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6세 [ 1754.8.23~1793.1.21 ]
루이 15세의 손자이며, 황태자 루이의 셋째 아들이다. 1770년 16세로 오스트리아의 왕녀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하고, 1774년 루이 15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선량하고 성실하였으나 의지가 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하였으며, 정무에는 열심이었으나 난국을 타개할 만한 기량이 없었다. 즉위하자 튀르고 ·네케르 ·칼론 ·브리엔 등을 차례로 재무총감으로 등용하여 재정적 위기를 타개하고, 국정의 개혁을 도모하기 위하여 면세특권을 폐지하고 과세의 평등을 실현하려 하였으나, 사제와 귀족 등 특권층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1787년 2월 명사회를 소집하여 재정개혁을 단행하려고 하다가 ‘귀족혁명’이라 부르는 고등법원의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1789년 5월 국민의 협력과 동의를 얻기 위하여 삼부회를 소집하였는데, 이것은 175년 만에 소집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이미 신분제의회를 인정하지 않는 제3신분의 대의원들이 특권층의 반대를 누르고 1789년 6월 국민의회의 성립을 의결하고 7월에는 그 명칭을 헌법제정의회로 바꾸어 절대왕정에 대신하는 입헌군주제의 수립을 추진하던 중, 7월 14일 파리 시민의 바스티유감옥 습격으로 프랑스혁명의 막이 올랐다.
10월 6일 왕은 파리 시민에 의하여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옮겨져 완전히 민중의 감시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후 콩트 드 미라보의 중개로 의회와 궁정 사이가 안정되는 듯하였으나, 1791년 6월 왕은 일족과 함께 파리를 탈출, 국외로 도망하려다 바렌에서 체포되었다. 1791년의 헌법 성립과 동시에 입헌군주제의 원수의 지위가 보장되었으나, 1792년 8월 10일 파리 시민의 재차 봉기로 체포되어 탕플탑에 유폐되고 왕권은 정지되었다(9월 21일). 12월부터 열린 재판에서 사형이 확정되고, 1793년 1월 처형되었다

초췌한 표정으로 한 중년 남자가 마차에서 내렸다. 총검을 든 병사들이 겹겹이 그를 에워싸고, 혁명 광장 중앙에 하늘 높이 치솟은 기요틴을 향해 천천히 몰아갔다. 남자는 이제 마흔이 되려는 나이였지만, 몸과 마음의 고통으로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꿋꿋하게 행동했다. 무시무시한 기계 아래에서, 스스로 저고리를 벗고 손을 묶게끔 팔을 내밀었다. 그리고 마침내 삶의 마지막을 향해 마지막 몇 계단을 오르려던 순간, 광장을 메운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목청껏 외쳤다.
“국민이여, 나는 죄 없이 죽는다!”
숨이 막히는 듯한 순간, 군악대가 우레처럼 북을 두들겨 그의 이어지는 목소리를 삼켜버렸다. 그러자 왕은 주위 사람들을 향해 지상에서의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의 죄상을 조작한 사람들을 용서한다…. 이 땅에 두 번 다시 무고한 피가 뿌려지지 않도록, 신이여, 돌봐주소서.” 그리고 루이 16세는 마지막 계단을 올랐다. 몇 분 후, 집행관이 그의 잘려진 목을 쳐들어 군중에게 보였다. “만세!” 소리가 일부 나왔지만, 대부분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거나, 괴로운 듯한 신음을 흘렸다. 1793년 1월 21일, 오전 10시를 얼마 넘긴 때였다.
새 시대의 희망이었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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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9년 전인 1774년에 루이 16세가 즉위했을 때,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때 막 스물을 넘긴 젊은 왕은 루이 14세와 15세의 허영과 낭비벽에 비해 소박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호평을 받았고, 여러 가지 문제점으로 어수선한 프랑스의 새로운 희망으로서 기대와 축복을 받으며 당당하게 왕관을 썼다. 하지만 그 ‘여러 가지 문제점’이라는 것이 워낙 복잡했고, 평범한 지도자의 평범한 방식으로는 해결하기 벅찼다.
절대왕정과 경제발전은 중세의 봉건질서를 많은 부분 무력화하고, 이름뿐인 것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새롭게 부르주아 계급을 등장시켰다. 하지만 왕권은 여전히 제도적으로 귀족들의 어깨 위에 올라 있을 따름이었고, ‘제3신분’으로 불리는 부르주아는 귀족 이상의 재력도 교양도 있었지만 그에 걸맞은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여기에 18세기 중엽부터 일기 시작한 중농주의적 개혁의 바람으로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도시의 빈민으로 내몰렸고, 농업기술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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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은 채 농민은 줄다 보니 흉년이라도 들면 심각한 식량 위기가 닥치곤 했다. 게다가 절대왕정은 헛된 영광을 꿈꾼 나머지 호화로운 궁정 생활과 함께 불필요한 해외 원정을 거듭했고, 그에 따른 막대한 재정 소요는 부르주아와 농민의 부담이었다. 그리고 볼테르, 몽테스키외, 디드로, 루소 등 ‘계몽사상가’들이 합리적인 정치사상을 제시하며 귀족의 특권과 왕권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루이 16세는 1754년 8월 23일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루이 15세의 아들 루이였는데, 그가 1765년에 죽는 바람에 할아버지의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다. 어머니는 작센 선제후의 딸인 마리 조세프였고, 남편의 사후 2년 뒤에 남편과 같은 결핵으로 죽었다. 그리고 3년 뒤, 15세가 된 루이와 14세의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이 베르사유에서 성대히 치러졌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었으며, 이로써 한때 오스트리아 계승을 놓고 겨루었던 부르봉가와 합스부르크가는 하나로 맺어져서 유럽의 중심 세력으로 떠오르고자 했다. | |

