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송 입니다.
2012. 3. 12.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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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때는 그냥 평범하기만 한 학생이었다고 들었는데 사회우등생이 되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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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변신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끊임없이 제가 하고 있는 일을 개선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냈기 때문이에요. 생산직 근무 시에는 하루 보통 7~8건. 매년 2천여 건씩 아이디어만 1만 8600건을 냈어요. 영광스럽게도 대통령표창 5회, 국제 특허 17개, 7번의 특진과 훈장 2회 수상했어요. 이런 아이디어들이 모여 지난 83년에는 타이어 완제품 가류기의 작업공정 개선방안을 내놓아 공전의 히트를 쳤어요. 당시 가류기는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100% 수입하고 있었는데 제가 공정 수순을 바꾸는 개선안을 사측에 제안해 타이어 한 개를 만드는 시간을 10초나 단축해 연간 2만개를 더 생산하는 효과를 낳았어요. 전체 투자비 12만원으로 연간 20억원 이상의 추가 생산효율을 거두게 된 셈이지요. 그 밖에 작은 것이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냥 스쳐지나갈 일들도 제겐 아이디어가 됩니다. 구내식당에서 젓가락과 숟가락을 따로 반납할 것을 제안해, 설거지 시간을 단축했더니, 덕분에 30억원의 원가절감을 이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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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졸 생산직 출신으로 16년 만에 금호그룹의 상무까지 진급해 직장인들 사이에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셨는데 본인은 성공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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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선 이런 저를 보고 성공한 직장인이라 하지만 전 이것만이 성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성공이라는 것을 좀 다르게 생각해요. 좋은 학교를 나왔거나,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만이 성공의 잣대가 아니라 자신의 일을 통해 내 안에 숨어있는 나를 발견하고 내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하고 자기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성공 아닐까요? 만약에 제가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고 좌절하거나 패배의식에 젖어 살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전 고정관념을 파괴하기 위해 끊임없는 도전정신으로 일에 몰두했고 창의력을 발휘하면서 점점 더 일에 흥미를 더해갔어요.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성공이 따라오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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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비결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특별히 성공철학이 있으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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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믿고 능력을 발견해야 해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실패를 하더라도 좌절할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만회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워야 합니다. 또 모험심, 문제의식, 실천능력을 통해 자신이 지닌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어야 해요. 일단 자아를 발견하면 두려움이 없어지면서 자신감이 붙게 됩니다. 이때 바로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탄력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특히 직장인으로 성공하려면 우선 끊임없는 아이디어를 제안해야 해요. 전 입사 이후 하루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어요. 10년 가까이 TV연속극을 본 일도 없고요. 항상 호주머니에 쪽지를 넣어 가지고 다니며 그때그때 생각난 것을 메모하곤 합니다. 또 하나의 비결은 체력 관리입니다. 저는 요즘도 매일 한 시간씩 체력 단련에 투자해요. 반짝이는 아이디어도 건강할 때 떠오르기 때문이지요. 남들 같으면 은퇴를 바라보는 50대 중반인데도 에너지가 넘치게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답니다. 특별한 성공철학이라면 비슷한 맥락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지금하고 있는 일에 열정적으로 미쳐야 해요. 그 다음에는 자신감을 갖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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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도전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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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 수 있다.’ 라는 긍정의 힘이 밑바탕에 있었던 것 같아요. 천주교 신자인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신부님의 사제관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신부님은 7년 동안 제게 항상 잘한다, 괜찮다, 가능하다는 칭찬을 굉장히 많이 해주셨어요. 농구를 해서 슛 하나 들어가도 전교 1등을 한 것만큼 좋아해 주셨어요. 이런 격려가 긍정의 힘을 발휘해 제가 돈이 없어도, 공부를 못해도, 가난했어도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머리와 가슴에 깊이 새길 수 있게 만들었어요. 그런 긍정의 힘이 있었기에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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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아이디어를 내면서 채택이 안 되거나 무시당했을 때는 없으셨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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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를 내서 발명을 하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에요. 실패가 70~80%에 달해요. 보통 사람들은 거기에서 다 좌절하지만 전 '야구이론'을 가지고 대처해요. 야구에선 3할 대 타자라면 최고의 타자예요. 그래서 저는 제 아이디어를 내서 3할 대만 성공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많은 사람들은 70%의 불채택된 것을 생각하지만 전 30%의 채택된 아이디어만 생각해요. 