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사막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여라'
사막에 들어서기 전부터 적막은 어느새 익숙해진다.
바로 몇 시간 전 살아왔던 세계와 말없이 결별하고 이제껏 누려왔던 낯익은 오감은 버려야 하는 것이다.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사라졌다. 소리의 밀도가 희박한 그곳에서 인간의 음성은 지나치게 또렷해서
도리어 현실감으로 와닿지 않는다.
사막의 입구 베두윈 마을
소실점을 잃은 지평선, 비슷비슷한 바위와 모래 언덕의 무리들...
친숙한 원근법의 세계는 사라지고 경험해보지 못했던 공간으로 들어간다.
와디럼...붉은 사막이다.
베두인 마을까지는 포장도로가 깔려있다.
사막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해야 할 물과 식량을 베두인 마을에서 보충받고
짧게는 하루 길게는 3일간의 여행을 떠난다. 대부분 사막의 지리에 익숙한 이곳 베두인 사람들이
가이드를 한다. 그들은 이제 더이상 낙타를 타고 양이나 염소를 몰고 다니지 않는다.
대신 여행자들의 목자가 되어 그들을 몰고 사막의 이곳저곳을 떠다니는 새로운 유목민으로 살고 있다.
메마른 바위 골짜기 화면 아래 사람들을 보면 규모가 그리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끝없는 지평선, 거대한 모래언덕, 신기루와 오아시스를 상상한
사람들은 이곳 와디럼에 오면 다소 의아해 할 수 있다. 이 사막은 모래보다는 거대한 바위산과
황량한 들판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거대한 사구와 캐라반 등을 보기 힘들다.
그러나 한낮의 열기는 여느 사막과 같다.
사막 가운데 군데군데 쉴 수 있는 베두인 캠프가 있다. 바람이 한번 지나가면 사라져버리는
사막의 길들...베두인들은 조상 대대로 몇 백년간 다녀온 이 길을 메마른 자신의 손금을
보듯이 훤히 꿰뚫고 있다.
단지 그들이 갔던 길에는 낙타 대신 사륜 구동 차들이 작열하는 태양아래 서있을 뿐이다.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낮의 열기를 식히거나 물을 채워야 한다.
캠프에서 차을 마시거나 담소를 나누는 베두인...
이곳이 '붉은 사막'으로 블리된 이유는 당연히 모래가 붉은 색깔을 띄기 때문이다.
모래입자가 너무나 곱고 색깔도 선명하다.
사막을 다니다 보면 가끔 키작은 나무와 풀들을 볼 수 있다.
트랙킹하는 여행자들....걷다보면 땀이 날 겨를도 없이 말라버린다.
믿기지 않지만 사막에는 파리와 모기들이 떼지어 다닌다.
조그이라도 물기를 품은 동물이나 인간이 지나갈 때면 집요하고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손으로 휘젖고 얼굴을 가려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본능적인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에...
가장 큰 규모의 모래언덕 중 하나다. 보기에는 그리 커보이지 않지만 웬만해서는 올라가기 힘들만큼 높고 경사도 급하다.
하루 동안 볼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다. 아침에 출발해 오전에 두 ,세곳을 들른 후
가장 뜨거운 한 낮에는 차도 사람도 쉬어야 한다.
대분분 낡아서 언제 설지도 모르는 일제 짚들이 사막을 누빈다.
사막 가운데서 실제 고장으로 멈추기도 하는데 다른 차들이 구해줄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휴대폰도 무용지물인 이곳. 사막은 섬 아닌 섬이다.
붉은 사막을 배경으로 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한 장면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거의 반세기가 지난 일이다.
거장 데이비드 린이 메가폰을 잡고 피터 오툴, 알렉 기네스, 안소니 퀸, 오마 샤리프 등 너무나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한 이 영화는 지금도 세계적 명작의 반열에서 빠지지 않는다.
중학교 때 쯤인가 처음에 이 영화를 보았을 때 감동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서구 사회를 추종하던 맹목의 시대를 벗어난 지금...뒷맛이 그리 개운치는 않다.
아랍 독립의 영웅이 영국인이라니... 마치 일제 식민의 시대에 조선 독립을 위해
일본인이 선각자로 나섰다라는 것처럼 앞뒤가 맞지 않다고나 해야될까...
바위와 바위 사이가 구름다리 처럼 연결된 지형
이곳에서 각자 싸온 음식으로 간단히 점심을 떼운 후
한 두시간 정도 낮잠을 잔다.
한낮의 열기가 한 풀 꺽일 무렵 다시 여행은 시작된다.
미동도 않던 대기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면 야트마한 모래 주름에도 그림자가 맺히기 시작한다.
사막에서 가장 황홀한 순간이다.
낮이 밤에게 권좌를 물려주며 사막은 또 다른 세상으로 태어난다.
낮이 빛으로 포만했던 메마른 죽음의 세계였다면 밤은 어둠의 세례를 받은 생명의 세상이다.
사막의 일몰...
해가 진 후 한참 시간이 흘러도 서쪽 하늘에 낮의 잔영이 남아있다.
그만큼 사막엔 낮의 위세가 대단하다. 베두인의 저녁식사를 마친 후
차 한을 마시고 유목민의 노래를 듣는다.
우리를 인솔했던 무슬림 사내, 지단이 그들의 음악의 맞추어 춤을 춘다.
그리고 사막의 하늘엔 축복처럼 별빛이 쏟아지기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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