마리 앙투아네트와 마리 테레즈 공주, 루이 왕자(왼쪽), 루이 16세(오른쪽)
국가와 국민을 위해 특권에 맞서다

루이 16세는 선대 왕들에 비하면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지 않았다. 아직 젊은 탓도 있었겠지만 왕비 외에 정부를 두고 그녀들의 치마폭에 막대한 재물과 권력을 안기는 일도 없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낯선 프랑스 땅에서 보내는 생활을 달래고자 다소 사치를 부렸으나 나중에 근거 없는 입방아에 오를 정도로 터무니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인간’은 아니었으며, 따분한 정치나 의전 활동보다 자물쇠 만드는 일을 비롯한 소소한 취미를 즐겼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다정하고 성실하다는 인상을 남겼지만, 전에 없는 위기 상황을 헤쳐 나갈 지혜와 의지력은 부족했다고 평가되었다. | |

대외정책을 논의하고 있는 루이16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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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가 자물쇠나 만들면서 혁명에 이르기까지 허송세월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백성이 불만에 차 있음도 알았다. 이를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귀족의 특권을 억제하여 그들도 세금을 내게 함으로써 부르주아와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고 국가재정을 튼튼히 해야 된다고 여긴 그는 재무총감 튀르고를 앞세워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귀족들은 이에 맹렬히 반대했으며, 새로운 세금을 매기려면 신분제의회의 동의가 필수임을 왕에게 상기시켰다. 개혁은 좌초되고, 파리에서는 빵을 달라는 시민들의 폭동이 일어나자 튀르고는 1776년에 사임했다. 그러자 왕은 국민적 인기가 있었던 은행가 자크 네케르를 후임자로 뽑았다. 그러나 귀족들의 돈주머니를 열지 못하는 한 누가 재무총감이 된들 별 수가 없었는데, 같은 해에 루이 16세는 세계사에 남을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미국의 독립전쟁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미국인들의 입장을 지지했다기보다 오랜 숙적인 영국을 견제하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이는 미국에게는 결정적인 도움이 된 반면 그렇지 않아도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던 프랑스 스스로에는 산 넘어 산을 초래했다. | |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여긴 루이 16세는 1787년에 ‘명사회’를 개최했다. 루이 13세가 개최한 이래 약 150년 만인 이 명사회는 삼부회처럼 귀족과 승려, 평민 대표가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의회였으나 삼부회에 비하면 소규모였고 그만큼 왕이 다루기 쉬웠다. 하지만 이는 귀족계급의 반발만 키웠고, 결국 1789년 5월 4일에 천이백 명의 신분대표들이 소집되는 삼부회가 열렸다. 176년 만이었다.
‘수구파’가 된 왕, 그리고 혁명