저는 보통 2할대 타자입니다. '20%나 채택되었구나 참 기분좋다'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3할 대 타자가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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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가도를 달리고 계시지만 한 번쯤은 좌절도 맛보고 힘든 시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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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도 많았지요. 입사 후 제안했던 아이디어가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고 다양한 문제 제기와 아이디어들이 상황에 따라서는 불평불만 많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수년간 기계를 똑같은 방법으로 사용하는 사람을 개선해 원가를 절감하고 생산성을 올린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초고속 승진하는 저를 보고 모함하고 시기 질투하는 시선이었어요. 언젠가 진실은 밝혀지리라 생각하고 오뚝이처럼 쓰러질 때마다 힘을 내 일어섰어요.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보니까 주위에서도 저의 진심을 알아주고 인정해 주더군요. 지금도 저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항상 노력하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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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의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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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땐 운동을 무척이나 좋아해 국가대표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리고 나서 사업을 하고 싶었어요. 전 무엇을 하든 항상 제 맘속에는 무조건 성공할거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어요. 국가대표선수가 되든 사업을 하든 직장생활을 하든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희망만은 학창 시절이나 지금이나 저의 맘 한곳에 꺼지지 않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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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고 닮고 싶은 롤모델이 있으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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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이 떠오릅니다. 사람이 성장하고 나이를 먹을수록 롤모델도 차츰 변하는 것 같아요. 우선 김우중 회장님의 성공에 대한 집념과 정주영 회장님의 창의력을 존경해요. 그리고 인재를 학벌이 아닌 능력으로 평가하신 금호그룹 박성룡 회장님의 인재경영방식을 본받고 싶은 부분이에요. 특히 박 회장님은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생산직 근로자인 저의 열정과 성심을 보시고 2계급 특진이란 전무후무한 인사 단행으로 제 능력을 활짝 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신 분이기도 해요. 나를 믿어주고 인정해주는 분들이 계셨기에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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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삶에 만족하십니까? 앞으로 어떤 꿈을 꿈꾸시고 계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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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인생을 축구시합으로 본다면 전반전 밖에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아직 화려한 후반전도 있고, 연장전까지 남아 있다고 생각해요. 더 크고 원대한 꿈과 야망, 목표를 향해서 끝없이 도전할 것이에요. 그것은 제가 사는 이유이기도 해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원 박사과정도 공부하고 있고 전문서적도 많이 읽고 있어요. 20~30대 젊은 친구들만큼 공부하고 노력하려고 해요. 앞으로는 녹색성장 신재생 에너지문제에 관심을 많이 갖고 사업을 구상 중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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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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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역경에도 뜻이 간절하면 길이 열려요. 성공은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흑산도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몹시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어요. 얼굴엔 마른버짐이 그칠 날이 없을 정도였어요. 그 당시 아이큐가 139라서 나쁘지 않은 머리를 가진 줄은 알았지만 아버님이 거듭된 사업실패로 화병으로 쓰러지시는 바람에 학비는 고사하고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야만 했어요. 그러나 가난은 고난이라기보다는 어떻게든 헤쳐 나가야 할 장애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상황에서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반드시 성공할거예요. 성공하도록 주어진 환경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세상을 향해 꿈을 가지고 맘껏 도전해 보세요. 그럼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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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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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이 비전과 도전을 가지고 꿈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학벌위주의 사회풍조가 만연하기 때문이에요. 그런 환경에서는 제2의 빌게이츠가 나올 수 없어요. 어느 한 분야에 특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학벌을 떠나 능력으로 존중받아야 해요. 어느 학교 나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잘하느냐가 중요한 사회 말이에요. 이웃 독일의 경우에는 마이스터란 제도가 있어 기능인들을 우대하기 때문에 세계적인 기술 인력들이 배출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한문으로 자기 이름을 못 쓴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이 세계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기술만 있다면 일인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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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기업들이 '고졸 채용'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하지만 '고졸'로 입사해서 기업의 별이라는 임원자리에 오르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별 따기보다도 더 어렵다.
