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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은
은(殷)왕조(BC1600~BC 1046)는 중국의 역사상 최초의 국가라고 여겨지는 나라이다. 은나라 이전에도 하나라가 존재하였다고 전하고있지만 아직 그에 관련된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된 적이 없어 인정받고 있지는 않다. 이에 반해 은나라는 1899년 우연히 갑골문자가 발견된 후 은의 수도였던 은허의 발굴이 192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여기서 수많은 유물이 발굴됨에 따라 전설 상이 아닌 실재하였던 왕조였음이 밝혀졌다. 은나라는 역사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중국 최고,최초의 왕조인 것이다.
중국의 전설에 따르면 고대 중국에 우라는 사람이 대홍수를 잘 다스려내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받아 하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우임금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왕위세습제도를 마련하여 자신의 아들 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하나라는 오래도록 우임금의 자손에 의해 통치되었다. 우임금의 17대 손인 걸왕이 전제정치로 민심을 잃게 된다. 그러나 탕은 덕이 많아 많은 사람이 따랐으며 탕의 세력은 점점 커지어갔다. 이에 걸왕은 탕을 유폐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탕은 살아남아 하 왕조를 치기로 하고 박에서 여러 제후들의 도움을 받아 명조에서 걸왕을 퇴치하였다. 탕이 은을 세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발달된 청동기 문화였으며, 은의 건국으로 인해 북방 수렵종족의 약탈에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은이 세워진 후 후대 왕들은 여러차례 도읍을 옮기다 20대 왕 반경이 은허(현재의 허난성 안양현 샤오툰촌)로 옮긴 후 주나라의 무왕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도읍을 옮기지 않았다. 은 왕조 후기 주왕은 동남아시아와의 무역을 활발히 하기 위하여 화이허강 유역의 인방이라고 하는 동이민족의 국가를 정복하기도 하였다.
쇠퇴와멸망
은왕조 후기 주왕은 자신이 신과 같은 절대자라 믿고 백성 위에 군림함으로써 혹독한 전제정치를 행하였다. 또한 인방이라는 동이민족의 국가를 정벌하는 전쟁에서 국력을 많이 소모하였다. 게다가 방탕해진 나머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자신의 총비 달기와 성적 쾌락을 즐기는 데에 몰두하였다. 주왕의 이러한 행각은 점점 더해져 급기야는 연못을 파 그곳에 술을 담고 나무에 고기를 걸어놓은 뒤 3천여명의 남녀가 벌거벗고 서로 쫒아다니는 것을 보고 즐겼다. 이를 주지육림이라 한다.
주왕이 이러한 폭정을 하고 있을 때 산시성에서 세력을 기르고 있던 강태공 등의 도움을 받은 문왕은 은을 압박하였으며 문왕의 뒤를 이은 무왕은 은의 주왕과 목야에서 격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그후 무왕이 은허에 입성하여 주왕을 죽여 은을 타도하고 주왕조를 세웠다.
은의 멸망에 관해 백이,숙제의 고사가 유명하다. 백이,숙제형제는 은나라에 살던 선비였는데 주가 은왕조를 치려하자 "주왕이 비록 도리에 어긋나지만 엄연한 군주"라며 신하된 도리는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은나라가 멸망하자 주의 녹을 먹고 살지 않겠다며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 죽었다고 한다
주
주(周) 왕조는 BC 1122~BC 256년까지 존재하였던 중국의 고대 왕조이다. 덕치를 강조하는 천명사상과 가족제도 및 제례의식을 중시하는 예 사상을 중심으로 요순시대를 이어 받은 이상의 치세라 불린다.
주 왕조 시조 후직의 13대손 고공단부는 덕을 쌓아 많은 사람들의 인심을 얻고 있었는데 훈육 융적의 공격을 받아 기산으로 옮겨가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성곽과 가옥을 건축하고 읍을 나누어 백성을 다스렸으며 오관유사를 설치한 후 국호를 주라 하였다. 당시 주는 은나라 제후국의 하나였다.
고공단부의 손자 문왕은 위수를 따라 동진하여 은나라를 칠 준비를 하였으며 태공망 여상을 등용하여 덕치를 펼쳤다. 이에 수많은 제후들이 문왕을 따랐으며 결국 문왕의 아들 무왕이 목야에서 은의 주왕을 죽이고 주 왕조를 창시하였다.
주 왕조 창시 후 무왕의 동생 주공이 봉건제를 확립하고 정전제를 제정하여 실시하면서 주 왕조의 국력은 점차 번성되어 갔다. 주공은 봉건제에 따른 제후들의 반역 가능성에 따라 예사상을 확립하여 제례를 중요시 하였으며 왕실 제사에 제후들이 참석하도록 하여 통제하였다. 봉건제는 왕권이 닿지 않는 지방에 제후를 봉함으로써 통치를 용이하게 하였고 정전제는 지배층이 농민의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하였다
쇠토와멸망
동주시대에 들어서서 약 반세기가 지나 춘추시대가 시작된다(BC 722). 춘추시대에는 제후 등의 이반으로 국내의 정정이 불안정하였고, 열국 간에 전쟁과 회맹이 끊이지 않았으며, 제의 환공, 진의 문공과 같은 패자가 회맹을 주재하여, 중원의 질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패자는 명목상으로는 주왕실의 권위를 존중하고, 주의 봉건질서를 적극적으로 허물어뜨리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BC 5세기에 들어서자, 여러 나라의 내부에서 하극상의 풍조가 일어나, 그 기세에 눌려 주의 위열왕은 진의 유력한 귀족 한,위,조의 3씨를 정식으로 제후로 격상하는 것을 인정했다(BC 403). 이 해를 전국시대가 시작되는 해로 보는 설이 있는 것은 주왕 자신이 ‘봉건’의 정신을 망각한 점을 중대시하기 때문이다. 전국시대의 주왕은 낙양 부근을 영유하는 한낱 작은 제후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도 마침내 동서로 분열된 나머지 BC 256년, 난왕이 진에 항복하여 주는 멸망하였다.
춘추정복시대
BC 8세기에서 BC 3세기까지의 제후 난립의 혼란기. BC 453(또는 BC 403, 설에 따라 유동적임)년 이전을 춘추시대, 그후를 전국시대라 하여 구분한다.
주나라가 도읍을 옮긴 후 철기의 발달과 현(縣)체제의 등장으로 각지의 제후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게 되었다. 세력이 강해진 제후들은 서로 왕을 자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세력이 1000여개에 달하였다. 오랜 전쟁 후 중원의 제후는 1000여국에서 10여국으로 압축되는데 이중 강력했던 5명의 제후를 춘추오패라 하여 구분하고 있다. 춘추오패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제 환공, 진 문공, 초 장왕 3명이 이에 들고 나머지 2명은 설에 따라 유동적이다. 여러 가지 설에서 나머지 2명에 들 수 있는 제후는 오 합려, 월 구천, 송 양공, 진 목공, 오 부차 등이다.
제의 환공은 포숙아, 관중 등 명재상의 도움을 받아 부국강병을 이루었고 존왕양이를 내세워 첫 번째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제 환공 사후 패자의 자리가 비어있는 사이 19년 동안이나 망명생활을 했던 진의 문공은 호의, 조쇠 등 현신들의 도움을 받아 국력을 강하게 만들었다. 그는 성복에서 초나라의 성왕을 꺽고 천토에서 회맹함으로써 두 번째로 패자가 되었다. 춘추초기 중원 강남에는 우수한 철기를 바탕으로 발전하던 초가 있었는데 주왕실이 약해지자 스스로 칭왕하여 초왕조를 창시하였다. 즉위 초기 방탕한 생활만 일삼던 장왕은 충신의 간언으로 국력을 급속히 신장시켰으며 BC 597년 즉위 17년만에 맹주의 자리에 올라 패자가 되었다.
주요인물
제 환공
姓은 姜이며 이름은 小白이다. 사후에 환공(桓公)을 시호로 받았다. 재위기간은 기원전 685~643년으로 43년간이다. 춘추 5패 가운데 첫번째 패자.
齊 양공(襄公)에게는 小白과 규(糾) 두 후계자가 있었으나 내분이 일어나 양공이 살해되자 공자 소백과 규는 외국으로 망명했다. 소백에게는 포숙아(鮑叔牙)가 따랐고 규 공자는 관중(管仲)이 뒤따랐다. 수습이 진정되자 신하들간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났다. 공자 두 명중 먼저 돌아오는 공자에게 즉위하도록 정해졌다. 公子 는 소백이 먼저 돌아오는 것을 방해하고자 관중에게 죽일것을 명하였다.관중이 쏜 화살이 공자 소백을 명중했으나 다행히 허리띠를 맞추어 죽은체 쓰러지자 규 일행은 소백이 죽은 줄 알고 여유있게 환도하였으나 소백은 이미 앞질러 도착해 왕위에 올라 있었다. 이가 환공이다.
임금이 된 환공은 포숙아의 건의를 받아들여 예전 자기를 쏜 관중을 재상에 임명하여 역사상 보기드문 명 재상이 된다. 관중의 도움으로 부국강병을 이룩하였고 존왕양이를 내세워 중원의 패자에 올랐다.
관중 사후 수조,역아등 간신을 등용하여 이들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국력 또한 급격히 쇠락해가기 시작하였다.
진 문공
姬姓으로 이름은 중이(重耳)다. 사후에 文公으로 시호받았다. 재위기간은 기원전 635~628으로 8년. 춘추 5패중의 하나로 제 환공에 이어 중원의 패자에 올랐다. 부왕인 헌공(獻公)은 총희 여희(驪姬)의 태생인 혜제(奚齊)를 태자로 삼고자 태자인 申生을 곡옥에, 중이(후에 문공)를 蒲, 이오(夷吾: 후에 惠公)을 굴(屈)로 내쫓았다. 기원전 655년, 태자 신생은 여희의 간계에 빠져 자살했고, 重耳는 어머니 나라인 적(狄)으로, 동생 夷吾는 양(梁)나라로 각각 망명하였다.
기원전 651년 獻公이 죽자 혜제와 동생 도자(悼子)는 왕위에 올랐으나 살해되었고,이오가 진 목공(繆公)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라 혜공(惠公)이 되었다.
중이는 적(狄)나라에 계속 머물렀으나 기원전 644년 혜공이 중이를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보내자 중이는 이르 피해 衛→齊→曹→宋→楚등 무려 19년간을 망명생활을 보내야 했다. 기원전 637년 혜공이 죽자 다음해 역시 진 목공의 도움으로 51세에 왕위에 올랐으니 이가 문공이다.
월왕 구천
姓은 사[女以]이고 이름은 구천이다. 기원전 496~465년까지 32년간 재위했다. 오왕 부차와 같이 와신상담의 주인공이다.
기원전 494년(월왕 구천3년), 구천은 오왕 부차가 부친의 유언에 따라 복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범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를 먼저 공격하였으나 부초산에서 패하고 회계산에서 항복하였다. 이 때 오자서가 구천을 죽이고 월나라를 멸망시키자고 간언하였으나 범려가 오의 간신 백비를 회유하여 오왕이 구천을 용서하여 신하의 예를 갖추게 하고 그의 부인은 오왕의 첩으로 만든 후 월나라로 돌려보냈다. 구천은 회계산에서의 수치를 잊지 않고 쓸개를 맛보며 복수의 칼을 갈아 후에 결국 부차를 죽이고 기원전 473년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최근에 후베이성[湖北省] 장링[江陵]의 망산일호초묘(望山一號楚墓)에서「월왕구천자작용검 (越王勾踐自作用劍)」이라는 명(銘)이 있는 아름다운 동검(銅劍)이 출토되었다.
손무
제나라 출신(현재의 山東省)으로 성은 손(孫)이고 이름은 무(武}이다
생몰연대는 알 수 없으나 기원전 500년 전후의 사람으로 추측된다.
현존하는 병법서「손자(孫子)」의 저자로 알려졌으나 손빈(孫賓)의 저작이라는 설도 있다.
손무는 오왕 합려밑에서 장수로 활동했다.
손무와 오왕의 여인들의 훈련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 손자병법을 읽고 관심을 가진 오왕 합려가 손무를 불러 궁중내 여인들을 훈련시켜 보라고 말했다.
손무는 궁중의 미녀 180명을 골라 두편으로 나누어 오왕이 총애하는 후궁 2명을 각 편의 대장으로 삼고「'좌로' 하면 왼쪽을 보고 '우로' 하면 오른쪽을 보라」고 명령을 내렸다.
군령을 받은 부녀자들은 큰소리로 웃어댈 뿐이었다.
손무는「병사가 군령이 서지 않는 것은 지휘관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재차 명령을 하달했으나, 여인들은 여전히 웃으며 움직이질 않았다.
「명령하달이 분명한데도 병사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대장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좌우 대장을 참수해버렸다. 이후로 여인들은 대오를 갗춰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그 후 손무와 오자서는 힘을 합쳐 소국인 오나라를 강한 나라로 만들었고 중원 이북의 강국인 제나라와 진(晉)나라를 넘보게 되었다.
