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미인도

클레오파트라와/안토니우스 사랑

박송 입니다. 2022. 6. 24. 10:41

클레오파트라 

Cleopatra VII Thea Philopato
 
 
 
출생사망국적
BC 69
BC 30. 8. 30, 알렉산드리아
이집트

요약 이집트의 유명한 여왕.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부였으며 뒤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되었다. 그녀는 부왕이 죽은 뒤(BC 51) 왕위에 올라 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BC 51~47 재위), 프톨레마이오스 14세(BC 47~44 재위) 및 자기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르(BC 44~30 재위)와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옥타비아누스(뒤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됨)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패배한 뒤에 안토니우스와 함께 자살했고 이집트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매력적이며 야심 만만했던 그녀는 로마의 중대한 시기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미인의 대명사로 불려 고대의 다른 어떤 여성도 얻지 못한 명성을 누렸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발견된 로마 시대 은전에 새겨진 형상으로 미루어, 현대적인 미인형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성 파라오이다.

ⓒ Louis le Grand/wikipedia | Public Domain

초기 생애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둘째 딸로 태어난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BC 323) 이후 로마 병합(BC 31) 때까지 이집트를 다스린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지막 군주가 되었다(로마사). 그녀의 조상은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장군 프톨레마이오스였다.

클레오파트라는 마케도니아인의 후손으로 이집트인의 피는 전혀 섞이지 않은 여성이었고 그녀를 제외한 왕가 사람들은 모두 이집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정치적 이유로 그녀는 태양신 의 딸로 불렸다. 주화에 새겨진 그녀의 모습은 미인이라기보다 생기 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 그녀는 육감적인 입과 단호한 턱, 부드러운 눈매, 넓은 이마, 높은 코를 가졌으며 목소리는 그리스의 전기작가 플루타르코스(플루타르크)에 따르면 '줄이 많이 달린 현악기'가 울리는 음색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뒤늦게 현대에 발견된 로마 시대 은전에 새겨진 클레오파트라의 형상을 조사한 결과 좁은 이마를 가지고 있으며 현대적인 미인형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왕위 승계와 카이사르와의 관계

BC 51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자 왕위는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15세 된 남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곧 갈라섰고 이집트는 내란에 휩쓸렸다. 이전에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는 BC 58년 이집트에서 추방당했을 때 로마 군대의 힘을 빌려 3년 뒤 복위한 일이 있었다. 그 이후로 로마는 막강한 부를 소유한 독립 왕국 이집트의 문제에 관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BC 168년 이후 이집트는 거의 로마의 보호령이라 할 수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세력을 인식하고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로마 및 그 통치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재빨리 간파했다. BC 48년 10월 로마 내전의 승리자인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테살리아에서 벌어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지고 이집트로 도망왔으나 카이사르가 도착하기 4일 전에 살해당했음)를 뒤쫓아 이집트로 왔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그를 유혹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이용하려 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를 복위시킨 대가로 돈을 요구했고 클레오파트라는 권력을 필요로 했다.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초기의 영광을 되찾고 싶어했고 한때 이집트 땅이었던 남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포함해 가능한 한 많은 이집트의 옛 영토를 회복시키려 했다. 그녀는 로마의 딕타토르(독재관)인 카이사르의 세력에 의지해 자신의 꿈을 이루려 했다. 이집트에서는 뒤이어 내란이 일어났으며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이끄는 반클레오파트라 세력 때문에 몹시 곤란을 겪었지만 결국 그들을 물리치고 남동생과 누이의 공동통치체제를 이집트에 회복시켰다.

BC 47년 3월 27일 승리를 거둔 카이사르는 이후 2주일 동안 클레오파트라와 지낸 뒤 이집트를 떠났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실제로 카이사르의 아들이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파를 완전히 진압하는 데 2년을 소비했고 BC 46년 로마로 돌아와 4일 동안 개선식을 벌였는데 언니 클레오파트라에게 적대적이었던 아르시노에는 이 개선식에서 포로로서 굴욕적인 행진을 해야만 했다.

