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구

허정 선생

박송 입니다. 2012. 3. 12. 16:45

 

 

 

 

 

 

 

허정 [許政]한국 정치가

허정 요약정보

 

 

 

소속 국가 한국
죽은 곳 서울.
죽은 때 1988. 9. 18
직업 정치가
태어난 곳 부산
태어난 때 1896. 4. 8
1896. 4. 8 부산~ 1988. 9. 18 서울.

정치가.

 

 

 

 

 

허정

허정

 

 

 

 

호는 우양(友洋).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했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한 후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20년 임시정부 관계자들과 중국 국민당(國民黨)의 주선으로 프랑스에 유학하며 6개월 정도 체류하는 동안 재불 한인거류민회장이 되어 교민들을 결속하는 데 힘쓰고, 이후 미국 뉴욕 한인유학생회장으로 활약했다. 1922년 북미한인교민총단장이 되어 재미교포의 독립사상을 고취했으며, 1923년 미국 교포신문인 〈삼일신보〉 사장에 취임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회에서 일했다. 이때부터 21세 연상인 이승만와 개인적으로 가깝게 지내면서 그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1933년 귀국해 이기붕과 함께 광산 일을 했다. 1938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 조선어학회사건 등으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기도 했다. 8·15해방이 되자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의 결성에 참여해 집단지도체제에 해당하는 8인 총무의 일원이 되었으며, 1948년 부산 을구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됨과 더불어 헌법기초위원에 피선되었다. 같은 해 10월 교통부장관, 1950년 3월 사회부장관을 역임했으며, 1951년 11월부터 국무총리 서리를 겸직했으나 부산정치파동 직전인 1952년 4월 국무총리 서리를 사임했다. 1957년 12월 서울특별시장에 임명되었으나, 1960년 3·15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서울특별시의 행정 비협조에 불만을 품은 자유당측과의 알력으로 1959년 6월 사임했다. 그해 한일회담(韓日會談) 수석대표로 활약했고, 1960년 4월 외무부장관에 취임했으며, 4·19혁명 후에는 과도내각수반을 겸직해 혼란시기에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무난히 수행했다. 1963년 민정이양과정에서 윤보선·이범석·김병로 등과 함께 국민의 당을 창당하고 대표최고위원에 취임했으나, 당내의 파벌 싸움으로 인한 분당과 함께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1969~84년 국토통일원 고문, 1980~84년 국토통일원 고문회의 의장, 1980~88년 국정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인촌문화상을 받았으며, 자서전 〈내일을 위한 증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