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송 입니다. 2010. 9. 10. 22:01

 

 

우리는 자연주의 혹은 더 자세히 사실주의를 일컬어 프랑스 미술의 제 2차 혁명이라고 한다. 자연주의는 19세기의 사실주의를 이어받아 세기말의 인생의 현실적인 모습을 이상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려내기 시작한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에는 충격적인 변화가 아니지만, 이러한 시도는 전 시대의 미술의 성향을 뒤엎는 혁신적 요소가 된다. 낭만주의나 그 이전의 그림이 귀족중심의 장식적이고, 화려한 기념비적 초상 혹은 종교 미술이 주류였다면, 시대의 변화에 의해 그림제작의 목적이 바뀌면서 화가들의 시각은 다른 곳으로 돌려진다. 현실적인 서민 계층의 노동 행위나 평범한 풍경 혹은, 정물로 그 관심이 돌려 자연히 제작 목적이 변화되었고 그것은, 그림의 소재나 제재가 신화나 성서적 내용, 귀족의 초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그러한 변화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전시대 사람들은 풍경과 정물, 그리고 노동자 등의 모습이 그림의 소재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당시에는 하층민을 그려도 귀족중심의 그림이 성행할 때라서 초라하고 보 잘 것 없으며, 풍자적으로 그려졌다. 그러므로 사실주의 혹은 자연주의 갖는 변화는 프랑스 미술의 제 2차 혁명으로까지 표현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자연주의가 현실적인 소재나 주제에 대한 관심을 형상화하려고 노력하였고 그러한 과정에 많은 거장들의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작품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진지하게 남아있는 것은 단연 밀레의 수작들이라고 생각된다. 밀레의 그림이 왜 많은 사람들에게 같은 자연주의자들의 작품보다 오래도록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를 알아보려고 한다.

또한 밀레와는 시대적으로나 외관적인 기법에서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이는 박수근의 작품을 밀레와 내면적인 어떠한 유사점으로 묶어보려고 한다. 두 사람이 생존했던 시기와 장소의 차이, 문화적인 차이를 초월하는 무엇인가가 있었기에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어떠한 큰 일치점의 형성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 내면적인 추구의 내용과 형성될 수 있었던 원인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밀레와 자연주의

1800년대 초·중기의 프랑스 화단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대립하던 때이다. 1860년대에 앵그르와 들라크루아로 대변되는 미술의 흐름인 거대한 역사화의 전통은 그들과 함께 사라졌다. 이러한 시기에 1848년 밀레와 쿠르베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화가들이 노동자, 농민, 하층계급의 삶과 생활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전통에 도전하였다.
하지만 밀레는 쿠르베와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밀레는 종교적 경건함을 토대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고 꾸밈없이 묘사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는 곧 종교를 통한 자연 특히 인간의 노동을 표현했고, 그런 의미에서 밀레는 도미에나 쿠르베 같은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사실주의에 속하면서도 단순한 리얼리스트가 아니었다. 그의 농부는 지속적인 단순성이라고 표현해야 될 정도로 종교와 고전의 선에 따라 이상화 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리얼리즘을 손상시키는 것 또한 아니다. 사실주의 화가지만 쿠르베와 도미에가 부패한 정치와 사회부조리를 풍자하는 도시적 화풍(畵風)이었던 데 비해 밀레는 자연과 함께 살며 농민들의 소박한 생활을 찬양하는 농촌화가였다.

그러면 그는 왜 농촌의 농부들에게 시선을 둔 것일까. 그 이유를 짐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시대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당시의 사회는 큰 변화의 흐름을 거치고 있었다. 우선적으로 왕정에서 공화정(1848년 파리의 2월혁명은 당시 시민왕으로 일컬어진 루이 필립의 왕정이 무너지고 제2공화정으로 이행된 전환점이다. 그 4년 뒤에는 나폴레옹 3세에 의해 다시 제2제정이 시작되는 정치적 격동의 시대가 펼쳐진다.)이 세워져서 귀족 중심의 계급 사회가 무너지고, 신흥계급인 부르주아들이 등장한다. 정치적 상황이야 어찌됐든 자연주의 출현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것은 경제적인 변화에 있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19세기 중반까지 프랑스에서도 널리 퍼져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즉, 부르주아에 의해 눈부신 산업의 발전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19세기 후반의 산업 혁명은 이후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파리, 런던 , 비엔나 등 대도시의 발전과 더불어 도시인구의 증가, 과학 기술의 비약적 진보, 부르주아의 농민 노동자 계급의 대립심화, 세계 경제 장악을 위한 서구의 진출 등 급격한 사회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했다. 기계를 움직여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고, 증기 기관차가 등장하여 각지에 철도가 놓였다.(이 시대에는 철근으로 거대한 건물을 축조하는 현대적인 건축기술로 에펠탑과 호텔까지 갖춘 오르세역을 그 대표적인 건물로 남기고 있다.) 하지만 산업의 발달로 사회는 풍요로워졌지만 새로운 문제도 발생하기 시작하는데, 도시의 공장이 늘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들었다. 공장주들은 싸게 많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그런 사람들을 낮은 임금을 주고 일을 시켰으며, 이렇게 해서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빈부격차가 점점 커지게 된다. 당시에 많은 농민들의 이동이 있었지만 여전히 인구의 2/3가 농민이었고, 공장이 지금의 대형화 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영세한 수공업 공장이 많았다. 그래서 농민은 동시에 노동자이기도 했다. 농민들은 흙과 공장에서 동시에 일을 했기 때문에 농민과 노동자들은 사실상 구분되지 않았다. 또한 19세기 농민들은 자본에 의한 "자유거래"의 희생물에 불과하여 그들의 수입은 사실상 자본가에게 지불되었다.