마침내 BC 45년의 문다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카이사르는 반대세력을 일소했다. 이제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에 살게 되었으며 황금으로 만든 그녀의 조상이 카이사르의 명령에 따라 카이사르가 속한 율리우스 가문의 조상신(祖上神) 베누스 게네트릭스 여신의 신전에 세워지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에게서 티베리스 강 너머 별장을 받아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함께 카이사르가 암살당할(BC 44) 때까지 로마에서 지냈다. 그녀는 신중하게 행동했으므로(이후에는 신중하게 행동한 적이 없음) 별 문제없이 지낸 듯하며 공식적으로는 동맹 조약을 협상했다.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정치가이자 작가였던 키케로는 다른 로마인들처럼 그녀를 굉장히 미워했다고 하지만 정작 그가 당시에 쓴 서신들에는 전혀 그녀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안토니우스와의 결혼

권력을 잡으려던 클레오파트라의 계획은 카이사르가 암살당함으로써 좌절되었고 그녀는 이집트로 돌아가 다시금 로마 정계의 다툼에 끼어들 때를 계속 노렸다. BC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이 격파당하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뒤를 이을 장군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카이사르의 누이의 외손자이자 그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아직 병약한 소년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로마의 통치자가 되겠다는 망상을 갖고 있던 안토니우스는 페르시아 공격중 사람을 보내 클레오파트라를 불렀다. 이미 클레오파트라는 로마 장교로서 이집트에 왔던 안토니우스를 14세 때 만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부름을 자신에게 온 2번째 기회로 여겨 기뻐했다. 그녀는 출발을 늦추어 안토니우스를 애타게 한 다음 선물을 가지고 소아시아의 타르수스로 출항했다.

그녀는 키드누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 그 도시에 도착했으며 이 유명한 광경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Antony and Cleopatra〉에 묘사되어 길이 남았다. 안토니우스는 그녀에게 완전히 매혹당했고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바람기 많고 경박한 성품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안토니우스는 점점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하던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해, 당시 이탈리아에서 남편의 이익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던 아내 풀비아를 잊고는 페르시아 원정을 연기한 채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히 빠졌고 그녀를 '보호령'의 통치자가 아니라 독립왕국의 군주로 대우했다. 한 역사가는 "그녀는 로마인을 이용해 로마를 공격하려는 과감한 방법을 택했는데 과연 이것 말고는 다른 수단이 없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라고 지적했다. 그녀가 최초로 꾀한 시도는 카이사르가 죽음으로써 좌절되었으나 이후에는 권력이 있으며 카이사르보다 더 융통성 있는 안토니우스를 이용해 모든 것을 얻으려 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약한 면을 충분히 활용했다. 그러나 로마의 지배권을 얻기 위한 10년간의 투쟁 끝에 결국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이 초래한 화를 입어 안토니우스와 함께 파국을 맞았다.

BC 40년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와 옥타비아누스와 한시적인 협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고, 풀비아가 죽은 뒤에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와 재혼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완전히 사이가 나빠져 다시 클레오파트라에게 돌아갔으며 클레오파트라에게서 자금을 얻어 그때까지 미루어왔던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 옥타비아와 옥타비아누스를 모욕했으며 이제 로마 전체는 그의 적이 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이 결혼은 로마 법에 따르면 무효였다. 한편 안토니우스가 로마에 가 있는 동안 클레오파트라는 어리석게도 당시 로마의 보호령 통치자들 가운데 가장 능력 있고 부유하며 강력한 유대 헤로데를 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헤로데와의 반목

헤로데의 오랜 친구였던 안토니우스가 이집트를 떠난 뒤인 BC 40년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지나가던 헤로데를 유혹했으나 실패했다. 클레오파트라는 거절당한 일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으며 더욱 큰 음모를 꾸몄다. 안토니우스가 이집트로 돌아오자 클레오파트라는 그를 설득해 시리아와 레바논뿐 아니라 헤로데의 왕국에 있던 땅 여리고의 발삼 농원을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헤로데를 완전히 희생시키면서 클레오파트라의 욕심을 채워주는 것은 거절했다. 이때문에 클레오파트라는 더욱더 헤로데를 미워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헤로데의 궁전에 있는 여자를 포섭해 그의 복잡한 가정 문제에까지 관여하려 했다.

