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에서는 다양한 종교 활동이 보장된다. 다만, 1,000여 년의 세월 동안 러시아 민족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러시아 정교회가 러시아에서 가장 많은 비율의 신자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러시아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정교분리를 표방하지만, 러시아 정부와 정교회가 매우 사이가 가까우며, 사실상 정교회가 러시아 제1종교이자 국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련 해체 이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이후 지난 20년 동안 종교를 믿는 러시아인은 급증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적어도 "다소" 종교적이라고 응답한 러시아 성인들은 1991년 11%에서 2008년에 54%로 증가했다. 그리고 “신을 믿는다”고 응답한 러시아인들은 같은 기간 동안 38%에서 56%로 상승했다.
2012년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의 종교는 정교회 41%, 무신론 13%, 이슬람 6.5%, 무응답 5.5%로 집계되었다. 정교회 신자들은 주로 슬라브계 러시아인(русские)들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이슬람 신자(무슬림)들은 북캅카스, 타타르스탄을 중심으로 분포해 있다. 소련 시절 국가 무신론 정책의 영향을 받아 무신론 비율이 높은 편이다.
9.4.1. 정교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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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정교회는 비잔티움 제국 선교사들이 전교해, 988년 블라디미르 대공이 통치하는 키예프 러시아[56]의 국교가 되었으며 1037부터 1448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임명한 그리스인 대주교가 통치했다.
키예프 러시아가 정교회를 국교로 선택한 데에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블라디미르는 형제들과 싸워 권력을 얻은 탓에 정치적 기반이 약했다. 그래서 권력을 키우고 키예프 러시아를 강력하게 통치할 수 있는 사상이 필요했는데 그 사상이 바로 종교였다. 국교를 정할 당시 블라디미르는 정교회, 가톨릭, 이슬람교, 유대교 4개 중에서 선택하려고 했는데, 이슬람교는 술과 돼지고기를 못 먹게 하니 아웃, 유대교는 블라디미르가 "왜 유대인이 선택받았다는데 당신네는 나라 없이 떠돌아 다닙니까?"라는 질문에 랍비가 아무 말 못해서 아웃. 그래서 두 그리스도교가 남아서 두 쪽 다 사절을 보냈는데, 가톨릭 측 사절이 갔던 독일은 거의 암흑시대로서 야만족과 다름없는 안습이었기 때문에 아웃되었다. 반면 정교회 측에서는 휘황찬란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로 데려가서 그 화려함에 당장 정교회를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보다 실질적인 이유로는 접근성과 당시 권력의 차이 문제가 있었다. 유대교로 개종했던(!) 하자르 칸국은 이 시절이면 쇠퇴하고 있었고, 러시아는 로마보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훨씬 가까우며 당장 직접적인 무역 루트나 영향력 면에서 여러 모로 정교회를 택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예를 들어, 당대 러시아의 중심지였던 키예프에서 드네프르 강을 타고 내려와 흑해에 이르면 동로마 제국의 크림 반도 거점이던 케르손에 도착할 수 있고, 다시 거기서 배를 타고 흑해를 건너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르게 된다. 반면 당시 가톨릭의 중심지인 독일 지방이나 이탈리아 및 이슬람 중동권은 거리도 멀고 육상 교통로에 의존해야 했다. 수상 운송이 육상 운송보다 훨씬 효율적임을 생각하면 어느 쪽이 더 우수한 교역 파트너인지는 뻔한 것. 게다가 러시아의 개종 당시 지지리도 가난하고 분열되어 있던 서유럽에 비해 동로마 제국은 강력한 통일 국가로서 사절들이 와서 구경한 뒤 "그리스 애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곳에 가 봤는데요, 엄청 멋있어서 이 세상 같지 않았어요! 그렇게 대단한 데니까 분명히 하느님이 사실 거예요!!"라고 보고할 정도로 엄청난 성당을 지을 정도로 부유하기까지 했다. 당시의 종교는 정치와 사회 전 영역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었고, 특정 종교를 선택한다는 것은 곧 그 종교를 믿는 국가와 우호적 교류 관계를 맺는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당시 러시아의 입장에서 어느 쪽이 더 매력적이었을지는 뻔하다.
이후 1589년 이오프 모스크바 대주교(Патриарх московский Иов)가 모스크바와 모든 러시아인의 총대주교가 되면서 자치 교회가 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에 이어 제5위의 정교회가 되었다. 현재 모스크바 총대주교는 키릴이다.
수세기 동안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의 지배적인 종교였다. 특히 1055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완전히 분리되고,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에 이어 1453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동방 정교회 세계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마저 무슬림들에게 점령당한 뒤에 동방 정교회에서 가장 유능하다고 추정되는 지도력을 가진 나라는 러시아 뿐이었다. 이 말은 결국 러시아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정교회 지역들이 모두 이슬람의 손에 떨어졌다는 걸 의미한다. 실제로 이 즈음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마저도 당시의 신흥 강자였던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당했다. 이들 정교회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이 패망한 1922년까지 과거 누렸던 종교의 자유를 제한받았다. 반면 이 시기 러시아 정교회는 종교와 예술 등 전 분야에 걸쳐 러시아 문화의 아름다움을 꽃피웠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 말기, 황실과 결탁한 정교회의 부패는 끝을 달리고 있었고, 이러한 모습은 1917년 10월 혁명과 적백내전으로 집권한 소비에트 연방에게 있어 혁파해야 할 대상으로써 간주되었다. 게다가 공산주의는 사상적으로도 무신론을 내포하고 있기도 했다. 특히 레닌은 교회가 소유한 재산을 국유화할 것을 지시하며, 이를 거부하는 많은 수의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투옥시키거나 처형했다. 이후 소련 전역에 위치해 있던 성당과 수도원은 다른 용도로 전환되거나 파손되었다. 또한 공개적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명망 있는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다. 공산당은 정교회의 권위를 깨부수기 위해서 정교회 성인들의 무덤을 파헤치기도 했다. 정교회와 가톨릭 등 기독교 보편교회에선 훌륭한 삶을 살다 죽은 일부 성인들의 유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썩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는데, 썩은 성인들의 시체를 보여 주어 대중의 신앙심을 공격하려 한 것이다. 근데 수백년 전에 죽은 시신들을 파냈는데도 전혀 썩지 않아 공산당원들이 하얗게 질리고 흥분한 군중들이 공산당원들을 비난하는 사태도 있었다고 한다.[57]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스탈린은 나치 독일의 침략을 막는 데에 종교적 열의를 이용하기 위해[58] 다시 정교회 신앙을 부활시켰다. 스탈린은 남몰래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었다고 경호원들과 손녀가 증언한 적이 있기는 하나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는 거의 국교가 되어, 보리스 옐친이나 푸틴은 소련 시절에 명목상 공산당원이였음에도 정교회 신자라고 커밍아웃했고, 이후 성찬예배에도 자주 참례했다. 심지어 소련 공산당의 후신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 당수인 겐나디 쥬가노프도 교회에 다니며 정교회 성직자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공산당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는 아노미 상태에 빠진 국민들이 사이비 종교에 홀리는 예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책으로서, 그리고 러시아의 국가 정체성 강조를 통한 통합강조 차원에서 정교회를 대폭 밀어주는 정책이 강화되었다. 실제로 악명높은 일본의 옴진리교가 한때 러시아에서 크게 세력을 떨쳤으며, 러시아인 신자들은 아사하라 쇼코 교주가 체포되자 무력으로 아사하라 교주를 탈환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소비에트 연방 몰락 이후 각 국가별 교회 문제 때문에 대판 다투기도 하였다. 우크라이나 등 구 소련 영토 내의 교회는 각 국가의 교회이나 그 교회 건물의 소유권을 러시아 정교회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각 국가들의 독립 이후 러시아 정교회가 이를 바탕으로 교도권을 주장하면서 독립 교회를 인정하지 않아 갈등을 빚고 있다. 2018년 10월에는 크림 반도 분쟁 등의 이유로 러시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단절을 선포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정교회 세계에서 제일 현지화가 많이 진행된 교회이기에 다른 교회 지체와의 차이점이 상당히 많다. 애초에 초대 교회가 동서로 찢어진 사건 때문에 정교회 성직자들은 러시아 지역에 선교할 때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일치!'를 외쳤으나, 이번엔 이 동네가 당시 서유럽보다 더한 깡촌이라서.... 결국 원조(?)와 좀 많이 달라지는 걸 피할 수 없었다. 17세기 중반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의 재위 기간에 모스크바 총대주교였던 니콘이 슬라브 토속 신앙과의 융합을 피하려고 전례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맞춰 바꾸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니콘의 전례 개혁에 반발한 구전례파와 니콘을 지지한 신전례파가 나뉘어 내분이 일어나는 바람에 결국 실패했다.[60] 게다가 표트르 대제 때 러시아가 서유럽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이면서 러시아 정교회에 가톨릭적 색채가 가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도 분쟁이 일어난 이유가 없었고, 또 이 지역 사람들의 신앙이 깊기도 한 데다가 딱히 핵심 교리에서 변질되거나 한 것도 아니라서 러시아 정교회가 정교회 그 자체로부터 분열해 버리는 사태는 다행히도 일어나지 않았다. 표트르 대제가 즉위할 무렵 모스크바 총대주교좌가 공석이 되자 차르는 신성종무원을 만들어 정교회를 관리했고, 신성종무원은 러시아 혁명으로 해체될 때까지 이어졌다.
혁명 직후 러시아 정교회는 새 총대주교로 티혼을 뽑았지만 곧바로 볼셰비키가 집권하며 박해받았다. 공산당의 탄압이 시작되기 전에 티혼 러시아 총대주교가 해외 러시아 정교회의 설립을 명하면서, 러시아 정교회는 국내파와 해외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후임 총대주교인 세르게이는 교회의 존속을 위한 궁여지책으로 소련 정부에 대한 비판을 중단하고 지지를 표명하는 등 '살아남기 위한 조치'를 이어가지만 실질적인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 게다가 소련 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해(실제로 살아있는 교회란 별칭이 붙었다)' 정부의 관리 아래 들어갔고, 이러한 모습에 비판적이었던 해외 러시아 정교회는 우리나라의 남북한 이상으로 갈등과 대립을 겪어 왔다. 러시아에서 정교회가 자유를 얻은 것은 1990년 고르바초프의 주도로 소련 최고회의가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법"을 의결한 이후부터였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의 러시아 정교회와 해외 러시아 정교회는 100년간의 갈등을 끝내고 2007년 5월 17일 일치를 선언한다. 무려 100년간의 갈등 끝에 이뤄진 일이다. 물론 이런 일이 있기까지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푸틴이 정교회 신자다 보니 직접 나서서 챙기고 다독거려서 상호 양보를 받아내고 일치에 이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한편 한국 정교회 역시 본래 러시아 정교회 소속이었으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러시아 정교회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러시아 정교회는 한국 정교회를 미국의 미트로폴리아 관구의 일본 정교회에 맡기려 했으나, 일본 정교회 역시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민의 정서에 맞지 않아 갈등하던 중 1955년 12월 25일에 서울 성 니콜라스 성당 신도회의 결의에 따라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2018년 12월 넷째 주에 모스크바 총대주교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가 서로 다투고 성사교류를 끊은 것으로 인해 한국에 다시 모스크바 총대주교좌 소속 교회가 들어왔다. 2019년 3월 달에는 남북한을 전부 포괄하는 한국교구가 설립되었고, 4월 4일 자로 한국 주교가 선출되었다.
러시아의 성탄절이 12월 25일이 아니고 1월 7일인 이유도 정교회의 세가 워낙에 강한 영향이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정부는 아예 양력설과 크리스마스를 연계시켜 신년 연휴를 만들었다. 이것 때문에 러시아는 크리스마스가 1월 7일인 유일한 월드컵 개최국이 되었다.[62]
9.4.2. 이슬람교[편집]
러시아에 이슬람이 전파된 것은 7세기 가량으로, 당시 다게스탄에 처음 선교사를 파견, 이후 주변 민족을 중심으로 전파했다. 10세기 가량 볼가 강 유역에 거주하던 불가르 족이 이슬람교를 믿기 시작했으며, 이후 카잔 칸국의 타타르족이 이슬람을 믿기 시작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 시절 중앙정부 차원에서 슬라브계 러시아인들이 믿던 정교회를 강요하면서 이슬람 신자들은 탄압받기도 했다. 특히 캅카스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이런 탄압이 심해, 억압적인 소수민족 정책과 더불어 1817년부터 1864년까지 지속된 캅카스 전쟁같은 무력저항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0월 혁명 이후 집권한 소련 정부는 러시아 제국 내에서 탄압받던 이슬람 신자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 특히 1920년대 중앙아시아에서 실시한 현지화(Коренизация) 정책으로 이들 이슬람 교리가 보장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1930년대 스탈린 시기를 거치면서 이슬람은 다른 종교와 함께 다시 위축되었고, 이후 소련 말기까지 정교회와 같이 국가 관리 아래 놓여있게 되었다. 이후 1991년 소련이 해체, 종교의 자유가 부활하면서 캅카스를 중심으로 이슬람을 믿는 신자 비율이 급격히 증가했다.