화가는 그가 살아가는 사회가 갖는 문제에 불만의식을 갖게 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미술이라는 형상화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곧 예술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의 주관적인 시각을 통한 사회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밀레가 살아간 시대는 급격한 변화를 거치던 때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그는 그가 느낀 사회현실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1848년 2월혁명 시기의 몇몇의 화가들은 퐁텐느블로Fontaine- bleau숲 인근의 작은 마을 바르비종Barbizon에 모여 자연을 새롭게 해석하여 화폭에 옮겼다. 이 화가들은 역사적으로 회화의 배경으로만 등장했던 숲, 늪지, 잡목림, 나무 혹은 들판 등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었는데, 밀레도 그 당시 바르비종의 화가들처럼 이 곳에서 농부들과 농촌의 일상적인 모습을 묘사했다. 밀레는 인물들을 이전의 화가들처럼 하층계급의 천하거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려내지 않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묵묵하게 자기 일에 몰두하는 엄숙한 노동자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곳을 중심으로 한 밀레의 일생에 대해서는 로맹 롤랑의 전기를 비롯하여 신화화를 형성한 여러 가지 삽화가 전해지나 최근에는 여러 가지 비판도 제기 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농민화가 갖는 위대한 비젼을 훼손할 정도의 신화파괴는 아직도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그이상의 그의 삶에 대한 추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에피소드가 아니라 그의 시대에 대한 통찰이 우리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농부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제시한 밀레의 시대에 대한 통찰은 어떠한 것일까.
밀레는 우리 시대 최초의 그리고 거의 유일한 농민화가이다 물론 그가 최초로 농촌을 그린 사람은 더 더욱이 아니다. 우리는 브뤼겔이나, 르냉 또는 루벤스의 즐거운 축제라는 작품을 접할 수 있는데, 밀레가 그들과 다른 점은 농촌이 아니라 농민 그것도 뛰노는 농민이 아니라 일하는 농민 노동하는 인간을 그렸다는 점에서 그가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고수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화면 속의 그들은 결코 고통받는 농민이 아니라 검소하게 일하는 질박하고 단순한 생활의 농민인 것이다. 서정적, 낭만적, 신비스러운 농촌의 분위기도 아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미화되고 회고되는 고향이나 전원의 전경도 아니다. 그냥 일하는 현장이다. 이 현장의 표현에는 그의 리얼리즘이 갖는 영원성에 있다. 이러한 농민의 삶은 밀레의 독창적인 천재성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1848년 혁명이 창조한 인간상이다. 문학이나 미술에서 농민의 노동이 중요한 주제로 된 것은 1848년 이후이다. 그 혁명은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를 그 시대의 인간상으로 부각시켰다는데 의미가 있다. 혁명은 혁명자체의 우상화가 아니라 꾸밈없는 자연과 그 자연 속에서 노동하는 노동자의 존엄성을 찬양하여 인간적이고 대중적인 주제로 승화시켰다. 혁명가들에게 거리와 들판을 관찰하게 했고 자신을 비천한 사람들의 열망과 감정에 결부시켰다. 과거의 신과 귀족들에게 헌신했던 미술이 이젠 노동자, 농민에게 헌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밀레의 노동자들이 있는 공간은 시대의 요구에 의한 인간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려진 단순한 공간적인 의미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네 시골이 그렇게 변했듯이 지금 프랑스 어디에도 밀레의 시골은 존재하지 않는다. 밀레가 후반 20여 년을 보낸 바르비종은 당시에는 완전히 빈촌이었지만 지금은 파리 근교의 관광지이다. 프랑스가 낳은 천재적인 화가 밀레가 살던 곳이었기 때문에 더욱이 관광지로 발전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밀레의 그림 속의 농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실 그대로의 고유한 농촌일 뿐이며, 고유함이란 인간의 내면 곧, 정신에서 차지하는 제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곳이 더 이상 농촌이 아니어도 좋고 도시의 공장이어도 무관한 것이다. 밀레가 그린 풍경은 시골의 허름한 집에서 창문만 열면 보이는 광활한 대지나 숲이 아니다. 밀레의 그곳은 겸허하게 노동하는 순박한 인간의 영원한 장소인 것이다. 밀레는 이러한 노동의 공간과 노동자를 통해서 순수한 이상적 현실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밀레의 '만종'...

 

하루의 고된 일과를 마친 농부가 저녁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기도하는 전원적인 풍경이

 

담긴 정말 평화로운 그림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 그림은 그렇게 낭만적인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현재 전해지는 그림에는 농부 부부가 망태기를 발 밑에 놓고 기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망태

 

기를 쇠스랑과 씨감자를 담은 망태기로 모두들 알고있죠.