그 공로로 출세하여 높은 관직에 이른 손무는, 성공한 후에 물러나지 않으면 화를 자초하게 된다고 말하고 돌연 관직을 버리고 은퇴해 버렸다. 손무의 말대로 남은 오자서는 합려의 아들 부차에게 자살을 요구받아 죽었다.
공자
진
(秦)은 주(周) 왕실 제후국의 하나로 출발하여 중국 역사 최초의 통일 제국을 이룬 나라이다.(BC 221~BC 207)
BC 10세기 경 서융을 견제하면서 일어나 주의 평왕이 견융의 침략을 피해 낙읍으로 천도할 때 이를 호위한 공으로 제후로 승격하였다. 춘추시대 목공 대에 이르러서는 서방을 통일하여 서방의 패자가 되었으며 BC 362년 효공이 즉위하자 상앙이 재상으로 임명되었고 강력한 법가개혁이 시행되었다. 그러자 도적들이 없어지고 백성들의 생활수준도 높아졌다. 상앙의 법가개혁은 상당한 세력을 가졌던 제후 및 귀족들의 특권을 폐지시키고 통제함으로써 왕권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효공이 세상을 떠나자 상앙은 공손고 일파의 모함을 받아 자신이 고안한 거열형(두 대의 마차에 사람을 묶고 양쪽으로 당겨 몸을 찢는 형벌)으로 처형된다.
진나라의 국력 신장에 적지 않은 위기의식을 느낀 연, 조, 제, 위, 한, 초 6국은 남북으로 길게 반진연맹을 구축함으로써 진에 대항하려했다. 이를 합종책이라 한다. 이에 진의 혜왕은 공손연에게 합종책을 깰 방안을 구하라 명하고 마침내 진 재상 장의가 6국을 돌며 뇌물로 회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력으로 협박하면서 진나라와 단독강화를 맺게 하는 "연횡"에 성공하였다. 이후 장군 백기의 도움에 크게 힘입어 초나라, 조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서쪽에는 진, 동쪽에는 제가 맞보는 형국이 된다. 그쯤 주나라가 또다시 열국을 합종하여 진에 대항하려 하자 이를 이미 알아챈 진은 주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켜 버린다.
쇠퇴와 멸망
시황제는 죽기 전에 장자 부소에게 제위를 넘긴다는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 그러나 당시 장자 부소는 흉노족 방비를 위해 북방에 주둔중이었고 시황제의 유서는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에 의해 조작되어 호해가 제위에 올라 2세 황제가 된다. 이후 권력을 쥔 조고와 이사는 장자 부소 외 황자 12명과 공주 10명을 모조리 누명을 씌어 죽이는 등 공포 정치를 행하였다.
환관 조고는 승상 이사마저 죽이고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된다. 무서울 것이 없어진 조고는 2세 황제마저 시해하고 3세 황제를 세우는데 자신 또한 3세 황제에 의해 주살되었다.
이후 진승, 오광의 난(BC 209)이 일어남으로써 진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고 결국 한중에 들어온 한왕 유방의 군대에 3세 황제(진왕 자영)이 항복함으로써 진은 통일 후 불과 16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살아지고 말았다.
한
(秦) 말기에 진승, 오광이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키자 각지에서 무장들이 봉기하였다. 한고조 유방도 이러한 무장 중 하나였다. 유방은 원래 농가태생으로 장년에 진의 하급관리가 되었으며 진시황릉의 공사에 인부 호송 책임을 담당했었다. 각지에서 군웅이 봉기하자 유방도 패땅에서 패공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그후 항양(항우의 숙부), 항우와 연합세력을 구축하여 진나라를 타도하였는데 항우의 군대가 진의 주력부대와 전투를 벌이는 사이 유방은 항우보다 먼저 수도 함양을 함락시키고 진왕 자영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이보다 조금 늦게 함양에 이른 항우는 홍문에서 유방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아방궁을 불태웠으며 팽성에 도읍하여 서초패왕이라 칭하였다. 유방은 BC 206년 항우로부터 한왕으로 봉해졌으나, 그 후 4년 동안 항우와의 쟁패전에서 장양, 한신 등의 도움을 받아 해하에서 항우를 대파하고 천하통일을 이루었다. BC 202년 유방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장안에 도읍하였다.(BC 202년)
한 왕조의 통치조직은 대체로 진을 이어받은 군현제가 중심이었으나 한 왕조 건설에 공이 큰 공신들은 제후왕과 열후로 봉해졌다. 이것이 이른 바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합시킨 군국제이다. 하지만 유방 생전에 공신들이 모두 멸망함으로써 제후왕은 모두 유씨가 봉해지게 된다. 그후 제후황은 한왕일족 출신자에 한정된다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다.
5대 문제는 여씨 외척세력을 모두 축출해내고 백성을 위한 통치에 힘써 사마천으로부터 인제라는 평가를 들었다. 6대 경제 때에 이르러서는 내정이 안정되어 국고가 풍족해졌으며 조착을 등용하여 제후권력을 통제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이로 인해 오초7국의 난이 일어났으며 난이 평정된 이후에는 제후왕의 세력을 삭감하였다. 7대 무제 때에는 제후왕의 통치 권력이 완전히 없어지고 군국제는 군현제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
7대 무제는 수많은 북벌을 단행하여 한제국의 영역을 최대로 넓혔다. 수많은 원정 끝에 흉노세력을 고비사막으로 내쫒았으며 한반도에도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서방으로는 장건의 원정을 통해 서역제국들을 복속시켰으며 장건에 의해 실크로드가 개척되었다. 그러나 많은 원정과 궁정의 사치, 토목 사업 등으로 문제, 경제 때 비축되었던 국고를 많이 소진하였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증세, 화폐제도 개선, 소금, 철, 술의 전매제 등의 재정 정책이 취해졌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부담이 늘어나게 되어 무제의 뒤를 이은 소제, 선제 때에는 내정 안정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오랜 시간 계속된 무제의 독재적 통치기간 동안 황제의 측근들은 정치적 실권을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10대 원제 이후 황실은 급속히 약해지기 시작하였으며 13대 평제는 외척 왕망에게 독살당하게 된다.
평제를 시해하고 실권을 잡은 왕망은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신이라 함에 따라 한제국은 일단 멸망하게 된다. 이 때를 기준으로 AD 8년 이전의 한을 전한, 그 후의 한을 후한이라 하여 구분한다. 왕망 잘못된 이상주의 정치로 내부 모순은 극에 달하였으며 이에 각지에서 농민과 호족이 들고 일어선다. 이 반란 세력 중 6대 경제의 후손인 유수가 농민과 다른 호족 세력을 물리치고 25년 낙양을 도읍으로 하여 한 왕조를 재건하는데 이가 곧 광무제이다.
한 왕조를 재건한 광무제는 여러 개혁을 단행하여 통일 왕조의 기틀을 다졌으며 후한 2대 명제부터는 다시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쳐 북으로는 흉노를 압박하고 서로는 카스피해 동쪽까지 세력이 미치었다. 그러나 그 이후 다시 외척과 환관세력이 득세함에 따라 정치의 문란이 심화된다. 이를 현신들이 비판하자 두 번에 걸쳐 탄압을 받게 되는데 이것을 당고의 옥이라 하며 이후 한 왕조는 국력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중세사
위진남북조
후한 말, 환관들의 횡포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 각지에서 농민과 호족세력이 봉기하여 거병하였다. 수많은 영웅들의 세력다툼 속에 확실하게 입지를 굳힌 세명이 있었는데 조조, 유비, 손권이 그 세명이다. 이 세명이 각각 세운 위, 촉, 오의 삼국 시대 속에서 한 왕조는 조조의 아들 조비에 의해 대가 끊기고 세로운 위 왕조가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곧 위의 실력자였던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끝까지 남았던 오를 쓰러뜨리고 새로운 왕조인 진을 창시하며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무제 사마염은 즉위한 후 정권강화 정책을 펴며 검소한 생활을 하여 모범을 보이는 듯 하였는데, 그후 점점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 게 되었다. 진 왕실의 사치가 도를 넘어서는 수준이 되자 귀족들도 사치향락 경쟁에 빠져들어 나라가 급격히 기울었다. 특히 석숭과 왕개의 사치 경쟁 일화는 유명하다.
진 귀족 왕개는 자기 집에서 귀했던 꿀물로 그릇을 씻었다. 그러자 석숭이 경쟁심으로 역시 값비싼 밀랍을 땔감으로 사용했다. 이에 왕개는 40리에 이르는 자택 담장을 비단으로 단장하였는데 석숭 또한 50리의 담장을 더 비싼 비단으로 장식하였다. 또한 왕개가 진 무제에게 하사받은 2척짜리 산호를 내보이자 석숭은 3척, 4척이나 되는 산호를 6, 7그루나 구해왔다.
진 왕실과 귀족의 사치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무제는 아들 25명을 각지역 군왕으로 봉하고 영토를 나누어 주어 통치하게 하였다. 290년 진 무제가 사망하자 혜제가 즉위하였는데 혜제는 무능하여 같은 해 다른 형제들이 난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팔왕의 난이다. 이 팔왕의 난은 무제의 황후 양씨 일족과 혜제의 황후 가씨 일족들의 권력 다툼으로 비롯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여남왕, 초왕, 조왕, 제왕, 장사왕, 성도왕, 하간왕, 동해왕의 팔왕이 16년에 걸쳐 싸움을 벌였다. 팔왕의 난 중 몇몇 세력은 북방의 흉노족을 용병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많은 유목 민족들이 중원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였다. 전쟁에 종군했던 다른 민족들도 민족의 독립을 위해 난을 일으켜 영가의 난이 발생하였다. 이에 나라 정세가 극히 어려워지고 농민층이 몰락하였다.
중원에 들어온 유목 민족 세력 중 남흉노의 수장이었던 유연이 자립하여 황제라 칭하였으며 한(나중의 전조)를 세웠다. 유연의 아들 유총은 311년 진 수도 낙양을 함락시키고 진 3대 회제를 살해하였다. 그 후 장안에서 즉위하였던 진 4대 민제가 316년 유요에게 사로잡힘으로써 진(이때까지의 진을 서진이라 칭함)은 멸망하게 된다. 진의 왕족이었던 사마예는 오나라의 수도였던 건업(지금의 남경)에 새로운 도읍을 정하고 진을 다시 세우는데 이것이 동진이다. 동진은 양쯔강 유역에 장원을 형성하며 귀족 중심의 국가를 이루어 문화면에서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장강 이남 동진이 들어선 사이 장강 이북 지역은 5개의 북방 민족이 나라를 세웠는데 흉노족의 전조, 선비족의 전연, 갈족의 후조, 저족의 전진, 강족(이들을 5호라 한다) 등이 그것이다. 서진의 멸망으로 화북 지역은 이들 유목민족들의 전쟁터가 되었는데 그 중 왕맹의 개혁으로 국력을 발전시킨 전진이 가장 우세하였다. 결국 전진의 3대 왕 부견은 376년 화북 지역을 평정하여 중국은 장강 이북의 전진, 장강 이남의 동진으로 양분되었다.
동진과 전진은 383년 비수에서 격전을 벌였는데 전진이 완패하여 국력에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이에 선비족의 탁발규가 북위를 세우는 등 화북 지역에 7개나 되는 국가가 한꺼번에 생겨나게 되었다.
419년 평민 출신인 유유는 동진의 장군이 되었다가 황제인 공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국호를 송으로 바꾸고 새 왕조를 개창했다. 그동안 화북 지역은 북위 태무제에 의해 평정되어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북위는 변방의 수비를 주로 선비족에게 맡기었는데 중앙 선비족과 변방 선비족의 차별로 변방군대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게다가 효무제가 한때 충신이었던 고환을 제거하려하자 고환이 난을 일으켜 낙양을 함락시키고 동위를 일으켰다. 이에 효무제는 장안의 우문태에게 피신하였는데 우문태는 효무제를 죽여 버리고 서위를 건국하였다. 그 후 동위는 북제에게, 서위는 북주에게 교체되었다가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고 한때 화북지역을 통일하였으나, 얼마 못가서 외척 양견(수 문제)이 제위를 양위받고 수를 건국하였다.
남조는 송 이후 제, 양, 진 의 4 왕조가 교체되다가 589년 수 문제의 아들 양광(수 양제)의 군대에 의해 진 황제 숙보가 사로잡힘으로써 끝나게 된다.
