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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瑬(김류):(1571~1648)-(仁祖反正을 企劃主導했던 政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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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祖(인조)14年(1636)正月(정월)領議政(영의정)吳允謙(오윤겸)이 죽고,같은해 2月 滿州(만주)에서 일어난 後金(후금)의 들째 王(왕)太宗(태종)이 國號(국호)를 大淸(대청)이라 고쳐 朝鮮(조선)으로 하여금 自身(자신)을 皇帝(황제)로 받들라고 威脅(위협)하니,朝鮮政局(조선정국)은 明(명)나라와의 關係(관계)때문에 매우 難處(난처)해 졌고,北方邊境(북방변경)은 곧 後金(후금)의 攻擊(공격)이 있을것이라는 風聞(풍문)이 돌아 民心(민심)이 매우 凶凶(흉흉)하니,左議政(좌의정) 金瑬(김류)는 上四道體察使(상사도체찰사)가 되어 北方(북방)의 民心(민심)을 다스리다가 같은해 7月 비워 두었던 領議政(영의정)자리에 앉았다.金瑬(김류)는 壬辰亂初期(임진란초기)忠州(충주)彈琴臺(탄금대)防禦戰(방어전)에서 敗(패)해 申砬(신립)과 함께 自決(자결)해 버린 義州牧使(의주목사)金汝岉(김여물)의 아들이었으니,本貫(본관은 順川(순천),殉節(순절)한 아버지의 勳積(훈적)으로 科擧(과거)를 거치지 않고 官職(관직)에 나갔다가 宣祖(선조)29年 文科(문과)에 及第(급제)承文院(승문원)의 權知副正字(권지부정자)가 되었다.倭亂中(왜란중)에 金瑬(김류)는 召募使(소모사)金時獻(김시묵)從事官(종사관)이 되어 嶺.湖南地方(영,호남지방)에서 活躍(활약)하였다.그런 가운데 金瑬(김류) )는 아버지가 殉節(순절)한 彈琴臺(탄금대)아래에서 어쩌다가 遊興(유흥)을 즐긴일이 있었는데,이 일이 司憲府(사헌부)에 悲慘(비참)하게 世上(세상)을 마친 곳에서 妓生(기생)을 끼고 風樂(풍악)을 울리며 놀았다”는 트집이 잡혀 그만 罷職(파직)되고 말았다. 그러나 湖西地方(호남지방)의 儒生(유생)들이 金瑬(김류)를 擁護(옹호)하고,李恒福(이항복)李德馨(이덕형)等(등)賢臣(현신)들 積極(적극)으로 그를 辯護(변호)하고 나서니,그는 3年만에 藝文館檢閱(예문관검열)로 復職(복직)하였다.이리하여 將來(장래)가 囑望(촉망)되던 자리를 두루 歷任(역임),大司憲(대사헌)鄭仁弘(정인홍)이 새삼스레 지난일을 들쳐내 攻駁(공박)하자 그만 견뎌내질 못하고 다시 罷職(파직)되고 말았다.그러나 그의 人物(인물)됨을 아는 宣祖(선조)는 곧 金瑬(김류)를 登用(등용)했고,그가 全州判官(전주판관)이 되어 善政(선정)을 베푸니 百姓(백성)들은 頌德碑(송덕비)를 세워 그를 稱頌(칭송)하였다. 光海君(광해군)이 登極(등극)하고 새 王(왕)의 寵臣(총신)들이 仁穆大妃(인목대비)를 내 칠려는 廢妃論(폐비론)을 들고 나오자 金瑬(김류)는 크게 反撥(반발)官職(관직)을 박차고 鄕里(행리)에 隱居(은거)해 버리는 氣慨(기개)를 보였다.1623年 3月 金瑬(김류)는 마침내 擧義大將(거의대장)에 推戴(추대)되어,反正軍(반정군)의 首將(수장)으로 前(전)咸興判官(함흥판관)李貴(이귀)申立(신립)의 아들 申景禛신경진),北平使(북평사)李适(이괄)前(전)藝文館典籍(예문관전적)崔鳴吉(최명길)等(등)과 힘을 합해 擧事(거사)에 成功(성공)하였다.이에 金瑬(김류)는 兵曺參判(병조참판)으로 義禁府(의금부)의 判事(판사)를 兼(겸)해,軍事(군사)와 司法權(사법권)을 거머쥔 莫强(막강)한 자리에 올랐다가 곧 兵曺判書(병조판서)와 兩
