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문학사

인도 아유타국 허왕후/가야로 시집 오다

박송 입니다. 2023. 6. 27. 13:35
1. 개요2. 기록3. 어디서 온 인물인가?
3.1. 아유타국설3.2. 불교윤색설
3.2.1.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아유타국3.2.2. '인도'에서 배를 타고 왔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이유3.2.3. 육로설도 어려운 이유3.2.4. 가야 철기와 인도와의 관계?3.2.5. '허황옥' 이라는 이름 그 자체3.2.6. 허황옥을 인도인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3.2.7. 역사상 실제 장거리 여행-항해 사례와 비교하여
3.3. 타밀나두
4. 한-인도 관계에서5. 대중매체에서

 

 

 

 

 

1. 개요

'허황후', '허왕후'라고도 불리며 한국 성씨 중 하나인 허씨의 시조이다.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나오지 않으며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만 등장하는 인물로 《삼국유사》에서는 고향 인도 아유타야라고 기록했다. 금관국 수로왕 혼인 아들 10명을 두었는데 2명에게 허씨 성을 주어 허씨 성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첫 두 아들은 김해 허씨가 되었고 여기서 더 갈라져 나머지 본관들이 생긴 식. 허씨 성을 물려받은 두 아들과 태자 거등왕을 제외한 아들 7명은 모두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경상남도 김해시 수로왕비릉이 현존하며 김해시는 이러한 이유로 인도의 아요디아 시와 자매 결연을 맺었다. 아요디아 시가 위치한 우타르프라데시 주에서도 김해시가 속한 경상남도에 자매 결연 및 교류 협력을 제안한 적이 있다. 다만 후술되어있듯 그 실체에 관해선 여러 설들이 제기된다.

2. 기록[편집]

건무(建武) 24년 무신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아뢰기를 “대왕이 강령하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으니 청컨대 신들의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항려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니 짐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일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라고 하고, 드디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경주(輕舟)를 이끌고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望山島)[1]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망산도는 서울 남쪽의 섬이고 승점은 연하(輦下)의 국(國)이다.으로 가게 하였다.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 색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매달고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은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곧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왔다. 신귀간은 이것을 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그것을 아뢰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찾아 보내어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열여섯살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황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황천(皇天)을 뵈었는데, 황천은 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라는 자는 하늘이 내려 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곧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것이 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갔다. 꿈을 깬 뒤에도 황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아름다운 모습으로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제 현숙한 공주가 스스로 왔으니 이 사람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이틀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니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재갈을 나란히 수레를 함께 탔으며, 중국의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되려 하였다. 왕후는 이에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을 주어 나누어 들어가게 하였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지급하는 것은 풍부하게 하고, 그들이 싣고 온 진귀한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고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장차 동쪽으로 가려 하였는데 파도신의 노여움에 막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말하였다.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명하니 곧 쉽게 건널 수 있어서 남쪽 해안에 정박하였다........ 탑은 모가 4면으로 5층이고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돌에 미세한 붉은 반점 색이 있고 그 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2]

3. 어디서 온 인물인가?[편집]

허황옥의 출신지에 대해 학계에 다양한 학설이 존재한다. 애초에 가야사와 관련된 기록이 극소수일 뿐더러 그나마도 부실하고 유적 발굴에만 의존하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 인도 지역으로 추정되는 아유타국에서 왔을 것이라는 설, 본래 토착민이거나 혹은 이주민이더라도 인도인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은 허황옥을 권위를 위해 불교적으로 윤색하고 그 과정에서 인도를 끌어와 신성성을 부여시킨 것이라는 설 등 여러 의견이 많았다. 다만 아유타국설은 근거가 많이 부족하여 기존 학계에선 주로 불교 윤색설을 신뢰하는 분위기였는데, 일부 DNA 연구가 진행되며 현재는 인도 북부 아유다도, 아유타국도 아닌 인도 남부 타밀나두에서 왔다는 설 역시 부상하고 있다.

3.1. 아유타국설

허황옥 관련 현전하는 실질적인 기록은 위에 인용한 삼국유사 가락국기뿐이다. 다른 기록은 전부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고 쓴 2차적인 것들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허황옥은 아유타국(阿踰陁國) 공주 출신이다. 정확한 위치는 논란이 있으나 허황옥 인도인설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인도 북부의 아요디아(Ayodhya)에 있었던 아요디아 왕국이나 후술된 인도 남부의 칸야쿠마리 지역 등을 아유타국이라고 추측하는 편이다.
 
아유타국의 위치[3]

태국 지역의 왕국이었던 아유타야(Ayutthaya/Ayudhya)를 거론하며 헷갈려하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이는 인도의 신화인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아유타(혹은 아요디야)지역명에 영향을 받았기에 이름만 비슷할 뿐[4] 시대적으로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난 나라다. 아유타야 왕국은 14세기 중반~18세기 중후반 까지 존속했다. 중세시대 중반기에 수코타이 왕국이 세워지기 전까지 타이족의 국가 자체가 존재하지 않거나 크메르 등의 타국의 주민으로 활동하였다.

2012년 방영된 KBS 스페셜 등 허황옥 아유타국설을 긍정적인 입장에서 다룬 대중매체에서는 가야에서 아유타국이 있었다고 추정되는 인도계 유리구슬이 나오고 가야의 철정 기술이 인도 남부와 유사한 점 등을 거론하기도 했다. 실제로 삼국유사에 적혀있듯 허황옥이 한국으로 가져와서 쌓은 파사석탑이 지금도 김해시의 수로왕비릉에 있는데, 조사 결과 이 은 한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재질이라고 한다.# 정확하겐 한반도에서는 나지 않는 엽랍석 성분의 사암으로,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 등에서 나는 재료라고 한다.

한반도의 철정 기술은 기원전 7-5세기에 무산의 범의구석 제5문화층에서 출토한 도끼, 기원전 4-3세기- 범의구석 제6문화층과 기원전 2세기경의 시중군 노남리, 중강군 토성리, 영변 세죽리 출토 철기들이 선철(銑鐵) 제품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기원전 5-4세기에는 철기를 부분적으로만 사용했고 기원전 3-2세기에 비로고 철기가 광범하게 보급되었다고 주장한다.[5] 기원전 3∼2세기 무렵 한반도의 세죽리유적(細竹里遺蹟)은 신석기·청동기·철기의 순서로 된 문화층이며 5기의 주거지와 함께 철제의 호미·괭이·낫·도끼·끌·손칼·살촉·명도전 등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3.2. 불교윤색설[편집]

학계에서는 허황옥의 출생지를 불교적으로 윤색하고 신성성을 부여한 것 아닐가 하는 설에 더 무게를 싣는다. 기록에 쓰여진 것이 다 사실이라고 보는 설은 인도학, 불교학 관련 논문 일부 등에서만 주장하는 소수설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3.2.1.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아유타국

'아유타(阿踰陀)'는 '아요디아(Ayodhya)'를 가리키는 듯한데, 문제는 '아요디아'라는 지명이 굽타 왕조 시대, 즉 4세기 이후에 성립한 듯 보인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사케타(Saketa)'라고 불렸고 5세기 법현의 <불국기>에서도 '사케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사기(沙祇)'라고만 나타난다. 7세기 현장의 <대당서역기> 단계가 되어서야 '아유타'라는 지명이 보인다. 고로 이 설이 맞는다면 당연히 1세기에 한반도에 왔다는 허황옥이 '저는 아유타국 출신입니다.'라고 소개할 리 없다.

