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 혈통인/노르만족이 세운/잉글랜드 노르만 왕조
바이킹 혈통인/노르만족이 세운/잉글랜드 노르만 왕조

잉글랜드는 이 노르이 정복하기 전에는 앵글로 색슨족이 들어가서 왕조를 만들었고 그리고 중간에 바이킹인 크누트에게 정복을 당했다가 에드워드가 다시 왕위를 찾습니다,
이 앵글로 색슨 왕조
자세한 이야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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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에드워드가 망명하고 있던 노르망디 공국의 노르만족이 영국을 침략하여 왕위를 빼앗고 노르만왕조를 여는 것이고 이 노르만왕조는 224년만에 끝이나고 그 뒤를 프랑스 앙주백작 부계혈동인 앙주왕조 혹은 플랜태저넷왕조가 열리는 것입니다,
앙주왕조
플랜태저넷왕조
자세한 이야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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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는 부계혈동만으로 보면 노르만왕조까지는 바이킹의 후예라고 할 수가 있고, 그 이후로는 모계혈통으로만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노르만왕조의 전왕조인 앵글로 색슨 왕조도 게르만족의 일부이기에 잉글랜드 왕조는 게르만족이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르망디 공국
개요


노르망디 공국은 바이킹인 노르만족의 지도자 롤로(846/854?,911~932?)가 서프랑크의 샤를 3세(879,893~929)로부터 받은 땅을 기점으로 911년에 세워진 공국이었습니다,
이후 1066년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윌리엄1세,1028,1066~1087)가 도버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 침략을 개시하여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잉글랜드 왕 해럴드 2세에게 크게 승리하여 잉글랜드를 점령함에 따라 잉글랜드 왕이 되면서 노르만왕조가 되었고 잉글랜드 국왕의 영지가 되었습니다.
헤이스팅스 전투
자세한 이야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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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배경은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의 분쟁의 원인이 되며 백년전쟁이 발발하였고 프랑스가 전쟁에 승리하여 프랑스 왕국에 귀속되면서 소멸하였습니다,
노르망디 공국
역대군주

1.롤로 911년-927년(루앙 백작)
2.기욤 1세 927년-942년
3.리샤르 1세 942년-996년
4.리샤르 2세 996년-1027년(공작으로 승작)
5.리샤르 3세 1027년-1028년
6.로베르 1세 1028년-1035년
7.기욤 2세 1035년-1087년(윌리엄 1세,잉글랜드 국왕으로 등극)
8.로베르 2세 1087년-1106년
(기욤 2세의 장남.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하며 앙리 1세와 왕위계승전쟁을 벌였다가 패배하며 노르망디 공작까지 박탈된다.)
9,앙리 1세 1106년-1135년

노르망디 공국과 프랑크 왕국(카롤링거,위그카페왕조)과의 연결
노르망디 공국
수립 배경
9세기 전반 프랑스는 노르만인의 침입과 약탈에 의하여 845년에 파리가 점령되고 각지의 주요 도시가 습격을 받았는데, 동프랑크와 북프랑스는 덴마크인, 남프랑스와 에스파냐 그리고 지중해는 노르웨이인의 습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당시 분열되어 있던 프랑스의 여러 왕은 단결해서 이들과 싸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의 내전에 이러한 노르만인을 용병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들의 침입을 한층 용이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9세기 후반 이후 노르만인의 수장(首長)들은 프랑크의 봉토를 받아서 가신(家臣)으로 되는 경향이 강하였는데, 노르만의 노략질에 대한 회유책으로, 프랑스 왕 샤를 3세가 911년 노르만의 추장(酋長) 롤로에게 센강 하류 지대를 양여하여 노르망디 공(公)에 봉(封)하자, 다수의 노르만인이 이 지방으로 이주하여 영지를 확장하고, 특수지역을 만들어 실질적인 독립국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앵글로색슨왕조 노르만왕조 프랑크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제국의 분열- 동,서 ,중프랑크