그녀는 새로 얻은 영지를 둘러보는 여행을 떠났고 헤로데는 반가운 척하면서 그녀를 영접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 질투심을 내보이면서도 적대적으로 행동했으며 자신만큼 안토니우스에게 영향력 있는 사람은 없다고 뽐냈다. 그녀의 이러한 어리석은 행동은 얼마 가지 않아 대가를 받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을 잠자코 승인했으며 이외에도 계속 돈을 낭비하는 정책을 폈다.

파르티아 원정은 돈만 들이고 실패했으며 성과라고는 일시적으로 아르메니아를 정복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BC 34년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라에서 성대한 개선식을 열었다. 식장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아들로 인정한 카이사리온을 비롯한 4명의 자녀들과 함께 황금 왕좌에 앉아 있었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아들로 인정한 것은 예전에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후계자였던 옥타비아누스를 법적으로 서출로 강등시키는 행위였다.

옥타비아누스와의 대결

클레오파트라는 개선식에서 '왕 중의 여왕', 카이사리온은 '왕 중의 왕'이라고 칭송을 받았다. 다른 아이들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유프라테스 강 너머 영토의 아르메니아를, 그 동생 프톨레마이오스는 아르메니아의 서쪽 땅을 얻었으며, 이들의 누이 셀레네는 키레네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제 이탈리아를 지배하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베스타 여신전의 처녀사제들이 내놓은 신탁이라면서, 안토니우스가 이국 여인에게 로마의 영지들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수도를 알렉산드리아로 옮겨 그곳에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 소식은 곧 로마인들에게 퍼졌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BC 32~31년의 겨울 그리스에서 연회와 사치에 빠져 있었다. 로마 원로원은 이듬해 콘술(집정관)직을 확보해놓았던 안토니우스의 피선출권을 박탈했고 마침내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항해 전쟁을 선포했다. 이때까지도 그녀는 헤로데에 반대하는 정책을 꾸미고 있었는데 당시는 헤로데가 안토니우스에게 자금과 병력을 가장 많이 대주고 있었던 때였음에도 클레오파트라는 헤로데를 페트라의 왕과의 싸움에 말려들도록 했다.

BC 31년 9월 2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은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돌연 전투장소에서 빠져나와 이집트로 향했으며 안토니우스 쪽의 패배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깃발을 단 배를 탔으며 3일 동안 그녀를 만나기를 거절했다. 둘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기 전에 화해했으나 이때는 희망을 버린 뒤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매력과 정치적 안목을 모두 발휘했음에도 지원할 상대를 2번이나 잘못 고른 셈이었다. 게다가 안토니우스의 몰락은 그녀에게도 책임이 컸다. 이제 실권은 옥타비아누스에게 돌아갔다. 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 안토니우스를 죽이거나 추방할 수는 없다고 깨달았고 엉뚱하게도 그를 자기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죽도록 만든다면 그들 2명의 이름을 역사에 남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평가