3.2.2. '인도'에서 배를 타고 왔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이유

현실적으로 볼 때 당시 '아유타국'으로 후대에 불리게 되는 지역 사람이 해로를 통해 한반도까지 올 가능성이 희박하다. 물론 인간 탐험에 대한 욕구는 경이로워서 기원전에도 전혀 불가능이라고 할 수는 없다.[6] 그러나 항로 자체가 한 사람이 스쳐가듯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백 년에 걸쳐서 고생 끝에 만들어낸 경로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중국 한나라 대에 인도로 가는 가장 유력한 경로는 한나라 정부에 의해 보장되는 실크로드를 거친 육로였으며 중국과 인도의 교역은 주로 북중국과 북인도 사이의 육로로 이루어졌다. 한나라 대 불교가 수입된 것 또한 입국 승려들의 국적을 볼 때 실크로드를 거친 것으로 여겨지며 이 경향은 4세기 무렵까지 변화하지 않았다.

물론 해양 경로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김해에서 출토된 유리 유물 중 일부가 인도계로 추정되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문제는 이 김해 출토 유리기는 2~4세기 유물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허황옥 전설의 시대와 맞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가야 자체의 건국 기년이 끌어올려졌다는 의견이 다수이기에 넘어가더라도, 이 유리 유물의 출토 지역은 Arikamedu, 현재의 Kakkayanthope 인근 지역으로 추정된다(링크). 그런데 후대에 '아요디아'로 불린 지역은 갠지스 강의 지류에 붙어 있는 내륙... 아니, 말이 내륙이지 오늘날의 지리적 관점에서는 남인도보다 히말라야산맥에 더 가까운 지역이다. 지도 지리적으로도 이 지역은 내륙과 연결된 쿠샨 왕조의 지배를 받거나 지척에 있는 지역이었으며(지도) 동방 여행을 간다면, 특히 그 동네 고귀한 공주 출신이었다면 그나마 쿠샨 왕조와 한나라의 안전 보장이 되는 육로를 대신해 해로를 택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똑같은 인도 아니냐고 하겠지만, Kakkayanthope 지역은 전근대 인도 역사에서 유일하게 인도 전 지역 통일에 근접한 아소카 대왕도 직접적으로 복속시키지 못하는 등 정치적으로는 북인도와 완전히 다른 지역이었다(애초에 인도는 유럽 대륙만큼 넓다 아대륙이라고도 하는건 이런 이유로 봐도 좋다.). 실제로 한 대 해상 경로를 확인시켜주는 <한서> 지리지의 경로도 일남(日南, 베트남)-도원국(都元國, 말레이시아)-심리국(諶離國, 태국)-부감도로국(夫甘都盧國, 미얀마)를 거쳐 근해 항해를 하다가, 갑자기 '배로 2개월 가서 황지국(黃支國, 인도 타밀나두 칸치푸람)에 도착한다'는 서술이 나온다. 이 자체만으로 북인도는 경유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데다가, 앞서 언급한 쿠샨 왕조는 '귀상(貴霜)' 왕조로서 당대 중국에 꽤 유명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경유했다면 언급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는 북인도가 남인도 지역과 중국 사이의 유리구슬 교역에 끼어들지 못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7]

그러나, 현지인들은 우타르프라데시의 아요디야는 옛날에는 사케타라는 이름이었고 타밀나두의 칸야쿠마리가 옛날에는 아유타라고 불렸기에 허황옥은 타밀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위치적으로는 유리구술의 원산지와 정확히 일치하긴 하다.

가덕도에서 신석기시대 유럽유전자가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섬에 머문 것으로 해로를 따라온 것으로 추정된다. 해로로 왔다면 인도를 경유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근해로 오는 것은 어려움이 없다. 문제는 육지를 경유할 때 마찰이 생기는 경우다.

3.2.3. 육로설도 어려운 이유

허황옥이 육로로 한반도까지 왔다고 가정할 경우 경로는 다음과 같다. (허황옥 인도유래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지도들도 다 3가지 경로를 제시한다)

1. 티베트 경유
북인도 (북쪽으로) ➝ 히말라야 ➝ 티베트 ➝ 칭하이 호 일대 ➝ 서량 ➝ 중원 ➝ 요동 ➝ 한반도
2. 중앙아시아 우회
북인도 (서쪽으로) ➝ 파키스탄 ➝ 중앙아시아 ➝ 타클라마칸 사막  서량 ➝ 중원 ➝ 요동 ➝ 한반도
3. 미얀마 경유
북인도 (동쪽으로)➝ 아라칸 산맥 ➝ 미얀마지역 ➝ 남만  익주 ➝ 중원 ➝ 서해 ➝ 한반도 (위의 지도 참조)

문제는 1,2,3번 모두 힘들다는 것이다. 일단 허황옥 일행이 중원까지 도착하기가 힘들다. 이 경로들은 하나하나가 현재도 교통로가 미비하여 거쳐가기가 힘든 지역이며, 고대에는 더욱 더 거쳐가기가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당시에 이 경로를 인도인 귀족 집단이 무사히 통과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에 가깝다.

1번이 어려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티베트인들은 아직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았으며 강족의 한 갈래였다. 강족은 사나운 오랑캐로 이 당시 중국의 변경을 습격하며 살고 있었다.[8] 당연히 외부인이 자기 영역을 통과하는 것을 묵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한말 끊겼던 실크로드는 후한의 명장 반초의 활약으로 흉노를 격파하고 1세기 후반에 다시 이어지지만, 이것은 타클라마칸-서량의 통로를 확보한 것일 뿐이며, 그 남쪽에 있는 티베트 지역은 당시 강족의 부족국가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이런 곳을 인도인 귀족집단이 무사통과하기란 어림 없었을 것이다. 비단 강족이 아니더라도 히말라야는 평균 해발 5,000m 이상, 티베트는 평균 해발 4,000m에 이상인 고지대이며, 고산병 및 혹독한 기후로 물리적으로 통과하기가 어려운 지역이다. 17세기 말 아르메니아인 상인 호바네스가 티베트의 라싸에서 칭하이성[9] 시닝으로 이동하는데 1년이 걸렸다고 한다.[10][11] 도로가 없는 거친 산악지대를 약탈이나 습격에 대비해서 이동하려면 이동 속도가 무척 느릴 수 밖에 없다. 라싸와 시닝의 거리를 기준으로 인도에서 가야까지 이동 시간을 계산하면 허황옥은 청춘을 전부 다 산과 숲을 타고 넘는데 낭비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2번의 경우는 허황옥이 불교의 전파로를 타고 들어왔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가능성이 조금은 있는 경우다. 이 경우에는 티베트를 거치지 않고, 쿠샨 왕조의 행정력이 미치던 현재의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쪽으로 우회해서 역시 후한이 장악한 실크로드 동쪽을 거쳐 중원까지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당시에 지루가참 같은 인도승려가 낙양까지 와서 역경사업을 했으므로,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경로도 보통 위험한 것이 아니며, 그보다 수백년 후에 그 루트로 중국에서 인도로 갔던 현장도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고서야 겨우 인도에 닿았다. (그리고 그 모험담이 서유기로 각색된다.) 종교 전파의 사명을 띤 역경승이나 구법승이 목숨을 걸고 넘어갔던 루트를 인도인 귀족집단이 위험을 무릅스고 통과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3번은 1번만큼이나 가능성이 없다. 먼저 인도-미얀마 사이에는 험준한 아라칸 산맥이 있으며, 아라칸 산맥은 인도와 동남아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이곳이 얼마나 험준한 곳이냐면, 그보다 약 1800년 후인 서기 1944년에 이곳에서 벌어진 임팔 작전에서 작전에 참가한 일본군 반이 아사했을 정도로 인간이 통과하기 힘든 지역이다. 게다가 운좋게 미얀마 지역에 닿았다고 해도, 미얀마의 북쪽에 있는 남만에서 중원으로 들어가기가 상당히 어렵다 .제갈량의 남만 정벌에서 보듯이 문명과는 거리가 먼 미개종족의 영역이었으며, 자연환경도 야생동물과 병충해가 들끓는 열대 밀림지대라서 통과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설령 여기를 넘어 왔다고 해도, 후한의 치세는 2세기 중반부터는 급격히 약화되며 이 후부터는 중원을 통과하기도 어려워진다. 이렇게 약화된 결과 2세기 후반에는 황건적의 난 삼국시대(중국)가 펼쳐진다. 허황옥이 그나마 중원을 통과할 가능성이 있는 시기는 반초가 활약한 1세기 후반부터 당고의 화로 후한이 어지러워지기 직전까지인 2세기 중반까지 약 50여년 뿐이며, 그 이후에는 중국 대륙이 군벌로 갈려 매일을 전쟁으로 싸우던 시기라서, 중원을 통과하기 힘들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2번을 조금 변형해서 인도인 이주집단이 중국 쓰촨에 머물렀을 때, 허황옥이 태어났다는 설을 주장한다. 그 근거는 허황옥의 묘비에 새겨진 " 보주태후허씨릉"이라는 명문이다. 이를 근거로 인도 이주민들이 2번투트로 쓰촨까지 와서 허황옥을 보주(普州) (현재 쓰촨성 안웨현)에서 낳았다는 설을 주장하고 있고 환빠스러운 일부 언론에서도 비슷하게 주장하는데 #, 이것도 말이 안된다. 중국어 위키 백과#에 따르면 보주는 북주 (AD 575)시절 처음 설치되었다 수나라 때 폐지되고 다시 당나라 때 설치되고 이후 설치와 복원을 반복하다 명나라 때 최종 폐지된다. 허황옥이 살았던 시기는 보주가 처음 설치될 북주 시기보다도 400년 전인 후한 시기이므로 보주 탄생설도 허무맹랑한 설이다.