9.4.3. 유대교[편집]
9.4.4. 불교[편집]
이 곳 역시 무신론을 신봉하는 공산주의 시대에 상당한 탄압을 받았고, 소련 전국에 오직 2군데의 사원[63]만이 허가 하에 존치되었을 정도였다.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 정부에서 공인한 '전통 종교' 4개 중 하나로 지정되어 정부 인사들과 불교 대표가 자주 만나는 등 사정이 많이 나아져 교세를 회복하고 있으며, 영미권에서 티베트 불교 신자가 조금씩 늘어나는 것처럼 소수민족 외의 슬라브계 러시아인 신자도 아주 조금씩 늘고 있는 편이다.
특이하게도 러시아 서부, 즉 유럽 지역에서도 칼미키야 공화국은 티베트 불교권이다.
9.4.5. 기타 종교[편집]
9.5. 치안[편집]
러시아 레드 마피아는 그 세력이 강하기로 유명한데, 택시를 타도 마피아 계열의 택시를 타면 강도로부터 안전하고, 의뢰받은 일은 그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반드시 완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다만 정부의 단속으로 예전보다는 나아졌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그래도 여전히 마피아의 암약은 상당한 수준이다.
살인발생 수 통계를 보면 러시아의 살인범죄 발생 수는 1987년에는 소련 10만명당 6명, 러시아 SFSR은 6.4명으로 1987년 10만명당 8.3명이었던 미국보다 낮았다. 소련 붕괴 이후로 3배 이상 급증하여 2001년 33,600건에 달해 세계 최고 수준에 달했고 살인건수도 10만명당 20명 이상을 찍을 정도로 상황이 매우 나빠졌다. 그래도 2000년대 이후 치안이 크게 개선되어 2018년에는 7,067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약 4분의 1로 줄어든 수치이나 여전히 대한민국의 3배 정도 되는 높은 살인 범죄율을 기록하고 있다. 2017년 소련 시절보다 살인률이 낮아졌다. 2018년에는 10만명당 4.9명으로 살인율이 급감해서 미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감소했다.
2016년 기준 대한민국 치안 지수는 85.69로 세계 1위이다. 반면에 같은 조사에서 러시아의 치안 지수는 52.69로 세계 68위다. 이 정도면 인도네시아(67위), 요르단(66위) 보다 낮은 순위이며 동유럽권 국가 중에서도 세르비아(58위), 불가리아(48위) 등 보다 낮은 순위이다. 다른 조사에서는 러시아가 110개 국가 중 뒤에서 46위의 치안지수로 미국과 비슷한 치안 지수를 기록하고 있다. 다만 미국의 경우 지역에 따라 개도국 수준의 치안상태가 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문제는 앞에 있는 나라에 이라크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나와있는 crime index 가지고 러시아가 그만큼 안전하다고 믿어서는 곤란하다.
관광객들이 접할 수 있는 범죄로는 관광지, 지하철역, 열차 등에서 소매치기가 있으며, 특히 4월 20일 히틀러 생일부터 5월 9일 승전기념일 사이에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
러시아 스킨헤드는 피부가 보일 정도로 머리를 짧게 밀고 검은색 옷을 입거나 아니면 웃통을 아예 벗고 다닌다는 인식과 다르게 요새는 평범한 옷차림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가정 폭력에 대해 처벌을 대폭 낮추는 법안이 통과되고 있다. #
서부 러시아에 비하여 이르쿠츠크나 블라디보스토크 등의 동부 러시아는 치안이 괜찮은 편이다.
어두컴컴해지기 전에는 뒷골목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일반 여행객 입장에서는 나름 치안이 괜찮은데, 여름에 가면 백야 현상 때문에 하루종일 어두컴컴해지지 않는다.
소련에서는 암시장이 전국적으로 크게 성행했다. 그냥 조직 한 두개가 여는 그런 소규모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그저 평범한 도시의 주민들이나 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닐 일이 많던 러시아 선원들이 부업으로 콜라, 플레이보이 잡지, 말보로 담배, 재즈 음반 등등 적성국가들의 것이니 당연히 금수(禁輸) 품목이던 미국, 서유럽, 일제 물품들을 들여와 몰래 비싸게 팔아서 재미본 것이었지만 연방의 붕괴가 진행되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이 거대한 마피아 네트워크는 순식간에 갈 곳을 잃은 전직 소련군의 제대 군인들, 순식간에 러시아 내에서 불법체류자가 된 많은 타 공화국들의 노동자들, 한 순간의 충동으로 아파트고 차고 다 잃어버려 새로 생긴 극빈층들, 일자리를 잃고 쫓겨난 전직 KGB의 첩보 요원들 등등으로 구성된 수 없이 많은 마피아들에 의해 시장이 잠식되었고, 블라디미르 푸틴께서 등장하기 전까지는 사실상 약해질 대로 약해진 중앙정부는 제대로 통제 시도도 못했기에, 결국 각 도시들은 여러 범죄 그룹에 의해 나뉘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들 간에는 세력갈등이 너무 심해서 공사장이나 상점 한 번 잘못 들어갔다가 총알세례로 벌집이 되는 일이 실제로 발생하곤 했다. 이는 사유지가 아니라 공사장이나 상점 등의 '개인' 명의로 된 공공장소에서 실제 일어나던 일들이었다. 그런데 러시아 경찰들은 당시 이런 사태에 대해서도 그저 못 본 척 하고 있었다. 첫 번째 이유로는 자신들의 안전이었다. 경찰 몇 명이 가서 질서를 확립하려 해도 상대는 재량에 따라 우크라이나나 벨라루스 등 타 공화국들에서나 자국에서 밀수입한 '군사용' 돌격소총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영화 로드 오브 워에 나오는 것처럼 소련 붕괴 이후 대량의 무기가 주인을 잃거나 애매해져서 무기상들에게 넘어갔고, 실제로 엄청난 양의 무기들이 팔려나갔다. 반면에 경찰들의 무장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지금의 러시아처럼 알파 그룹 같은 경찰 소속의 특공대가 가서 그냥 다 깽판 쳐놓을 수도 없는 게, 당시 정부 치안 유지 기구들은 급격한 민주화로 인해 권한이 많이 약화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로는 경찰들을 포함해 거의 대부분이 마피아들에게 '매수'되어 있었다. 당시는 블랙박스나 CCTV 등의 기록장치들이 선진국들에서도 흔하지 않던 시대였는데 러시아 같이 한순간에 헬게이트가 열린 나라들은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포상이나 사후 보상은 커녕 월급이나 제대로 챙겨줄지도 의문인데 사람 위해 목숨 걸고 일하느니 그냥 안전하게 갈길 가거나 위험하긴 해도 자기들의 밥줄과 생존을 보장해 주기는 하는 마피아들과 붙는 게 그들의 마인드였던 셈. 이렇게도 중앙정부가 무능한 상황에서 통제를 하려고 해도 통제가 안 되니, 사유지, 사유시설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사실상 그냥 신경을 껐다는 것이 온당한 표현일 것이다.
1990~2000년대 초반 상황을 다룬 러시아의 여러 매체들을 보면, 총기, 도검류 등의 살상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인물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블라디보스토크 같이 범죄 조직들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고 인구 밀도도 높은 도시들의 빈민가나, 러시아 마피아들이 세를 날리던 곳의 주민들 중의 상당수는 총기류를 보유하고 있었다. 보통은 TT 권총 같은 가벼운 경무장이었지만, 칼라시니코프 계열의 소총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었고, 심한 경우에는 RPG같은 대전차 화기를 보유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당연히 어그로를 끌지 않기 위해 이런 무장을 한 채 거리를 활보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자기 집안에 있을 때는 대담히 전시, 혹은 소지하고 있었다. '내 집엔 이런 게 있으니, 너 나 잘못 건들면 개발살난다' 라는 일종의 위력과시가 주목적이었겠지만 강도나 도둑들이 들어왔을 때 진짜 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사건의 경우 당연히 경찰이 출동해서 조사하고 총기를 압수해 가고 법원에 회부한다. 사실 러시아는 사냥용 이외의 총기 소지가 불법이다. 암묵적으로 공공연히 소지하고 구하기가 어렵지 않아서 그렇지.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보통 가벼운 벌금이나 집행유예가 딸린 가벼운 징역형을 받았는데, 상해죄가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된 지뢰 사건이 괜히 일어난 게 아니다. 법원에서도 치안기구들의 통제력, 공신력, 적극성 등등으로 인해 공권력이 이들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현실과 위험하고 거친 사회에서 살아야 하는 이들의 현실을 모르지 않기에 이런 것들을 감안했기 때문일 것이다.
9.6. 사회 문제[편집]
9.6.1. 부정부패[편집]
무엇보다 러시아는 뇌물이 흔하며 아예 당연시 될 정도다. 일상에서도 쉽게 볼 수 있으며, 관공서나 은행을 방문할 때 초콜릿 같은 선물을 준비하면 더 빨리 처리해 준다던가 더 친절(?)해진다. 러시아 내무부의 세르게이 솔로포프에 의하면 러시아에서 오고 간 평균 뇌물 액수는 1인당 6만 루블 정도라고 했는데, 러시아 평균 월급이 2012년 7월 2만 8천 루블이다. ‘러시아에 여행을 갈 땐 (뇌물로 줄)담배와 스타킹을 챙겨라’ 라는 말이 있을 정도.
특히 러시아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는 그야말로 심각한 수준이다. 뇌물을 요구하거나 받는 것은 약과고 아예 공금을 빼돌리는 것도 흔하게 일어난다. 러시아 수사당국은 2012년 4만 5,000건의 부패 관련 범죄를 적발해 8,000명의 공무원을 기소했으나 하급공무원이 아닌 고위층의 부정부패는 손쓸 도리가 없다고 한다.
'가이'라고 불렸던(ДПС의 전신) 러시아 교통경찰도 부정부패로 유명하다. 뇌물 받고 경찰차를 택시로 사용하기도 한다고. 이는 교통경찰 뿐만 아니라 다른 경찰들도 마찬가지다. 러시아를 여행하는 외국인이면 좋은 타깃이 되는데, 온갖 트집을 잡아 돈을 받아내려고 한다. 돈 주기를 거부하면 결국 경찰서까지 동행해서 해당 국가 대사관의 외교관이 와서 해명할때까지 오랜 시간을 거기서 썩혀야하니 외국인 입장에선 보통 짜증나는게 아니라서 결국 돈을 줄 수 밖에 없다. 외국인한테 이러니 자국민한테 저지르는 짓은 더 심하다. 러시아인들은 경찰들의 뇌물 요구라면 치를 떨 정도.
군대도 부정부패에서 예외가 아니라서 군 간부들이 공무원들처럼 예산을 빼돌리는 것은 물론이고 뇌물을 받거나 뇌물 바친 사람에게 특혜를 주는 일이 흔하다. 그래서 군 간부들도 고위 공무원들처럼 월급이 수백달러밖에 안되는데도 고급 주택, 승용차를 소유한 사람이 많고, 군 간부들에게 뇌물을 바쳐 멀쩡한데 징병에서 면제되거나 군 생활을 하더라도 보다 편한 보직을 받는게 흔하다. 또한 러시아 군은 국가에서 가장 많은 예산을 가져감에도 군 예산의 20%가 부정부패로 날아간다고 한다.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 존 버렐에 의하면 크렘린 밑에는 시장과 주지사가 뇌물을 주고 FSB와 경찰은 자국의 사업가들에게 보호비를 받아내며 레드 마피아는 모스크바 시 당국이나 경찰, 정보기관, 검찰에게 뇌물을 바쳐서 보호를 받고 있다고 하며 위키리크스의 폭로에 의하면 러시아에서 1년에 3,000억 달러(한국 국가 예산과 맞먹는 거액이다) 가량의 뇌물이 거래된다고 한다. 외국인 사업가들도 러시아에서 사업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공무원들의 뇌물 요구다. 뇌물을 주지 않으면 러시아에서는 제대로 된 사업을 하기 힘들 정도다. 스웨덴의 유명한 가구 기업 이케아도 러시아에서 사업하다 공무원들의 계속된 뇌물 요구에 짜증나서 2009년에 철수했다. 이케아가 뇌물 안 주었을 때 당한 불이익의 예로 모스크바 교외에 가게를 내서 오픈 기념식을 하려는데 소방당국이 안전을 이유로 기념식을 금지시켰다. 사업할 때도 전기료를 빠짐없이 냈는데 공공전력회사가(한국으로 치면 한국전력 같은 기관) 갑자기 전기를 끊고는 말로만 복구시켜 주겠다 하고선 해주지 않아 촛불과 손전등을 켜고 사업해야 했다. 이외에도 사소한 잘못으로 고액의 벌금 폭탄을 먹는 등 각종 불이익을 당하다 보니 버틸 수가 없는 것이다. 즉 뇌물을 주지 않을 경우 이런 방식으로 기업들을 괴롭혀서 뇌물을 바치게 만든다.