삼부회에서도 개혁에 저항하는 귀족들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루이 16세보다 더 실망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이 자리를 빌려 쌓이고 쌓였던 목소리를 내고자 부푼 가슴으로 삼부회에 참석한 제3신분의 대표들이었다. 그런데 “어찌 감히 천한 것들이…” 하는 의식에 사로잡힌 귀족들은 회의 진행 내내 모든 면에서 그들을 차별했다. 제3신분 대표들은 아무 장식이 없는 수수한 검은 옷을 입어야 했고, 국왕과 귀족, 성직자 대표들이 입장할 때 일어서서 경의를 표해야 했으며, 좌석도 따로 떨어져 있었다. 여기에 “빠른 의사 진행을 위해 대표들 가운데서 또 대표를 뽑는데, 제3신분의 대표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지명하겠다”고 하자 마침내 그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 |

루이 다비드가 그린 ‘테니스 코트의 선서’
바이이, 미라보, 시예예스 등의 주동에 따라 제3신분 대표들과 일부 하급 성직자들은 봉쇄된 본회의장 옆의 테니스코트에 모여 이른바 ‘테니스코트의 선서’를 하고, 스스로를 ‘국민의회’라 하며 프랑스 국민의 유일한 대표 세력임을 주장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개혁적’ 입장이었던 루이 16세의 태도가 일변했다. 그는 제3신분과의 타협을 주장한 네케르를 전격 해임하고, 군에 동원령을 내려 무력으로 국민의회를 해산시킬 뜻을 보였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국민의 고통과 국가의 혼란을 염려하는 착한 국왕이었지만, “국민은 짐의 통치를 받을 뿐 스스로 통치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확고한 ‘구시대’ 인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부르주아들의 반발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예상치 못했던 조력자가 나타났다. 바로 민중이었다. 무거운 세금과 심각한 기근에 진절머리가 나 있던 파리의 하층민들이 국민의회를 도와 봉기했던 것이다. 7월 14일, 그들은 악명 높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점령했다. 소문과는 달리 바스티유에 정치범은 하나도 없었고 수감자도 고작 7명일 뿐이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왕권과 봉건적 질서에 맞서 국민이 일어선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루이 16세는 “저들이 레볼트(폭동)를 일으켰다!”고 외쳤는데, 옆에 있던 라로슈푸코가 “아닙니다. 이것은 ‘레볼루시옹(혁명)’입니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본래는 별의 회전운동을 의미했던 레볼루시옹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인데, 이후 1789년 7월 14일은 프랑스 혁명의 시작일로 기념된다.
탈출에 실패하다
 국민의회의 부르주아들과 거리의 민중이 합친 힘 앞에서는 루이 16세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7월 17일, 그는 혁명을 승인하고 그 상징인 세 가지 색깔의 휘장을 받아 자신의 모자에 달았다. 구체제의 군주는 국민의 군주를 자처했고, 입헌민주주의 체제의 수립이 추진되었다. 모든 봉건적 특권의 폐지, ‘인권선언’의 채택 등이 잇달아 이루어졌다.
하지만 왕은 할 수 없이 혁명을 받아들였을 뿐, 마음은 여전히 구체제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그는 특권 폐지법과 ‘인권선언’을 승인하기를 계속 미루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러는 사이에 지방에서는 농민반란이 잇따르면서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렇지 않아도 넉넉하게 먹지 못하고 있던 파리 시민들에게 식량이 공급되기란 더욱 어려워졌다. 이렇게 되자 혁명세력 중 온건파의 입지가 줄어들고, 아예 왕을 폐위시키고 공화국을 세우자는 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 등의 목소리가 커져 갔다. 그러다가 1789년 10월 5일에는 수천 명의 여성들이 흥분하여 베르사유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등을 위협하여 이들을 파리로 이끌고 왔다. 민중이, 그것도 한낱 여인네들이 지엄한 자신에게 대포를 들이대며 위협하고 행동을 강제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왕은 라파예트를 비롯한 중도파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으며, 1791년 발효된 헌법에 따라 새로운 입헌군주국 프랑스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 |