3.2.4. 가야 철기와 인도와의 관계?[

가야의 철정 제작 기술이 인도와 비슷하다는 주장은 근거조차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인도 고인돌에서 나왔다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인도는 유럽 대륙만큼 넓다. 게다가 영문 위키백과의 고인돌 목록(List of Dolmens) 문서에서는 '아유디아'(다시 말하지만 후대에 그렇게 불리게 되는 지역)가 속한 우타르 프라데시 주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고인돌이 제작되는 것은 인도에서도 철기시대의 일인데, 4대 문명에 속한 범인도 지역은 철기시대도 빨라서 한반도와는 500년 이상 차이가 난다. 이러한 무리한 추정과는 달리 한반도의 철제 유물 제작 기술은 대체로 전국시대 중국의 제철 기술이 고조선을 거쳐 한반도 남부로 확산된 것으로 여겨진다(이성주(2007), <청동기·철기시대 사회변동론>, 학연문화사).

또한 조금만 생각해보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는데, 허황옥과 인도 제철 기술의 전래(만일 그런 것이 존재하기는 했다면)가 관련이 있다면 허황옥은 여행 다니는 와중에 배에다가 광산 노동자와 제철 기술자를 싣고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고대 항해는 현대인의 생각보다 여러 모로 경이롭기는 하지만 그것은 성공 사례일 뿐, 전근대에 배 타고 멀리 가다가 식량 떨어져서 굶어죽는 배가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해 보면 항해에 아무짝에 쓸모없는 인원을 태우고 한반도까지 온다는 것은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다.

3.2.5. '허황옥' 이라는 이름 그 자체[편집]

허황옥이라는 이름을 보면 성은 허요, 이름이 황옥이다. 이것이 명백히 중국이나 한국에서 쓰이는 한자 이름에 기반하지, 인도인의 이름이라고는 보기가 어렵다. 마치 투란도트 오페라에서, 유럽인이 중국 공주라면서 실제 중국 이름과는 별 상관이 없는 '투란도트'를 중국 공주 이름이라고[12] 설정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 작성된 사료에는, 외국인이나 이민족의 이름들을 죄다 한자로 표기하여 적지만, 그 표기를 보아하더라도 한족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흉노족인 난제어부라 또는 혁련발발이나, 인도에서 온 승려인 구마라집, 돌궐인인 아사나묵철, 여진족인 완안아골타, 선비족인 독발수기능, 거란족인 야율아보기나 몽골족인 패아지근철목진이나 만주족인 애신각라노이합적같은 이름은 그 원어를 알지 못하더라도 한자 표기만 보더라도 명백히 한족이 아닌 민족의 이름을 표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유연처럼 한화(漢化)된 이름을 사용한 것은 있지만 이는 사서에서 이민족들이 중국 지역에 왕조를 세우고 한족식 이름을 채용했다는 기록이 명백하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고대 인도 아대륙권 인물의 이름 중 하나를 대라고 하면, 고타마 싯다르타를 들 수 있겠다. 물론 인도가 단일한 국가가 아니며 언어도 한두개가 아니라지만, 불경 등에 나오는 고대 '인도인'들의 이름들(아난다 데바닷타, 슈도다나, 라훌라 등)과, '허 황옥' 이라는 이름을 비교해보면, 과연 허황옥이 진짜 '인도 아대륙에 있다던 아유타국'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지조차 의심이다.[13] 게다가 허황옥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자기 성씨가 허요 이름이 황옥이라고 하니, 인도인이 한반도 남부 가야에 정착해 따로 개명하거나 누군가에게 받은 이름조차도 아니라는 것이다.

즉, 인도인의 이름이 허황옥이라는 것은 실제 인도인의 기록이 아니라, 단지 오페라 투란도트나 고대 아랍 설화 알라딘에서 실제 중국과는 별 상관 없는, 단지 이야기 저자들의 환상과 판타지 속의 중국을 만든 것처럼 허씨 가문이 자신의 시조를 꾸며내면서 그들의 환상 속의 인도 아유타국을 만든 것에 가깝다.

3.2.6. 허황옥을 인도인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편집]

허황옥의 출신지를 굳이 각색할 이유가 있냐는 것도 사실 좀만 생각해보면 간단한 문제다. 불교계에서 인도는 천축국 말 그대로 성지이며, 진흥왕 아소카 왕이 만들다 못 이룬 불상이 어쩌다 떠내려와서 신라에서 완성했다는 터무니없는 얘기를 하며 어떻게든 인도와 연결짓고 싶어 했을 정도로 선망의 대상이 되던 곳이다. 그뿐만 아니라 개국 전설은 후대에 신화화되기 가장 좋은 소재이다. 단군, 박혁거세, 고주몽, 해모수 등 고대 국가의 개국에는 객관적 사실과 무관하게 전설들이 많다. 가야 역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잡아서 구워 먹겠다."라는 노래로 대표되는 건국 신화가 있었다. 물론 현대인들은 곰이 쑥과 마늘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등 이런 신화를 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로 알아듣는 사람은 없다. 즉 신화적 기록은 사실과 허구가 섞인 거라고 이해해야 합리적이다. 고로 허황옥의 경우도 이런 건국 신화처럼 후대인들이 각색하여 신성한 권위를 부여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허황옥 일가가 가야에 미쳤던 영향력을 고려해야 되는 측면도 있는데, 좌지왕 시절 허황옥 일가는 왕의 결정을 거부하고 이를 관철시킬 만큼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에 질지왕이 왕후사를 짓고 허씨 가문과의 연대를 공고히 하는 등의 모습들도 보인다. 즉, 가야 왕실이 허황옥 집안을 높이기 위해 불교적 윤색을 할만한 영향력은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는 것. 신라에 병합된 이후 김유신 후손들이 가야 세력의 영향력을 높이는 과정에서 허황옥을 신격화시켰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또 나아가 왜 기록이 삼국유사에만 적힌 것인가에 대해서도 한번쯤 고려해볼 만하다. 삼국유사에 기록될 정도면 다른 역사서에도 충분히 이런 얘기들이 기록될 여지가 있었을 텐데 삼국사기 등에선 이런 얘기를 적지 않았다.[14]