러시아의 행정은 비효율적이기로 유명한데, 가게 하나 내려고 하면 무려 140개나 되는 공무원의 확인 날인이 필요하다. 이게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대략 6개월에서 1년이나 걸린다. 특히 공무원에게 밉보이면 아예 허가조차 내주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사업가 입장에선 보통 속터지는게 아니라서 이를 조금이라도 빨리 받으려면 뇌물을 주지 않을 수가 없다. 더불어 러시아 공무원들의 서비스 수준은 세계 최악을 자랑한다. 불친절한데다 민원인을 대상으로 한 갑질은 물론이고 뇌물 안 주면 제대로 된 민원처리를 안 해 준다. 해주더라도 느려터지게 해 주니 민원인 입장에선 혈압이 오를 정도.
러시아 공무원들의 무사안일하고 경직된 태도와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러시아인들도 치를 떨며, 러시아인들의 언어 생활에서 줄곧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러시아어에서는 정부 기관, 조직, 요인 이름을 약어로 적는 경우가 많은데 주로 이걸 비틀어서 정치 세태를 풍자한다.[64] 다 적기에는 너무 많고 일부만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 ГИБДД: 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инспекция безопасности дорожного движения (국가 도로 교통 안전국) → Господа, инспектор беден — дайте денег (여러분, 검문 경찰은 가난하니 돈을 줍시다)
- ДПС: Дорожно-патрульная служба(도로 순찰대)[65] → Дайте, пожалуйста, сто (100(루블)만 줍쇼)
- ППС: Патрульно-постовая служба(순찰대) → Покупаем, продаём совесть (양심을 사고 팔자)
- ФСБ: Федеральная служба безопасности (연방 보안국) → Фантастически сумасшедшее бюро (환상적으로 미친 부서)
- КПСС: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소련공산당) → Клуб пенсионеров, стариков и сумашедших (연금생활자, 노인네 그리고 미친 사람들의 모임)
- МВД: Министерство внутренних дел(내무부) → Мало важных дел (중요한 일은 딱히 없다)
- ЗАГС: Запись актов гражданского состояния (호적등록과) → Зверски адская 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служба (지독하도록 지옥같은 국가 기관)[67]
- РСФСР: Российская Советская Федеративн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 Разная сволочь фактически слопала Россию (이런저런 개자식들이 러시아를 해쳐먹었다)
- СССР: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 Строили, строили, строили - рухнуло (건설에 건설을 거듭하여 붕괴하다)
2014년 11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사실 부패 척결의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으나 소련 이전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질적 문제이고 고위층의 부패는 전혀 손쓸 도리가 없어서 언제나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그러다보니 러시아 내에서도 기대를 안 한다. 결국 푸틴의 선포는 효과가 없었고 2016년 1월에 다시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고 선언한다. 물론 저 선언대로 될지가 미지수다. 푸틴 본인부터가 강도정치에 있어서 수하르토에 비교되는 인물인지라.
러시아는 서방과의 관계가 악화되기 이전에도 불경기와 계속된 물가상승, 실업난[69], 부유층이 국가 전체 부(富)의 "'75%'"를 쥘 정도의 세계 최악의 빈부격차[70], 빈약한 복지로[71][72] 알고 보면 국민의 생활은 서방보다 훨씬 어렵다. 이는 러시아 경제가 오일머니로 성장하는 와중에도 이랬다. 오일머니로 인한 부는 국민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고 부유층이 가장 많은 혜택을 보아 러시아 국민의 삶의 질은 그다지 나아진 게 없었다. 특히 러시아 공무원들과 일반인들이 받는 월급은 갈수록 오르고 있는 물가에 비하면 턱없이 낮기만 한데, 러시아 직장인의 94%가 연소득이 1만 달러 미만이다. 미국은 연소득 1만 달러 미만인 직장인이 30%인데 이 정도면 미국의 3배가 넘어 심각한 수준이다. 따라서 뇌물을 가외소득으로 여기게 되니 국가에서 아무리 부정부패 척결을 외치고 행동으로 옮겨도 근절이 안 된다.
푸틴의 부정부패 타도를 비웃듯 러시아에서는 2016년에도 비리사건들이 터졌다. 9월에 러시아군의 고위급 간부인 드미트리 자하르첸코 대령이 80억 루블(한화 약 1370억원)을 축재한게 들통나 부정부패의 영웅이라는 비난까지 받았고, 심지어 푸틴의 측근인 경제개발부(한국으로 치면 재정경제부)의 수장인 울류카예프 장관이 최대 국영 석유기업인 로스네프트로부터 한화 23억원대의 뇌물을 받은게 들켜 푸틴과 러시아 정치권에 충격을 주었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 반부패 수사를 담당하는 GAESC의 에너지산업부 부부장 드미트리 자칼첸코의 자택에서 약 220만달러(24억4706만원)에 이르는 돈다발이 발견되어 반부패 수사기관 수장이 부정축재한 것이 들키고 말았다.
노멘클라투라, 올리가르히 참고
9.6.2. 인종차별[편집]
그리고 다른 요소로 소련은 전체 국민 중 러시아계가 51%, 비러시아계가 49%를 차지했기 때문에 미국 등과 별다를 바 없는 다민족 국가였고, 그런 사정 탓에 "민족"을 내세울 수 없었다. 민족으로 찢어지기 시작하면 냉전 이후 유고슬라비아처럼 국가 붕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 서민들의 보수성이야 어디 가는 게 아니니 민간 차원에서 '저 타타르 X놈'이라고 욕하는 등의 인종주의는 만연했지만 그 공적인 표현은 엄격하게 금지되었고, 테리 마틴, 쉴라 피츠패트릭 등의 연구가 말해 주듯 오히려 일부 소수 민족을 전문직이나 고위직에 올려 놓아 현대 미국의 어퍼머티브 액션 비슷한 걸 선례로 남긴 적이 있다. 사실 소련은 국부 포지션의 인물인 블라디미르 레닌부터가 주류 슬라브계와 전혀 연관이 없는 소수민족 출신이며, 레닌 말고도 고위 정치인들 중 비러시아계 소수민족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74] 어떻게 보면 저게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연방으로 바뀐 지금도 세르게이 쇼이구 등 비러시아계 소수민족 출신 고위 관료나 정치인들을 종종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소련에서는 정치적 차원에서 일본과 너무 가깝다던지 파시스트와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든지, 이런 식의 정치적 이유로의 민족 박해는 계속 되었고, 이 와중에 볼가 독일인, 크림 타타르인, 체르카시인, 조지아에 있는 마슈케트 지방의 터키인, 벨라루스의 폴란드인, 콜라 반도의 노르웨이인 등 수많은 뿌리 깊은 민족 공동체들이 사라졌다. 러시아인들도 스탈린이 군수산업이 우랄산맥으로 이전되면서 강제이주를 당했고,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의 인민들은 퇴각 금지령을 받았기에 언급된 도시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는 인종주의보다는 독재와 전체주의로 인한 인권 탄압에 가깝다.
그리고 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의해 나라가 멸망할 뻔할 때는 '어머니 조국'을 강조하며 러시아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사용하긴 했으나, 러시아 우월주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2~3천만명의 인민이 희생된 마당에 러시아계와 비러시아계를 구분은 이데올로기적으로도 금지됐지만, 전선의 상황상 사치 그 자체였고 수많은 동양계들도 소련군에 징집되어 전선위에서 싸웠다. 북한의 국방장관직을 지내게 되는 남일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다. 이외에도 수많은 기록 사진에서 동양계 병사들이 전선에서 싸우는 것이 보이고, 특히 전차의 경우 T-34의 특성상 내부가 비좁아 체구가 작은 동양계가 선호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소련의 혁명영웅 중에는 비슬라브인도 있었는데 블라디미르 레닌(칼미크-유대-러시아 혼혈) 트로츠키(유대인), 스탈린(조지아인), 미코얀(아르메니아인)이다. 사회주의노력영웅 훈장을 수여받은 김병화의 경우 고려인이었으며, 소련의 비틀즈로 불리던 빅토르 최 또한 고려인이었다. 푸틴의 후임 대통령
이리나 말렌코(노동운동가)
친소적인 인물의 발언이니만큼 신빙성이 높은 증언이다.
아무튼 인종주의, 민족주의, 파시즘을 앞세운 나치 독일에게 나라가 멸망당할 뻔 했으니 상대적으로 당시의 서유럽에 비하여 소련 시절에는 차별의 의미로서 민족, 인종의 개념이 희박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해 극심해진 빈부격차 등 때문에 백인우월주의자들이 급속도로 늘었다. 시장이 개방되면서 값싼 노동력이 유입되자[75]백인 하층민들이 백인우월주의자로 변했다. 이들은 모순적이게도 러시아 민족인 슬라브인들과 공산주의자들을 말살하려 했던 아돌프 히틀러를 찬양하고 다녔으며 히틀러가 태어나고 또 죽었던 4월경에 특히 극성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외국인 투자가들과 외국 유학생들이 습격을 받았었는데, 러시아의 언론에선 "조상의 뼈 위에서 춤추는 패륜아"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주요 타깃은 러시아에서 천덕꾸러기라고 불리는 캅카스인과 러시아 극동으로 파도처럼 몰려오는 중국인들이다. 물론 캅카스를 무력으로 정복하고 압제를 펼친 나라는 러시아이므로 러시아 극우들의 행태는 적반하장이다. 이들은 슬라브 애국주의를 열심히 외쳐대기에 한국인도 종종 인종범죄의 피해자가 된 적이 있다.
소련 붕괴 이후 이 문제가 심하던 2000년대까지 한국인 유학생 역시 12명이나 아무 이유 없이 살해당했고 고려인 가라데 챔피언이흉기 린치로 사망한 적도 있다. 다른 외국인들도 무차별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 블라디미르 푸틴 집권 초기에는 이들 집단에 대한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으나, 집권 중반기부터 푸틴이 직접 나서서 연설을 통해 이들의 문제를 거론하고 색출할 것을 지시하였고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과거의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스킨헤드를 연상하면 떠올리는 특유의 복장과 이미지인 경우가 드물며, 평범한 옷차림인 경우도 많다고 한다. 또한 축구 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행패는 여전히 악명높다.
시베리아라고 흔히 부르는 동부 지역에는 러시아의 소수민족으로서의 동양인이 많이 살기 때문에 한국인이 외모만으로 차별받을 여지는 거의 없다.
러시아에서 타인종에 대한 인종차별 범죄만이 특히 높은 것은 아니다. 자국민이나 타국 백인에 대한 범죄도 꽤 있는 편인데, 러시아판 차브족인 고프닉들, 그러니까 동네 양아치들이 종종 문제를 일으키고 다닌다. "야, 저 놈 맘에 안든다. 조지고 털어버리자."했는데 피해자가 외국인이었다 라는 식이다. 골 때리는건 이놈들이 꼴통들이라 아무한테나 달려든다는 것이다. 심지어 체격이 192cm, 134kg에 달하는 유명 레슬링 선수 알렉산드르 카렐린에게 청소년 2명이 린치할려다 순식간에 제압당하고 카렐린에게 하루종일 벌받은 사건도 있었을 정도. 이들 외에도 잉구슈, 체첸, 다게스탄 등 북카프카스 지방 출신 사람들은 내전의 여파가 가신 지 얼마 안 되어 중앙 정부에 대햐 반감이 크고 강력범죄 비율이 높다. 가끔 비러시아인들도 휘말린다.[76]
2010년대에 들어서는 레드 마피아와 더불어 스킨헤드들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었고 특히나 푸틴의 지지 기반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스킨헤드들은 레드 마피아와 함께 러시아 내무부의 집중적인 단속대상이 되어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지금은 일부러 우범 지역을 찾아가거나 정말 재수가 없는게 아닌 이상 마주칠 일은 드물다.
빅토르 안에 대한 러시아와 러시아 빙상연맹의 전폭적인 지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중상위 계층에서의 인종주의는 적다. 푸틴 정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정부 주요 인사들을 보면 소수 민족 출신이 적지 않은데 국방장관인 세르게이 쇼이구는 투바계,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은 아르메니아계, 엘비라 나비울리나 연방 중앙은행 총재는 타타르계, 국영 기업 가즈프롬의 회장 알렉세이 밀레르와 게르만 그레프 전 재무장관은 독일계 러시아인이다.