클레오파트라는 웅장한 무덤 안에 들어간 뒤 사람을 시켜 안토니우스에게 자기가 죽었다는 거짓 전갈을 보냈다. 스스로 칼 위에 엎어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곳으로 옮겨져 그녀에게 옥타비아누스와 평화조약을 맺을 것을 지시한 뒤 죽었다. 옥타비아누스가 방문했을 때 그녀는 다시금 매력을 발휘해 그를 사로잡으려 했다. 그녀는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했으며 옥타비아누스는 자기의 개선식 때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아이들을 굴욕적인 행진에 참여시키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여왕으로 태어난 몸이 로마 시내를 질질 끌려다니면서 모욕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 그녀는 이집트 왕가의 상징인 코브라에 물려 죽은 듯하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안토니우스 곁에 묻어달라고 부탁한 클레오파트라의 편지를 받은 즉시 사람을 보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전속력으로 달려간 그들은 경호원들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문을 열었으나 이미 클레오파트라는 왕가 대대로 내려오는 장신구들을 모두 걸친 채 황금침대에 누워 죽어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22년간 여왕으로 군림한 끝에 39세에 죽었다.

소원대로 그녀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묻혔으며 이들과 함께 로마의 공화정도 막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클레오파트라는 정치에서는 완전히 실패한 셈이었다. 그녀의 야망이 조금만 더 작았더라면 그녀는 헤로데가 그러했듯이 로마 속왕으로서 일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욕심을 부려 모든 것을 망쳤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실패 덕분에 안토니우스와 그녀의 사랑은 더욱 유명해졌고 셰익스피어는 이를 주제로 작품을 썼다.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가장 유명한 문구를 남긴 로마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당대에 가장 위대했던 로마인 두 사람을 사로잡았지만 3번째 사람 때문에 파멸하고 말았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Marcus Antonius

바티칸 미술관에 전시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조각
로마 공화국 삼두
기원전 43년 11월 27일- 기원전 33년 12월 31일
 
로마 공화국 집정관
기원전 34년 1월 1일 - 기원전 34년 12월 31일
루시우스 코르니피시우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아우구스투스
루시우스 볼카티우스 툴루스
 
로마 공화국의 기병대장
기원전 48년
루시우스 발레리우스 파쿠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로마 공화국 호민관
기원전 49년 1월 1일 - 기원전 49년 1월 7일
 
신상정보
-83년 1월 14일
로마 공화국 로마
-30년 8월 1일(53세)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알렉산드리아
포풀라레스
풀비아
옥타비아
클레오파트라
군사 경력
로마 공화국
기원전 50년 - 기원전 34년
로마 육군
총독
제13군단 제미나
갈리아 전쟁
카이사르의 내전
무티나 전투
리베라토레스의 내전
필리피 전투
로마-파르티아 전쟁
안토니우스의 내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기원전 83년 1월 14일 - 기원전 30년 8월 1일)는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이자, 장군이였다. 그는 로마 공화국 로마 제국으로 바뀌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안토니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지지자였고, 갈리아 전쟁 내전 당시 카이사르 휘하에서 복무했다. 카이사르가 정적들을 그리스, 북아프리카, 스페인에서 제거하는 동안 안토니우스는 이탈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안토니우스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와 힘을 합쳐 3인 집정제를 열었고, 이는 제2차 삼두정치라고 불린다. 삼두정치의 지도자들은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인 리베라토레스를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격멸시켰고, 이후 공화국 정부를 그들 스스로 나누었다. 안토니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을 비롯한 로마의 동방 속주들로 가게 되었다. 이후 그는 로마-파르티아 전쟁의 사령관이 되었다.

다른 삼두정치 지도자들과의 관계는 각자가 더 큰 권력을 추구하면서 경색되었다. 기원전 40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 옥타비아와 결혼했을 때 내전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결혼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져, 옥타비아누스와의 관계는 더욱 경색되었다. 기원전 36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권력에서 축출되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관계가 기원전 33년 악화된 이래, 삼두 정치의 지배층들은 분열되었다. 결국 이 분열은 기원전 31년 내전으로 이어졌고,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안토니우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에게 패배했고, 이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도망쳐 그곳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안토니우스의 사망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공화국의 사실상 유일한 지배자가 되면서, 로마 공화국은 로마 제국이 되었고,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그는 로마의 최초의 실질적 황제가 되며 제정이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긴 했으나, 본인을 '제 1시민', 즉 프린켑스라고 자칭했다.