하지만 학벌이 곧 실력이고 성공의 지름길로 여겨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고졸이라는 학력을 이겨내고 이른바 '고졸 성공신화'를 써내려간 사람들을 종종 찾을 수 있다. 윤생진 선진D&C 대표도 그 중 한명이다. 윤 대표는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1978년 금호타이어에 기능직으로 입사했다. 그러나 7차례의 특진을 거듭해 금호아시아나그룹 전략경영본부 전무까지 지내다 지난 2010년 물러나 자기사업을 하고 있다.
고졸이라는 멍에를 지고 어떻게 대그룹 임원에 오르게 됐는지, 그 비결과 성공 스토리를 들어봤다.
◆'미친놈' 취급 받은 '부장 목표'
윤생진 대표는 신입 면접 때 면접관에게 "자네의 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윤 대표는 "금호타이어의 부장이 되는 것이 꿈입니다"라고 답했다.
그의 대답에 면접관들은 "반장을 잘못 말한 것 아니냐"며 의아해 했다. 당시 금호타이어 고졸 기능직이 최고로 올라갈 수 있는 직책은 기능직을 총괄하는 반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장이 꿈"이라는 윤 대표의 답변이 반장을 잘못 말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윤 대표는 반장이 아니라 부장이라고 강조했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부장까지 오르겠다는 목표를 갖는 것은 당연했죠. 그러나 회사 내에 고졸의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 거죠. 어쩌면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애의 호기였구요."
윤 대표의 이러한 면접 얘기는 순식간에 전 공장에 소문이 났다. 그리고 윤 대표를 보고 모두들 "미친놈이 한명 들어왔다"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정말 창피했습니다.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구요. 그러나 마음을 다잡았죠. 내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윤 대표가 고민 끝에 생각해 낸 방법은 대졸 직원은 할 수 없는 분야에서 1등을 하자는 것이었다. 생산성 향상, 품질 향상, 불량 감소 등 회사의 이익이 되는 분야에서 1등을 하면 회사에 눈여겨볼 것이고, 그러면 '부장'이 결코 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진=류승희 기자)
◆'민주화 운동', 기회를 제공하다
윤 대표는 현재의 자신이 있기까지 많은 노력과 성과를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운도 따랐다고 말한다. 그 운은 바로 80년대 후반의 민주화 열풍이다.
"민주화운동이 벌어지면서 노조도 자신들의 요구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서게 됐습니다. 그렇게 되자 관리직 직원들은 노조 앞에 나서서 이들을 달래기 어려워졌습니다. 또 모두 대졸 출신인 현장관리직은 고졸 출신인 기능직 노조보다 직급은 위지만 나이나 경험은 적을 수밖에 없죠. 그렇기 때문에 대졸관리자와 고졸 기능직 간의 갈등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현장관리를 맡기기 위해 대리로 발탁하게 됐죠. 운이 따른 거죠."
그러나 윤 대표가 운만으로 관리직이 된 것은 아니었다. '부장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를 했다. 매일 책과 씨름을 하면서 전문지식을 갈고 닦았다. 특히 원가산출분야에 집중했다. 이론에 현장경험을 접목해 남들이 쉽게 따라올 수 없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 또한 보고서에서도 대졸 직원보다 잘 쓴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이러한 노력이 그를 관리직으로 박탈하게 된 배경이었다.