내각의 장관과 관료들뿐 아니라 러시아 국회의원들 중에서도 황인이 적지 않다. 이린체이 마트하노프 의원(부랴티아계), 페도트 투무소프 의원(사하계), 세르게이 텐 의원(고려인) 이리나 하카마다 전 의원(일본계 러시아인)등.
공중파 뉴스 앵커만 봐도 소수 민족이 상당히 많은데, 국영방송 로시야 1에는 에르네스트 마츠캬비추스(리투아니아계)가 현재 메인 뉴스인 베스티의 앵커로 있으며, 이전에는 마리나 김 (고려인)앵커도 있었다. 또한 러시아 채널1에는 이라다 제이날로바(아제르바이잔계), 옐레나 빈니크(독일계), НТВ에는 라마스 치아우렐리(조지아계), 릴리야 길데예바(타타르계) 등이 있다. 실제로 러시아 방송국들에서는 소수 민족에 대한 우대가 있다고 한다.
2018년 6월 13일에 러시아 공산당소속의 타마라 플레트뇨바 의원이 고보리트 모스크바에 출연하면서 월드컵 기간에는 유색인종과 성관계를 하면 안된다는 발언을 하면서 인종차별논란을 빚고 있다.조선일보 , 중앙일보 내용을 자세히 보면 예전에 소련 올림픽 기간에 같은 백인종이 아닌 남성과 섹스 원나잇을 하고 미혼모가 된 경우 나중에 그 자녀가 인종차별 당하는게 현실이라는 걸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UFC 헤비급 파이터 데릭 루이스도 러시아 국적의 알렉산더 볼코프가 대결을 원한다고하니까 흑인이 모스크바에 간다고? 라고하면서 러시아의 인종차별을 비꼬고 미국에서 경기하자고했다 #
2018년 10월 10일(현지시간)에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식당에서 알렉산드르 코코린과 파벨 마마예프가 고려인 공무원을 폭행하고 중국인이라고 비하하자 러시아에서는 두 선수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고 푸틴 대통령도 비판했다.# 그 후 결국 이 둘의 인생은 망했어요.
9.6.3. 성문화[편집]
연인 간의 진도는 유교 문화권에 비해 빠른 편이며 성적인 주제에 대한 태도도 서유럽만큼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는 개방적인 편이다.
9.6.4. 동성애 혐오[편집]
러시아는 2016년 현재 UN 안전보장이사회에 속하는 강대국 중 유일하게 국가적으로 LGBT 반대를 견지하고 법제화까지 한 국가다. 2013년 정의 러시아당 옐레나 미줄리나(Еле́на Мизу́лина) 의원이 발의하여 두마를 통과하고 시행된 '동성애 선전 금지법'이 그 중심.[77] 중동처럼 극성적으로 종교적인 국가에서 반동성애적인 정책을 실시하는 나라는 있지만, 적어도 전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강대국 중 이렇게까지 철저히 반 LGBT를 견지하고 법제화까지 하는 나라도 드물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동성애에 부정적이던 정교회의 영향을 받아 동성애자를 멸시하고 탄압하는 문화가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던 중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에 들어선 소련은 정교회의 영향력을 뿌리뽑기 위해 동성애를 허용하였다. 당시 블라디미르 레닌은 인민의 평등을 실천하면서 계급철폐, 성별차별 철폐, 그리고 성적지향으로 인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동성애를 인정했다.출처[78]
이 후 이오시프 스탈린이 권력을 잡으면서 조금씩 탄압을 가하다가 1934년부터는 동성애를 처벌하기 시작했다[79]. 결국 사회 전반에 걸쳐 동성애는 철저히 금기시되었고 소련이 세계 공산권의 맹주가 되면서 다른 공산권으로도 반 동성애 이념이 퍼졌다. 오죽하면 소련군의 가혹 행위 중 동성 성행위를 강요하는 가혹행위가 존재할 정도로 러시아인들은 동성애에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소련 붕괴 이후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생긴 이념의 공백을 틈타, 정부 차원에서 정교회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러시아는 사회적으로 정교회에 많이 의지하게 되었다. 한 예로, 2002년 러시아 교육부에서 정규과목에 '정교문화'를 필수 과목으로 도입하고 2007년 종교교육기관들에게 국가인증 졸업장을 발급하는 등 정교회를 정부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80]
당연히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보는 분위기는 더 짙어지게 되었고, 결국 2013년 반동성애 프로파간다법이 제정되면서 러시아 내 성소수자들은 사실상 범죄자로 취급되고 있다. 유럽인권재판소(ECHR)에서 반동성애 프로파간다법을 표현의 자유에 관한 유럽조약을 위반한 것으로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이라고 판결했다.[81]
러시아의 동성애 혐오 분위기는 종교적인 배경과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치관이 남아있는 것 외에도 소련 시절부터 악명이 높았던 군대 내의 강제 동성매춘과 소련 붕괴 이후 혼란기 시절 먹고 살기 위해 러시아 남성, 여성들이 동성 포르노에 몸을 담그면서 온갖 수치스러운 일을 겪은 트라우마 때문도 있다. 지금도 러시아 국민들은 이런 과거에 치를 떨고 있으며 그 영향이 소련 및 혼란기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정도로 이는 비단 러시아 뿐만이 아니라 다른 구 소련권 국가들(우크라이나, 아르메니아 등등)도 어느정도 해당된다[82]
이에 갖가지 국제행사에서 '호모포빅 러시아'라는 낙인이 찍히며 보이콧의 대상이 되고 있다.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등을 보이콧한 사례가 그 예이다. 정작 유럽, 미주와 교류하거나 해외에서 근무하고 거주하는 러시아인들은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음에도 러시아라는 나라 자체가 호모포비아 국가로 낙인 찍혀서 이에 대한 비난을 묵묵히 견뎌내야 하는 신세다. 또한 러시아인들 역시 호모포비아와는 별개로 "우리나라의 내정 관련 법에 외국이 뭘 그리 야단법석이냐"고 비판하다가 호모포비아로 낙인찍히는 등의 곤란을 겪고 있다. 실제로 많은 러시아인들이 "동성애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비정상적인 행위"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성애고 뭐고 아예 관심 없는 러시아인들조차도 서방을 비롯한 외국에서 동성애 금지법을 논하는 걸 내정간섭으로 여기고 아니꼬운 시선을 갖고 있는 편이라는 점이 문제다. 또한 반동성애 성향이 딱히 정치성향에 좌우되는 것만도 아니라서, 그 사민주의를 내세운다는 정의 러시아당도 동성애를 혐오하는 편이다.
당연히 트랜스젠더들의 상황도 동성애자들과 다를게 없다. 트랜스젠더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기에 운전하기에 적합하지않다는 이유로 운전면허 발급을 금지한 일이 국제적 비난을 받기도 했다.
사진의 성소수자 인권운동가가 공수군의 날 기념행사에 맞춰 도발적인 시위를 했는데, 근처에 있던 공수부대원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은 'LGBT 선전은 범죄'라면서 인권운동가를 폭행한 공수부대와 '공평'하게 연행해갔다.
러시아에서도 자성의 목소리는 존재한다. '동성애자들이 제정신은 아니지만(...), 길거리에서 아무 이유없이 두들겨 맞는건 심하지 않냐'며 동정을 받기도 했다.[83] 또한 아무 죄 없는 행인들에게 묻지마 폭행을 가하는 스킨헤드같은 과격 단체들에 대한 단속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져 동성애자들이 길에서 폭행당하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LGBT 단체 대표가 입건된 뒤 그 단체가 미국 정부의 사주를 받아 분탕질을 꾀했다는 미 대사관 명의 조작 문서를 퍼뜨린 언론에 대한 미 대사관의 조롱[84]이 이어지며 나라망신 작작 하라는 주장도 나왔다. 한편으로는 잡혀온 LGBT 운동가들을 취조하던 형사들이 나긋나긋하게 나와서, 험악한 조사를 각오하던 인권운동가들이 당황하는 경우도 있다고.[85]
유로마이단과 크림 사태, 돈바스 전쟁 등으로 인해 서방과 러시아의 관계가 냉각곡선을 타면서 호모포비아에 대한 비판을 서방의 선동 내지 반국가행위라고 여기는 인식이 늘고 있다. 보통 호모포비아 논쟁은 인권운동과 종교, 사회적 문제에 국한되곤 하는데 러시아에서는 반동성애법에 대해 안 그래도 러시아를 적대하던 서방의 건수 잡은 지나친 참견에 대한 반동으로 성 소수자 박해에 동조하는 의견이 강하게 대두된다. 2016년 올랜도 나이트클럽 총기난사 사건이 벌어진 뒤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공식적인 조의 표명과는 별개로 미국 대사관 앞에서 추모집회를 하던 이들이 호모들은 꺼지라는 욕설을 듣고 경찰에게 잡혀간 사건도 있었다.
2017년에는 러시아령 체첸 공화국에서 게이로 '추정되는' 남성을 대규모로 연행, 납치하고 폭행하거나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기사). 이에 대해 노바야 가제타 보도에 따르면 3명이 사망했다고는 하지만 러시아 성소수자 운동가들은 그 기사를 쓴 기자조차도 동성애 혐오에 물든 사람으로 평가받으며 실상은 훨씬 참혹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체첸 정부가 반응이라고 내놓은 입장이 "존재하지도 않는 자들을 어떻게 탄압하는가?"일 정도니 실상이 어떨지는 상상에 맡긴다. 유럽 인권운동가들은 체첸의 성소수자들에게 하루빨리 도망치라고 호소하고 있으나, 성소수자를 작정하고 짓밟고 있는 체첸 공화국에서 체첸 성소수자들이 얼마나 더 희생될지는 추산조차 힘들다.
막심 마르친케비치처럼 동성애자들을 길거리에서 대놓고 폭행하며, 이를 자랑이라도 되는 양 당당하게 인터넷 방송까지 하는 인물들도 있다.
여튼 이러한 이유로 가상매체들 중 심즈 시리즈처럼 동성애 묘사가 가능한 매체들은 법에 의해 싸그리 검열당해 일명 '19금 딱지'를 모조리 달고 나오고 있으며, 오버워치 역시 오버워치 단편 만화 "성찰"이 러시아에서는 열람이 불가능하다는 안내문과 함께 내용이 공개되지 않는다. 이걸 공개할 경우 오버워치 역시 기존 15금에서 바로 19금 딱지로 격상된 등급을 붙여 서비스를 해야 한다. 이런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블리자드가 취한 조치. 빌리 헤링턴의 사망 소식에도 조의드립으로 고인드립을 치기도 했다.
심지어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은 처벌하면서도 동성애 차별은 당연시 여긴다.[86]그러다보니 2018년 11월 27일(현지시간) 유럽인권재판소는 러시아의 성소수자 집회 탄압은 심각한 인권침해라고 선고하자 러시아측은 반발했다.#
10. 학문[편집]
10.1. 과학[편집]
위에서 언급한 상황은 소련 붕괴 후 3만 명에 달하는 고급 연구인력들이 빠져나간 것에서 비롯된 듯 하다.[87] 러시아 정부에서는 어떻게 도로 데려와보려고 똥줄이 타는 듯 하나, 관료들과 해외 러시아 과학자들 간 의견이 잘 안맞아서 해외 러시아 과학자들이 불만을 토로하는 상황이다. 설상가상으로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자 과거에 여기에 책정했던 예산의 가치가 반토막 밑으로 떨어지면서 그저 묵념. 그래도 기사에 따르면 아직 수학, 물리학 일부 분야에서는 명성이 이어지고 있는 듯 하다. 즉, 막대한 재정을 투자하지 않아도 머리만 있으면 연구가 가능한 분야[88]는 그나마 명성이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 현재도 고등학교(10-11학년) 교육과정중 물리와 화학은 한국의 고교 교과 과정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어렵다.[89] 우리나라의 교육 수준을 고려하면 상당한 것,
2016 US News & World Report 의 대학평가에 따르면 모스크바 국립대학교가 종합 순위에서는 227위로 231위인 한국의 성균관 대학교와 비슷한 수준으로 나왔다. 세부 분야별로는
물리학 23위
물성물리학 180위
임상의학 집계안됨
생명공학 및 화학생명공학 196위
화학 103위
컴퓨터공학 집계안됨
미생물학 집계안됨
수학 51위 로 나타났다. 수학, 물리학에서는 강세를 보이나 나머지 분야에서는 한국과 비슷하거나 뒤쳐지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참고로 한국, 러시아 둘 다 집계가 안된 분야는 이 항목에서 명시하지 않았다. 또한 집계가 안된 것은 아예 순위 밖으로 나가떨어진 것이거나 평가기관 측에 제공된 자료가 없어서 집계가 불가한 경우 중 하나이니 섣불리 뭐가 높고 뭐가 낮다고 여기지 말 것을 당부한다. 애초에 대학평가가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상하이교통대학 세계대학평가에서 모스크바 대학교는 [90] 동 시기 서울대학교의 경우 [91] 물리학이 모스크바 대학교보다 앞서고 수학에서 뒤쳐지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종합 평가에서는 모스크바 대학교가 86위, 서울대학교가 101~150위 사이로 모스크바 대학교가 약간 더 우위라고 평가되었다.