애초에 시조 또는 추앙하고자 하는 인물의 격을 높이기 위해 억지로 외국을 엮은 전설, 전승은 흔하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 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트로이 인이라고 주장했으며, 아우구스투스 베르길리우스를 시켜 트로이 전쟁과 로마 건국을 엮는 이야기를 꾸며내도록 하였다. 그것이 바로 아이네이스다. 한편 트로이는 영국의 전설에도 이용되는데, 브리튼 섬의 초대 왕 '브루투스'가 트로이인의 후손이며, 그 브루투스 왕의 직계 후손이 바로 아서 왕 이라는 내용이다. 물론 아이네이스건, 아서 왕 전설이건 트로이인의 후손이 로마인, 영국인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허황옥 전설을 다르게 볼 이유가 없다.

3.2.7. 역사상 실제 장거리 여행-항해 사례와 비교하여

오스트로네시아인의 대양 확장, 박연 헨드릭 하멜의 표류 사례, 안다만니코바르 제도 노스 센티널 아일랜드에 출입하지 못하는 인도의 공무원의 사례, 고대 카르타고의 탐험가인 항해자 한노는 대양항해는 꿈도 못 꿀 시기에 연안항해를 통해 서아프리카 세네갈 일대까지 탐험한 기록 등과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오스트로네시아인의 항해는 개인의 항해가 아닌 인구 집단의 항해이며, 수백, 수천 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박연-헨드릭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는 나가사키에 상관(商館)을 유치하고 있었고, 조선도 그 존재를 당연히 알고 있었다. 카르타고와 세네갈의 경우에도, 인도와 한반도의 거리에 비해서는 아득한 차이가 날 정도로 짧은 거리에 있으며 그 사이를 가로막을 정치체가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같은 국가에 속하는 인도 공화국과 노스 센티널 아일랜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강원도 정선군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 유럽계 유골이 출토된 사례 # 까지 언급되었으나, 이 경우는 수천 년에 걸쳐서 소수 인구 집단이 이주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역사 시대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러한 비판은 억지에 가까운 것이 , 수천년에 걸쳐서 소수 인구 집단이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다하여 그 보다 후대인 역사시대에 허황옥의 무리가 이주하지 못하리란 증거는 되지 못하고 오히려 허황옥의 이주를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서기 1세기 후한의 탐험가인 감영이 지금의 캅카스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일대에 이르는 지역까지 탐험한 사례, 고대 그리스 피테아스가 그냥 탐험하려고 브리튼 제도까지 가본 사례, 중세 모로코의 탐험가인 이븐 바투타 메카 순례를 다녀오는 길에 멀리까지 가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해서 중국까지 다녀온 기록 등도 있다. 그러나 감영은 후한 정부가 절반 이상의 경로를 보장해 준 데다가 후한의 정부 관료로서 안식국(파르티아)에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데다가 그 사이의 경로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고, 이 시기에 로마 기록에서 '시니카'가 확인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로마가 중국과 교역하면서 그에 대한 지식을 얻기는 한 것으로 보인다. 피테아스는 이미 그 시대에 적어도 스페인까지는 그리스-로마인의 교역망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거리에 대한 비교적 구체적인 측정 자료를 남겨 경로의 재구성이 가능했다. 이븐 바투타의 경우 메카까지는 말할 필요도 없고 홍해와 인도, 인도와 중국 사이에 정식으로 국가 대 국가로 교섭하는 정치체들 사이에 계절풍을 이용한 정기 무역이 이미 발달해 있었으며, 자신의 여행기에서 그 풍습에 대한 사실적 기록을 남겨 오늘날까지 연구에 대해 이용되고 있다. 반면 허황옥과 관련된 기록에서는 그런 항해 내용을 증언해 주는 기록이 전혀 없다.

그래서 억지로 <한서> 지리지 등의 기록을 끼워 맞춰 없는 기록을 땜질해 보려하는 것이지만, 당시 남해 항로에 대해서는 한의 정부에서 점 단위[15] 조직을 겨우 파악하고 있는 것이 전부였고, 그 사이 있다는 나라들도 한나라와 '아유타국(앞에서 말했듯 이름은 둘째 치고 대충 그 전신이 있기는 했다면)' 사이에 정식 국교가 없었다. 무엇보다 앞의 여행가들은 당대에 기록을 남겨 당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은 반면, 허황옥에 대한 기록은 1000년이나 지나서 기록된 가락국기로 추적하는 것이 고작이다.

3.3. 타밀나두

DNA 연구가 진행되며 부상하고 있는 가설로, 허황옥이 인도 남부 타밀나두의 칸야쿠마리(카니아쿠마리) 지역에서 왔다는 설이다.

21세기 들어 서울대 연구팀이 가야 대성동 고분군에 가야 왕족으로 추정되는 유골들의 유전자 검사를 진행한 결과 7개 중 6개의 미토콘드리아가 남인도 타밀족의 DNA와 일치한다는 것이 확인되어, 어느정도 신빙성 있는 가설이 되었다. 미토콘드리아 유전물질은 모계를 통해 유전되는데 서울대학교 유전학 연구소 서정선 교수와 한림대학교 의대 김종일 교수가 김해 예안리 고분 유골의 염기서열을 분석한 결과 57호 순장자의 염기서열이 인도 남방계 타밀 쪽 유전자와 가깝다는 것.[16] 즉, 이 무덤에 안치된 사람의 조상이 곧 허황옥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인도 남방 타밀계 사람과 비슷한 유전자를 가졌을 개연성은 높다는 말이다. #, 관련 KBS 영상.