수
수(隨) 문제 양견은 북주의 외척 세력으로 사위 정제로부터 황제 자리를 선양받아 수왕조를 세웠다. 587년 남조 양의 황실 자손이 다스리던 후량을 무너뜨렸으며 589년 그의 차남 양광을 시켜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을 멸망시킴으로써 통일을 완성하였다. 원래는 문제의 장남 양용이 태자였으나, 진을 무너뜨리는 데 공을 세운 차남 양광이 태자가 되었으며 그는 아버지 문제를 죽이고 제위에 올라 양제가 되었다.(581년)
양제는 문제의 뒤를 이어 대운하 공사를 계속 하여 중국의 남북을 수로로 이었으며 남북의 통일을 추진하여 동도를 낙양에 조성하고, 토욕혼과 돌궐을 토벌하였다. 또한 돌궐과 손을 잡을 수 있던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3번에 걸쳐 대군을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쇠퇴와멸망
통일왕조를 이룬지 얼마 되지도 않아 대규모의 토목공사와 수차례에 걸친 원정이 감행되자 백성들의 생활은 피폐해져 갔다. 이에 각지에서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양제는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있었다. 617년 태원 유수 이연은 내란이 격화하여 양제가 있던 강도가 고립되자 태원의 호족들을 끌어모아 군사를 일으켜 장안을 탈취하고 양제의 손자인 유(공제)를 옹립하였다. 그러나 618년 양제가 강도에서 우문화급에 의하여 살해되자, 이연이 공제로부터 양위받아 스스로 즉위, 당조를 창건함으로써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당나라가 세워진 뒤에도 양제의 총애를 받던 왕세충은 공제의 동생인 월왕을 옹립, 수나라의 대통을 잇게 하였으나, 619년 그를 폐위하고 스스로 즉위, 정국을 세움으로써 수나라의 황실은 그 맥이 완전히 끊겼다.
당
태원 유수 이연은 양제의 폭정에 반기를 든 농민반란을 진압하다 617년 자신이 반란군을 일으켰다. 그는 군사를 일으킨지 1년 만에 수도 장안을 점령하였는데 이 때 양제가 그의 친위대장인 우문화급에게 살해당하자 그가 양제의 손자인 양유를 공제로 세웠다. 그리고 공제에게 제위를 선위받아 당(唐)을 건국하였다.(618년)
당 건국의 제1공로자는 이연의 차남 이세민이었는데 태자인 형과 동생이 시기하자 이들을 궁궐로 불러 죽인 후 이연을 몰아내고 2대 태종이 되었다. 태종은 제위에 오른 후 돌궐, 설연타, 위구르 등을 압박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그는 내정에도 힘써 수나라의 균전제, 조용조, 부병제를 개선하여 효율적인 통치체제를 마련하였으며 민생안정에도 힘썼다. 이에 나라가 안정되어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으며 태종의 연호를 따 이 시기를 '정관의 치'라고 한다.
당 태종이 중앙아시아 서부에까지 안서도호부와 북정도호부를 설치하여 실크로드는 한 이후로 다시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은 말년에 황후를 폐하고 태종의 궁인이었던 무씨를 황후로 내세웠다. 무씨는 고종에 이어 즉위한 자신의 아들 중종, 예종을 폐하고 스스로 제위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주로 바꾸었다. 이가 측천무후로서 중국 역사 상 유일한 여황제이다. 측천무후는 무씨가문의 정권을 꿈꾸며 공포정치를 하다가 재상 장역지 일파의 쿠데타로 제위에서 내려갔다. 그 후 중종이 즉위하여 다시 국호를 당으로 바꾸었으나 곧 황후 위씨 세력에게 독살을 당하였다. 이에 이융기(현종)이 무력으로 위씨 세력을 축출해내고 예종을 복위시킨다.
이어 현종이 제위에 올라 통치를 하게 된다. 현종은 부병제를 모병제로 바꾸어 실시하고, 과다한 관리를 해고시키는 등 내정과 사회안정에 힘쓰었다. 이에 당나라는 당 태종의 '정관의 치'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이를 '개원의 치'라 부른다. 그러나 현종은 환관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고, 말년엔 여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아 당의 멸망을 초래하게 된다.
쇠퇴와멸망
'정관의 치'에 비길 만한 '개원의 치'를 펼쳐 당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현종은 말년에 양귀비를 얻어 여색에 탐닉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동안 시행되어오던 균전제의 모순도 심해지고 고력사, 이보국 등의 환관 세력이 득세하여 정치가 어지럽게 되었다. 현종은 양귀비의 일족인 양국충에게 재상 자리를 주어 정사를 돌보게 하였는데 이에 권력에서 점점 소외되는 것을 느낀 절도사 안록산이 '변경의 반란세력의 토벌'을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안록산의 군대는 수도인 장안까지 진격하였는데 이에 현종은 장안을 버리고 사천 지방으로 피난을 갔으며 이 과정에서 양귀비도 살해되었다.
안록산에 이어 그의 부장이었던 사사명이 계속해서 반란을 이끌었으나 안록산과 사사명이 모두 아들에게 살해되는 등 내분으로 세력이 약해졌다. 이에 8대 황제 대종은 위구르의 지원을 받아서 낙양 등을 수복하고 반란군에게 항복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안록산의 난이 진압된 후에도 당의 어려움은 계속 되었다.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토지를 나눠주는 것을 목표로 하였던 균전제는 인구가 급증하면서 각 개인에게 돌아갈 땅을 줄여놓았고, 귀족과 지주 등 기득권을 가진 세력들이 불법으로 땅을 늘려나가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에 덕종이 양세법을 실시하여 농민의 세부담을 덜어주려 하였으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대토지 소유를 인정하게 되어 농민들의 부담을 더 가중시켰다.
당 말기에는 환관들이 세력을 넓히고, 보수적인 전통 문벌귀족과 지주 세력의 신흥관료가 국정 주도권을 얻기위해 대립함에 따라 국정이 더욱 혼란스럽게 되었다. 중앙이 이러하자 각지에서는 크고 작은 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881년에는 황소의 군대에 당 수도 장안이 점령되었다. 이를 황소의 난이라 한다. 원래 황소는 평민 출신의 소금 상인이었으나 막대한 재력을 가지고 북방 출신 병사들을 끌어들여 황소의 난을 일으켰다. 이에 호응하여 불만이 많던 농민층까지 가세, 장안까지 점령하게 된 것이다.
황소의 난은 사천절도사 고변에 의해 평정되었다. 황소의 후퇴에 당시 고변의 휘하에 있던 최치원의 <토황소격문>이 썼던 일화는 유명하다. 황소의 난 이후 강회 지역의 곡창 지대가 황폐화되어 국가 재정은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한때 황소의 부장이었던 주전충은 황소를 배신, 황소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재상파와 손잡고 권력을 잡아 소종을 시해하고 애제를 옹립하였다. 그러나 907년 스스로 애제를 폐위시키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후량이라 함으로써 290년에 걸친 당의 역사는 끝나게 된다.
5대10국
오대십국이란 당 멸망부터 송 건국까지(907~960) 중원에 들어섰던 5개의 정통 왕조와 지방에 들어섰던 10개의 작은 나라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오대에는 양(梁), 당(唐), 진(晉), 한(漢), 주(周)가 속하는데 이전에 존재하였던 같은 왕조와의 구별을 위해 앞에 후(後)자를 붙여 구분한다. 십국은 오(吳), 남당(南唐), 오월(吳越), 민(:福建,), 형남(荊南), 초(楚), 남한(南漢), 전촉(前蜀)·후촉(後蜀), 북한(北漢)을 말한다.
당이 망하고 후량이 건국된 뒤 각지에서 세력을 키우던 절도사 및 번진 세력들이 각각 왕이나 황제를 칭하였다.
화북에서는 후당이 후량을 멸망시키고 화북 지역을 거의 통일하였다. 화남 지방에서는 남당을 중심으로 남한 등이 발전하였으며 중개무역 및 특산물 개발 등에 따라 소도시가 발달하게 되었다.
후당은 반란에 의하여 세워진 후진에 의해 멸망하였다. 그때 북방에는 거란족이 발해를 멸망시키는 등 세력을 굳히고 있었는데 후진의 건국을 도운 대가로 연운 16주를 할양받고 폭정을 일삼았다. 이런 와중에서 결국 후진도 거란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이쯤 후주에서는 세종이 통일의 기틀을 닦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세종이 병으로 사망하자 7세의 어린 황제 공제가 즉위한다. 후주의 친위대 사령관이었던 조광윤(송 태조)은 북한과의 전투를 위해 진군했던 진교역에서 회군하여 조보, 조광의 등의 추대로 공제로부터 제위를 이어받게 된다. 이후 조광윤은 국호를 송이라 하고 남당 등의 여러 나라를 병합하여 통일 제국 송나라의 시대를 열 게 된다.
근세사
송
당(唐)이 절도사 주전충에 의해 멸망하자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때 통일을 위한 기반을 닦고 정치를 잘하여 명군이라 불려졌던 후주의 세종이 병사하였다. 이때 송(宋) 태조 조광윤은 후주 친위대의 총사령관이었다. 세종이 병사하자 7세의 황제 공제가 즉위하였다. 이에 조광윤은 북한을 치려고 진교역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곧 개봉으로 회군하여 공제에게 제위를 선양받고 국호를 송으로 고쳐 960년 송 왕조를 창시하게 된다.
태조 조광윤은 즉위 후 최우선급무로 천하통일을 내세웠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지방군사 세력을 억제하고 절도사의 권한을 빼앗았으며 지방의 관료들도 문관만 임명하는 정책을 폈는데 이것이 이른 바 '문치주의'이다. 태조 생전에 강남 및 사천에 난립하던 오대십국 시대의 국가들은 모두 멸망하였으나 산서 지방의 북한은 요나라(거란족이 세운 나라)의 도움을 받아 계속 남아있게 된다. 2대 태종 때 요와 북한 사이 외교적 마찰이 생기자 태종은 북한을 멸망시키고 계속 하여 요나라의 연운 16주를 수복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1005년 송과 요는 전연에서 '전연의 맹'을 맺어 송이 형이 되고 요가 아우가 되는 형제의 의를 맺었다. 여기서 송은 해마다 비단과 은을 요에 보내기로 합의하였는데 이에 한참동안 요와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고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상 굴욕적인 강화였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평화가 계속 되자 오대십국 시대 소도시의 발달을 발판으로 송의 경제는 호황을 누리게 되고 국가 재정도 풍족해졌다. 그러나 인종 대에 이르러서는 서하와의 수년에 걸친 전쟁 때문에 재정이 적자를 기록하게 되었으며 경제공황에 빠지게 되었다.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신종은 왕안석을 등용하여 신법을 시행하였다.
신법개혁의 목적은 대지주 및 대상인의 기득권을 뺏고 중소농민 및 상인의 경제적 지위향상에 있었다. 신법에는 청묘법, 시역법, 방전균세법, 보갑법, 모역법 등이 있는데, 이에 따라 연리 2할의 저리 융자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노역의 의무를 화폐로 대신할 수 도 있게 되는 등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획기적인 조치들이 많았다. 또한 매년 토지를 측량하여 그간 탈세해온 토지를 적발하여 세수를 늘리는 방법 등으로 재정은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되었다.
왕안석의 신법개혁은 대지주 및 귀족, 관료층 등의 기득권층의 이익에 반(反)하는 것으로 기득권층 세력의 반대가 심했다. 1085년 왕안석을 등용했던 신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자 왕안석의 신법개혁에 반대하던 사마광이 문하시랑에 임명돼어 신법을 폐기하고 구법을 다시 시행하였다. 이후 철종이 장성하여 친정을 선언하고 구법당의 관리를 물리치고 신법당의 관료를 등용하였지만 그 뒤를 이은 휘종이 중도정치를 위해 구법당 관료도 등용하였다. 이후 신법당과 구법당 관료사이의 당쟁이 계속되었다.
이 때 북방에는 만주의 여진족이 국력을 키워 국가체제를 정립하고 국호를 대금이라 칭하였다. 결국 흠종 대에 이르러 송은 수도인 개봉을 금나라에 함락당하고 전대 휘종, 흠종을 비롯하여 수많은 황족이 금으로 호송되어 갔다. 이를 '정강의 변'이라 하며 그전까지의 송을 북송, 이후 고종부터의 송을 남송이라 하여 구분한다.
쇠퇴와멸망
'정강의 변' 때 수많은 황족들이 금으로 호송되어 갈 때 흠종의 동생만이 남쪽으로 도주할 수 있었다. 그는 흠종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르는 데 이거 바로 고종이다. 고종 때 송의 조정은 두 개의 파로 나뉘게 되는데 금을 치고 북방을 수복하자는 주전파과 현실을 받아들여 금나라를 인정하자는 화의파가 그것이다.
고종 대의 대표적인 주전론자로는 악비를 들 수 있다. 그는 호북 일대의 대군벌이었는데 회하, 진령 등에서 금을 물리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나 화평론자였던 재상 진회에 의해 누명을 쓰고 숙청되어 송은 금과 화평을 하게 되었으나 그도 오래 가지 못하고 깨어지게 된다. 이후 양산박 송강의 난 등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왕권마저 약해져 송은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몽골의 초원지대에는 칭기즈칸을 지도자로 하는 강력한 제국이 탄생하였는데 이가 몽골제국이다. 파죽지세로 영토를 확장해나가던 몽골은 금나라를 함락시키고 서하도 공략하는 등 세계 최강의 제국을 만들어 간다. 금 정복 이후 몽골제국은 남송 공략을 계속하였으나 험준한 강과 산맥을 넘어 인구가 조밀한 대도시를 상대해야 했기에 계속 실패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결국 1279년 쿠빌라이에 의해 남송은 멸망하였다.