이를 보았을 때, 위에서 서술된대로 수학이나 물리학에서는 아직까진 어느정도의 수준을 유지하는 듯 하며 항공우주기술이나 국방 기술에 있어선 여전히 강력한 편. [92] 다만 모스크바 대학과 한국 주요 대학 몇개만 놓고 본 것이므로 국가적 역량으로 봤을 땐 국가별 논문 피인용지수 등에서 오히려 부족할 수 있다.
수학 분야에서의 역량과 잠재력이 대단한 나라임은 사실이다. 이미 필즈상 수상자수가 미국을 이은 프랑스와 공동 2위이고[93] 그 중 국립 모스크바 대학 출신자 수만 무려 6명이다.
10.1.1. 항공[편집]
(Su-47, 2001년 MAKS 에어쇼)
러시아는 소련 때부터 군 전력 강화의 일환으로 항공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해왔고, 소련 자체가 위낙에 넓었던데다가 비행기값도 왕창 쌌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민수용으로도 수요가 많았다. 비록 지금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있는 보잉이나 에어버스에 많이 밀렸지만, 과거 소련 시절에는 공산권 및 제3세계에 투폴레프, 안토노프, 일류신을 비롯한 여객기 및 수송기를 적극적으로 수출하고 미그, 수호이, 야코블레프 등 고등전투기를 설계할 만큼 뛰어난 항공산업을 갖추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미국, 유럽계 항공회사들이 민항기 시장을 완전히 독점하면서 민항기로는 시장성을 많이 잃은 상황이고, 옛 공산권뿐 아니라 러시아 본국조차도 서방 비행기를 점차 많이 사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항공무기 쪽에서는 Su-47같은 전진익 실험기나 PAK-FA같은 스텔스 전투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세계 각국에 수출할 만큼 발전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대부분 국가가 국가원수 전용기로 서방제 비행기를 쓰지만 블라디미르 푸틴은 국산 비행기인 IL-96을 사용한다. 대통령이 모범을 보인다는 제스처긴 하지만 못 믿을 정도로 부실한 기술력은 아니라는 것이다.
10.1.2. 우주[편집]
(미르(Мир) 우주정거장, 1998년)
현재 러시아는 미국, 중국, 유럽과 함께 선진적인 우주기술을 보유한 국가이다. 구 소련은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유인 우주비행, 우주유영, 우주정거장을 연달아 성공시키면서 우주 시대를 개막한 주역이었다. 특히 소련 시절 핵전력 보강을 위한 ICBM과 체제 우월 경쟁을 위해 국가적으로 우주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구 소련 해체 이후에는 NASA도 부러워하는 소유즈의 안정성을 바탕으로 우주여행 산업을 통해 동서양의 갑부들에게 우주 경험을 시켜주면서 돈을 뜯어먹는다는 사기적인 돈놀이로 새로운 우주산업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 또한 받고 있다. 갑부들만 터는게 아니라 셔틀 퇴역한 후에는 자기 힘으로 우주인 못 보내는 NASA한테도 소유즈 한 좌석당 수천만불씩 삥뜯고 있다. 어지간한 우주비행사들은 NASA 우주선보다 소유즈가 더 편하고 안전하다고 인정했을 정도. 참고로 '어지간한' 우주비행사들이라 함은 우주비행사를 제일 많이 뽑는 NASA에서 선발된 미국인들을 말한다. 7인승 셔틀을 굴렸던 NASA의 역사적 특징 때문에 NASA는 셔틀 시대에 우주비행사 한번씩 모집할 때마다 적게는 십수명에서 스무명대, 많게는 서른명 넘게도 뽑아댔는데 그들이 러시아어라는 장벽에도 불구하고 셔틀보다 소유즈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물론 얘네들도 이래저래 양키들 덕을 많이 보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호구가 된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도 이제는 과거지사로 지금은 미국이 우위에 있다. 사실 1980년대만 해도 소련은 미국에게 밀리지 않았다. 우주왕복선 같은 비싼 우주발사체를 운용하고 SDI 같은 미친 짓거리를 하다가 STS-51-L 챌린저 참사 같은 희대의 쇼크를 맛보면서도 미국의 우주개발 예산은 소련에 비하면 화수분이었지만 소련도 우주정거장 미르와 우주왕복선 부란을 개발하며 밀리지 않았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주요 설계국들이 떨어져나가고[94] 경제난으로 재정수입이 크게 줄고. 지원도 크게 줄어들어 월급이 푼돈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어버리자 주요 인재들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러시아의 우주산업은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즉 80년대에는 밀리지는 않았지만 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경제 위기가 치명타가 되어 우주 개발이 정체되어 버린 것.
비록 러시아는 2000년대 이후로 경제를 회복하면서 우주개발 예산을 급격히 늘렸지만, 그동안 투자한 돈의 단위 자체가 이미 너무 벌어졌다. 2008년 미국이 439억 달러를 우주에 퍼부을 때 러시아는 고작 35억 달러를 투자했을 뿐이다. 2011년에는 65억 달러로 늘어났고 미국의 우주개발 예산은 420억 달러선으로 줄었지만, 여전히 압도적인 격차가 나는 건 마찬가지. 그리고 이런 예산 차이가 구 소련 붕괴 이후 20년이나 계속되었다.
현재 러시아가 우주개발에서 그나마 경쟁력을 가진 분야는 로켓과 우주선을 비롯한 발사체 분야고, 인공위성이나 위성 응용 서비스, 이를 보조하는 지상 시설 면에서는 미국에게 상대가 안 된다. 당장 위성 시장의 70%를 차지하는 게 미국이다. 예산 규모로 따지자면 사실 러시아의 경쟁상대는 미국보다는 유럽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그나마도 로스코스모스는 발사체 분야에서는 ESA보다 우월하지만 위성 분야에서는 밀리는 판이고.[95] 사실 10년 가까이 경제상황이 막장으로 치닫았던 나라에서 소련시절의 항공우주 기술 경쟁력을 바라는것 자체가 무리다. 게다가 비교상대는 미국. 기초과학 강국이란 이미지 또한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10년은 실력있는 학자들이 다 빠져나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96] 게다가 연착륙한 것도 아니고 단숨에 바닥으로 쳐박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상황이었으니...
NASA 우주인들이 소유즈를 타고 ISS에 가는 것도 러시아의 기술이 미국보다 나아서가 아니다. 소유즈가 값싸고 신뢰성 높으며 안전한 우주선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반은 1950-60년대 기술이며, 첨단 기술의 우주선은 아니다. 소유즈가 지금까지 쓰이고, 우주왕복선이 결국 퇴역크리를 맞은 것은 까놓고 말해 소련이 망했기 때문이다. 즉 소련 이후 불황을 맞은 러시아는 대규모로 돈을 쓸 수가 없어서 검증된 소유즈를 계속 사용하면서 원가절감을 한 반면, 미국은 검증되지 않은 신기술[97]을 마구 사용하다가, 냉전이 종식되자 러시아와의 경쟁이라는 예산 확보 명분이 사라지고 2000년대 테러와의 전쟁으로 미국 경제도 어려워지자 줄줄이 프로젝트가 취소당하고, 결과적으로 소유즈식의 1회용 캡슐 우주선인 오리온 다목적 유인 우주선으로 다시 되돌아 간 것. 그래도 기술 혁신의 가능성 면에서 러시아가 미국에 뒤쳐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이마저도 불안한 게 러시아의 고급 인력이 해외로 유출되는데 항공 우주 분야가 그 중에서도 특히 타격이 크다고 한다.### 새로 유입되는 젊은 인력이 태부족한 실정이니, 침체는 불가피한듯. 지구 저궤도 운송 사업을 국가 기관이 주도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누가 하냐면 스페이스X 같은 민영 기업들이다! 물론 이들이 역량을 제대로 갖출 때까지는 NASA가 아낌없이 돈을 퍼줘야 한다. NASA의 주력 분야는 SLS 같은 외우주 탐사 로켓과 오리온 다목적 유인 우주선 등이다. 그리고 이제 상기의 스페이스X는 팰컨 헤비와 BFR을 통해 외우주 미션까지 NASA의 밥줄을 끊겠다고 나서는 판이라 로스코스모스라는 공공기관이 타국의 민간기업과 모든 영역에서 경쟁해야 할 형편이 되어버렸다.
아직까지도 최고급 굴절망원경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광학계(렌즈)는 주로 러시아에서 생산된다.
로고진 러시아 연방 우주청장은 2018년 11월 6일에 달표면에 장기 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고, 로보트 아바타의 도움을 받아 달을 연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심각한 정체상황과 더불어 러시아 연방 우주국의 심각한 비리, 횡령도 발생되고 있는 상황이다.#
시아가 달이나 화성 탐사용 우주선을 쏘아 올릴 수 있는 새로운 초대형 로켓발사체 개발을 2028년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0.2. 인문학[편집]
18세기까지만해도 유럽에서 크게 주목 받지 못했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앞에서 열거된 작가들이 러시아 문단에 등단했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19세기부터 20세기세기 중반까지의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 데카브리스트의 난, 크림전쟁, 농노해방령,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의 갈등, 산업혁명, 1차 세계 대전, 러시아 혁명, 적백내전, 대숙청, 독소전쟁 등 정말 다양하고 처절한 사회적 혼란과 격변을 겪었고 이는 작가들에게 무궁무진한 소재를 제공했다. 일찍부터 해외문학을 번역해온 일본은 메이지 시대 작가들이 러시아 문학가들의 주옥같은 작품들에 기가 죽어 공로병(恐露病)이라고 불렀을 정도.[99]
다만 19세기와 20세기 초중반 때와 같은 세계적인 수준의 작가들은 20세기 후반부터는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있다. 이는 국제 도서전에서도 여러차례 지적된 상황. 1900년대 초반에 태어나 스탈린 사후 해빙기에 활발하게 활동한 아나톨리 리바코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블라디미르 두딘체프, 칭기스 아이트마토프의 시대를 지나 고려인 3세 소설가 아나톨리 김[100]을 마지막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나오지 않고 있다.
한국에선 러시아 문학하면 19~20세기 초반 태생 작가들의 근대 문학과 드미트리 글루홉스키의 메트로 시리즈, 세르게이 루키야넨코의 위치 시리즈 같은 현대 SF/판타지 소설을 떠올린다. 소련 해체 이후에 등장한 빅토르 펠레빈, 이리나 제네쥐끼나 같은 작가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인문학에서 다음 같은 사건도 있었다. 영국에선 식료품점에서 어제한 축구 얘기하다 주먹싸움이 벌어진다면, 러시아에선 식료품점에서 칸트 사상 논쟁을 하다가 총을 쏜다. 실제로 러시아에서는 철학에 대한 토론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는 편이다.
11. 교육[편집]
1. 교사의 월급이 매우 낮아[102] 경쟁력 있는 교사의 수가 극도로 부족하다. 실제로 대부분의 학교 교사는 수업 후 과외 수입으로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구분 없이 반이 바뀌지도 않고 1학년부터 11학년까지 한 학교에서 쭉 공부하는 특성상 물갈이가 전혀 되지 않는다. 사실 이건 꽤나 심각한 문제인데, 한국처럼 학교가 나뉘어져 있다면 초등학교, 혹은 중학교 졸업 후 자신에게 맞는 학교로 갈 것인데 공부가 맞지 않는 아이들이 반에 계속 남아있게 되면 공부 분위기를 크게 해치게 된다. 실제로 최상위권이나 최하위권의 학교를 제외한 중위권 학교들의 졸업시험 성적을 보면 졸업 기수마다 평균 점수 차이가 매우 큰데,[103] 이것을 보면 반의 학습 분위기가 얼마나 반 구성원들의 실력에 영향이 큰지 알 수 있다.
3. 사실상 가장 근본적이고도 근원적인 문제로, 교육부로부터의 재정 지원이 말 그대로 참담하다. 사립교는 재단이라도 있지만, 대다수의 국립학교들은? 다 낡아 떨어져가는 학교 시설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받는 것도 없으니 학생들의 애교심과 소속감은 바닥이고, 이는 안 그래도 낮은 교육열을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12. 문화[편집]
12.1. 음악[편집]
록과 같은 서구적 대중 음악은 발전이 꽤나 뒤쳐졌다. 하지만 러시아 록 계의 전설로 1980년대에 결성된 키노(밴드)[106]라는 밴드가 있다. 첨언하자면 이 밴드의 리더가 고려인인 빅토르 최 이다. 비유가 적절한 것 같지는 않지만, 러시아 한정으로 거의 더 도어즈의 짐 모리슨 비슷한 존재라고 보면 된다. 그가 부른 노래들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후의 암울했던 사회를 잘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특히 윤도현이 '혈액형'이라는 노래로 리메이크한 적이 있다. 현재 수도 모스크바의 최고 중심지인 아르바트 거리에 그의 추모벽이 남아 있다.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 중인 아나톨리 최(MBand - мбанд)가 러시아에서 고려인 가수의 대를 이어가고 있다.