館大提學(양관대제학)을 兼(겸)昇平府院君(승평부원군)에 封(봉)해졌다.이어‘李适(이괄)의 亂(란)·丁卯湖亂(정묘호란)을 겪으며 難局(난국)을 收拾(수습)하고,道體察使(도체찰사)가 되어 不安(불안)한 邊方(변방)에서 百姓(백성)들을 救出(구출)하는데 힘쓰니,西道(서도)의 百姓(백성)들이 한결같이 稱頌(칭송)하며 그를 기리는 頌德碑(송덕비)를 세웠다.仁祖(인조)7年金瑬(김류)는 左議政(좌의정)이 되었는데,仁祖(인조)가 아버지 定遠君(정원군)의 追崇問題(추숭문제)를 들먹이자 이를 强力(강력)히 反對(반대)하였다.화가 치민 仁祖(인조)는 그만 金瑬(김류)를 罷職(파직)시켰다가 뒤에 淸國(청국)과 關係(관계)가 惡化(악화)되어 事態(사태)가 어려워지자 金瑬(김류)에게 領議政(영의정)자리를 맡겨 難局(난국)을 打開(타개)하고자 했다.마침내 丙子胡亂(병자호란)을 겪으니,金瑬(김류)는 主和派(주화파)의 一員(일원)으로 淸國(청국)과의 和議(화의)를 成事(성사)시키는 役割(역할)을 했다가,斥和派(척화파)의 極烈(극렬)한 反擊(반격)으로 失脚(실각)하고 말았다.뒤에 仁祖(인조)의 特命(특명)으로 仁祖(인조)22年 4月 두 番(번)째 領議政(영의정)에 起用(기용)되고 寧國功臣1等(영국공신1등)祿勳(록훈)과 함께 順天府院君(순천부원군)에 封君(본군)되었다.그러나 이듬해 昭顯世子(소현세자)가 王(왕)의 誤解(오해)끝에 죽고,世子嬪(세자빈)姜氏(강씨)가 죽자 金瑬(김류)는 辭職(사직)하고 다시는 朝廷(조정)에 발을 디디지 않았다.仁祖(인조)26年 閏3月(윤3월)金瑬(김류)가 世上(세상)을 뜨니 享年(향년)78歲(78세),諡號(시호)는 文忠公(문정공)京畿道(경기도)安山市(안산시)廣德山(광덕산)에 墓所(묘소)에 세운 神道碑(신도비))는 左議政(좌의정)宋時烈(송시열)이 지어 겼비문)을 그의 10代孫(10대손)金相穆(김상목)이 쓰고 篆額(전액)을 새겼으며,傳(전)하는 金瑬(김류)의 影幀(영정)은 뒤에 仁祖(인조)의 廟庭(묘정)에 配享(배향)된 金瑬(김류)는,文章(문장)에 氣力(기력)이 넘치고 詩文(시문)도 매우 鍛鍊(단련)되어 北渚集(북저집)을 著書(저서)로 남겼다. 金瑬(김류)는 反正以後(반정이후)危機(위기)의 政局(정국)을 잡느라 며칠 사이에 鬚髥(수염)이 모두 빠져 버렸다. 이에 仁祖(인조)가 어느날 金瑬(김류)와 李貴(이귀)를 便殿(편전)에 불러,한 食口(식구)처럼 對(대)하고 世子(세자)와 大君(대군)들에게“너희들은 이 두分(분)보기를 아버지 보듯하라!”하였다.金瑬(김류)는 숨지기 直前(직전)떨리는 손으로 上疏(김류)를 써서 올렸는데,한결같이 나라와 임금을 爲(위)한 眞心(진심)어린 忠情(충정)이 담겨있었다.前(전)領議政(영의정)申欽(심흠)이 金瑬(김류)가 反正(반정)을 일으켰다는 말을 傳(전)해 듣고,“내가 平素(평소)에 보니 그의 눈빛이 달라 英雄(영웅)의 資質(자질)이 이었다”고 말했고,일찍이 成渾(성혼)은 金瑬(김류)의 嚴格(엄격)한 性格(성격)과 俊秀(준수)한 容貌(용모)를 보 큰 그릇이라”했다. 金瑬(김류)의 외아들 慶徵(경징)은 丙子胡亂(병자호란)때 아버지의 命(명)으로 江華(강화)섬을 지키는 江華檢察使(강화검찰사)였는데,防備(방비)를 消忽(소홀)히하여 섬은 무너지고 金瑬(김류)의 아내를 비롯한 眷屬(권속)들이 모두 自決(자결)하여 家門(가문)은 風紙博山(풍지박산)[風飛雹散(풍비박산)이 正當(정당)함]되었다.金慶徵(김경징)은 結局(결국)死藥(사약)을 받아 목숨을 整理(정리)하니,나이 49歲(49세).金瑬(김류)의 孫子(손자)震標(진표)는 文科(문과)에 壯元(장원),顯宗(현종)때 敦寧府都正(돈영부도정)이 되고,側室(측실)에서 난 國標(국표)武科(무과)에 올라 府使(부사)를 지냈다.
2012. 1. 25. 伍民轉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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