원
13세기 초 몽골 초원지대를 근거로 하던 몽골족에 칭기스칸이라는 영웅이 탄생하였다. 칭기스칸은 몽골고원을 통일하고 칼을 남쪽으로 돌려 금나라도 멸망시켰다. 몽골은 계속적인 원정으로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사상 최대의 영토를 소유하며 유라시아 전역을 지배했다.
그러나 유목민 지배층과 농경민 피지배층이라는 사회 구조는 정치적, 경제적 모순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칭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는 유목과 농경이 공존할 수 있는 아건조지대에 강대한 제국을 세우려 하였다. 그는 형인 대칸 몽케의 뒤를 이으려 했던 막내 동생 아릭 부케를 몰아내고 대칸 자리에 올랐다. 그후 수도를 몽골고원의 카라코룸에서 연경(지금의 북경) 부근에 새 수도인 대도를 건설하여 천도하였다. 1271년에는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칭하고 중국식 정통 왕조임을 자처하였다.
이후 1279년에는 회하 이남의 남송을 평정하였고 그 이남까지 침략하여 대제국을 이루었다.
한때 오고타이칸국의 왕 카이두가 원의 종주권을 부정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카이두가 사망함으로써 이는 무마되었다. 이후 원나라는 칸국들과 친교를 맺어 제국의 종주권을 회복하였으며, 하루가 다르게 국력이 발전하여 국제 무역이 성행하게 되었다. 원은 고려와도 강화를 맺어 정동행성을 설치하였으며 일본 정벌도 시도하였으나 태풍에 의해 실패하였다.
쇠퇴와멸망
거대한 영토 위에서 번영을 누리던 원도 점점 정치가 문란해져 갔다. 정치권은 부패하였으며 관리들은 뇌물 긁어모으기에만 탐닉했다. 또한 몽골족은 한족 차별정책을 써 수많은 한족의 불만을 샀고 대규모의 공공사업에 노동력이 징발되어 감에 따라 백성들은 가혹하게 착취당했다. 게다가 강남 일대에 갑자기 수해가 일어나자 식량난이 심해져 한족 농민들이 급기야는 반란을 일으켰다.
사회가 어렵게 되자 미륵불을 믿는 종교인 백련교가 창시되어 수많은 신도들이 몰려들었고 백련교도 또한 반란에 가담하였다. 이들 반란군은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두르고 다녀 홍건적이라 불렸으며 이 난이 '홍건적의 난'이다. 불만이 많던 한족들이 홍건적에 계속하여 가담함에 따라 홍건적의 수는 늘어만 갔다.
홍건적의 무리에 주원장이라고 하는 탁월한 평민 출신 지도자가 탄생하면서 반란은 급물살을 탔고 결국 1368년 수도인 대도가 함락되었다. 이에 원 마지막 황제 순제(토곤 테무르)는 몽골로 피신하게 되었고 원나라는 멸망하게
명
원나라 말기 정치권이 부패하고 각종 재해까지 발생함에 따라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졌다. 이때 강남에서 한족 농민과 백련교도들이 이른 바 '홍건적의 난'을 일으켰다. 이때 명(明) 홍무제 주원장은 홍건적에 가담하여 대장이 되었다.
주원장은 원래 유랑농민의 아들로서 기근으로 고아가 되어 탁발승 생활을 하며 걸식으로 끼니를 때우던 미천한 신분이었다. 그는 황각사에서 탁발승 노릇을 하다가 홍건적에 가담하여 전투력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홍건군의 대장이 된다.
주원장이 이끄는 홍건적은 마침내 1368년 원의 수도 대도(大都)를 함락시키고 금릉(지금의 남경)에서 명(明)나라의 건국을 선포하고 제위에 오름으로써 홍무제가 되었다.
그는 즉위 후 수도 남경에 거대한 성곽을 세웠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중앙집권을 위해 재위기간 동안 무려 4차례나 숙청을 단행하였으며 재상직 마저 없애 버렸다. 그 결과 각 지방의 통치마저 중앙에서 통제하고 관리하는 특급(?) 중앙집권체제가 마련되었다.
주원장의 뒤를 이은 건무제를 축출하고 제위에 오른 영락제는 유목계 북방민족의 원정을 위해 5번이나 고비사막을 넘고 3번은 그들의 본거지를 함락시켰는데 이를 오출삼리라 한다.. 그리고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겼으며 색목인 출신 환관 정화에게 남양으로 출항할 것을 명하여 7차례의 원정이 이루어졌다. 정화는 총 60여척이 넘는 대선단을 조직하여 싱가폴, 자바, 수바트라, 실론, 인도까지 거쳐 각종 진귀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들 선단이 한번 출항할 때 선원의 수가 2만7천 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1449년에는 몽골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부의 남침으로 친히 정벌에 나섰던 영종 정통제의 군대가 대패하여 종군했던 문무관료들이 전멸하고 황제가 적국에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 생겨났다. 이를 ''토목의 난'이라 하는데 이후 명은 정통제의 동생을 황제로 내세우고 결전을 다짐한다. 결국 북경을 공략하다 몽골쪽에 내분이 일어나 정통제는 다시 명으로 돌아왔으며 8년만에 동생을 몰아내고 다시 황제자리에 선다.
이미 '토목의 난'으로 고초를 겪었던 명은 북방 수비의 중요성을 느끼고 유명무실해진 만리장성의 재건에 힘을 쏟았다. 지금의 만리장성은 이때 명나라가 쌓은 것이다.
16세기 과거제에 의해 문신 관리들이 많이 배출되면서 홍무제가 닦아놓은 중앙집권체계는 헤이해졌다. 황제가 국사에 직접 개입하는 일은 적어졌으며, 권력을 쥔 권신들은 현상유지에 힘을 쏟아 명나라는 내향적인 성격의 국가가 되었다. 이러한 무사안일 주의에 명의 경제는 점점 침체되어 갔으며 국가 재정은 거의 100년 동안 적자만을 기록하고 있었고 국방은 약해져 북으로는 몽골족에게 침략을 당해 북경이 위태로워 지기도 하고(북로) 남으로는 왜구에게 수탈을 당했다(남왜).
이때 13대 황제 만력제가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자 예부상서였던 장거정은 정권을 장악하고 여론을 주도했던 서원 등을 폐지하는 등 독재권력체제를 마련했다. 장거정은 이후 여러 관료들을 숙청하고 각 지방 정부를 압박하여 예산을 줄이도록 하여 만성적인 재정 적자 문제를 해결한다. 장거정이 사망하자 만력제가 친정을 시작하였다. 만력제는 6년여에 걸쳐 자신의 무덤을 조성하는 등 장거정이 확보해놓은 국고를 모두 축냈으며 나라 안팍에서 크고 작은 난이 일어났다. 이중 중대했던 3개의 난을 '만력의 3대정'이라고 하는데 이 중 하나가 임진왜란이다. 이후 명은 국력이 급격히 쇠약해져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쇠퇴와멸망
13대 신종 만력제가 죽고난 후 그의 아들 광종 태창제가 즉위하였는데 한달 만에 죽고 만력제의 손자가 제위에 올랐는데 그가 희종 천계제이다.
희종은 명대 황제 중 가장 어리석은 황제로 꼽힌다. 희종은 즉위 후 환관인 위충현을 총애하였는데 위충현은 빚쟁이었다가 스스로 거세하고 환관이 된 자로 간악무도한 간신의 전형이었다. 위충현은 어린 황제를 등에 없고 비밀경찰기관인 동창을 장악하여 관료들을 탄압하였다. 위충현의 횡포가 어찌나 심했는지 자신이 지나갈 때 사람들에게 "구천세"를 외치게 했다고 한다. 황제에게 외치는 만세보다는 천세가 적은 구천세를 외치게 하여 자신의 권세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후 희종이 즉위 7년 만에 죽었는데 그 뒤를 이어 17세의 동생인 16대 의종 숭정제가 즉위하였다. 어린 나이의 황제였지만 그는 파국으로 치닫는 명황실을 구해내고자 노력했다. 즉위 후 숭정제는 권세를 쥐고 있던 환관 위충현을 제거하였으며 내각을 여러번 교체하는 등 나라를 일으키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하였으나 능력있는 인재를 구하지 못하여 국력은 점점 더 약해져만 갔다.
그 무렵 명의 이곳저곳에서는 도적세력이 계속해서 나타났는데 이중 이자성의 무리가 가장 세력이 컸다. 이자성은 역졸 출신으로서 도적의 무리를 몰아 탐관오리를 제거하고 부호들의 토지를 빼앗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적 행세를 했다. 그의 인기는 계속 치솟아 1644년 국호를 대순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황제가 된 그는 곧바로 군대를 몰아 북경을 쳤는데 그때 명의 정예부대는 모두 청나라(여진족이 세운 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경에 전진배치되어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맞설 군대도 없이 황궁은 포위되었고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황태자와 황자들을 외가로 피신시키고 황후는 스스로 자결하게 하였으며 스스로 두 공주를 죽였다. 그리고는 자금성의 뒷산 만세산에 올라 옷깃에 "나는 죽어 지하에 가도 선왕들을 뵐 면목이 없어 머리털로 얼굴을 가리고 죽는다. 짐의 유해가 도적의 손에 찢기는 것은 상관하지 않으나 단 한명의 백성이라도 상하게 하지 말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어 자결했다.
이로써 1644년, 명의 276년에 걸친 역사는 끝을 내리게 되고, 한족에 의해 성립된 마지막 통일왕조는 막을 내렸다
청
청(淸)왕조는 만주인이 세운 나라이다. 만주인은 퉁구스족의 일파로서 여진이라고도 불린다. 그 일부가 화북에 진출하여 금나라를 세운 이후에는 점차 정착농경생활을 하게 되었다. 명조 말기에는 3부로 나누어져 명나라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이들의 사냥기술은 대단히 뛰어났는데 이 사냥 기술을 전투에 이용한 것이 팔기제도이다. 여진기병은 대단히 강인하여 '천명의 중국병사가 한명의 여진기병을 이겨낼 수 없다'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명 말기 임진왜란 출병 등 '만력의 3대정'으로 만주족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지자 여진족의 추장이던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국호를 후금이라 하여 스스로 한의 위에 올랐다. 누르하치(청 태조)는 명을 계속 공격하는 등 청나라의 기반을 닦은 후 2대 홍타이지(청 태종)에게 후금제국을 넘겨주었다. 이후 그는 조선을 두차례에 걸쳐 침략하여 강화를 성사시켰으며(병자호란) 1636년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고치고 제위에 올렸다.
이때 이자성을 주축으로한 반란군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황도에 진입하여 명(明)을 멸망시키게 된다. 청나라에 대한 방비를 위해 산해관에 전진배치되어 있던 오삼계는 청에 투항하여 청군을 북경으로 인도했다. 오삼계는 북경을 공략하여 대승하였으며 이자성 세력은 서안으로 후퇴하다 청 군대의 추격을 받고 호북으로 달아난다. 이로써 중원은 청나라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24세의 나이로 젊은 순치제가 죽자 그의 둘째 아들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제위에 올랐는데 이가 희대의 명군인 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이다. 강희제는 나이 16세가 되던 해 스스로 친정을 선언하고 직접 정사를 담당하게 된다.
당시 청은 번이라는 것을 설치하여 변방의 방비를 맡기고 있었는데 유력한 군벌을 왕에 봉하여 번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 번세력들이 점점 강해져 막대한 부와 강한 군대까지 거느리며 황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에 강희제는 번 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정하는데 가장 큰 번세력이었던 오삼계가 이에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오삼계는 다른 3번세력을 모두 모아 막강한 군대를 조직하여 청 왕조를 위협하였는데, 이에 강희제는 팔기군을 소집하고 선교사로 북경에 머물던 베르비스트에게 명해 경량 대포를 각 전선에 조달하도록 하였다. 강희제는 각 전황을 모두 조사하여 친히 전투를 지휘하였는데 섣불리 나서지 않고 장기전을 펼쳤다.
명 황실을 스스로 배신했던 오삼계는 명을 다시 재건한다는 모순된 명분으로 반란군을 일으켰는데 이런 명분으로는 전쟁이 길어질수록 불리했다. 게다가 나이가 70을 바라보게 되면서 다급해진 오삼계는 국호를 주(周)라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지만 같은 해 병을 얻어 죽고 만다. 이후 반란군은 힘없이 모두 무너졌으며 8년 여에 걸친 '3번의 난'이 평정되었다.