그리고 회사의 기대(?)대로 관리직이 된 윤 대표는 금호타이어 공장을 한국 최고의 공장으로 만들었다. 많은 기업들이 윤 대표가 근무하는 공장으로 견학을 오기 시작했고, 청와대 초청을 받아 당시 김영삼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얘기가 박성용 회장 귀에 들어가 대리에서 차장으로 승진하면서 회장부속실로 옮기게 됐다.
회장부속실에서 근무하게 된 후에도 윤 대표는 특히 노사관계와 품질관리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현장 출신답게 기능직 직원에 대한 처우를 높이고, 품질향상을 위한 다양한 제도를 도입해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이러한 노력으로 6년 만에 대리에서 상무까지 승진하게 됐다.
◆평생 잊지 못할 고졸 출신 스트레스
고졸 출신 기능직에서 금호아시아나그룹 전략경영본부 전무까지 오르기까지 윤 대표가 받은 스트레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윤 대표는 "영산강에 흘린 눈물의 3분의 1은 내 눈물"이라고 표현했다.
"대졸자가 실수를 하면 그냥 실수지만, 고졸자가 실수를 하면 무식한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모든 간부가 고졸 출신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어요. 삼삼오오 모여 얘기할 때도 내가 고졸 출신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대화를 나누더군요. 능력을 배제한 학력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와 소외감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윤 대표에 대한 시기와 질투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윤 대표가 부장으로 승진한 후 회장 앞으로 전달된 투서만 48통에 달했다. 각종 음해 투서가 남발하자 윤 대표는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다. 하지만 박성용 회장이 "중역이 될 사람이니 그런 것에 구애받지 말고 추진하라"고 신뢰해줘서 버틸 수 있었다.
"내가 임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대졸 출신이 할 수 없는 분야에서 1등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언젠가 회사가 나를 발탁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구요. 이 때문에 신입 때부터 편견과 잘못된 제도를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당분간 '고졸 신화'로 불릴 만한 사람을 찾기 힘들 것이라고 봅니다. 요즘에는 잘못된 제도에 부딪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해봐야 안 되고 소용도 없다는 패배의식으로 도전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도 희망과 비전을
윤 대표는 최근의 고졸 채용에 대해 "한편으로는 좋지만,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움도 있다"며 "정부와 기업의 계속된 관심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고용노동부, 지식경제부, 기획재정부, 경총, 전경련, 상의 등 민관이 합동으로 학력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기 위한 위원회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고졸 출신이어도 능력이 있으면 높은 자리까지 오를 수 있는 기초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윤 대표가 내놓은 대안은 '4+2'제도. 고졸 출신 직원이 4년간 근무하면서 능력을 평가받으면 2년간 집중 교육을 시키고 이후에는 4년제 대졸 출신과 동등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제도화 하자는 것이다.
윤 대표는 "가장 중요한 것은 고졸 출신에게도 희망과 꿈과 비전을 줘야 한다는 것"이라며 "스스로 능력을 키우면 회사에서 발탁한다는 믿음을 직원들에게 주면 회사에게도 더 큰 이익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뼛속까지 금호인인 윤생진 대표
윤생진 선진D&C 대표의 휴대전화 번호는 019-2*9-1**9번이다. 스마트폰 가입자가 2000만명을 넘어섰지만 윤 대표는 아직도 2G폰을 사용하고 있다.
윤 대표는 그 이유에 대해 "스마트폰으로 바꾸면 전화번호를 010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번호에 3개의 9를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자신이 모신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을 잊지 않기 위해 전화번호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윤 대표의 설명이다.
윤 대표는 "나에게 종교는 금호고, 교주는 총수"라며 "어부의 아들로 있을 사람을 기능직 사원으로 뽑아줬고, 기능직 사원으로 끝날 수 있는 사람을 회장 비서실로 발탁해줬다. 금호 덕분에 현재의 내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첫째가 가족을 위해, 둘째 처가를 위해, 셋째 외가를 위해 그리고 넷째는 금호그룹을 위해라고 말할 정도로 금호아시아나그룹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
윤 대표는 "최근 금호아시아나그룹에 형제간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 나보다 더 마음 아프고 가슴이 찢어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