생애[편집]

초기의 생애[편집]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83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은 모두 그와 같은 이름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인데 할아버지는 당대의 유명한 웅변가로 기원전 86년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로마로 복귀했을 때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처형당했다. 그의 어머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먼 친척벌인 율리아 안토니아였다. 안토니우스의 아버지가 죽자 어린 안토니우스와 그의 형제들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는데 로마의 거리를 쏘다니며 방탕한 시절을 보낸것으로 보인다. 로마에서 안토니우스는 엄청난 빚을 지고 도망하듯 그리스로 건너가 수사학을 공부했다.

아테네에서 잠시 철학을 공부하다가 기원전 57년 시리아의 전직집정관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소집한 군대에 들어가 그의 휘하에서 유대 이집트에서 기병대장교로 복무하였다. 기병대 지휘관으로서 그는 용맹하고 대담한 군사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이 원정길에 알렉산드리아에 처음으로 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편집]

기원전 54년경 안토니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의 기병대 지휘관으로서 갈리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지휘력으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의 후반에 큰 도움이 되었으나 개인적으로 방탕하고 분방한 성품때문에 종종 카이사르를 짜증나게 했다. 카이사르의 호의로 그는 원로원에 들어갔으나 보수적인 원로원과 카이사르의 사이가 점점 나빠지자 원로원에서 추방당해 카이사르 진영에 합류하고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널때 함께 했다. 이어 벌어진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그는 카이사르의 오른팔로 좌익 기병대를 지휘하며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맞서 싸웠고 전과를 올렸다.

기원전 47년경 카이사르가 독재관에 취임하고 아프리카에서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축출하는 동안 이탈리아 반도의 통치를 맡았으나 키케로가 지적한 대로 예산낭비가 너무 심한 행정때문에 시민들의 반감을 사고 결국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는 2년간 전혀 왕래없이 지내다가 기원전 44년 카이사르의 다섯 번째 집정관 임기때 동료집정관직에 올랐다.

같은해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왕위를 노린다는 협의로 원로원에서 암살당하고 그 혼란중에 안토니우스는 노예로 변장하고 로마를 탈출하였다. 곧 로마로 돌아와 그는 카이사르를 변호하여 그의 암살의 부당함을 로마 시민에 설득시키고 여론을 반전시켰다. 6월에 그는 카이사르 군대에 힘입어 카실피나 갈리아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키케로는 끈질지게 그에 대해 비난했으며 이에 힘입어 기원전 43년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군권을 주고 그해의 집정관 두 명과 함께 안토니우스를 공격하게 했다. 4월 안토니우스는 포룸 갈로룸과 무티나에서 패하고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로 퇴각했다. 두 명의 집정관은 죽고 옥타비아누스가 혼자 권력을 차지하자 원로원은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집정관직을 수여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집정관에 취임했다. 그동안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합세하여 세력을 불렸다.

제2차 삼두정치[편집]