강희제는 또한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였고 조선과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 경계 문제를 확실히 하였다. 그는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고, 사서삼경은 물론이며 서양의 선교사들에게 서양의 학문도 배워나갔다. 또한 궁중의 화장품과 향응비를 모두 없애고 환관, 궁녀의 수를 대폭 줄였으며 자신의 옷 치장도 매우 검소하게 하였다. 치국에도 힘써 황하 치수 공사를 완성하였으며 흉년이 들었을 때 토지세와 소작료를 감면하게 하는 등 사회 안정에 힘썼다.
강희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5대 옹정제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였으며, 그 뒤를 이은 건륭제는 선대 2대에 걸친 선정 덕에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건륭제는 티벳, 미얀마, 베트남 원정 등을 통하여 청나라의 영토를 최대로 만들어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했으며, 사고전서의 편찬 등의 문화 사업과 내정에도 충실하여 선대 2대에 이어 청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쇠퇴와멸망
건륭제의 뒤를 이은 가경제 즉위 1년 만에 각지에서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이 백련교도의 난은 10년 동안 계속 되는데 이 난으로 청 팔기군의 무력함이 드러났다.
그 동안 영국은 중국인들에게 아편을 팔아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아편중독자가 급증하는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발생하게 되자 도광제는 임칙서에게 아편금연대업을 맡기게 된다. 이에 임칙서는 광주에 부임하여 아편 밀매자들을 처벌하고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튜나 호를 억류하여 튜나 호에 있던 아편을 모두 폐기 처분했다. 이에 영국 의회가 소집되어 전쟁을 결의하였으며 2년 간에 걸친 '아편 전쟁' 끝에 청나라는 패배하여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을 맺게 되며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광주, 상해 등 5개 항을 개항하게 되었다.(1844)
1851년 청나라 내부에서도 불만이 가중되어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다. 이들은 기독교의 천국을 지상에 건설한다는 취지로 태평천국이란 나라를 건국했으며 북상을 거듭하여 남경을 점령한 후 남경을 천경이라 개칭하여 태평천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태평천국에서도 민생은 안정되지 않았고 내분이 발생하여 세력이 약해져 갔다. 결국 이홍장 등의 한인 관료가 조직한 향용 등에 의해 태평천국의 난은 진압되었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고난 이홍장은 상해에 서구식 무기 공장을 세워 가동하는 등 서양 것을 배워 근대화를 하자는 '양무운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양무운동은 사회, 정치적인 개혁은 하지 않고 무력적인 것에만 제한되었다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양무운동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서구의 기술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체계도 개혁해야 한다는 강유위의 변법자강운동(무술변법)이 일어나 황제 광서제의 동조까지 받았으나 서태후 등 수구파의 반대로 100일 만에 막을 내리는데 이것을 100일 유신이라 한다.
변법자강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농민들이 봉기하여 외세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의화단이라는 비밀결사단이 만들어져 서구를 타도하였으며 "청을 받들고 서양 세력을 멸한다"는 구호를 내세워 세력을 확장시켰다. 의화단 세력이 수도 북경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자 영국, 러시아, 일본 등 8개국 연합군이 북경에 진입하여 의화단을 모조리 처형하였으며 청은 이후 열강의 식민진출에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어 버린다. 이후 청나라는 유명무실한 종이 호랑이에 불과한 신세가 되며 1912년 손문의 신해혁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중국 역사상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부의의 퇴위와 함께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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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황하문명의 발상지로 5,0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4천년 전에 이미 고유문자를 만들고, 나침반, 화약, 인쇄술, 제지술은 중국의 4대 발명품으로 중국인의 자랑거리이다.
은 왕조때 나라의 체제를 갖춘 후로 첫 통일국가인 진, 한, 수, 당, 송, 원, 명, 청으로 이어오면서 한족을 중심으로 여러 주변 민족들과 어울려 통일과 분열을 거듭하여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했다.
청나라 말기에는 서양세력과 일본의 침략을 받았지만, 1912년 손문이 이끄는 중화민국이 건국되었다. 그 뒤에도 일본의 침략으로 중 .일전쟁이 일어나는 한편 공산당과 국민당의 30년간의 내전이 계속되다가 2차 세계대전후 1949년 승리한 공산당이 대륙부를 차지하면서 패배한 국민당은 타이완섬으로 밀려났다.
중국은 공산당을 주체로 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1954년 헌법을 제정하여 지금까지 독자적인 사회주의의 길을 걸어왔으나 등소평의 개혁 개방 정책으로 중국의 문호는 세계를 향해 열리고 있으며 또한 자본주의의 우수성이 유입됨으로서 21세기의 새로운 발전을 꾀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를 세분하여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왕조의 변천
중국 역사에는 옛날 삼황(三皇)·오제(五帝)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에 속하는 것이고 실증을 할 수는 없다. 오제 중에서 특히 《書經》이라는 역사책에 보면 요(堯)·순(舜)임금 두 임금에 관한 이야기가 보이고, 그 다음에 우(禹)임금이 임금자리를 이어 받아서 '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夏 다음에 나온 왕조가 '商'이다. 상나라는 중간에 '은(殷)'이란 곳으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에 국호를 '殷'이라고 고쳐 불렀다. 이 상나라때의 유물은 지금도 갑골문자 등에 나타난다.
은을 멸하고 세운 나라가 '주(周)'인데 800여년을 계속하는 동안 도읍을 한 번 옮기고, 또 중기 이후에 가서는 양상이 크게 바뀌어 가고 있다. 앞서 호경(鎬京)에 도읍하고 있던 때를 '서주(西周)' 뒤에 낙양(洛陽)에 도읍한 때를 '東周'라 하며, 동주에도 전기를 '春秋時代' 후기를 '戰國時代'라고 한다. 이 주나라를 멸한 것이 '秦'나라다. 위의 夏·殷·周를 합하여 '三代'라고 부르기도 한다.
진나라 다음에 나온 것이 漢나라인데 400여 년 계속되었으나 중간에 일시 망하여 왕망(王莽)의 '新'이란 나라가 서기도 하였다. 新 이전에 長安(지금의 西安)에 도읍하고 있던 때를 '西漢' 또는 '前漢', 新 이후에 낙양에 도읍하고 있던 때를 '東漢' 또는 '後漢'이라고 하는데, 또 합하여 '兩漢'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후한 말기에 가면 소설 《三國志》에 나오듯이 조조가 승상이 되어 사실상 임금 노릇을 하다가, 그의 아들 조비가 '漢'을 아예 없애고 '위(魏)'나라를 세우고, 거기에 대항하여 유비가 '촉(蜀:蜀漢)', 손권이 '吳'나라를 세운다. 이 세 나라를 통틀어 '三國'이라고 하며, 이 시대를 '三國時代'라고 한다.
그 다음에 '진(晉)'나라가 나타났지만, 2대에 북쪽 영토를 북쪽에서 침입하여 온 이민족들에게 빼앗기고 양자강 이남으로 쫓겨나게 된다. 북쪽에서 낙양에 도읍하고 있던 때를 '西晉', 지금의 南京에다 도읍을 옮긴 이후를 '東晉'이라고 한다. 그 후 '수(隋)'나라가 들어설 때까지는 중국의 분단 상태가 계속되며 수많은 나라들이 부침하고 있다.
남쪽에서는 '동진'을 이어 한족들이 네 나라를 계승하였는데, 宋·齊·梁·陳이다. 이 '宋'은 이 뒤에 가서 '唐'이후의 '宋'과 구분하기 위하여 '유씨가 세운 송나라'란 뜻으로 '劉宋'이라고도 한다. 이상 동진부터 '진'까지 남쪽에 있었던 나라들을 합하여 '南朝'라고 부른다.
당시 북쪽에서는 다섯 이민족들이 먼저 열 여섯 나라를 번갈아 세웠는데 이를 합하여 '五胡十六國'이라고 부른다. 그 다음에 '北魏' - '西魏' - '南魏' - '北周' - '北齊' 같은 나라들이 북쪽에 있었다. 이 때를 '北朝'라고 부른다. 위의 남조와 북조를 합하여 '南北朝'라고도 부르며 위나라 때부터 이 시대까지 중국이 사실상 긴 분단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통칭하여 '위·진 남북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이 위·진 남북조시대 가운데서 외래 민족이 차지하였던 북조를 제외하고서 양자강 이남에서 한족들만이 명맥을 잇고 있던 나라들 여섯―삼국시대의 '吳'와 그 다음의 '晉' 그 다음의 宋·齊·梁·陳―을 합하여 '육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위·진 남북조 시대를 이어 통일 왕조를 세운 것이 '隋'이며, 그것을 이어 295년 동안 국세를 크게 떨친 것이 '唐'나라다. 당나라와 宋나라 사이에 불과 70년이라는 짧은 시기였으나 '五代·十國'이라는 분단 시대가 있다. '5대'란 '後梁·後唐·後晉·後周' 등 '後'자가 들어가는 다섯 나라인데 황하 유역의 중원을 차지하고서 잠시나마 황제를 칭하였던 나라들이다. '十國'은 중원을 차지하지 못하고 중국의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미처 '皇帝'니 '王'이니 하는 이름조차도 못 붙여 보았던 미미한 나라들이다. 이 중에는 '南唐'·'西蜀'같은 나라들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이 '오대 십국'을 통일한 것이 宋나라다. 처음에 개봉(開封)에 도읍하였다가 여진족이 세운 '金'나라에 쫓겨 항주(杭州)로 수도를 옮겼는데, 앞의 시대를 '北宋', 뒤의 시대를 '南宋'이라고 한다. 한편 그때 북쪽에서는 거란족이 세웠던 '요(遼)'나라, 여진족의 '金'나라, 몽골족의 '元'나라로 바뀌고 원은 드디어 '南宋'을 멸하게 된다.
'元'나라는 북경에 도읍하였으며, '明'나라는 처음에 '南京'에 도읍을 하였다가 北京으로 옮겼고, 만주족이 세운 '淸'나라는 역시 북경에 도읍하였다.
이상이 中華民國이 들어서기 이전까지의 중국 역사이다.
고대 역사의 기원
중국 문명의 개조로 일컬어지는 황제(黃帝)는 황하 유역의 반대 세력들을 물리치고 여러 가지 발명품을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을 편안하게 하였다. 黃帝가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요임금이 천자가 되어 어진 정사를 폈으며 효행으로 이름 놓은 순을 발탁하여 그에게 천자의 자리를 선양하였다. 이 요(堯)·순(舜)의 치세는 지금까지도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불리며 두 임금은 성군의 이상형으로 높이 추앙되고 있다.
순임금은 우(禹)에게 천자의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우의 아들 계(啓) 때에 이르러 세습 왕조 체제로 바뀌어 하(夏)왕조가 이어진다. 17대 걸(桀)왕에 이르러 말희라는 절세 미녀에게 빠져 폭정을 폈기 때문에 은(殷)의 탕(湯)왕에게 멸망하였다.
은·주시대
은(殷=商)의 탕왕은 덕이 높은 인물이었다. 그는 명재상 이윤(伊尹)의 협력으로 은왕조를 세우고 왕도정치를 폈다. 19대 임금 반경(盤庚) 때에 이르러 도읍을 은허(殷墟)로 옮기고 쇠퇴해 가는 은왕조를 중흥시켰다. 30대 임금 주(紂)왕 신(辛)은 절세 미녀 달기에게 정신을 빼앗겨 주지육림의 놀이와 가혹한 형벌로 포악함이 극도에 이르자 주(周)의 무(武)왕이 목야의 싸움에서 은을 멸망시키고 주왕조를 세워 봉건제를 실시하였다.
무왕의 동생 주공(周公)은 새로운 법도와 예악을 제정하여 주나라의 기틀을 다졌으며 나이 어린 조카 성왕을 도와 선정을 폈다. 10대 임금 여왕 때에 이르러 민중의 반란이 일어나 여왕은 도망치고 공화(共和)시대가 열린다. 12대 임금 유왕 때에 포사라는 미녀의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하여 봉화를 올리게 함으로써 마침내 유왕은 견융(犬戎)에게 살해되고, 13대 임금 평(平)왕은 견융족의 침입을 피하여 수도를 낙양으로 옮김으로서 동주 시대가 열리게 된다.
춘추·전국시대
주나라 제13대 평왕이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부터를 東周時代라 하고 동주 시대를 다시 春秋時代와 戰國時代로 나눈다.
춘추시대에 들어서면서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점점 약해져 천자로서의 위력이 없어지고 대신 강력한 제후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게 된다. 주나라 초기에 1천여 국이나 되던 제후의 수가 마침내는 10여 개국으로 압축되었다. 이 가운데 패권을 잡은 제후를 춘추오패(春秋五覇)라 하는데 이 오패는 제의 환공, 진(晋)의 문공, 초의 장왕, 오왕 합려, 월왕 구천이라는 설과 오왕 합려, 월왕 구천 대신 송의 양공과 진(秦)의 목공이라는 설이 있다.