동프랑크와 서프랑크의 왕위 다툼

노르망디 공국과 프랑크(카롤링거왕조와 위그카페왕조) 왕국
이 노르망디 공국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동프랑크는 서프랑크의 왕위를 차지하려고 치열한 싸움을 하였습니다, 그결과 서프랑크 왕위가 샤를 3세(879,893~929)에서 동프랑크 출신인 외드에게 넘어갔다가 로베르 1세와 그의 사위를 거쳐 다시 서프랑크의 루이 4세(920,936~954)에게로 돌아갑니다,
이 루이 4세는 독일출신 첫 동프랑크 왕인 하인리히 1세(873,876?,919~936)의 사위였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서프랑크는 루이 4세이후 서프랑크는 루이 5세로 카롤링거왕조가 끝이나고 카페왕조가 시작하게 됩니다,
987년 49살 위그 카페(938,987~996)가 카페 왕조를 세웠을 때부터는 서 프랑크 왕국 대신 프랑스로 불리기 시작했지만 프랑크라는 명칭은 당분간 유지되었는데, 1190년까지 카페 왕조의 군주들은 스스로를 프랑크인의 왕이라 칭했다가 1190년 1월 1일부로 25살 필리프2세(1165,1179~1223)는 렉스 프랑코룸이라는 단어를 폐지하고 로이 드 프랑스(Roi de France)라 칭하였다고 합니다,
게르만족
게르만족(독일어: Germanen, 영어: Germanic peoples)은 그리스 로마 문화권 저자들에게 최초로 언급된 북유럽 민족 집단들의 한 분류인데, 이들에게서 발생하고 분화되었으며, 게르만 민족성을 정의하는 데 사용되는 몇 가지 기준 중의 하나인 게르만어파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게르만족(Germani)과 독일인(Deutsche) 단어 사용간의 혼동이 있으며, 게르만족은 그리스 로마 문화권 집단들에 관찰된 폭 넓은 인종 분류 (예시: 인디언, 아시아인 등)이며, 독일인은 현대적 의미의 독일인 및 독일어를 포함한 오늘날 독일 지역 거주민을 의미합니다, 영어권에서는 이러한 혼동을 피하기 위해 German과 구분되게 전자에는 Germanic peoples 및 Germani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게르만족 분류
게르만족은 북게르만족, 동게르만족,서게르만족으로 분류를 할 수가 있습니다,
북게르만족이란
(노르드인)

북게르만족
북게르만어를 사용하는 게르만 민족을 일컫는 것으로 대표적인 북게르만족으로는 바이킹으로 잘 알려진 노르드인들이 있습니다, 이 노르드인들이 프랑스 북부에 정착하여 형성된 민족이 바로 노르만족입니다,

노르만족의 지배지역
동게르만족이란

오늘날의 중동유럽 지역에 살던 게르만족들입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고향이며, 기원전 600년에서 기원전 300년 사이에 발트 해를 건너와 오데르 강과 비스와 강 사이 영역에 정착했습니다, 북게르만족이나 서게르만족만큼 민족성을 잘 보존하지 못하고 서게르만족 및 로마 라틴족에게 동화 흡수되었으며, 이들이 사용한 언어를 동게르만어라고 한다.
동게르만족에 해당하는 게르만족은 부르군트족, 고트족(동고트족, 서고트족),반달족등입니다, 이들이 바로 게르만족 이동의 주축입니다,



게르만족 이동
서게르만족이란

앵글로 색슨 지역, 알라마니 지역, 롬바르드 지역
게르만어파 계열의 서게르만어군을 사용하는 게르만족 일파입니다, 주로 유럽 중부나 서부에 분포하고 있으며 게르만족 대이동 때 이동한 게르만족 대다수들이 서게르만족에 속합니다,
서게르만족이 해당하는 게르만족은 앵글로색슨인인 앵글족,색슨족(작센족), 프랑크족, 알라마니족, 수에비족, 랑고바르드족(롬바르족)등입니다
게르만족이
세운 왕국

4세기 후반, 동방에서 갑자기 훈족이 나타나서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연맹왕국 비슷하게 형성하면서 게르만족 중 가장 잘나가던 동고트족을 휙 밀어버리자 이들이 서진하면서 주변의 여타 게르만족들은 도미노처럼 쓰러뜨리듯이 밀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일어난 것이 이른바 게르만족의 대이동인데 이로 인해 로마의 영토와 유럽, 아프리카 각지에 게르만족들이 각자의 왕국을 세우게 됩니다, 이 중 대표적인 왕국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반달족 - 반달 왕국
고트족 - 동고트 왕국·서고트 왕국
부르군트족 - 부르군트 왕국
프랑크족 - 프랑크 왕국
앵글로색슨족 – 칠왕국
게르만족
현존하는 국가
옛날에는 수많은 게르만 부족들이 있었지만, 후대에 프랑크 왕국 등 통일 국가가 생기면서 경계가 모호해지거나, 먼 타지에 왕국을 따로 차린 경우 현지인들과 동화되어 사라졌거나 혹은 현지인들에게 멸망하거나, 점령지에서 철수한 나라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바이킹들이 오늘날의 캐나다의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지역을 침공하여 세운 식민지인 빈란드(래브라도 반도에 있던 바이킹들의 거주지 또는 전초기지였던 랑스 오 메도스가 현지 원주민들에게 함락당하면서, 바이킹계 이주민들이 모두 북아메리카 본토를 떠나 그린란드로 철수해버렸다)와 노르망디 공국의 잉글랜드 침공 직전에 잉글랜드를 공격한 노르웨이가 대표적입니다,