탈출에 실패하고 파리로 압송되는 루이 16세 일가
이보다 몇 달 앞선 혁명 1주년 기념식에서, 그는 헌법 초안을 앞에 두고 “프랑스의 왕인 나는 헌법을 수호하며 그에 따라 위임된 권한을 성실히 행사할 것을 국민에게 맹세한다”고 선서했다. 그러나 그 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791년 6월, 그는 왕실 가족과 함께 비밀리에 마차를 타고 국경을 넘으려다가 발각되었다. 민중은 깜짝 놀랐고, 분개했다. 병사들에게 잡혀 꼼짝없이 파리로 돌아오는 왕의 마차에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부었다. 이 일로 루이 16세는 정치적 영향력을 사실상 완전히 상실했다. 그는 이제 이름뿐인 왕이었고, 살기등등한 적대세력의 포로나 다름없었다. 이 때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던지, “이제 내가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는 말을 측근들에게 했다고 한다.
“군림하거나, 죽거나”
 1792년 8월 10일, 파리의 민중은 국왕이 있는 튀를리궁으로 돌격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연합군이 루이 16세 구출과 혁명 진압을 목표로 진격해 오고 있었는데, 이것이 도리어 민심을 자극했던 것이다. 왕을 지키려는 스위스 용병과 근위대는 용감하게 싸웠지만 엄청난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로써 왕정은 공식적으로 끝났으며, 마지막 순간에 왕을 보호한다는 입장을 보인 국민의회도 불신임을 받았다. 그리하여 새로 구성된 국민공회가 주도하는 프랑스 공화국이 탄생했다.
루이 16세는 탕플 탑에 유폐되었고, 12월에 재판을 받으려 끌려나올 때까지 4개월 동안 그곳에서 옥살이를 했다. 그 사이에 외국 군대와의 전투가 한때 불리하게 전개되자 급진파들의 선동으로 ‘반혁명 분자의 처단’이 벌어지기도 했다. ‘9월 학살’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서 최소한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성난 군중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절친한 친구였던 랑발 부인을 붙잡아 사지를 갈가리 찢고, 그녀의 목을 창에 꿰어 왕비가 갇혀 있는 창문으로 들이밀었다.
폐위된 왕을 어떻게 처리할지의 문제는 새 정부의 뜨거운 감자였다. 어찌됐든 그는 합법적인 왕이었고, 1791년의 체제에서 국가원수의 지위도 보장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왕을 해칠 경우 전 유럽이 반혁명 전선에 동참하게 되리라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격앙된 민심을 달래려면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하며, 구체제의 상징이자 지금 닥친 외국군의 침략을 초래한 장본인(많은 사람이 루이 16세가 외국 군대를 끌어들였다고 믿었는데, 사실 이후의 재판 과정에서 그 혐의는 입증되지 않았다)인 루이를 없애야 한다는 강경파의 목소리가 더 강했다. 훗날 혁명의 마지막 장에서 ‘죽음의 대천사’라는 별명을 얻게 될 생쥐스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우리는 이 사람을 재판할 것이 아니라, 그에 맞서 전쟁을 벌여야 한다. (…) 이 사람은 옥좌에 앉아 군림하든지, 죽든지 해야 한다. 모든 왕은 국민에게 반역자다. 모든 왕위는 찬탈된 것이다!” | |

루이 16세의 처형
이리하여 12월 10일에 시작된 국왕 재판은 1월 14일에 끝났다. “나는 내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 (…) 나는 모든 일을 사랑하는 국민을 위해 했다. 그러므로 내가 가장 가슴이 아팠던 때는, 8월 10일에 국민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거짓 혐의를 추궁 당할 때였다.” 면도도 허락 받지 못해 수염이 덥수룩한 채로, 하지만 단호히 최후 진술을 하고 탕플 탑에 돌아간 왕에게 재판부는 사형을 선고했다. 약 일주일 뒤의 사형 집행. 마리 앙투아네트는 약 9개월 뒤인 10월 16일에 기요틴에 올랐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포정치에서 양심을 걸고 왕을 변호했던 변호인들과 왕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은 증인들이 속속 그 뒤를 따랐고, 마지막에는 그들을 심판한 자들도 기요틴에 피를 뿌렸다.
루이 16세가 더 뛰어난 인물이었다면 혁명은 미뤄졌을지 모른다. 그가 결정적인 순간마다 더 현명하게 판단했더라면 목숨을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혁명은 말 그대로 ‘레볼루시옹’이었기에 미뤄지기는 해도 결국 막을 수는 없었겠지만, 어쩌면 영국처럼 입헌군주정이 정착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루이 26세’쯤 되는 프랑스 왕이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와 담소하는 장면을 TV에서 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는 과격함, 잔혹함, 그리고 큰 모순을 품은 두들김에 가장 활짝 열어젖혀진다. 루이 16세의 죽음으로 흐르기 시작한 그 수없이 많은 피, ‘무고한’ 피가 프랑스의 땅에 그처럼 수없이 뿌려졌기에,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이만큼 든든하게 뿌리내린 것이 아닐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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