러시아 민요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검은 눈동자, 칼린카가 대표적인 러시아 민요이다. 워낙 많은 민족이 있는 나라이다보니 카자크 민요라든지 집시 민요가 러시아 민요에 흡수되었다. 이런 민요들 중에서도 유명한 게 꽤 있다.
또한 러시아의 대중 가요가 꽤나 더디게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차이콥스키로 유명한 러시아인들의 음악적 재능이 달아나는 것은 아닌지라 좋은 곡들이 많이 만들어졌고,특히 예고르 레토프의 그로즈단스카야 오보로나(민방위),빅토르 초이의 키노,비체슬라프 부투소프의 나우틸루스 폼필리우스로 대표되는 1980~90년대의 격동기에 여러 밴드들이 내놓은 수많은 곡들은 시같은 느낌의 환상적이고 수준높은 가사들과 폭발적인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
친정부적 가요 장르인 에스트라다 가요 중에서도 지금 들었을 때 꽤나 훌륭한 것들이 많고, 그 중 상당수는 서구로도 건너가 인기를 많이 끌었다. 물론 서정적인 가곡도 많이 발전했다. 소련 시절에 비정치적이라고 하여 많은 디스를 받았지만, 많은 가수들의 노력으로 러시아 로망스는 그 나름의 맛을 인정 받고 있다.
또한 체제의 폭압을 거부하며 러시아 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만들어낸 바르드 가요라는 것이 있다. 기타 한 대를 들고 자신들이 쓴 시에 자신들의 곡을 붙여 부른 것들을 바르드 가요라고 한다. 음유시라고 번역된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비정치성과 반항성으로 체제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바르드 가요의 인기는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80년대 러시아 록의 발전에 주요한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음악들은 주로 마그니티즈다트라는 카세트 테이프 녹음집에 담겨져 유통되었다.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와 불라트 오쿠자바를 바르드의 양대산맥이라고 일컬으며 고려인 출신 율리 김과 1세대 바르드 가수인 알렉산드르 갈리치를 더하여 4명을 주요 가수로 꼽는다.
싱어송라이터 레지나 스펙터는 러시아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9세때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하여 현재는 미국에서 주요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12.2. 영화[편집]
- 러시아 영화 문서 참조.
12.3. 음식[편집]
- 러시아 요리 문서 참조.
12.3.1. 차(茶) 문화[편집]
러시아 차문화는 사모바르(самова́р)라고 불리는 주전자로도 유명하다. 주전자 중심에 원통형으로 빈 공간이 있고, 그 공간에 불을 피워 물을 끓이는 개인 가열기구로, 사모바르라는 이름도 "스스로 끓이는 용기"라는 의미이다.
12.4. 음주[편집]
얼마나 전 국가적으로 술에 대한 개념이 관대했는가 하면, 금주 정책의 일환으로 주류를 구매할 때 전용매장에서 허가 하에 구입해야 하는 러시아에서 맥주는 2011년까지도 '음료수'로 분류되어 슈퍼에서 탄산음료 사는 듯한 개념으로 구입, 판매가 허용되었다.[110] 이 정도의 도수는 느껴지지도 않았다는 듯이. 하지만 금주정책을 더 강화하는 와중에 러시아 국가두마(하원)가 2009년 9월에 맥주를 술로 인정하는 '알코올 제품 생산과 유통에 관한 국가통제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제는 맥주도 밤 10시 이후에 구입할 수 없다.
"크바스"라는, 맥주와 유사한 전통적인 알코올성 음료가 있는데(알코올 도수는 맥주의 절반 정도), 이것의 경우 러시아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즐겨 마시며, 술로 취급하지 않는 듯하다. 예부터 러시아에선 온도가 -40도보다 높으면 추운 날씨가 아니고 알코올 도수 40% 이하는 술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도수 40% 이상의 독한 술을 즐겨 마신다.
당연히 알코올 중독은 러시아의 큰 고민거리인데, 여성 평균 수명보다 남성 평균 수명은 12년 가량 적다[111]. 통계에 따르면 남성들 중 무려 25%가 55세 이전에 사망한다고 한다! 원인은 당연히 알콜 중독과 간암, 간경화 등 간 관련 질환. 러시아 남성의 평균 수명은 64년[112]에 불과하여 자녀가 아직 20대인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사망하는 경우가 흔하다. 또한 알콜 중독으로 인한 범죄와 가정폭력, 이혼이 심각해서 러시아 내에서도 큰 문제일 정도다. 비록 2010년대 들어서 맥주 주류 지정 등의 반 알코올 정책으로 알코올 소비가 줄고있기 때문에 평균수명이 점차 연장되어가고 있다지만 아직 한참 멀었다.
12.5. 전통공예[편집]
12.6. 비디오 게임[편집]
동유럽 게임사인 4A게임즈가 메트로 시리즈를 만들었다. 또한 워썬더도 러시아 제품.
가끔씩 스팀에 내수용 러시아 게임들이 속속들이 올라오고는 하는데, 공통된 특징 이라면 상당히 복잡한 인터페이스(...),그리고 그에 비례하는 게임의 깊이이다.
한때 세계적으로 유행한 Hello Neighbor도 러시아 게임이다.
12.7. 기행[편집]
2분만에 보는 세계: 러시아편
반면 러시아에서는.. |
대륙의 기상을 위시한 중국에 밀려 그 동안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았지만 2010년대에 이르러 러시아의 기이하고도 대단한 장면들이 인터넷 상에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러시아에서는 개가 사람을 산책시킨다는 식의 러시아식 유머같은 내용은 기본이다.[115] '한편 러시아에서는(Meanwhile in Russia)'으로 구글링 해보면 그야말로 온갖 기행들을 구경할 수 있다.
주로 폭설 및 추위, 총기를 위시한 각종 무기류, 난폭운전, 싸움, 위험한 장난, 곰, 술, 미녀 및 아줌마, 경찰 및 군대, 국가원수 및 특정 인물들이 주 희생양(...)이 된다.
물론 이런 것들이 실제로도 그럴 것이라고 쉽게 믿으면 곤란하다. 가령 난폭운전의 경우 인터넷상에 러시아 난폭운전 모음집 같은 게 하도 많이 퍼져있어서 진짜로 헬게이트인 줄 아는 사람도 많은데 한국인들 중에서도 실제로 러시아 전국을 장시간 운전해본 사람들이 늘어가면서[116] 실제 러시아 도로를 경험해본 사람들의 경험담을 보면 러시아의 운전 매너는 유럽과 별다를 바 없고, 보행자 중심에 양보도 한국보다 더 잘 해주고 과속도 힘들다고 한다.[117]
이들의 기행은 온라인 게임, 특히 1인칭 슈팅 게임쪽에서 빛을 발하는데, 단순한 트롤링부터 시스템을 교묘히 이용한 고도의 플레이로 전세계 온라인 게이머들에게 악명을 떨치고 있다.
길바닥이건 의자건 일단
여담으로 이렇게 길거리에서 쭈그려앉는 문화(?)는 다른 동부 유럽국가에서도 일상적이다.
13. 스포츠[편집]
냉전시절 미국과의 경쟁을 위해 스포츠를 전폭 지원했는데 실제로 세계적인 선수들을 많이 배출했다. 소비에트 연방 해체 후에는 다른 국가들로 인재들이 퍼진 감이 있다.
소련에는 러시아만 있는게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있었지만 소련 시절도 따지자면 1991년에 해체한 소련의 기록이 체조, 레슬링, 역도, 카누, 배구, 핸드볼에서 아직도 1위 기록을 하고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Soviet_Union_at_the_Olympics 그리고 프랑스, 영국, 독일, 중국이 각각 자국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1위 해본거 말고는 모든 하계올림픽을 미국이 1위하는데 이 1위 자리를 소련이 6번이나 했었다. 독립국가연합도 1번 했었다 네이버 하계올림픽 우승국 참고
대표적으로 테니스에서 전설적인 샤라포바 테니스선수가 있다.
레슬링이 강력한데 이 영어 위키백과에서 맨 밑에(PC 버전) 년도별로 봐도 알수있겠지만 소련 해체 후에도 1992년 독립국가연합 이후 1996년부터 2016년까지 금메달 순으로 계속 1위 국가다. 전체 메달 합계순으로도 1996년 2위 계산되는거 말고는 모두 1위였다.역대 최강의 격투가를 꼽을 때 반드시 거론되는 전설적인 레슬러 알렉산더 카렐린이 특히 유명.
https://en.wikipedia.org/wiki/Wrestling_at_the_Summer_Olympics
UFC 라이트급 챔피언 하빕 누르마고메도프도 러시아 다게스탄 출신이다. 가라데를 수련한 알렉산더 볼코프와 삼보의 알렉세이 올리닉도 UFC 헤비급 탑 랭커다.
올림픽 복싱, 유도, 펜싱, 사격에서도 소련시절까지 따지자면 꽤 강국이다. 푸틴이 유도 유단자이자 유도 철학에 빠져있는 매니아인 것으로 유명하다. 러시아 언론에서 카자흐스탄 출신 복싱 세계 챔피언인 게나디 골로프킨을 러시아인으로 불렀다가 호된 서리를 맞은 적이 있다.[118] 푸틴, 골로프킨 경우 아녀도 항목 가서 영어위키백과 자료보면 알겠지만 순위 꽤 높다.
올림픽 아마추어 권투 역대 6위다 https://en.wikipedia.org/wiki/Boxing_at_the_Summer_Olympics 해체 전 소련은 5위를 하고있다.
삼보(무술) 종주국이고 운동기구 케틀벨의 종주국이다.
파워 리프팅에서 우크라이나와 함께 선전하고있다. IPF 대회 성적. 최근 2011~2015년은 러시아가 17번으로 가장 금메달 많이 따냈다.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world_championships_medalists_in_powerlifting_(men)
체스로 유명하다. 현재 국가랭킹 세계 1위를 하고있으며 그랜드 마스터를 무려 203명이나 보유하고 있는 나라다.[119] 그 외에도 인터내셔널 마스터 수, 평균 레이팅, 레이팅 등록자 수 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1위를 하고 있다. 16년간 챔피언 자리를 지켜낸 가리 카스파로프가 이 나라 사람이다. 역대 최고의 레이팅을 기록하기도 했으며 세계 최초로 슈퍼컴퓨터와 체스대결도 했던 전설적인 플레이어.
축구는 유럽 축구 연맹에 속해 있다. 소련 시절에는 중상위권 정도 하는 강팀이었지만, 해체 이후에는 힘을 영 쓰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유로 2008에서 4강,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8강으로 체면 치레는 했다. 국대에 대해 자세한 것은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문서 참조. 또 현재 유일한 골키퍼 발롱도르 수상자인 레프 야신도 러시아(정확히는 소련) 출신. 자국 리그에 대한 투자가 대단하지만 그만큼 쇄국화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농구도 세계적인 강호이다. 유로컵 바스켓 대회에선 소련 시절 모두 14번 우승했으며 러시아 시절에서도 1번 우승했다. 1950~1970년대만 해도 유로컵 바스켓은 유럽 최강을 자랑했으며 그나마 유고슬라비아가 유일한 유럽 내 라이벌이었고 세계적으로도 미국이 유일한 상대 국가였을 정도로 농구에선 세계 최강을 자랑했다. 소련 시절에는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나라들이 독립해서 예전보다 못하다고 해도 여전히 유로컵 농구 대회에선 8강권에 드는 강호로 활약하고 있다.
아이스하키는 소련 시절부터 캐나다 다음 가는 유수의 강호인데, 1956년을 시작으로 동계올림픽에서 총 8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다만 92년 독립국가연합의 이름으로 금메달을 따낸 뒤로는 러시아의 이름으로는 금메달을 따내지는 못하고 있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선 당해 NHL MVP를 수상한 오베츠킨을 비롯, 말킨과 코발척의 공격진을 필두로 최강전력을 꾸리며 간만에 금메달 사냥에 나섰으나, 8강에서 홈버프를 받은 캐나다에게 7-3이라는
리듬체조 강국이기도 하다. 현재 세계랭킹 1, 2, 3위는 모두 러시아 국내랭킹 1, 2, 3위다. 2000년, 2004년, 2008년, 2012년, 2016년 5번의 올림픽 리듬체조 금메달리스트는 모두 러시아 선수였으며, 쿼터제에 의해 2명밖에 출전을 못하지만 그 결과가 금, 은메달이 모두 러시아가 가져가는 현상도 발생 중. 명실상부한 21세기 리듬체조 강국으로, 많은 타국 리듬체조 선수들이 러시아 전지훈련에 참가한다. 이런 실력의 뒷배경은 리듬체조라는 스포츠 자체가 발레에서 유래했는데[120] 알다시피 러시아는 고전발레의 분수령이라고 할만큼 고전발레가 민족예술이다. 그 예로, 러시아 혁명 당시 황가가 무너지는데도 황실발레단은 이름만 바꾼 채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 중. 이 정도면 러시아인들의 발레와 무용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다른 예로는 당장 고전발레 최고의 명작인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이 모두 러시아 고전발레 작품이다. 아예 세계랭킹을 매기는 포인트가 주어지는 월드컵 대회가 러시아에서 매년 개최될 만큼 국민적 관심도 높다. 정부의 지원도 전폭적이어서, 러시아 국가대표 리듬체조 선수들의 후원사는 러시아 국영기업인 가즈프롬이다.