진(晋)의 문공은 오랜 망명 생활 끝에 성복의 대전에서 강력한 라이벌인 초나라 성왕을 물리치고 패자가 되어 천도에서 회맹하였다.
초의 장왕은 필의 전투에서 진(晋)을 물리치고 패자가 되어 패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 후 천하의 형세는 진(晋)과 조가 남북으로 대치하고 동쪽의 제와 서쪽의 진(秦)이 서로 견제하는 4강의 시대로 접어든다. B.C 546년 송나라 수도서
미병회담이 열려 일종의 정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중원은 소강 상태에 접어든다.
이 때 장강 남쪽에서 오나라·월나라가 일어났다. 오왕 합려는 오자서, 손무 등의 계책을 써 중원의 초나라, 진(晋)나라, 제(齊)나라를 위압하고 월(越)나라를 제압하였다. 월왕 구천도 범려의 계책을 써 오왕 합려의 아들 부차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복수전을 흥미롭게 펼친다.
B.C. 453년 강력했던 진(晋)나라가 한(韓)·위(魏)·조(趙) 세 나라로 분리되면서 전국시대가 펼쳐진다. 춘추시대에는 패자들이 힘이 약한 주나라 왕실을 존중한다는 관념이 있었으나, 전국시대에는 이러한 관념이 없어지고 오로지 힘과 힘이 대결하는 약육강식의 양상이 펼쳐진다. 전국 7웅은 위의 세 나라 외에 진(秦)·초(楚)·연(燕)·제(齊)의 7국이다. 이 가운데 초기에 패자의 자리를 다툰 것은 위·제·진 세 나라였다. 제나라는 유명한 병법가 손빈의 계책을 써 위나라 장수 방연을 마릉의 싸움에서 패사시키고, 진(秦)의 효공은 법가인 공손앙(公孫 , 商 )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위한 일대 정치 개혁을 실시하여 천하 통일을 위한 기반을 다져 갔다.
부국강병의 추구와 권모술수가 소용돌이치며 명군과 명신들, 명장과 명장들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근 2백 년 동안 계속되는 동안 진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나라의 힘은 점점 쇠약해져 차례차례 진나라에 멸망해 버리고 B.C. 221년 제나라가 마지막으로 진나라에 항복함으로써 진의 시황제가 중국 최초의 대통일 국가를 이루게 된다.
진(秦)나라 시대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룩한 진의 시황제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는 승상 이사(李斯)에게 명하여 문자를 통일하고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모든 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장군 몽염에게 명하여 흉노를 토벌하고 만리장성의 대공사를 감독토록 하였다. 시황제는 자기의 정책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세력을 철저히 단속하기 위하여 역사상 유례없는 이른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였고, 아방궁의 건설과 여산릉의 공사 등으로 3백여 만 명의 노동력 동원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재정을 조달하기 위하여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다. 과중한 조세 부담과, 가혹한 법과 형벌로 온 천하는 마치 감옥과 같았다.
진왕조의 지주 정권과 농민간의 모순은 시황제가 죽은 다음 해인 B.C. 209년에 마침내 진승(陳勝)·오광(吳廣)이 반란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반란을 신호로 각지에서는 진나라 타도를 외치는 반란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고 유방과 항우도 이 때에 봉기하여 여러 제후들과 함을 합쳐 진나라 타도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는 유방과 항우가 천하를 다투게 된다. 유방의 진영에는 소하, 장량, 한신 등의 명참모·명장이 있어 유방을 잘 보좌하였고, 항우의 진영에는 범증이 자주 계책을 진언하였으나 항우는 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홍문의 만남에서 유방은 죽음의 위기를 맞았으나 구사일생으로 모면하였고, 그 후에도 여러 번 위기를 맞았으나 명참모들의 계책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처음 유방에게 불리했던 전세가 날이 갈수록 유리해져 유방은 마침내 궁지에 몰린 항우를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완전 고립시킴으로써 오강에서 최후를 마치게 한다. 이 유방과 항우의 싸움은 소설 《초한지》의 무대이기도 하다. 엄격히 말하면 진나라 타도의 수훈 갑은 항우임에 틀림없었으나 마지막 승리의 열매를 거둔 것은 전한 왕조를 세운 유방이었다.
전한시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장사 항우를 물리치고 漢나라를 세운 한 고조 유방은 봉건제의 장점과 군현제의 장점을 살린 이른바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왕조 초기에는 한신·팽월·경포 등 前漢 창업의 일등 공신들을 차례차례 숙청하였고, 흉노와는 화친책을 썼다. 한고조가 죽고 난 후는 그의 처 여후(呂后)의 집권 시대가 당분간 이어진다. 여후는 유방이 사랑하던 여인들과 그 여인들에게서 태어난 황자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 죽이는 방법도 참혹한 방법을 썼다. 그뿐 아니라 여씨의 천하를 만들기 위해 여씨 일족을 왕으로 세우는 등 여씨 세력의 포석에 적극적이었다.
여후가 죽자 여씨의 정권은 무너지고 다시 유씨의 천하가 되었다. 문제, 경제의 선정이 이어져 천하는 바야흐로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경제 때 제후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에 오초 7국이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주발의 아들 주아부에 의해 쉽게 평정되었다. 경제의 뒤를 이은 무제는 창업이래 쌓아 올린 문화적·경제적 여력을 바탕으로 과감한 정책을 펴 전한의 황금 시대를 이룩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화친책으로 일관해 오던 대흉노 정책을 버리고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하여 위청·곽거병 등에게 명하여 흉노를 토벌하여 전한의 위력을 크게 떨쳤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장건(張騫)은 역사상 유명한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선구가 되었다. 사마천의
사기도 무제 때 이루어졌으나 국내적으로는 무고의 난이 일어나 황태자가 살해되는 등 불상사가 많았으며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중신들의 희생도 많았다. 무제가 죽고 여운의 시대가 지난 다음 제 14대 평제 때에 이르러 외척 왕망(王莽)이 전한을 찬탈하고 신(新)이라는 나라를 세웠으나 제도 개혁의 실패로 혼란이 가중되어 15년만에 망하고 광무제 유수(劉秀)가 후한을 세우게 된다.
후한시대
後漢의 창시자 광무제 유수는 남양 호족 출신으로 왕망 정권의 제도 개혁 실패와 잇따른 실정으로 도처에서 반란군이 일어나자 그도 한왕조 부흥이라는 깃발을 높이 들고 봉기하였다.
처음 그는 경시제 유현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곤양의 싸움에서 중국 전사상 최소의 병력으로 최다의 병력을 무찔러 그의 비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 후 왕랑과의 싸움, 적미군과의 싸움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후한 왕조를 창시하였다.
광무제 유수는 천하가 일단 평정되자 내치에 힘을 기울여 백성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세금을 감면하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경제가 안정되고 사회가 안정되어 갔다. 어진 임금 밑에 어진 신하가 있듯이 광무제 치하의 중신 가운데는 어진 사람들이 많아 정치는 더욱 안정되어 갔다.
특히 반초는 오랫동안 두절되었던 서역 제국과의 교역과 개척에 필생의 정력을 바침으로써 전한 시대의 장건과 함께 실크로드의 개척자로서 청사에 길이 빛나는 업적을 세웠다.
후기에 들어서면서 외척과 환관들의 발호로 정치는 문란하고 사회는 점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외척 양기에 이은 2차에 걸친 당고(黨錮)의 화로 당시 백성들이 정신적 지주로 받들고 있던 인물들이 애석하게 희생됨으로써 정국은 더욱 어지러워지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거록 사람 장각이 태평도라는 종교단체를 조직하여 세력을 확장하더니 급기야는 정치적 단체로 변신하여 184년 후한 왕조 타도를 외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모두 머리에 누런 수건을 둘렀기 때문에 황건적이라 불렀다.
이들 황건적은 정부군과 정부를 지지하는 군벌들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후한 왕조는 이를 계기로 걷잡을 수 없는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황건적의 반란은 후한 왕조 붕괴의 결정적 요인이 되어 마침내 삼국정립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문화적 업적으로는 역사상 최초로 채륜이 종이 제조 기술의 개발에 성공하였다는 사실과 혼천의·지동의의 발명 등 과학의 발달과 한방 외과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삼국시대
후한 말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였는데 이들 할거 세력들은 동탁의 난을 계기로 그들의 세력 확장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 가운데서 천하를 삼분하여 나라를 세운 촉한(蜀漢)·위(魏)·오(吳)를 三國이라 한다.
이 삼국 가운데 중원 지역에서 기선을 제압한 것은 위의 조조였다. 조조는 당대 일류의 전략가로 전투시에는 항시 진두에 서서 장병들을 직접 지휘하였다. 그는 장안에서 도망해 온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를 맞아들여 천자의 명을 빙자하여 군웅들을 호령하였다. 당대 최고의 명문 출신 원소를 관도의 대전에서 격파함으로써 중원 통일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그 후 승상이 되어 권세를 휘둘렀고 208년 천하 통일의 대업을 완성하기 위하여 대군을 강동으로 출동시켜 손권·유비의 연합군과 적벽에서 일대 결전을 벌였으나 이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조조의 천하 통일의 꿈은 깨어지고 대신 삼국이 정립하는 형세로 바뀌었다.
촉한의 유비는 제갈공명을 삼고의 예로써 맞아들이고 오나라 손권과 연합하여 적벽에서 조조의 80만 대군을 격파함으로써 서서히 기반을 구축해 갔다.
유비가 죽은 후 제갈공명은 후주 유선을 도와 중원 회복을 목표로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충정이 넘치는 출사표를 올리고 6차에 걸쳐 조조의 뒤를 이은 조비의 위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오장원의 진중에서 일생을 마쳤다.
또한 오나라의 손권은 그의 형 손책이 죽은 후 가업을 이어 강동에서 오나라를 세워 산월족을 귀순시키고 강동의 미개발 지역을 개발하여 그의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형주의 영유권 문제로 형주를 지키던 관운장을 맥성에서 생포하여 죽임으로써 유비와 일전을 벌이게 된다. 결국 유비는 이 싸움에서 패하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병이 들어 일생을 마치게 된다.
이들 삼국은 반세기 동안 역사에 각각 그들의 발자취를 남겼고 마침내는 오장원에서 제갈공명과 오랫동안 대치했던 위나라 대장군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세운 서진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다.
서진 시대
호족 출신 사마의는 조조 이래 위나라에 벼슬하여 249년에는 승상이 되고 이후 그의 아들 사마사·사마소 등이 사실상 위나라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사마소는 촉한을 토멸한 공로로 진(晋)왕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사마염은 265년 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아 西晋 왕조를 세웠다.
무제 사마염은 귀족의 특권을 옹호하고 정치를 안정시켜 나갔다. 즉위 초에는 검소한 생활로 모범을 보였으나, 점점 사치와 방탕에 빠지자 귀족들도 다투어 사치와 부를 마치 무슨 경쟁이라도 벌이듯 과시하였다.
특히 천하의 부호 석숭과 왕개의 사치 싸움은 당시의 부패상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다. 무제가 죽고 혜제가 즉위하자 국정은 점점 문란해지고 제실의 울타리로서 강력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왕은 무제의 황후 양씨 일족과 혜제의 황후 가씨 일족들의 권력 다툼으로 비롯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팔왕이 16년에 걸쳐 싸움을 벌여 마침내는 영가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결국 팔왕의 난이 영가의 난을 부르고, 영가의 난이 서진을 멸망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중국 북부에서 五胡十六國 時代의 막이 열리게 되었다. 팔왕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이미 중국 내륙에 많은 이주민을 보내고 있던 유목민족은 무력 침략을 시작하였는데 산서지방의 남흉노의 수장 유연이 자립하여 황제라 칭하고 북한을 세웠다. 그의 아들 유총이 311년 낙양을 함락시키고 영가의 난을 계기로 서진의 회제를 사로잡았다. 이어 장안에서 즉위했던 민제도 316년 북한의 유요에게 사로잡힘으로써 서진은 52년만에 멸망하였다.
이보다 앞서 팔왕의 난이 한창일 때 왕실의 일족인 사마예는 건업(남경)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왕도 등 중원의 호족과 토착 호족들의 추대를 받아 317년 동진을 세움으로써 중국 북부의 오호십육국과 남북으로 대치하는 남북 분열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동진·오호 십육국 시대
서진이 기원 316년에 멸망하자 서진의 일족인 사마예는 317년 건업을 건강으로 개명하고 이 곳을 수도로 동진을 세웠다. 사마예는 동진의 관중이라 불리는 왕도의 도움으로 강남 지방 호족들을 복종시켜 동진의 기반을 튼튼히 해 나갔다.
동진 정권이 수립된 후 6년째에 동진의 중신 왕돈이 형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건강을 공략·함락시키고 반대파 중신들을 죽이거나 추방하였다. 동진의 황제 사마예는 왕돈의 반란에 심한 분노를 느껴 발병하여 죽고 그 후 왕돈의 난은 평정되었다.