노르드인의 활동영역
그래도 프랑크 왕국과 독일 왕국에선 부족 공국으로 명맥을 이어왔으며, 언어나 지명 측면에서 현재까지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는 게르만 부족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노르드인 - 북게르만어군 언어권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앵글로색슨족 - 영어권
영국(잉글랜드, 저지대 스코틀랜드)
프리시 - 프리지아어권
네덜란드(프리슬란트), 독일(동프리슬란트)
작센 - 저지 독일어권
독일(니더작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프랑크족 - 프랑크어군 언어권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플란데런), 독일(라인란트, 프랑켄)
알레만니 - 알레만어권
스위스, 독일(바덴뷔르템베르크, 슈바벤)
바이에른 - 오스트로바이에른어권
오스트리아, 독일(바이에른)
노르만 왕조
(윌리엄 1세부터
윌리엄 2세
헨리1세,
스티븐까지)

38살에 등극한 윌리엄 1세(1028,1066~1087)는 노르만에서 데려온 기사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행정적·군사적 체제를 갖추고 잉글랜드를 지배했습니다, 이 윌리엄 1세의 장남인 로베르 2세(1051~1134)는 쿠데타를 시도하였다가 실패를 하여 상속권을 박탈당하여 노르망디 공국을 받았고 윌리엄1세가 59살에 죽자 그의 차남인 윌리엄2세가 왕위를 잇습니다,
31살에 등극한 윌리엄2세(1056,1087~1100)는 형 로베르 2세가 소유한 노르망디 지방을 7년간의 전쟁(1089~1096)을 거쳐 굴복시킨후 1100년 동생 헨리 1세와 떠난 사냥에서 44살로 갑자기 죽어, 그 뒤를 동생 헨리 1세가 잇게됩니다,
32살에 등극한 헨리1세(1068,1100~1135)는 첫째아들이 배사고로 죽고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5세(1086,1111~1125)에게 시집을 간 딸 마틸다(1102,1114~1125,1167)만 있었는데 이 하인리히 5세 황제가 39살에 죽자 영국으로 데려와서 프랑스 앙주백작과 결혼을 시켜서 여기서 아들을 낳게 됩니다,
이 아들이 외할버지인 헨리1세(1068,1100~1135)가 죽자 그 왕위를 찬탈한 헨리1세의 조카 스티븐(1096,1135~1154)이 죽고 왕위를 되찾는 헨리 2세가 됩니다, 이렇게 하여 헨리 2세(1133,1154~1189)부터는 부계혈통이 프랑스 앙주백작이기에 앙주왕조 혹은 아버지이름을 딴 플랜태저넷왕조라고 합니다,