 

하지만 원래 그림은 그 부부의 발밑에 있는 망태기 속에는 씨감자가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애지중지하던 사랑하는 아기의 시체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고픈 시절에도 낙심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땅에 씨감자를 심으면서 겨울을 보냅

 

니다. 그리고 봄이 되면 풍성한 결실을 맺어 그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리라 생각했겠죠, 하지만

 

그들의 사랑하는 아기는 봄이 오기 전에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슬픔 속

 

에서 이 배고픔을 참지 못해 죽은 아기를 땅에 뭍기 전에 마지막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그린 그림

 

이 바로 '만종'이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보게된 밀레의 친구는 큰 충격과 우려는 나타내어 결국 고심끝에 아기대신 다른 그림

 

을 넣어주었으면 하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 충고를 맏아드린 밀레는 아기대신 감자를 대신

 

그려 넣게 되어 이토록 평화롭고 목가적인 풀경이 담긴 세계적인 명작으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우유를 휘젓는 여인] 1847년경부터 다루어온 소재인데, 이 파스텔 화는 70 년에 제작된 것이다. 농가의 생활 단면을 아무런 꾸밈 없이 극히 담담하면서도 솔직하게 붙잡고 있다. 이런 그림은 화가가 방안에 들어와 모델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스스럼 없는 시각을 느끼게 되는데, 밀레의 농민 화가로서의 뛰어난 점도 이런 소박성에 있음이 분명하다. 화면에 있어서 별다른 구도적 배려도 찾을 수 없다. 화면 가운데 큰 통을 앞에 두고 우유를 젓고 있는 시골 여인의 약간 거친 표정이 일하는 사람의 건강한 야성미(野性美)로 대치된다. 우유를 휘젓고 있는 막대기는 이상하게도 <어린 양치기>나 밭에서일하는 사람 들의 쟁기와 연결되는, 대지에서 솟아오른 듯한 상징적인 의미를 드러내주고 있다.

 

 


 

 

 

 

 

제목 / The walk to work

제작년도 / 1850-1851

재료 / Oil on canvas (유화)

크기 /  21 7/8 x 18 1/8 inch (세로x가로)

 

제작년도 / 1863.

기법/ Etching in brown ink on off white laid paper (에칭기법-판화기법의 하나)
크기 / 38.5 x 30.8 cm (15 3/16 x 12 1/8 in.) ...(이미지만의 크기)
크기 / 55 x 44 cm (21 5/8 x 17 5/16 in.)...(여백을 포함한 종이 전체 크기)
해석은 저도 딱히 올려드릴수가 없네요.
다른 글을 일부 올려봅니다. 밀레의 작품성향에 대해 참고하시면 좀 도움이 되실것 같아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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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 지방 그레빌 출생. 1833∼1836년 셰르부르에서 그림공부를 하다가 1837년 장학금을 얻어 파리로 진출하여 P.들라로슈의 제자가 되었다. 루브르미술관에서 푸생, 르냉, 샤르댕 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도미에의 작품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1848년 살롱에 출품한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루브르미술관 소장)은 그 후 농민생활을 그리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1849년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대지와 맺어져 있는 농민생활의 모습과 주변의 자연풍경을 그렸다. 이 시절에 T.루소, C.코로 등과 친교를 맺고, 빈곤과 싸우면서 진지한 태도로 농민생활에서 취재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여 독특한 시적(詩的)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가 감도는 작풍을 확립, 바르비종파(派)의 대표적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과는 달리 풍경보다는 오히려 농민생활을 더 많이 그렸다. 그런 가운데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종교적 정감이 감도는 서정성으로 친애감을 자아내고 오늘날까지 유럽 회화사상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만년에는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아 화가로서의 영광을 누렸으며, 1868년 프랑스의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주요작품 중 《씨뿌리는 사람》(1850) 《이삭줍기》(1857) 《걸음마》(1858) 《만종》(1859) 등은 발표 당시부터 주목을 끌었으며, 만년의 가작 《봄》에는 빛의 효과에 있어서 인상파를 예고하였다. 그 밖에 《우유 짜는 여인》 《저녁기도》 《실 잣는 여인》 《괭이 가진 남자》 《젊은 어머니와 아기》 등이 있고, 소묘와 판화 등의 작품도 많다



 

 

 

19세기 자연파 화가로 대표되는 밀레.
그의 작품은 유난히 가을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것들이 많은거 같습니다.
더군다나 농촌 생활에서 사랑을 찾고 농부들의 소박하고 솔직한 삶을 예술의 목적으로 삼아 평생을 흙의 화가로 살았다는 점이 더욱더 그런 느낌을 갖게 하는 이유로군요.

그래서 그의 작품들 중에 가을 분위기 나는 것들을 모아 봤네요~ ^^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을 하나 꼽아보시겠어요~?

아, 조건 하나를 붙입니다. 가을의 분위기와 가장 잘 맞는 그림으로 골라주세요~ ^^

 

 

 

 

 

 <ㅡ 밀레의 이삭줍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