미토콘드리아는 수백 세대격인 수만년간 변이가 일어나지 않고 모계쪽에서만 전달되기에 Y 염색체와 함께 인류의 이동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고 한다. 이를 통해 가야 왕실과 남방계가 무언가 연관성이 있다는 것 자체는 사실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유전학적 분석은, 고고학적/역사학적 분석과는 다른 것이며, 유전적인 분석이 고고학, 역사학을 뒷받침해주는 자료는 될 수 있지만, 다른 정황 증거없이 오로지 유전적인 증거로만 확신을 할 순 없는 일이다. 또 구글 검색 결과 확인 가능한 2004년 기사에 따르면 연구팀은 "유골 4구 가운데 1구에서 이같은 결과를 얻었으며, 나머지 유골 3구를 더 연구하면 정확한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추후 연구 결과에 대해선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 외 현재 인도에서 칸야쿠마리라고 불리는 지역은 옛날에 아요디아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삼국유사에서 인도 지명을 음차한 것으로 보이는 단어인 아요다와 가장 비슷하다. 아요타는 비슷하긴 해도 완전히 똑같진 않았다. 사실 이렇게 보면 인도는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고, 북부 우타프라데시와 남부 타밀은 민족 자체가 다른만큼 이것 또한 다른 의미로 논쟁거리가 된다. 여담으로 김해시는 이미 타밀나두의 칸야쿠마리가 아닌 우타르프라데시의 아유다 시와 자매결연을 맺었는데, 갑자기 이걸 끊을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17]

 타밀어와 한국어의 유사성[18] 설명할 자료가 없었는데 이와 연관지을 수 있다는 것이 해외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다만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허황옥이 타밀어를 들고 와서 한국어와 타밀어가 유사해진 것이 아니라, 허황옥의 존재 자체가 고대에 한국과 타밀 지역이 교류했다는 증거며, 타밀어와 한국어의 유사성도 뿌리가 같아서가 아닌, 교류를 통해 전해진 것으로 보이기에 문헌과 고고학 자료가 하나도 없는 한국과 타밀 지역의 교류에 대한 증거 중 하나로써 사용될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이다. 타밀어와 한국어의 유사성도 대부분 우연의 일치나 억지로 만든 것에 가까워보이는데,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틀렸다고 볼 수 없는 것이, 타밀어와 유사한 한국어들 중 언어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언제부터 쓰였는지 모호한 단어들이 존재하고, 정설은 아니더라도 가설의 근거로써 허황옥이 타밀에서 왔다는 것이 인용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19]

그러나 이것도 아직은 가설 단계이며, 가야 지역과 타밀 지역이 서로 교류했다거나 하는 식의 고고학적 자료가 확실히 뒷받침되지 못해 좀 더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4. 한-인도 관계에서

이처럼 학계에선 정설로 확실히 공인받지 못한 설이나, 허황옥이 자주 인도 출신이라고 언론매체에 소개되는 이유는 불교계의 영향력도 있고,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한-인도 친선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각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허왕후가 인도서 왔다고?

현재도 가락중앙종친회는 매년 아요디아를 방문해 제사를 지내고 있고,[20] 심지어 인도에는 지금도 아요디아 왕족이 존재한다. 아요디아 라자의 궁전에 가면 허황옥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라자도 허황옥이 자기 집안 사람이 분명할 거라고 믿는다고 한다. 이 라자 가문은 1999년 국민의정부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의 초청으로 방한하여 김해 김씨 종친회와 공동으로 수로왕비릉을 참배한 적도 있었으며,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김수로왕과 허황옥 왕후의 만남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를 개최할 때도 마찬가지로 구경을 왔었다.

인도에서는[21] 한국-인도 관계의 상징적 인물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실제 2010년대 들어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박근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당시 한국과의 인연을 강조하며 허황옥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이를 주제로 한 소설 <비단공주>가 인도 현지에서 출간되기도 했고, 뮤지컬 제작 논의도 있었으나 현재는 감감무소식인 듯. 전 인도 대사 인터뷰.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의 인도 국빈 방문 당시에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인도 공주가 한국에 와서 수로왕과 혼인해 일가를 이뤘고, 그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한국에는 아주 많다고 한다. 놀랍지 않은가?"라는 류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인도 외교부 산하 단체인 인도문화교류위원회(Indian Council for cultural Relations, ICCR)에서도 허황옥을 주제로 2015년 7월 14~15일 간 컨퍼런스를 연 적이 있다. 사무총장 사티시 메타(Shri Satish C. Mehta) 사무총장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인도와 관련이 있는 분[22] 천만 명 가까이 있다는 것은 양국 관계 발전에 큰 힘이 될 것이며, 이번 컨퍼런스는 인도가 한국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2015년 9월에 김해시 부산광역시는 허황옥이 배를 타고 인도에서 김해로 오는 과정을 재현한 허왕후 신행길 축제를 공동으로 개최하였다. 앞으로도 매년 개최하여 특색 있는 전통 관광상품으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2018년 11월 2일(현지시간)에 영국의 BBC는 김정숙 여사의 인도 방문을 앞두고 허황옥 관련 이야기를 보도했다.#


2019년 7월 30일에 한국과 인도에서 허황옥을 주제로 한 기념우표가 공동발행되기도 했다.

2019년 10월 5일 김해에서는 허황옥 콘텐츠 공모전을 개최했다. 이 또한 주한인도대사가 참관하고 주한인도대사상 경우 인도대사가 직접 수여했다.

2019년 한 유튜브 영상을 보면 심지어 아요디아 지방과 관련 없는 타밀어 한국어 비교 영상에서도 인도인들이 허황옥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타밀어를 쓰는 지역은 인도의 남쪽 지방이다. 실제로 해당 영상에서는 힌디어 화자인 인도인 유저가 "난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는 댓글도 남긴 것을 볼 수 있다.) 인도 국내에 허황옥 신화가 생각보다 제법 퍼져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왕비가 된 인도 공주"…BBC, 허왕후 이야기 집중 조명

김정숙 여사 인도 방문 앞두고 소개…6일 허왕후 기념공원 착공식 (뉴델리=연합뉴스) 김영현 특파원 =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의 인도 방문을 앞두고 영국 공영 BBC방송이 4일(현지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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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중매체에서

  • 2010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김수로에서 배우 서지혜[23]가 연기했는데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기록된 내용에 따라 인도에서 온 여자로 표현했다.