국토의 상당 부분이 영구 동토이고 사람 사는데도 1년의 절반은 눈과 얼음에 덮여 있는 추운 나라다 보니 아이스하키 말고도 동계 스포츠는 전 종목 골고루 꽤 잘 한다. 피겨 스케이팅에는 유명한 선수들이 셀 수 없으며, 알파인 스키도 곧잘 한다. 대통령 푸틴과 총리 메드베데프가 직접 스키를 타기도 한다. 2007년 소치가 강원도 평창군을 꺾고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낙점된 데에는 푸틴 정부의 적절한 사전 득표 운동도 있었지만, 동계 종목에 대해선 우리 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저변과 실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1980년 구소련 시절 열렸던 모스크바 하계올림픽 이후 러시아 연방 명의로는 올림픽을 한 번도 열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였다. 러시아는 2005년 2012 하계올림픽 개최지 후보에 모스크바를 선정하여 구소련 이후 32년만에, 그리고 러시아연방으로서는 최초로 하계올림픽 유치를 하려고 했으나 영국 런던에 밀려서 탈락한 적이 있다. 2010년에는 2018년 FIFA 월드컵 개최국이 되었다. 이로서 4년 사이에 다시 러시아의 국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비슷한 예는 2014년 월드컵, 2016년 올림픽을 개최하는 브라질.
2011년 안현수가 귀화하면서, 러시아 쇼트트랙 국가대표 팀의 사실상 에이스로 활약하며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쇼트트랙 종목에서 러시아 최초의 메달을 따내는데 성공했다. 안현수가 금.동메달을 따내고, 은메달까지 따내면서 쇼트트랙 종목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안현수는 러시아의 영웅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소련 시절까지 합치자면 최다 동계올림픽 우승국이다. 네이버 동계올림픽 우승국 참고 물론 그냥 러시아로만 따지자면 노르웨이, 독일보다 우승 횟수가 적은데 러시아로 나간 기간이 별로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런데 러시아 국가대표팀 도핑 스캔들로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국가 자격으로 참가도 못 했다.
육상 계열 역시 강국이었지만 2015년 연말을 뒤흔든 러시아 국가대표팀 도핑 스캔들 파문으로 인해 러시아 국적의 모든 육상 선수들은 국제경기 출장 금지를 당했으며 반도핑 기구는 해체되었다. 그리고 이 도핑 파문은 해가 지나서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젠 수영과 빙상계열까지 연루되었단 소식이 전해지면서 파문이 커진 상태다. 국가 전체적으로 관여한 걸로 파악되어가면서 리우 올림픽에 러시아 선수단 전체가 출전 금지될수도 있다고 IOC에서 밝혔으나, 이후 입장을 바꾸어 각 종목 연맹이 출전금지 결정하기로 결단하였다. 한편, 국제 패럴림픽 위원회는 러시아 선수단 전원의 리우 패럴림픽 출전을 금지시켰다.
13.1. 국제대회[편집]
14. 외교[편집]
- 러시아/외교 참조.
15. 여행 정보[편집]
- 러시아/관광 참고
16. 창작물에서[편집]
러시아에서는 이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고,람보 3편이 나올 당시 소련의 외무차관은 "공산주의자 살육하는 호전적인 영화"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재치있게(?) 대응하기도 한다. 소련이던 시절에 미국에서 아프간에 가서 소련군을 무찌르고 무자헤딘을 도와 무자헤딘에게 무기를 밀매하는 CIA 요원을 구출한다는 시나리오의 람보가 큰 인기를 얻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인들을 쓸어버리는 시나리오의 소련판 람보, 일명 람보스키를
스파이, 범죄 조직, 마피아 등의 뒷세계를 다룬 작품에선 러시아인들이 악당 내지는 성격 나쁜 놈 정도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냉전시대부터 각인된 러시아에 대한 폐쇄적이고 어두운 이미지와 러시아하면 마피아와 어둠의 조직들이 연상되는 일종의 선입견 때문이다.
창작물에서, 특히 군사물이나 어둠의 세계를 다룬 작품일 수록 '어머니 러시아'라는 단어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유래는 2차대전 당시 "어머니 러시아를 위해!"라는 진격 구호에서 나왔다는 설과 공산국, 혹은 러시아의 실질 지배를 받는 국가에서 본국을 호칭하는 의미로 불렀다는 설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러시아어로는 '조국'을 뜻하는 단어 'Родина'가 여성명사이기도 하고[123], 그에 따라 프로파간다용으로 조국의 아들들을 독려하는 어머니 러시아의 이미지[124] 가 널리 퍼져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념한 어머니 조국상도 그 예로 들 수 있다. 문화 전반적으로도 나머지 서방 유럽의 제국들은 꼭 한번씩 진통을 겪었던 여성 상속 문제가 한번도 문제된 적이 없고 자식들에 대한 어머니의 권위가 강조되는 등 게르만족으로 대표되는 서유럽보다 전통적으로 여권이 강한 편이다.[125]
특정 캐릭터로 나올 때 배틀물이면 덩치 큰 근육질 남자이거나 테크놀로지 계열인 경우가 많다. 박사로 나오기도 하고 KGB와 관련된 경우도 있다. 여캐의 경우엔 상당한 미인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일본 애니나 게임 등에 등장하는 러시아인 속성의 여캐에는 아예 은발벽안
우리나라 만화 비행고등학교에선 러시아군 학생들로 수호이집안의 Su-27을 비롯한 플랭커자매와 언니두명, 동생들이 등장하며 미그기자매들역시 등장하며 미군학생들과 대립각을 세운다.
시드 마이어의 문명에서는 1편부터 계속해서 오리지널 문명으로 개근하고있는 문명 중 하나이다.
1, 2편에서는 소련 관련 인물이 지도자로 등장하는데, 1편에서는 스탈린이 지도자로 등장하고, 2편에서는 레닌이 지도자로 등장한다.
폴란드공에서는 보드카를 든 모습으로 자주 등장한다.폴란드를 괴롭히는 등의 악역 포지션을 담당하고있는데 그중 가장 압권인건 미국이 유럽권 국가들의 대책없는 군축에 악을 쓰며 욕하다가 결국 답이 없다며 손을 놔버리자 곧바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안녕?(Privet)"이라며 독일, 프랑스, 영국에게 그림자를 드리우는것...
16.1. 러시아를 모티브로 한 것들[편집]
- 스트라이크 위치스 - 오라샤 제국
- 유녀전기 - 루시 연방
- 메트로 2033 - 이건 모스크바 지하철 한정이다
- DLC
- MOD
- Southern Region Map: (서)남부 지역 한정.
- Harsh Russia Baikal: 시베리아, 동부 지역 한정.
17. 참고 자료[편집]
18. 관련 문서[편집]
18.1. 정치 및 군사[편집]
18.2. 그 외[편집]
- 정로환 - 정로환의 "로"가 러시아다.
19.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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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 회담 당사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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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역사 История Росси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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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보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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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동유럽의 슬라브 민족이 분열될 때, 키예프 공국이 세워지고 흥한 것에 의해 모스크바 대공국이 루시의 옛 영토뿐만 아니라 우랄, 중앙아시아, 시베리아에서 극동의 오호츠크 해 연안까지 형성된 국가 발전의 역사로 파악된다.
그러나 실제로 루시에서는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등 러시아인과 다른 민족 의식을 확립해서 현재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의 나라를 세운 사람들이 있고, 또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에서는 동방 정교회 신도인 러시아인과는 다른 민족의 기원을 가지는 여러 사람이 독자적인 전통과 역사를 걸어왔다.
목차
초기 역사[편집]
슬라브인 이전[편집]
초기 동슬라브족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 남러시아 쪽에는 기원전 10세기부터 각 민족들이 역사에 이름을 드러냈다. 기원전 10세기 경부터 스키타이인과 킴메르인이, 기원전 7세기 경에는 사르마트인이 각각 남러시아에 진출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기에는 동고트족의 일부가 남러시아에 들어왔지만, 7세기부터는 러시아 대평원에서 독자적인 힘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초기 동슬라브족[편집]
기본적으로는 슬라브 문화를 바탕으로 했다. 하지만 동,서,남의 많은 여러 슬라브인들 그리고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은 고대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온 투르크 민족들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은 5세기부터 투르크 민족 국가인 사바르 카간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 후에는 아바르 카간국에 정복되어 나중에는 러시아인 초기 국가인 루스카간국과 우크라이나인들에 막대한 영향을 준 하자르 카간국에 정복되어 있었다.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슬라브 민족들은 중앙아시아의 동유럽 정복을 받아들이고 그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3세기부터 10세기까지 이르는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의 러시아 민족 지배에 의한 투르크화의 영향력으로 슬라브 문화는 서유럽 문화와는 조금은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됐었다.[1]
현재의 러시아 연방의 유럽 부분과 우크라이나의 북부, 그리고 벨라루스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는 게르만인의 서방으로의 이동 뒤 동슬라브족으로 불리는 슬라브 민족의 일파가 거주하고 있었다. 슬라브어파의 동슬라브어를 사용하고, 삼림 지대에서 소박한 농경 생활을 보내고 있던 동슬라브족의 서쪽에는 발트어파에 속한 발트족, 동쪽이나 북쪽에는 핀우그리아어파에 속한 핀족들이 그들과 같은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남쪽의 흑해 북해안의 스텝은 유목화된 슬라브인들이 거주했다. 이윽고 이 지역의 슬라브인들은 튀르크인들의 지배로 투르크어족에 동화되었고, 돌궐의 대제국이 붕괴한 다음은 볼가 강의 하류에서 튀르크족의 러시아 정복에 의해 하자르 한국에 정복당하였다.
서유럽에서 프랑크 왕국 등 게르만족의 왕국이 형성되었을 무렵에, 북서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노르만인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해적·침략 행위 뿐만 아니라 발트 해·북해의 교역에 종사한 노르만인은 발달된 항해술로 강을 타고 흑해로 들어가서 남쪽의 경제적으로 번영한 동로마 제국과 교역에도 나섰고, 또 이슬람 제국의 교역도 활발히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개의 교역 루트를 통해 동쪽 슬라브 사람들은 노르만인과 튀르크 하자르의 영향을 받아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키예프 공국[편집]
초기 러시아인이 남긴 연대기에 의하면, 862년 노르만인 류리크가 교역도시 노브고로트의 공이 되었고 류리크의 일족이 동슬라브인의 거주지역으로 지배를 하러 가는 과정에서, 동슬라브인 사이에서 몇 개의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나라들이 있던 이 지역은 류리크가 속하는 부족 루스인의 이름을 따서 루시로 불리게 되었지만, 루시라고 하는 명칭이 후에 러시아라고 하는 국명의 어원이다. 하지만 "러시아"라는 단어는 중세 시대 그리스인들이 사용한 단어였으며, 루시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루시라고 불렀다.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편집]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은 키예프 공국을 계승한 국가로,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이후 번성했다.
지배기[편집]
킵차크 칸국의 바투의 서양 원정 이후,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된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킵차크 칸국을 '황금의 약탈자'라는 뜻의 골든 호르드(Golden Horde)라고 불렀다.
킵차크 칸국은 기존 러시아 지배자들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간접 통치하였지만, 반란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했다. 하지만 러시아 측의 반격도 간헐적으로 있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 시절인 1380년 쿨리코보의 전투에서 러시아는 처음으로 몽골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몽골의 반격으로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완전한 독립은 1세기 뒤에 이루어졌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1147년에 유리 돌고루키의 치세에 처음 이름을 드러낸다. 이후 몽골의 침략 기간 동안 약탈당했다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막내아들 다니일의 치세에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1317년에 모스크바의 군주는 금장 칸국의 공주와 결혼하여 칸으로부터 러시아의 대칸으로 인정받는다. 트베리와 같은 경쟁도시들과의 투쟁, 폴란드, 리투아니아와 같은 서쪽의 외국 세력과의 다툼 속에 모스크바는 점차 러시아 전체의 통합을 이루는 도시로 인정받게 된다.