원로원 공화파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가 그리스에서 반 카이사르파를 규합해 군대를 조직하자 기원전 43년 11월초 옥타비아누스는 보노니아에서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를 만났으며 세 사람은 공식적으로 5년 기한의 독재통치 협정을 맺어 제2차 삼두정치를 수립했다. 이듬해 10월 마케도니아에서 벌어진 두번의 필리피 전투에서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파 군대를 승리로 이끌었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패하여 자살했다. 이로써 카이사르파에 반대하는 공화파가 모두 제거 되자 제2차 삼두정치는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하였고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돌아가고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와 동방의 속주, 레피두스는 히스파니아 아프리카속주를 각각 맡아 통치하기로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구역인 동방 속주를 둘러보면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 타르수스로 불러 그녀의 반란혐의를 조사하고, 이후 기원전 41년과 40년의 겨울을 알렉산드리아에서 함께 지냈다. 한편,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불만을 품은 안토니우스의 세 번째 부인 풀비아가 안토니우스의 동생인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독자적으로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반란을 주동하고 로마를 잠시 장악했다가 실패하고, 페르시아로 퇴각하는 일이 벌어졌다. 풀비아는 반란 와중에 죽었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담당한 동방지역에서는 로마의 전통적인 적대국인 파르티아가 로마의 영토인 시리아를 침공하는 일이 벌어졌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먼저 이탈리아로 가서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고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이후 두사람은 동방정책에 대해 합의했는데 헤로데를 원조하여 유대를 다시 찾고 헤로데를 왕으로 세우기로 하였다. 또한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해적질을 하던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잠시나마 휴전을 하였다. 이 휴전을 하면서 두사람은 다시 사이가 나빠졌다. 기원전 38년 타렌툼에서 삼두정치를 5년 더 연장하기로 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동방원정에 군대를 보내겠다고 합의 했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문제에 대한 옥타비아누스의 지원을 점점 더 의심하게 되었다. 두 사람사이는 점점 더 벌어져 안토니우스는 임신한 옥타비아를 이탈리아로 돌려보내고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손잡았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죽음[편집]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합은 수많은 예술작품에 영감을 주었고 상당부분 과장 미화된 점이 없지 않다. 현실적으로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필요했고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입지 강화와 파르티아에 대한 원정에 필요한 자금과 보급품의 지원에 이집트가 필요했다. 기원전 37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 유대를 회복하고, 헤로데를 유대의 왕으로 곧 괴뢰정권으로 세우고, 이어 다음해 시리아와 파르티아로 진군해 들어갔으나 대패하고 물러났다.

이무렵 로마에서는 레피두스는 실패한 정치로 실각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과거 공화파 귀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권력을 강화하고, "정숙한 로마인 부인을 버리고 난잡한 이집트의 여왕과 놀아나 로마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라고 안토니우스를 비난했다. 안토니우스는 기소되어 몇 차례 로마로 소환당했으나,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면서 이에 응하지 않았다.

기원전 35년 안토니우스는 다시한번 이집트의 지원으로 아르메니아 공략에 성공했다. 원정에서 돌아와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4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했는데, 로마인들에게는 전통적인 로마 개선식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져 반감을 샀다. 개선식 직후 그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왕중의 여왕'으로, 카이사리온을 이집트의 '왕중왕'으로 선포하고 그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에게도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파르티아는 단 한번도 로마에 정복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의 왕', '시리아와 리비아의 왕'등 거창한 제왕의 칭호를 붙였다. 특히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아들이라고 여겨지던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르)은 카이사르의 적법한 후계자로 공표되었다. 이러한 안토니우스의 발표는 옥타비아누스는 물론 로마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후 2년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서로에 대한 엄청난 비난과 선전전을 벌였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양자임을 위조하고 적법한 후계자가 아님에도 권력을 찬탈한 자라고 주장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불법으로 속주를 차지하고, 원로원을 무시하고, 외국과의 전쟁에 들어갔으며, 영토를 이집트의 자기 자식들에게 팔아넘겼다고 주장했다. 이제 두 진영사이의 내전은 피할 수 없었다. 기원전 32년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해임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그해의 집정관 2명과 원로원 의원의 3분의 1이 그리스에 있는 안토니우스 진영으로 넘어갔다.

기원전 31년 드디어 내전이 시작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에페수스, 아테네, 파트라스에 잇달아 전선을 구축하고 암브라키아 만에서 주력함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장군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이탈리아에서 이오니아 해를 건너는 상륙작전에 성공했고, 안토니우스의 주요 방어지점을 차례로 점령했다. 안토니우스 진영은 점차 분열되었고, 드디어 9월 2일 벌어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해군은 괴멸당하였다. 두사람은 남은 배를 끌고 이집트로 도망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유일한 권력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고, 기원전 30년 8월 아그리파의 부대가 이집트에 상륙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고 믿고 패배의 절망속에서 자살했고, 며칠후 클레오파트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카이사리온은 살해 되었다.

연표[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