헨리1세의 딸 마틸다가 아들 헨리2세를 낳고 2년 후 헨리1세가 67살에 죽자 이번에는 헨리1세의 누나가 프랑스 귀족과의 사이에서 낳은 즉 헨리 1세의 조카이며 헨리2세에게는 사촌형인 스티븐이 1135년 39살에 왕위를 찬탈하게 됩니다,
이 스티븐은 정통성이 부족하여 헨리 2세의 어머니 45살 마틸다와 14살 헨리 2세가 합세하여 1147년 용병들로 부대를 구성하여 잉글랜드로 침공하지만 이 1차 침공은 준비부족으로 실패를 합니다,
그러나 6년후인 1153년 1월 헨리 2세는 다시 잉글랜드를 침략하여 스티븐이 헨리2세에게 차기 왕위계승자의 권리를 준다는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그 후 결국 스티븐에게는 정실 소생 자녀가 없었기에 58살 스티븐이 죽은 1154년에 21살 헨리 2세가 왕위를 잇게됩니다,
노르망디 공국
Duchie de Normaundie Ducatus Normannia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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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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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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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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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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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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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립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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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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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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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프랑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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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men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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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ðmann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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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man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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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atus Normanni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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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hie de Normaun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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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hé de Norman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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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hy of Norman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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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역사[편집]
2.1. 건국[편집]
롤로는 훗날 잉글랜드를 정복한 '정복왕' 윌리엄 1세의 고조할아버지였다. 롤로가 처음 임명될 때는 백작이었지만 증손자였던 리샤르 2세때 선정과 공적을 인정받아 공작으로 승격되었다. 롤로 이후 기욤 1세-리샤르 1세-리샤르 2세-리샤르 3세를 거쳐 로베르 1세가 즉위했다.[5] 로베르 1세는 원래 아들로는 기욤 하나뿐이었는데 하필 기욤의 어머니 에를르바가 로베르 1세와 정식 결혼하여 기욤을 낳은 게 아니었고, 그녀의 출신도 변변치 않았다. 그래서 기욤은 훗날 사생아왕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을 얻게 되었다.
2.2. 기욤 2세의 잉글랜드 정복[편집]
이후 대대로 노르만 왕조의 국왕이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을 겸하게 되었는데, 원래 노르망디가 프랑스 왕국 권역이었고, 잉글랜드 왕은 잉글랜드 내에서는 왕으로, 프랑스 왕의 신하가 아니었지만, 노르망디 공작으로서는 그 통치 권한이 프랑스 왕국 권역하의 프랑스 왕의 봉신 자격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노르만 왕조 이후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갈등 요소가 되었다. 프랑스 왕은 외국 왕에게 넘어간 프랑스 왕국 내 공작령을 수복하려고 했고, 잉글랜드에서는 합법적 권한으로 노르망디 통치를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노르망디 공국 및 결혼으로 얻은 아키텐 공국, 그리고 혼인으로 맺어진 프랑스 왕가 혈통을 기반으로 프랑스의 왕위까지 노렸다. 이는 결국 훗날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된 백년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
2.3. 노르망디 공국의 프랑스 귀속과 그 이후[편집]
하지만 당시 노르망디 공국의 영토 중 채널 제도(저지 섬, 건지 섬 등)는 지금도 노르망디 공 윌리엄 1세의 후손인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재위하고 있는 왕실의 속령이기 때문에 영토가 엄청나게 줄어들었을 뿐 노르망디 공국은 채널 제도에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는 농담도 있다. 물론 채널 제도의 건지, 저지 자치정부는 공식적으로는 군주인 엘리자베스 2세를 여왕이라 칭하지만 아직도 채널 제도의 현지 주민들은 엘리자베스 2세를 노르망디 공(Duke of Normandy)[8]이라 부른다고 한다. 게다가 엘리자베스 2세가 1967년 노르망디 본토를 방문했을 때도 프랑스 국적인 노르망디 본토의 현지 주민들이 공작 만세!(Vive la Duchesse!)라고 외치며 환호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자코바이트파는 명예혁명을, '의회가 왕을 자신들 마음대로 갈아치운 쿠데타'로 간주하여 명예혁명 이후에 즉위한 영국 역대 왕들의 정통성을 모조리 부정하기 때문에 이들의 노르망디 공작 칭호 또한 불법적으로 사용한 칭호로 여기며, 그에 따라 현 자코바이트 왕위 요구자이면서 바이에른 왕국과 그리스 왕국 비텔스바흐 왕조의 왕위 요구자이기도 한 프란츠 폰 바이에른을 명목상의 노르망디 공작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렇게 프랑스에 귀속된 노르망디 공작위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 내에서는 폐지되었다.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노르망디 항목을 참조.
3. 역대 군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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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로 911년~927년(루앙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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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1세 927년~9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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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샤르 1세 942년~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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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샤르 2세 996년~1027년(공작으로 승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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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샤르 3세 1027년~10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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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1세 1028년~10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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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2세 1035년~10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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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2세 1087년~1106년(기욤 2세의 장남. 잉글랜드의 왕위를 주장하며 앙리(헨리) 1세와 왕위 계승 전쟁을 벌였다가 패배하여 노르망디 공작위까지 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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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1세 1106년~1135년
이후는 프랑스에 귀속될 때까지 잉글랜드 왕이 겸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