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藝.墨畵.草書

초서탐방

박송 입니다. 2010. 10. 20.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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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7(우왕 13)~1453(단종 1).
조선 전기의 문신.
명가필보 /황보인의 글씨, 〈명가필보〉에서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사겸(四兼)·춘경(春卿), 호는 지봉(芝峰). 아버지는 지중추원사 임(琳)이다.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진출한 뒤 1414년(태종 14) 친시문과에 급제했다. 1418년(세종 즉위) 좌정언이 되었으며 이후 좌헌납·사재감부정·장령·지승문원사·승정원동부대언·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432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음해 하경복(河敬復)·정흠지(鄭欽之)·정초(鄭招) 등과 함께 〈진서 陣書〉를 편찬했다. 이어 병조참판·병조판서·평안함길도도체찰사·의정부좌참찬 등을 역임하면서 세종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특히 1440년부터 10년간 함길도 국경지역에 보(堡)를 설치하고 요충지에 만호(萬戶)를 배치하는 등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북방의 개척 및 방어에 힘을 기울였다. 1447년 우의정이 된 뒤에도 양계(兩界)의 축성을 관장했다. 1451년(문종 1) 영의정부사가 되었다. 1452년 단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와 함께 왕을 보필하면서 의정부에 권력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재상권의 행사는 왕실세력뿐 아니라 지나친 권력 집중을 우려했던 집현전 출신 관료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그해 10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의정부 대신들을 제거할 때 김종서·정분(鄭奔)·조극관(趙克寬)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1746년(영조 22) 복관·신원되었다.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구룡포의 경남서원(慶南書院), 종성 행영사(行營祠) 등에 재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사정   ( 師正 )

 

 

* 鄭州市 書法家協會員

* 鄭州市 友誼賓館

* 鄭州市 黃河書畵 硏究會 常務 理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