[1] 부산광역시 강서구 송정동에 위치한 섬. 행정구역상 부산이지만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 시가지와 붙어있다. 근처에 대한제국 순종때 허왕후 전설을 전하기 위해 만든 유주비각이 있다. 다만 이 망산도가 기록상 망산도가 맞는지에 대해선 학계에서도 견해가 분분한 편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과거의 지형과 지금의 지형은 특히 바다와 인접한 섬의 경우 다를 확률이 높기 때문.[2] 일연 스님이 직접 현장답사를 가 파사석탑을 관찰하고 쓴 글. 실제 현대 조사에서도 재질이 한반도에서는 나지 않는 엽랍석 성분의 사암으로 밝혀졌다. 다만 인도라고만 확정할 순 없고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 등에서도 나는 재료라고 한다.[3] 참고로 위 지도는 인도 혈통의 중국인 허황옥이 대륙을 건너 다시 해로를 통해 한반도로 건너온 것이라는 설을 주장한다. 허황옥을 일컫는 보주태후에서 보주가 뭘까 고심하다 이게 중국 사천땅의 옛 지명이고 이곳에서 허씨 성을 가진 인물이 마침 비슷한 시기 반란사건을 일으켰다 진압당한 사실에 착안해 추측성 주장을 한 것. 물론 딱히 명확한 물증은 없다.[4] 인도 신화와 태국의 신화는 상당히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거나 내용이 거의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는 라마야나 서사를 태국식으로 해석한 '라마끼안'이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태국인들의 정체성과 사고에 큰 영향을 주는 신화이기도 하다. 태국인들 절대다수가 불교를 믿으며 사실상 불교국가나 다름없기 때문에 가능한 점.[5] (『조선고고학개요』).[6] 허황옥 태어나기 500년도 더 전에 존재했던 페니키아인들은 인류 최초로 아프리카 일주에 성공했으며 홍해, 인도양, 대서양, 발트해를 다녀갔다고 여겨지고 있고 오스트로네시아족은 중국 남부, 대만을 거쳐 동남아에 정착하고 일부는 오늘날 아프리카 대륙의 마다가스카르 섬에 정착하고 또 태평양을 떠돌며 이스터 남쪽의 뉴질랜드, 동쪽의 이스터 섬까지 다다라 정착하기도 하였다.[7] 그래서 허황옥 인도설이 사실이라고 보는 주장 중에는 허황옥이 인도 북부가 아닌 남부 타밀나두 지역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후술 내용 참고.[8] 허황옥의 동시대인 삼국지에 등장하는 서량 출신 대군벌들 (동탁, 마등, 마초, 한수)가 엄청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강족을 막는 한족의 방어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9] 당시에는 간쑤성[10] 약 2,000km의 거리이며, 현재는 칭짱철도가 놓여 있어서 이틀이면 간다. 하지만 이 철로를 놓느라고 중국 측은 수백명의 건설노동자가 순직할 정도로 악전고투를 했다.[11] 대충 간단하게 계산해도 직선거리 상 하루에 평균 5km를 간 셈이다.[12] 오히려 투란도트라는 이름은 이란어 이름인데 몽골인이나 거란, 여진족이 중국 땅을 지배한 적은 있어도 이란계가 중국을 지배한 적은 없다. 그나마 후조의 석씨 왕조를 배출한 갈족 정도가 이란계(정확히는 소그드인)로 추정되긴 하지만 이쪽은 이란계가 아니라 토하라계 튀르크계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어서 딱히 어느 쪽 혈통이라고 단정짓기 힘든 상황이다.[13] 한역된 불교 인명을 보면 난디미트라-경우慶友, 나가르주나-용수龍樹, 마하나마-대명大名 등 의역된 이름도 많은 데다 황옥이라는 이름도 매우 흔한 한자라서 그 자체는 의역으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단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불교의 중국전래 이전에 왔으니 그럴 확률이 희박해서 문제. 인터넷에서는 본명이 슈리라트나라는 출처불명인 이야기도 퍼져 있다.[14] 물론 '이러한 전설이 있다.' 정도는 쓸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조차 안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승려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도 한 유학자라 불교를 배척한 점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해볼 수 있다. 또한 김부식이 적은 삼국사기는, 주로 한국 본토에서 기록된 글과 전승되는 이야기들을 옮겨 적은 삼국유사와 다르게, 중국 기록을 많이 참고하여 옮겨 적은 부분이 많다. 또 승려 일연 입장에서도 불교와 관련된 허황옥 얘기는 꼭 쓰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김부식은 괴력난신을 배격하였기에 기실, 허황옥 얘기만이 아니고 많은 건국신화를 배격했다.[15] 말이 점 단위이지 지금 기준으로도 국가 단위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점들이었다.[16] 다만 후술된 영상의 김종일 교수 설명에 따르면, 남방계 유전자가 꼭 인도 지역으로만 한정되는 개념은 아닌듯도 하다. M7 남방계는 아프리카에서 나와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인도 남부와 남아시아 등지까지 훑는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 정확하겐 이 M7과 인도 타밀 지역 사람 샘플 하나, 이렇게 둘 다가 당시 가야 고분 유전자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언급한다.[17] 관련해서 절충론 비슷하게, 허황옥은 사실 타밀어 사용 지역인 인도 남부 지역에서 왔되, 일연이 좀 더 불교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불교의 기원지와 가까운, 힌디어 냄새가 나는 인도 북부 지역의 지명을 사용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데, 아직은 말 그대로 뇌피셜 수준이라서 확신할 근거는 없다.[18] 다만 항목에도 있듯 유사언어학스런 분위기도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19] 단, 이 유사성 중 가장 유명한 '엄마'나 '아빠'를 똑같이 부르는건 우연의 일치인 것으로 보인다.[20] 다만 김해 김씨 문중내에서도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논개처럼 전설이 있다 정도로만 언급하고 기념해도 될 것을, 확실하지도 않은 설에 너무 오버한다는 것이다.[21] 실제로 힌두 민족주의 세력에서 잘 이용해 먹고 있다. 어떻게 보면 고대 인도의 해외 진출의 하나로 볼 수도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22] 김해 김씨·김해 허씨, 인천 이씨 등 ‘가락종친회’ 회원.[23] 서지혜는 2005년에 방영된 MBC 드라마 신돈에서 원나라에서 고려로 시집온 노국대장공주 역을 맡은 바 있었기 때문에 김수로에 출연하면서 외국인 출신 왕비를 2번이나 연기하게 되었다.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락국으로 시집온 허황옥과 김수로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락국에 시집 온 허황옥은 김해 허씨의 시조이니 런던의 피카딜리 
스트리트에서 레스트 스퀘어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도중에 차이나타운이 
보이는데런던 동쪽 그리니치와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처럼 허씨(許氏식당이 있습니다. 


 

런던 그리니치 마을과 노르웨이 베르겐의 허씨식당은 한국인은 아니고... 중국 장가계의 
원가계 천하제일교에 있는 조선족 허씨 상회 처럼 중국인들 인데..... 천하제일교 
허씨상회에서 꿀차를 대접받으며 들으니 남편은 김해허씨고 부인은 밀양박씨라 합니다.


 
 


김해허씨(金海許氏의 유래는... AD 42년 김수로(金首露왕이 가야국을 건국했다는데
1281년경에 편찬된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
의 공주 허황옥 (許黃玉은 상제의 명으로 종자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와서는 서기 48년 (신라 유리왕 25에 한반도 김해 남쪽 해안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김수로 왕이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배와 말을 가지고 망산도(望山島) 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乘岾)으로 가도록 하니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 색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매달고 북쪽을 향해 오니 
유천간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자 곧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왔다.” 

 
 

신귀간은 이것을 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그것을 아뢰었다김수로 왕이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등을 찾아 보내어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바로 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살 입니다본국에 
있을때 금년 5월에 부왕이 어젯밤 꿈에 함께 황천(皇天)을 뵈었는데가락국의
왕 수로(首露)라는 자는 하늘이 내려 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갔다꿈을 깬 뒤에도 황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라
라고 하였습니다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아름다운 모습으로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허황옥이 왕후가 되어 낳은 아들 중에 장남인 태자(거등왕)는 김해김씨가 되었고 두 아들 (혹은 
차남)을 특별히 허씨로 삼았으니 김해 허씨로 여기서 양천허씨등이 갈라져 나갔으며
나머지 일곱 왕자는 출가했다는데...... 죽은 후에는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합니다.

 
 


공주 허황옥 일행이 상륙한 곳이 김해 주포촌 이고... 비단 바지를 벗어 산령에게 
제사지낸 곳이 능현이며 배에 붉은기를 꽂고 들어온 곳을 기출변이라 
불렀는데, 2천년간 낙동강의 홍수 때 떠내려온 토사로 지금은 육지가 되었습니다.

고대에 금관가야 가락국의 수도 김해시는 인도의 아요디아시와 자매결연을 맺었고 아요디아시
가 위치한 우타르프라데시주도 경상남도에 자매결연 및 교류, 협력을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아유타야는 원래 드라비다어를 사용하는 타밀족으로 고대 인더스 문명을 세웠던 드라비다족
이 침입자 아리안족에게 밀려났으니 지금은 남인도에 거주하는데.... 인도에서 사용된 
고대 언어인 드라비다어 에서는 '가야혹은 '가라라는 발음이 '물고기를 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수만리 떨어진 인도에서 어찌 김해사정을 알것이며 안다한들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에 인도에서 한반도 까지 올수 있었으랴또 아유타(阿踰陀)' 는 '아요디아(Ayodhya)' 
를 가리키는 듯 한데이 지명은 4세기 이후 굽타왕조시대에 성립한 듯 보이니 그 전에는
'사케타(Saketa)' 라고 불렸고 7세기 현장의 대당서역기 에 비로소 '아유타지명이 보입니다.