드미트리 돈스코이 시절은 이러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당시 금장 칸국으로부터 대공을 인정받은 트베리의 미하일과 싸워 이겼으며, 리투아니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1380년에는 자신들이 임명한 대공인 미하일의 복수를 위해 출격한 몽골군을 돈 강에서 싸워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1382년에 토크타미시 칸에게 패배하여 모스크바를 점령당한다.
이후에도 금장 칸국의 통치는 계속되었으나 돈 강의 전투 이후에는 러시아 독자적인 발달에 크게 간섭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반 3세때는 이미 유명무실화된 금장 칸국의 지배를 폐기하고 완전히 독립했다.
이반 3세의 손자인 이반 4세에 이르러 모스크바 공국은 '연합체'적인 모습을 벗고 통합적인 '국가'의 모습을 완전히 갖추게 된다.
모스크바 러시아[편집]
몽골의 통치에서 독립을 이룬 이반 3세의 손자인 이반 4세는 3살의 나이에 대공이 된다. 초반 몇 년간의 섭정 통치가 끝나고 1547년에 이반 4세는 기존의 대공이라는 명칭 대신 '차르', 즉 왕으로서 즉위하게 된다. 이로써 분권적인 모스크바 공국 시대가 끝나고, 중앙집권적인 모스크바 러시아(러시아어: Царство Русское, 짜르스뜨보 루스까예)가 성립된다.
강력한 이반 4세의 통치기간 동안 중앙집권제가 확립되고 해외 영토가 많이 팽창했지만, 후계 문제 때문에 러시아는 동란 시대로 접어든다. 이반 4세의 아들인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가짜 차르가 3명이 등장한 가운데, 이반 4세의 처가인 로마노프 가문의 미하일 1세가 1613년에 자리를 계승한다.
초기 로마노프 왕가의 차르들의 권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력한 표트르 대제의 등장과 함께 모스크바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으로 거듭나게 된다.
러시아 제국[편집]
러시아 제국(러시아어: Pоссийская Империя)은 1721년 표트르 대제가 세운 이후부터 제1차 세계대전 도중 러시아 혁명(1917년 3월)에 의해서 타도될 때까지 존재했다.
17세기 말, 차르로 즉위한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러시아는 간신히 유럽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발트 해에 진출하기 위하여 대북방 전쟁에 참가하여, 발트 해에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였다. 표트르 대제가 로마 황제의 정식 칭호인 임페라토르를 러시아 황제의 칭호로 채용하고, 정식으로 "러시아 제국"이라는 국호를 제정한 것도 이때다.
표트르 대제 시절에 러시아는 급격한 서구화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정작 근대화가 필요한 농촌에는 개혁의 바람이 불지 않아 농노제는 폐지되지 않았고, 예카테리나 대제 시기에는 농노제가 확장되기까지 했다. 농민들은 톨스토이(일명 '대문호')의 단편소설에 언급될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았다.
알렉산드르 2세 황제는 본격적인 러시아의 근대화에 착수했다. 이는 크림 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에 패한 영향이 컸으며, 알렉산드르 2세의 대표적인 근대화 작업은 농노 해방령이었다. 그러나 정작 농노들이 살 토지를 마련해주지 않아, 도시에서는 농민 출신의 빈곤한 노동자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황제는 1881년에 암살당했고, 알렉산드르 3세에 이르면 부황이 행했던 대학 자치제 등의 자유주의가 제한되었고, 전제정치는 더욱 강해졌다.
니콜라이 2세도 알렉산드르 3세 못지않게 전제 정치를 행했다. 그는 러일 전쟁의 패배에 대한 질책과 이에 따른 개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기병대에 의해서 살해 당한 사건인 피의 일요일 사건 등을 맛본 뒤에야 비로소 개혁을 실시하게 된다. 1906년 4월 24일에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것은 1889년에 근대적 헌법을 도입한 일본보다도 늦은 것이었다.
러시아 군은 제1차 세계대전 초반, 프로이센의 동부 지역을 침공하여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맹국 세력에게 패퇴하여 동부 전선은 프로이센에서 우크라이나로 점차 후퇴하였고, 1917년 제국은 전쟁에 따른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혼란 속에서 군대의 사기마저 저하되었다.
1917년 차르 정부는 전쟁을 도저히 부담할 능력이 없었다. 이에 자유주의자, 기업가, 장군, 귀족 모두가 차르 정부에 등을 돌렸다. 빈곤한 노동자 계층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차르 정부의 퇴진을 원했으며, 이는 곧 2월 혁명으로 이어졌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퇴위되었고, 권력은 임시정부로 넘어가게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편집]
소비에트(혁명 위원회)는 임시정부가 성립되었음에도 해산하지 않았고, 그 중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파는 민중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는 수도인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하고, 소비에트라는 이름으로 집권했다.
1918년, 볼셰비키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Брест-Литов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에서 독일과의 불평등 조약을 맺음으로써, 국내외적인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동시에 제정을 지지하는 세력을 격파해야만 했다. 볼셰비키는 1920년 1,300만명의 희생자를 내고 내전에서 승리했다. 러시아 제국은 이로써 소비에트 연방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러시아 혁명[편집]
1917년 2월의 차르(황제) 퇴위 이후 성립한 임시정부는 점진적인 개혁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1914년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특히 독일과의 전쟁으로 인해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또한 어린이들이 먹을 우유가 모자를 정도로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임시정부에 휴전할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7일에 레닌의 지도하에 10월 혁명이 일어났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적위군을 조직해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했다. 혁명에 반대하는 백위군 및 외국 열강의 군대에 대항하려고 레온 트로츠키는 적위군을 붉은 군대로 개편했다. 그 후 일본을 포함한 열강에 의한 간섭 전쟁과 시베리아 출병, 백군과의 내전에 승리했으며, 모든 반대파를 숙청해 러시아에 있어서 볼셰비키의 일당독재 지배를 결정지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성립[편집]
1922년 12월의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러시아 공화국, 백러시아 공화국, 우크라이나 공화국, 자카프카스 공화국이 연합하여 소비에트 연방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1924년 레닌의 사후(死後) 집권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세계 공산혁명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와는 달리 나라안의 안정이 더 중요하다는 일국공산주의를 내세우며, 1928년에는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트로츠키를 외국으로 추방했고, 반대파를 숙청했다. 일설에 따르면 스탈린이 숙청한 사람은 2000만 명에 이르렀다고도 하며, 무리한 경제발전계획으로 강제수용된 이들도 많았다.
1933년 독일에서는 나치스가 집권했고, 스탈린은 중앙유럽 국가를 공산주의화 해 위성국(衛星國)으로 둘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양자는 결국 중앙유럽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충돌하게 된다.
1939년 소련과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그 해 9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의 영토를 분할했다. 이어 소련은 리벤트로프-몰로토프 밀약으로 말미암아 발트 3국까지 점령했다. 또한 소련은 핀란드를 흡수하려고 겨울 전쟁을 일으켰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1941년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 독일과 소련 사이에 전쟁(대조국전쟁)이 발발했다. 그 결과로써 소련은 연합국에 참전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독일군이 우세하여 소련의 수도(首都)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소련은 레닌그라드 포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등의 공방전에서 수백만의 희생자를 낸 끝에 승리, 전세(戰勢)를 역전시켜 끝내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시켰다.
소련군 점령지대에는 독일민주공화국이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연합군 점령지역에는 독일연방공화국이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들어섰다.
1945년 8월 8일에는 얄타 회담의 협정에 근거해 소-일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여 사할린, 만주국 및 한국 북부를 점령했다.
소련의 중앙유럽 점령 이후 중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연이어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 차츰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어갔다. 이들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 미국을 비롯한 민주주의 진영에 맞서려고 했다. 미국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마셜 플랜을 발표,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도우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양 진영은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냉전이 시작되었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등장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여 전체주의 독재 정책을 크게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소련은 여전히 경찰국가, 감시국가였다. 그는 식량 생산에 힘을 쏟아 일시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농업생산의 확대로써 농지의 비영양화, 사막화가 진행되어, 결국 소련은 식량을 해외로부터 수입해야 하게 되었다.
또, 중앙유럽 위성국에서는 자주 반체제 운동, 개혁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에 대해 소련은 1956년 부다페스트 봉기, 1968년 프라하의 봄에 대해 무력개입을 통하여 이를 진압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 붕괴 사이에 미국과는 직접적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베를린 봉쇄 등의 적대 행동이나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 등, 세계 각지에서의 대리전쟁이라고 하는 형태로 냉전으로 불리는 대립관계가 형성되었다. 특히 한없는 군비 확장과 또한 핵(核)개발 경쟁은 세계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다(1962년의 쿠바 위기 등).
1960년대에 들어와 흐루쇼프 체제가 안정되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다소 개선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실용 노선에 회의적이었던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는 반대로 악화되었다(중소대립).
1964년에 농업정책의 실패와 서방에 대한 유화(宥化)정책을 이유로 실각(失脚)한 흐루쇼프에 대신해 보수파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지도자가 된 이후, 관료의 세습화 등 체제의 부패가 진행된 동시에 식료나 연료, 생활필수품의 공급 부족으로 국민 생활이 어려워졌으며, 이와 함께 동쪽 제국 전체의 경제가 점차 침체해 갔다.
또한 1979년에 브레즈네프는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정권을 지지하려고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실시했지만 이는 다음해의 모스크바 올림픽에 대한 서방 여러 나라의 대량 보이콧을 부르게 되었다. 이 전쟁은 1989년까지 계속되어 소련의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을 불렀던 것뿐 아니라, 막대한 전비를 낭비했기 때문에 경제를 더욱더 압박하는 결과를 낳았다.
1985년에 등장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경공업에 대한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정보 공개, 개방)가 진행되었다. 또한 부패한 정치체제의 개혁이 추진되어, 1990년에 지금까지의 구 소련 공산당 일당 독재제 대신 복수정당제(複數政黨制)와 대통령제가 도입되었다.
또한 소련의 개혁에 영향을 받아 중앙유럽 위성 국가(衛星國家)에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 1989년부터 1990년 사이에 동독,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소련의 위성국들이 연이어 민주화를 달성했다.
이에 따라 냉전은 사실상 붕괴, 1989년 12월에 몰타 회담에서 고르바초프와 미국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냉전이 종결되었다는 선언을 했다.
개혁노선에 반대하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 등은 이에 반발해 8월에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개혁파와 소련 국민, 서방 각국의 반대로 실패했다. 이어 같은 해 9월 최고 소비에트는 발트 3국의 독립을 승인했다.
같은 해 12월 러시아 공화국, 백러시아 공화국, 우크라이나 공화국은 독립국가연합(CIS)의 창설에 합의하고, 다른 소련 가맹 공화국들도 CIS에 연달아 가입했기 때문에, 12월 25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사임하고, 소련은 해체되었다.
러시아 연방[편집]
1990년 6월 12일에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러시아 공화국을 선언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해 러시아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여기에 1992년 급진적인 경제 개혁을 발표하면서 러시아 경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경제 개혁을 둘러싸고 대통령인 보리스 옐친은 의회인 최고 소비에트와 갈등을 일으켜, 1993년 결국 10월 위기로 옐친이 전차부대로 의회를 해산시키면서 끝났다. 하지만 계속되는 경제 악화와 옐친의 정치적 무능, 1차 체첸전쟁의 패배로 인해 1998년 러시아는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기에 이르고, 러시아는 최악의 상황에 다다르게 된다.
보리스 옐친에 이어 대통령에 선출된 블라디미르 푸틴은 1999년부터 2008년까지 집권하며 혼란을 수습하고 러시아의 재건을 이끌었다. 2008년 3월 총선에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러시아의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대통령의 임기 기간을 6년으로 헌법을 바꾸었다.
2012년 대선에 다시 출마하겠다고 발표한 푸틴은 선거에서 승리하여 재선되었다. 최근에 러시아에서는 반푸틴공연을 펼친 '푸시 엘리엇'이 징역2년형을 받으면서 서방은 '푸시 엘리엇' 판결에 비판했다.[2] 러시아는 2012년에 WTO가입비준안을 서명했다.[3] 그리고 8월 22일에 WTO회원국이 되었다.[4] 메드베데프는 푸시 엘리엇을 석방해야 한다고 밝혔다.[5] 러시아는 키르기스스탄에서 러시아군기지를 건설하는데 키르기스스탄과 합의했고, 타지키스탄에서는 2042년까지 러시아군주둔을 연장하는 것에 타지키스탄과 합의했다.[6] 러시아는 23년만에 아프간전에서 실종된 265명의 병사들을 찾아나서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7] 2013년 12월 24일에 푸틴은 기자회견에서 2014년 5월까지 유라시아 경제연합 창설조약을 체결하고 2014년 1월에 통합기구를 출범시키겠다고 밝혔다.[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