동진 정권의 권력에는 북방에서 내려 온 호족 왕씨와 강남지방의 호족세력이 2대 지주를 이루었는데 약 1백년 동안은 왕씨 일족과 그 뒤를 이은 유씨, 사씨, 환씨 등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동진은 끝내 중국 북부를 수복하지는 못하였으나 383년에는 비수의 대전에서 전진왕 부견의 대군을 연파함으로써 양자강 이남의 땅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동진은 말기에 이르러 南朝 송(宋)을 세운 유유(劉裕)에게 멸망당하였다.
한편 동진 왕조와 때를 같이하여 중국 북부에서는 흉노·선비·갈·저·강 등 다섯 이민족이 약 130년간에 걸쳐 중국 북부에 16개의 왕조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를 오호 십육국이라 부른다.
이들 이민족은 일찍이 후한 말·삼국시대에 이미 중국 북부에 이주하여 한민족과 섞여 살다가 서진 왕조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304년 남흉노의 수장 유연이 산서에서 독립하고 316년 그의 아들 유총이 서진 왕조를 멸망시킨 이후 중국 북부는 분열 상태에 빠져 오호 십육국이 각지에 할거하게 되었다.
그동안 전진이 한 때 중국 북부를 통일하였으나 비수의 대전에서 동진에게 패함으로써 통일의 꿈이 와해되었다. 다음으로 선비족의 척발씨가 세운 북위가 점점 강력해져 주위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고 439년 다시 중국 북부를 통일함으로써 오호 십육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즉, 중국 북부는 북위가 통일하고 중국 남부는 송의 유유가 통일함으로써 南北朝時代가 열리게 되었다.
남·북조 시대
南北朝時代는 東晋 왕조가 멸망한 때부터 수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데 문화의 소개는 편의상 육조시대(오·동진·송·제·양·진)에 포함시켜 서술하였다.
따라서 남조는 동진 왕조에 이어 강남 지방에 세워졌던 송(宋)·제(齊)·양(梁)·진(陳)의 4개 왕조를 말하고, 북조는 오호 십육국의 혼란을 통일한 북위(北魏)를 비롯하여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의 다섯 왕조를 가리킨다.
연대적으로는 북위가 북부 중국을 통일한 439년부터 남조의 진이 수나라에 멸망되어 남북조로 갈라졌던 중국이 통일된 589년까지의 약 150년간을 가리킨다. 이 시대의 특징은 왕조의 교체가 빈번하여 이에 따라 사회의 혼란이 극심하였다는 점이다.
남조의 지배계급은 북부 중국에서 이주해 온 귀족들로서 전통있는 문화의 보호에 힘을 기울였고, 북조의 지배계급은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한민족을 억압하는 정책을 폈다.
남조에는 문학·예술이 크게 발달한 데 비하여 북조에는 한문화의 섭취에 힘썼으나 특별히 발전된 것은 없었다.
남북조 모두 불교가 융성했다는 사실은 중국 역사상 주목할 만한 일이다, 특히 남조의 양무제는 즉위 초에는 명군으로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폈으며 남조시대 불교를 공전의 전성시대로 만들어 황제보살로 불려지기도 하였으나 만년에 이르러서는 부정 부패를 막지 못해 자신은 물론 국가까지 멸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대의 문화는 육조문화라 일컬어 중국문화의 중심이 황하 유역으로부터 강남지방(양자강 유역)으로 옮겨져 화려하고 정교한 육조문화를 이룩하였다. 문학에는 전원시의 창시자이며 귀거래사·도화원기로 유명한 도연명, 서도에는 書聖 왕희지, 회화에는 畵聖 고개지 등의 명인이 배출되는 등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수 . 당 시대
수(隋)나라를 세운 수 문제는 그 때까지의 악정을 과감히 개혁하고 정치에 정진하는 한편 북쪽으로 호족들을 물리치고 남쪽으로 남조 최후의 진(陳)왕조를 멸망시켜 근 4백 년 동안 이어오던 대분열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천하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였다.
문제는 정치적으로 유능한 군주로서 강력한 중앙 집권제의 확립과 지방 행정의 간소화를 실시하고 군사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여 병농일치제를 실시하였다. 또 경제면에서는 요역의 경감과 세금을 감소시킴으로써 문제의 선정이 실시된 지 20 수 년 후에는 국가가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하여 역사상 선정으로 일컬어지는
개황의 치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조급한 중앙 집권제의 강화로 남쪽에서는 반항 운동이 일어나고 안으로는 수왕실 자체에도 내분이 일어났다. 604년 문제가 병상에 눕게 되자 황태자 양광(나중의 양제)이 문제를 시해하고 수나라의 2대 황제가 되니 이 이가 그 악명을 떨친 수의 양제이다.
양제는 제위에 오르자 동도의 건설과 대운하의 개설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상 위대한 사업을 성취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운하의 개설과 동도 건설의 토목공사 때문에 백성들은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인공산의 축조와 이궁의 축조공사, 몇 만 척에 달하는 용선의 건조, 만리장성의 축조 공사 등으로 수십만 수백만의 인부가 동원되어 요역은 일종의 재난으로 화하였다. 이같은 요역에 이어 3 번에 걸친 고구려 원정의 실패는 급기야 각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각지에서 호족과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군웅이 할거하는 가운데 양현감, 이밀, 이연 등이 군사를 일으켰다. 618년 양제는 강도에서 친위군에게 시해되고 그의 손자 공제가 낙양에서 자립하였으나 619년 반란 세력인 왕세충에게 제위를 빼앗겼다. 한편 장안을 함락시킨 이연은 공제의 아우를 황제로 옹립하였다가 그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당(唐)이라 하니 수나라는 겨우 3대 39년만에 멸망하였다.
당나라 시대
당(唐)의 고조 이연이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를 세움에 있어서는 그의 둘째 아들 이세민의 활약이 컸다. 당나라 건국 후 이세민의 신임을 질투한 태자 건성이 세민을 제거하려는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자 세민은 기선을 제압하여 현무문에서 태자 건성과 동생 원길을 제거하였다.
그 후 고조는 세민을 태자로 세우고 그로부터 2개월 후 제위를 세민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태상황으로서 은퇴하였다.
태종 이세민은 제위에 오르자 안으로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밖으로는 영토를 확장하여 당왕조 300년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또한 균전제를 바탕으로 한 조·용·조의 세제와 부병제의 실시, 과거 제도의 확립으로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부흥하여 역사상 선정으로 일컬어지는
정관의 치를 이룩하였다.
제 3대 고종의 집권 후부터 고종의 황후 측천무후가 고종을 대신하여 정권을 전횡하다가 690년에는 스스로 제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주(周)라 칭하였다. 그러나 705년 측천무후의 정권은 물러나고 당왕조는 다시 회복되었으나 중종의 황후 위씨의 전횡으로 정치는 다시 문란하였다. 이 때 즉위한 현종은 정치를 개혁하여 국력의 충실을 기하자 당왕조는 다시 중흥되어
개원의 치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이윽고 현종은 정치에 싫증을 느끼고 양귀비를 총애하여 간신을 중용함으로써 정치가 문란해지고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급기야는 안사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안사의 난은 9년간 계속되어 겨우 진정되었으나, 이 난에 이은 번진 세력의 발호와 이민족의 침입, 환관의 횡포 등은 마침내 875년 황소의 난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난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884년에 이르러 겨우 평정되었으나 당왕조의 지배력은 극도로 약화되어 황소의 난 토벌에 전공을 세운 절도사의 한 사람인 주전충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문화면에서는 중국 고유의 문화가 개화된 시기로서 시선 이백과 시성 두보를 비롯하여 산문의 대가 한유·유종원, 서도의 대가 구양순·안진경 등이 배출되었다.
송나라 시대
송(宋)의 태조 조광윤은 중국 역사상 명군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로 영명한 점으로는 당태종 이세민을 능가한다고 평가되는 인물이다. 조광윤은 제위에 오르자 문치주의로 무인 세력을 억제하고, 중압집권체제의 확립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뒤를 이은 동생 태종도 태조의 유업을 이어 중국 통일의 여세를 몰아 후진의 석경당이 요나라에 바쳤던 연운 16주의 수복을 꾀하여 요와 싸웠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진종·인종 시대에는 국력이 신장되고 번영하였으나 요와 서하의 침입을 받는 등, 인종 만년부터는 급격한 군사비의 지출로 재정이 궁핍해졌다. 그 뒤를 이은 신종은 왕안석을 등용하여 부국 강병을 위한 신법을 단행하였으나 구세력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별다른 성과 없이 폐지되고 말았다.
그 후 12세기 초엽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요나라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북부 중국에 침입하여 1127년에는 송나라의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휘종·흠종이 포로가 되어 연행됨으로써 송나라는 사실상 멸망하게 되었다. 이 때까지의 9대 168년 간을 역사상 北宋이라 하고, 흠종의 동생인 고종이 강남으로 난을 피하여 임안(항주)에 도읍하여 송나라를 이은 후부터를 南宋이라 한다.
남송은 금나라를 물리치기 위하여 주전파인 악비 등이 분전하여 한때는 유리한 형세를 형성하였으나 강화파인 진회 등이 정권을 잡아 오로지 강화 정책만을 고집하여 주전파인 악비 등을 모반죄로 몰아 죽이고, 굴욕적인 강화를 맺어 소강 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북방에서 새로 일어난 몽골이 서하·금나라 등을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남송에 침입해 왔다. 남송에서는 항전파인 문천상·장세걸 등이 최후까지 항전했으나 당해 내지 못하고 9대 152년만에 몽골의 원나라에 멸망하고 말았다.
송나라는 문화 국가를 표방하였으므로 이 시대에는 많은 문인·학자가 배출되어 여러 가지 문화의 꽃을 피웠다. 《자치통감》의 사마광, 성리학의 집대성자 주희, 당송 사대가인 구양수·소동파 등은 이 시대의 두드러진 인물들이다.
원. 명시대
몽골 초원의 영웅 징기스칸은 무력을 앞세워 유럽과 아시아를 석권하여 역사상 유례없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세조 쿠빌라이는 후계자 싸움에서 승리하여 칸의 자리에 오른 후 나라 이름을 원나라로 고치고 수도를 연경(北京)으로 옮겨 大都라 칭하였다.
쿠빌라이가 칸의 자리에 오르자 이에 반발한 캐로코룸파의 왕후들이 아리크부가를 칸으로 추대함으로써 원나라 후계자 싸움의 불씨가 되었고 그 후 여러 한국(汗國)은 독립하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중국을 통일한 후 고려를 복속시키고 일본과 동남아시아에 원정군을 보냈다. 그의 치세 35년간은 원의 황금시대로서 동서간의 교류가 활발해져 원의 수도 대도에는 유럽 각국에서 온 색목인(色目人)이 자주 눈에 띄었고 외국 상품이 거래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도양을 통한 해상 무역도 활발해져 천주(泉州)는 해양 도시로서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처럼 동서의 교류가 활발해진 데는 원나라가 장악한 광활한 영역을 지배하기 위해 대도를 중심으로 전국을 연결하는 역전 제도의 발달에 힘입은 바 크다. 이렇듯 동서 교류가 활발한 가운데 역사상 유명한 마르코 폴로의 원나라 체류와 그의 구술로 엮어진 《동방견문록》은 유럽 사람들에게 동양을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원나라의 정치제도는 중앙에 중서성·추밀원·어사대를 두어 3권을 분립시키고, 지방에는 行중서성을 두어 중앙에서 관장하였다. 원나라 사회제도의 특징은 몽골인, 색목인, 한인, 남인의 네 계급으로 구분되어 각 민족간의 차별이 엄격하였다. 몽골인은 중앙과 지방의 행정기관의 중추를 독점하였고 보좌역인 차관급을 색목인이 담당하였다. 한인·남인은 간부직에 등용되는 일이 없이 가장 천대를 받았다.
원나라는 말기에 이르러 제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과 라마교 숭배에 따르는 퇴폐적인 악습으로 국력이 쇠진하여 명나라를 일으킨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멸망하였다. 원나라가 사상 유례없는 대제국을 건설해 놓고도 중국을 통일한 지 불과 90년만에 멸망한 것은 그들의 정치가 거칠고 낙후된 생활에서 얻은 유목인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으로 지적되고 있다. 즉 황제란 천하만민의 복리 증진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중국 고래의 전통을 무시하는 경향이 짙었다는 것이다.
원대는 문화는 중국의 전통적 학문인 경학이나 사학 등은 그다지 발달하지 못하였으나 희곡은 매우 발달하여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명나라 시대
明의 태조 주원장은 원나라의 정치가 문란하고 국력이 쇠진한 틈을 타 한족 국가 부흥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일어난 백련교의 한산동·유복통을 수령으로 하는 곽자흥의 부하가 되었다. 주원장은 차츰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내면서 장사성·방국진 등의 군웅을 물리치고 1368년 명나라를 세워 남경에 도읍하였다. 이어 원나라의 잔존세력을 막북으로 몰아내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그는 즉위 초기에는 원나라의 정치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으나 얼마 후 황제 직속하에 6부를 두고, 군사를 통괄하는 5군도독부를 두어 군사·행정의 권력을 한 손에 장악하였다.