김해는 고대에 철()을 중국과 일본에 수출하던 국제무역항으로 평안도의 한사군 낙랑과 황해도
의 대방을 통해 중국 상인들이 드나들었으며... 또 김해는 중국인들이 왜국으로 가던 길목이니
사천성 보주의 상인들이 양자강을 따라 내려와 하류인 양주에서 교역했다면 국제 무역항
이던 양자강 하류 양주에서는 바다 건너 왕비를 찾는다는 김해의 사정을 들을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김해시의 허황후릉에는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 (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
許氏陵)” 이라는 비가 있으니왕비의 이름 황옥(黃玉은 중국 여자의 이름이며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하는데..... 중국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노라면 
사천성 安岳縣(안악현보주(普州) 를 말하니 지금도 허씨 집성촌” 이 있다고 합니다.


현대 지명으로는 사천성 자양시 안악현 서운향(瑞雲鄕인데 안악현은 우리의 시(,에 
해당되는데 인구는 160만명이고 중경(重慶)과 성도(成都)의 중간에 위치하니보주(普州)
는 안악의 고칭(古稱)이고 허씨 집성촌이 오늘날까지 존속하며 보주 땅의 암벽에 "후한 
초에 허씨의 딸 황옥이 용모가 아름답고 지혜가 남들보다 나았다라는 글귀가 있다고도 합니다.


 
 

인도계 이주민 중에 중국에서 고위직에 오른 인물 중에는 당시 한나라의 황제 선제(재위 
BC74년 ~ BC48의 왕비가 된 공애황후 허씨(평군)가 있었다고 하는데.... 선제의 
장인 평은후 허광한도 쓰촨성 출신으로 허황옥 역시 그의 일족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습니다.


대장군 곽광은 BC 74년 유하를 폐하고 선제를 황제로 옹립하니 아내 허씨(평군)는 공애황후가
되어 아들 원제를 낳았으며.... 두 번째 출산중에 곽광의 부인은 순우연을 매수해 허씨를 
독살하고 자기 딸인 곽성군을 황후로 만들었지만 세월이 흘러 허씨의 아들 원제는 황제가 됩니다.


 

원제는 왕씨를 황후로 맞았는데  이 효원 황후의 친정 조카가 왕망으로 친정 오빠 
왕봉을 극진하게 병구완한 왕망을 신임해 황제에게 추천하니왕망은 항문랑을 
거쳐 대사마가 되고 딸(효평황후 왕씨) 을 평제에게 시집보내  국구가 되었습니다.


평제가 자신의 외가 위씨들이 박살난 것에 불만을 가지자 왕망은 평제를 독살하고 2
유영을 황제로 올렸다가 서기 8년에 황제에 오르니 신(나라인데 안으로 몇가지
개혁을 하면서 밖으로는 흉노를 홀대하니...... 서기 9년에 삭방으로 쳐들어오자 
왕망은 30만의 병력을 이끌고 흉노를 공격했으나 대군을 동원하고도 소득이 없습니다.


 


왕망은 고구려의 군사들을 징발해 호(胡 흉노)를 치려했으니 가고자 하지 않는지라 강제로 다그쳐
파견하니 변방에서 달아나 도둑이된지라 요서 대윤 '전담을 보내 공격하였는데 살해 당하였다
주군현에서 '구려후 추에게 허물을 돌리자 '엄우가 진언하길 '맥인이 법을 범한 것이니죄는
'()' 에게 있지 않습니다위로함이 마땅합니다큰 죄를 쒸우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간곡한 엄우의 진언을 '왕망이 듣지 않고 공격하라 하니 '가 '구려후 추를 꾀어 
만나길 약속해 ' '가 이르자 베고 머리를 '장안으로 보내었다. '이 기뻐하며 천하에 
포고하길 '고구려의 이름을 '하구려(下句麗)' 로 바꾸어 명하게 하였다이때부터 후국이
되었다. '' '광무제팔년 '고구려왕이 사신을 파견해 조공하자 다시 왕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王莽>初發<高句麗>兵以伐<>, 不欲行彊迫遣之皆亡出塞爲寇盜. <遼西> 大尹 <田譚>遣擊之
爲所殺州郡縣歸咎于<句麗侯>< > <嚴尤>奏言: [<>人犯法罪不起于且宜安慰今猥被之大罪
恐其遂反.] <>不聽<>擊之. <>誘期<句麗侯>< >至而斬之傳送其首詣<長安>. <>大悅
布告天下 更名<高句麗><下句麗>. 當此時爲侯國 <><光武帝>八年 <高句麗王>遣使朝貢 始見稱王


하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죽은 사람은 왕이 아닌 “고구려 장수 연비 라고 나옵니다십년전 백두산
과 용정 가는길에 집안현에 들러 광개토대왕비와 왕릉 및 장군총을 보고 환도산성에 올랐다가 
국내성 유적을 지나 집안박물관에 들렀더니 고구려를 하구려” 로 표현한게 눈에 거슬리던게 떠오릅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서기 14년에는 秋八月王命鳥校勘 伊·摩離領兵二萬西伐梁貊滅其國,
進兵襲取漢髙句麗縣 縣屬玄免校勘郡. “가을 8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군대를 내어 보내 한()의 현도군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습격하여 차지하였다.”라고 나옵니다.

왕망과 같은 시대에 허씨 황후의 아들인 원제의 후궁에 왕소군(王昭君)이 있었으니 
흉노와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서 
연지가 되었고 ... 선우가 죽으니 호한야의 아들인 복주류약제 선우의 처가 
되는데 서시 양귀비 초선과 함께 고 대 중국 4대 미녀들 중 1명으로 손꼽힙니다.

 

왕소군은 오랑캐 땅에서 죽게되는데 그녀는 "소군원이라는 시에서 노래하니 그 시구 중
"봄은 왔으나 봄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 라는 구절은 흉노 땅의 봄을 
맞이했음에도 고향 땅의 봄같지 않아 더욱 사무치게 고향이 그립다는 그녀의 애절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는데 묘는 소군묘(昭君墓혹은 청총(靑塚이라고 부르며 혹은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지은 시 '소군원(昭君怨왕소군의 원망)' 이라는 시라고도 합니다.



漢道初全盛 한나라 비로소 번성하여
朝廷足武臣 조정에는 무신들 넘쳐나건만
何須薄命妾 어찌 하필 박명한 아녀자인고
辛苦遠和親 괴로워라 멀고도 먼 화친 길
掩涕辭丹鳳 눈물을 삼키며 궁궐을 작별하고
銜悲向白龍 슬픔을 머금은 채 흉노 땅으로 향하네
單于浪驚喜 선우는 놀라 그저 기뻐하지만
無復舊時容 예전의 낯빛을 다시 찾을 길은 없구나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에는 꽃이 없으니
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自然衣帶緩 자연히 허리띠가 헐렁해지는데
非是爲腰身 이는 가는 허리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네

 

원제때 허씨들은 출세가도를 달리는데 또 다른 이야기로 김병모 교수는 후한서에 
나오는 기사에(사천성땅에서 서기 47년에 남만인들이 봉기했는데
지도자의 이름이 허성(許聖)으로 이 반란 사건의 여파로 다음해인 서기 48
에, 사천성 안악현 보주에서 허황옥 일행이 강을 따라 내려왔을 것으로 본답니다


그래도 김해 황후릉 납릉정문에 조각된 쌍어문(雙魚文과 신도시 이수에 태양문등 인도
적인 요소가 있다는 점에서 아유타의 왕족으로 기원전 1세기에 쿠산족의 침입등 어떤 
이유로 인도 아유타국에서 중국으로 이주해서는.... 양자강 중류 보주(普州에 정착한 
왕족의 후손이 무역상 편으로 처녀를 공주 ”라고 이름 붙여 시집 보냈던 것이 아닐까요?