홍무제는 오랫동안 전란에 시달려 온 백성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감세와 면세를 실시하고 수리 사업과 개간 사업을 추진하여 생산 촉진에 주력하였다. 태조 홍무제는 자신이 죽은 후 공신들의 발호를 크게 두려워한 나머지 창업의 공신들을 숙청하여 주씨의 명나라를 반석 위에 놓으려 하였다.
그러나 바로 손자인 건문제 때 '정난(靖難)의 변'이 일어나 연왕 주체(燕王 朱 )가 영락제로서 제위에 올랐다. 영락제는 용맹 과감한 제왕으로서 변방을 침범하는 몽골의 잔존 세력을 완전 섬멸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몽골에 친정하였고, 鄭和로 하여금 대선단을 이끌고 동남아시아 일대와 인도양 일대를 활약하여 명나라의 국위를 선양하였다. 영락제는 1421년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으며 《영락대전》을 편찬하였다.
영종 때에는 환관 왕진의 발호로 국정이 문란하였고 몽골 오이라트부의 침입으로 '토목의 변'에서 영종이 포로로 잡혀가는 치욕을 겪었다. 헌종 성화제와 효종 홍치제의 치세를 명나라의 안정시기로 일컬어진다. 그 후 정덕제가 즉위하자 다시 환관의 발호로 정치가 부패하였고, 특히 천계제 때의 환관 위충현(魏忠賢)의 횡포는 극에 달하였다.
신종 만력제가 즉위하면서부터 동북쪽에서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그 세력을 확장하더니 끝내 중국을 침범하게 되었고 이에 따른 백성들의 과중한 세 부담과 심한 기근으로 농민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게 되었다. 농민 반란 가운데 특히 이자성은 그 세력이 왕성하여 마침내 북경성을 점령하자 숭정제가 자결함으로써 명나라는 17대 277년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자성은 북경에 입성한 지 얼마 안 되어 산해관 총병 오삼계(吳三桂)의 반민족 행위로 인해 북경에서 쫓겨나고 만주족인 청나라가 마침내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청나라
오삼계의 반민족적 행위로 난공불락의 산해관에 무혈 입성한 예친왕은 손쉽게 북경에 들어가 이자성을 몰아내고 淸왕조가 명나라의 뒤를 승계한 중국의 정통 왕조임을 선언하였다.
1644년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후 제 4대 강희제 때에는 명의 유신들이 세운 남명 정권을 완전 소탕하고 오삼계 등 삼번(三藩)의 난을 평정하였다. 또 러시아의 침공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써 제지하고 외몽골·회부 등을 병합하는 한편 대만의 정씨 정권을 평정함으로써 중국 지배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강희제로부터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에 이르는 1백 년 동안은 청의 전성기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기간에 청의 영토가 현저히 확대되었음은 물론 군주권이 강화되고 여러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국가 재정이 충실하였다.
청나라는 원나라와 같이 이민족으로서 중국을 지배한 민족이었으나 한족 지배 정책에 있어서는 그 궤를 달리하였다. 원나라가 철두철미하게 몽골 민족만을 우대하는 정책으로 일관하여 정치상의 결정권을 모두 몽골 민족이 장악한 데 반하여 청나라는 만주족과 한족이 협동으로 정치를 수행하는 정책을 펴 나갔다.
청나라의 전성기인 강희·옹정·건륭의 시대를 거치면서 창업 당시의 청신했던 기풍이 점점 사라지고 사치 풍조에 젖어 들면서 정치가 부패하고 사회적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다.
특히 군의 근간을 이루었던 팔기군이 부패해지면서 백련교의 난이 일어나 국내의 정정이 불안한 가운데 1840년에 있었던 아편전쟁에서의 패배는 거대한 중국의 무력함을 드러내었다.
1851년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청조는 더욱 궁지에 빠졌으며 1856년에 일어난 애로우호 사건으로 영·불군의 공격을 받음으로써 더욱 중국의 무력함을 여지없이 드러내었다.
1864년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면서 겨우 평온을 되찾아 동치 중흥을 꾀했으나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좌절되고 열강의 중국 진출이 현저해져 중국 요지에 대한 조차와 할양 등으로 중국 전토는 열강들에게 잠식되기에 이르렀다.
1900년에는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 열강의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청조는 입헌정치의 준비를 서둘렀으나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그 다음해에 선통제가 퇴위함으로써 청조는 막을 내렸다.
문화적으로는 강희제 시대의 《강희자전》과 건륭제 시대의 《사고전서》 등 대편찬 사업이 이루어졌으며 고증학이 발달하였다.
중화민국(中華民國)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1912년 1월 손문의 삼민주의를 강령으로 하는 中華民國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북양군벌을 배경으로 당시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원세개의 독재와 집권욕 때문에 민주주의 건설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대국적인 시세를 판단한 손문은 한때 원세개에게 대총통의 자리를 물려주자 원세개는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해 황제 제도의 부활을 꾀하는 등 정권욕을 채우려다가 실패하였고 1917년에는 장훈이 선통제(청조의 마지막 황제)의 복위를 꽤했다가 실패하였다.
그후 단기서·오패부·장작림·풍옥상 등의 군벌이 권력다툼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 틈을 노린 일본은 독일이 소유했던 산동반도의 권익을 승계하는 한편 중국에 대하여 21개조 요구 사항을 승인하도록 강요하였고 군벌 단기서와 결탁함으로써 중국 진출에 성공하였다.
1923년 이후 세계 열강들은 다투어 중국에서의 이권 쟁탈에 주력하였고 이에 불만을 가진 중국의 지식인·학생·노동자들은 외세 배척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1919년의 5·4운동과 1925년의 5·30사건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1924년 국민당 제 1회 전국 대표 대회가 열려 제 1차 국공합작이 성립하였고, 1925년 손문이 죽은 후 국민당은 광동에 국민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어 다음해인 1926년 북벌을 개시하여 상해·남경을 점령하였다. 북벌군 사령관 장개석은 上海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남경 정부를 수립하여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이 손을 잡은 무한정부와 대립하였으나 얼마 후 무한 정부도 공산당과 결별하고 남경정부와 합류하였다. 그후 북벌이 재개되고 1928년 장작림이 봉천에서 폭살되자 중국 전토가 국민당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이로써 남경을 수도로 하는 국민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국민정부는 9·18사건(만주사변) 이래 일본의 침략에 무저항주의를 택하고 오로지 공산당 타도에 중점을 두는 정책을 폈으나 서안사건을 계기로 제 2 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어 항일 민족 통일전선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국공간의 반목이 일어나고 태평양 전쟁 종결과 함께 국공합작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국공 양측은 미국 특사의 중재로 정치 협상 회의를 열어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였으나 결국 국공내전으로 번져 국민당 세력은 대만으로 이동하고 공산당은 1949년 10월 모택동을 주석으로 하는 中華人民共和國을 수립하였다.
대만으로 이동한 국민당 정부는 5권 분립주의 아래 산업과 경제를 발전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중국 공산당을 구원한 홍군
蔣介石이 공산당과의 국공합작을 깨고 1928년 6월 단독으로 北京의 군벌들을 쳐부쉈을 때, 그와 국민당의 기세는 중국 전역을 뒤흔들었다. 이제 중국의 새 지배자는 장개석임이 분명해졌다. 승세를 몰아 장개석은 공산당 소탕작전에 들어갔다. 이 소탕작전은 1930년대 초 여러 차례에 걸쳐 전개되었고, 막강한 화력과 병력에 대항할 힘이 없던 중국 공산당은 위기를 맞았다. 공산당은 하는 수 없이 장개석군을 피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대탈주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그 유명한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장정이란 이름은 훗날에 중국 공산당이 결국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뿐 당시 이 행군은 참담한 패주였다. 누가 보아도 싸움은 끝났고 승리자는 장개석이며, 중국 공산당의 재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한 알의 불씨에 불과했던 공산당은 마침내 소생하여 광야를 불태워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절대 열세의 싸움에서 공산당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던 것일까. 그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중국 공산당의 군대인 紅軍이었다. 더 정확히 말해 홍군이란 집단의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도덕성, 강인함, 철의 규율이 그 힘이었다.
홍군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이 군대가 가히 지상 최고의 군대였음을 알 수 있다. 놀라운 것은 홍군 병사(그들은 자신을 전사라고 불렀다)들의 평균 연령이 20세가 채 안 된다는 것이다. 10대 중반의 어린 소년병들이 매우 많은 수를 차지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소년병들이 이미 7∼8년의 전투 경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 중에는 물론 농민 출신이 가장 많았고 수공업자, 마부 출신도 있었다.
홍군 장교들의 평균 연령 역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낮은 24세 정도에 불과했다. 이들 가운데는 과거 국민당군이었던 장교가 3분의 1가량 있었고 장개석의 황포군관학교 졸업생과 프랑스, 소련, 독일 유학생 출신자들이 많았다. 현재 중국의 원로 지도자들 대부분은 이때 홍군 장교였었다.
이처럼 가장 어린 사람들로 이루어진 군대임에도 홍군의 규율과 도덕성은 인류 역사에서 전례를 찾기가 힘든 것이었다. 점령 지역의 여자들을 소유물처럼 여기는 국민당군이나 일본군과는 전혀 딴판으로 홍군의 병사들은 농부의 아내나 딸들을 정중하게 대했다. 그리고 이들은 농민에 폐가 될 것을 염려해 노숙하기 일쑤였다. 병사 대부분이 미혼이었지만 이들은 어떤 마을에서든 여자 문제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없었다. 홍군의 실상을 최초로 세상에 알린 미국의 신문기자 에드거 스노는 홍군 병사들이 대부분 동정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여자뿐 아니라 담배나 술에 대해서도 초인적인 자제력을 보였다. 담배나 술이 공식적인 금지 사항은 아니었지만 병사들 사이에서 상습적으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비판의 대상이었고 술에 취해 있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러니 전쟁의 추이를 지켜보던 일반 민중들이 누구에게 지지를 보낼 것인지는 뻔했다. 노인과 어린아이들조차 홍군을 위해 망보는 일에 앞장섰고 마을 주민 모두가 홍군의 정보망을 형성했다. 식량이 부족하면 주민들은 홍군과 함께 식사를 했다. 이에 대해 훗날 국민당 사람들은 자신들이 대륙에서 패배한 것은 바로 백성들과 제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홍군의 강함은 또한 장교들의 헌신적인 태도에서 나왔다. 특히 이 점은 병사들의 식량을 빼앗아 사복을 채우는 등 온갖 부정과 비리로 악명 높았던 국민당군의 장교와 비교할 때 더욱 두드러지는 면이다. 홍군 장교들은 당시 중국에 있던 각 지역 군벌 등 모든 군대를 통틀어 전사율이 가장 높았다. 다른 군대의 지휘관들은 "진격하라"고 뒤에서 명령하지만 홍군의 지휘관들은 "나를 따르라"고 외치며 빗발치는 총탄 속으로 맨 먼저 뛰어들었다. 이 때문에 장교의 전사율이 50%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홍군 지도부는 장교의 손실을 우려했지만, 이 같은 현상을 변하지 않았다. 팔이나 다리가 없는 장교, 머리나 얼굴에 흉한 상처가 남이 있는 장교들은 아주 흔한 모습이었다. 이들은 일반 병사와 함께 자고 함께 먹었으며 맛있는 음식이 생겨도 똑같이 나누었다.
홍군은 계급의 승진과 강등을 전적으로 전투 공로에 따라 실행했다. 이것은 국민당군이 학벌이나 재력에 따른 것과는 달라서 홍군의 병사들의 전투 의욕을 크게 고무시켰다.
당시 국민당군에 쫓겨 연안(延安)을 향해 하염없는 대탈주에 나선 홍군에게 물자를 대주고 있다고 비난했지만 소련이나 몽고와의 국경 지역은 국민당군이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럼 홍군의 보급원은 어디였을까. 재미있게도 그것은 다름 아닌 국민당 군대였다. 홍군은 주로 영국, 체코, 독일제 총을 보유했는데 이것들은 바로 장개석 정부가 공산당 토벌을 위해서 대량 수입한 무기였다. 장개석조차 홍군의 화력이 패주한 국민당군이 버리고 간 무기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인정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홍군은 국민당군을 '탄약 운반대'라고 조롱했다.
홍군은 무기는 빈약했지만 이같이 조직이나 사기 면에서 최고의 군대였기에 공산당은 승리할 수 있었다. 국민당군의 장군들조차 대만으로 쫓겨난 뒤 출판한 책에서 홍군이 곤란과 희생을 피하지 않은 훌륭한 군대였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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