 
 


오라버니 장유화상(長遊和尙) 만 남겨두고 공주를 호송해 온 상인들은 배 가득 쌀
과 철 및 베를 싣고 제 나라로 돌아 갔다지 않습니까그러니 김해 구산동의 
허황후릉에는 한국에는 나지않는 돌(빈 배의 흘수선을 맟춘 용도?) 파사 석탑
과 함께 비석이 보주태후(普州太后)” 라고 씌여 있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봅니다.


십수년 전에 신라 왕족 경주김씨는 흉노족이다” 라는 책 을 읽고는 반신반의 했었는 데
그 이후에 KBS 방송에서 "태종무열왕비 및 문무대왕의 비문과 중국측 자료 에다가 
대당고김씨 부인묘명(大唐故金氏 夫人墓銘을 근거로 한무제로 부터 김씨성과 
투후(秺侯에 봉해진 "흉노 왕자 김일제 (金日磾의 후손" 이라고 특집을 방송 했습니다


 

조상의 이름은 일제(김일제)이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시었다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발탁해 시중에 임명하고 투정후에 봉하시니,
7대에 걸쳐 벼슬하였고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이로 말미암아 경조군(서안)에 정착하게 되고 
()나라에 난리가 나자 피난하게 되었다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살게 되었다." 


흉노의 묵특 선우는 서기 202년에 한고조 유방이 급히 진군하느라 보병인 후진과 격리되어 버린 
10만 대군을 평성 백등산에서 포위하고는 공격하려다가 뇌물을 받고는 퇴로를 열어 주었는
이후 한나라는 흉노에게 매년 비단과 무명쌀에다가 공주 까지 바쳐가며 평화를 유지합니다.

 

태종무열왕비와 문무왕비를 세우던 당시의 신라인들은 흉노 투후(김일제)의 후손 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비에 새겼으나.... 고려말부터 조선조에서 유학이 국교로 자리잡고 성현을 
낳은 중국을 우르러며 오랑캐를 멸시하면서 조선에서는 이런 사실은 잊혀졌던 것이라 여겨집니다?


몇 년전에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는 중국 서안의 비림(碑林)” 박물관에 있는, 864년 당나라
에서 사망한 신라 여성의 묘지명 인.... “대당 고김씨 부인 묘명” 에서 
그 조상을 흉노 출신 투후 김일제 金日磾 라고 쓰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한나라 곽거병이 흉노를 공격해 휴도왕(休屠王)을 포로로 잡자 왕자 김일제(金日磾가 투항
하는데흉노족은 예로 부터 황금을 좋아해서 금인(金人)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한무제는 금(), 다시말해 김씨(金氏성을 하사하니 중국 최초로 김씨가 된 인물입니다.


후일 "흉노의 후예 김씨들은 AD 8년에 한나라 황제 유영에게서 선양을 받아 신()나라
를 세운 외척 왕망(王莽)의 이종사촌으로 함께 영화를 누리다가.... 유수등이 반란
을 일으켜 서기 23년에 후한(後漢동한을 세우자 지은 죄가 있으니 후환이 
두려워 도주하는데 그중에 신라로 간 사람이 김알지 이고 김해로 간 사람이 수로왕 이라?


 
 


그런데 흉노족의 후예 "김수로는 중국 신()나라에서 허씨들과 교유관계가 있었으니 후한
의 핍박을 피해 동쪽으로 망명해 김해에서 자리를 잡자.... 허씨 중에 일부가 보주(普州
로 피한 것을 알고는 중국 보주에 연락해서 김해로 데려와 배필로 맞았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김씨의 선조인 흉노 김일제는 금인(金人)” 으로 하늘에 제사 지내고 경주 김씨 김알지
는 계림의 소나무에 걸린 금괘 에서 나왔으며 김수로는 하늘에서 내려온
금합에서 나왔으니 모두 ()” 과 관련이 있으므로 금씨 (김씨 金氏가 된 것이라?


 

가락국 김수로도 하늘 에서 내려왔다는데 김알지와 김수로가 "금괘나 금합에서 나왔다는
것은.... 사람들이 저 두 사람의 고향이나 아비어미등 그출생의 근본을 모른다 는 뜻
이니곧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하여 김수로 그도 흉노족 이라 주장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석탈해는 멀리 한반도 남쪽에서 수로가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같은 흉노족의 동료 인 석탈해 가 수로의 지위를 뺏으러 바다를 건너 왔다가 실패 
했던 것이니이에 석탈해 는 울산으로 달아나 지방 호족과 결탁한후경주로 
올라가 세력을 과시하여 신라 왕족 박씨의 사위가 되어서는 결국에는 박씨들
로 부터 신라 왕위를 빼앗아 차지 하는 것과 별반 다를바 없는 이야기가 아닌지요?

 
 


흉노족 이란 곧오랑캐” 이니 후일 유학(儒學)이 자리 잡은 고려시대 이후에 우리 조상
들은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명나라 가 오랑캐인 여진족들이 세운 청나라에 
망하자 이에 "우리가 중국이라고 생각하여....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오랑캐 란 중국인이 이웃의 남의 민족을 칭하는 말 이니... 북적(北狄), 서융(西戎), 
남만(南蠻), 동이(東夷가 곧 그들인데..... 우리 민족이라고도 하는 동이(東夷는 
원래는 한반도가 아닌 화북과 산동 반도 및 강소성등 중국의 동부에 거주하였다고 합니다.


 
 


동이족 치우(蚩尤가 중화 민족인 황제(黃帝에게 패배하니 대부분은 화하족에 동화되어 버리고 
그 일부가 중국 동부 지방에서 도망쳐서 만주와 한반도로 밀려나게 된 것이 아니던가요?

또 화하족인 하나라의 동쪽 산동성과 화북성에 있던 상(은) 나라를 동이족이라는데, 저 상나라가
하나라를 이어 중국이 되니 동이족이 중국 영토에 한족으로 동화되어버리니... 그 후로 동이
(東夷)란 말은 중국 동부가 아닌 동쪽인 만주와 한반도로 그 범위가 변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중국 송나라를 멸망시킨 만주 북부 흑룡강의 여진족 금나라도 그 시조 아골타의 6대조 가 평안도에서 
이주한 경주 김씨 김함보라 후일 여진족들이 나라를 세웠을 때 성씨인 김(으로 금(나라 라.... 
*** 수정 : 금의 색깔은 백(白)인데 완안부 부족의 색깔 또한 백이다. 이로부터 국호를 대금이라 했다


()나라가 몽골족에게 망하고 명나라 시대에 여진족의 다른 이름 만주족이 세우는 후금 청(나라는
(씨의 만주어 아이신줘러” 는 한자로 "애신각라 (愛新覺羅)" 라 이를 황족의 성씨 로 삼았습니다.
*** 수정 : 아이신줘러에서 아이신(Aisin, 愛新)은 무쿤(穆昆: 가족 공동체) 이요, 줘러(Gioro, 覺羅) 는 
하라(哈拉: 씨족 공동체, 성씨) 이며 또는 장백산 신화에서 퍼쿤이 낳은 아이에게 지어주었다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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