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연구

명성황후/ 서태후

박송 입니다. 2020. 11. 8. 18:47

출생

1851년 (철종 2)

사망

1895년 (고종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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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민자영, 그녀는 남편 고종과 함께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세력이 동쪽으로 밀려들어옴)의 거친 파고 속에서 일제 침략자들의 야심에 정면으로 맞서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던 조선의 여걸이었다. 그녀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쥐고 흔들던 왕권을 남편 고종에게 되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임오군란으로 절체절명의 고비를 넘긴 그녀는 고종을 보좌하면서 조선의 근대화를 선도한다.

제국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욱일승천의 기세를 뽐내던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를 발판으로 조선 병탄의 야심을 숨기지 않는 위급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강대국 러시아와 미국 등을 끌어들이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제압함)의 외교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국체를 보전하고자 했다.

이런 전략적 묘수는 소위 ‘여우 사냥’이라는 일제의 야만적인 도발로 인해 무산되었지만, 이후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도피함)이라는 대반전의 승부수를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대한제국 수립이라는 결실로 맺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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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경 러시아 공사관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오늘날 그녀는 ‘민비’와 ‘명성황후’라는 극단적인 호칭이 말해주듯 조선을 망친 여인, 혹은 조선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다 순절한 영명한 조선의 국모라는 두 가지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실로 명성황후의 치적에는 숱한 유언이 나돌지만 당시 조선을 병탄하려던 일본에 있어 그녀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제거해야 했던 최대의 걸림돌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감고당의 외로운 소녀, 면류관을 쓰다

명성황후 민씨는 노론의 거물이었던 민유중의 6대손 민치록과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외동딸이다. 1851년 9월 25일 경기도 여주시 근동면 섬락리에서 태어났다. 정3품 사도사첨정을 끝으로 낙향한 민치록은 딸에게 ⟪소학⟫, ⟪효경⟫ 등을 가르쳤지만 그녀는 제국의 흥망성쇠를 담은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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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생가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위치해 있다. (경기도유형문화재 제46호)

ⓒ 연합뉴스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9세 때인 1858년 아버지 민치록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홀어머니와 함께 서울에 있는 인현왕후의 사가인 감고당으로 이사했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서울에서 그녀는 쓸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바로 그 시기에 일본에서는 극렬 정한론자이며 제국주의자들의 스승이었던 요시다 쇼인이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제자들에게 조선 정벌의 당위성을 극력 설파하고 있었다.

1866년,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왕후를 간택하는 과정에서 처가인 여흥 민씨 가문의 사고무친한 민자영에게 주목한다. 여기에는 대원군의 부인 여흥부대부인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대원군은 본래 안동 김씨 집안의 딸을 왕후로 내정했지만 그 약속을 어김으로써 안동 김씨 세력과 척을 지게 된다.

민자영은 그해 3월 6일의 삼간택에서 왕후로 간택되었다. 당시 15세의 남편 고종은 궐내에서 귀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가례 첫날부터 소박을 맞았지만 상심한 마음을 치국의 서책으로 달랬다. 이때의 공부를 통해 그녀는 대원군이 장악한 내정을 회수하고,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동북아의 소국 조선이 살아남는 묘책을 찾아내지 않았을까? 당시 그녀는 민승호, 민겸호 등을 통해 일찍이 대원군이 조정에서 쫓아낸 조영하, 김병기, 흥인군 이재면, 최익현 등과 제휴하며 정치적 역량을 키워나갔다.

1868년 4월 귀인 이씨가 완화군 이선을 낳자 흥선대원군은 몹시 기뻐했다. 방심한 그는 며느리의 정치적인 행보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871년, 고종의 사랑을 되찾은 민씨는 아들을 낳았지만 항문폐색증으로 생후 5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비슷한 시기에 세 살이 된 완화군이 요절하자 그녀는 생모인 귀인 이씨를 궁궐에서 내쫓아버렸다.

이윽고 정계의 전면에 등장한 왕후 민씨는 성년이 된 고종에게 친정을 하도록 설득하면서 한편으로 대원군 퇴진 공세를 펼쳤다. 여기에는 고종의 등극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소외당하고 있던 조대비의 친족 조성하, 조영하 형제, 대원군의 형 흥인군, 서원철폐로 인해 분개한 유림 세력,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던 노론 세력이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1873년 10월, 최익현은 고종의 친정을 주장하며 대원군의 섭정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탄핵 당했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고종을 설득하여 그에게 정3품 돈령부 도정 벼슬을 제수했고, 금세 호조 참판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최익현은 그해 11월에 재차 대원군 규탄 상소를 올렸다. 바야흐로 대원군 퇴진 분위기가 고조되자 고종은 운현궁에서 대궐로 통하는 대원군의 전용 출입문을 폐쇄해 버렸다.

당시 고종의 나이 22세, 성년을 넘긴 국왕이 친히 정사를 돌보겠다는데 반박할 명분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대원군은 11년에 걸친 농단하던 권력을 빼앗기고 양주 시둔면 곧은골(直谷)에 은둔하고 만다. 이때부터 대원군은 자신을 내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며느리를 정적으로 인식하고 반격의 기회를 엿보았다.

이듬해인 1874년 왕후 민씨는 둘째 아들 을 낳고 한 시름 놓았지만, 대원군 일파의 폭탄테러로 친정오빠 민승호와 그의 아들, 어머니 등 3명을 잃었다. 민승호는 대원군의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동생으로 왕후의 본가에 가족이 없어 대를 잇기 위해 민치록의 양자로 입적시킨 인물이었다.

1875년 왕세자 책봉으로 심기일전한 왕후 민씨는 대원군이 정계에 끌어들인 여흥 민씨 일족과 청년 개화파 인재들을 중용하면서 정계를 리드했다. 때 마침 일본이 조선정벌의 야심을 숨긴 채 운요 호 사건을 빌미로 개항을 요구하자,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문호를 활짝 열었다.

이때 고종은 개항의 상징적인 기관으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대원군이 부활시켰던 삼군부를 폐지했다. 아울러 영선사신사유람단을 중국과 일본에 파견하여 공업·무기제조법 등을 배워오게 했다. 당시 왕후 민씨는 김윤식에게 밀명을 내려 청나라에 한미수교를 주선하도록 부탁했다. 또 개화승려 이동인을 일본에 파견하여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한미수교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부강한 나라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조선의 국체를 보전하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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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 Highshines~commonswiki | Public Domain

군란과 정변의 파고를 넘어서

1881년 8월, 대원군을 추종하는 안기영과 권정호 등이 고종을 폐위하고 이재선을 옹립하려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하지만 정권을 탈환하려던 대원군 일파의 시도는 더욱 면밀하고 거칠어졌다.

1882년 6월 5일, 구훈련도감 군병들이 선혜청 도봉소에서 군료로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지급하려던 관리들을 구타하면서 임오군란이 시작되었다. 당시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미숙한 대응으로 군병들의 분노가 확산되자 대원군의 심복인 허욱이 주동하여 관공서 및 고관의 저택을 습격하더니 급기야 대궐 난입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어느덧 폭도로 변질된 군병들은 대원군의 친형인 이최응, 민겸호, 김보현 등을 잡아 죽이고 왕후 민씨를 부정부패의 수괴로 지목하면서 대궐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급박한 위험 속에서 그녀는 여흥부대부인의 도움으로 가마에 올라 대궐을 빠져나온 뒤 무예별감 홍계훈의 기지로 도성을 벗어나 여주 땅에 은신했다.

당시 이성을 잃은 폭도들은 일본공사관으로 몰려가 불을 지르자 하나부사(花房義質) 일본공사가 급히 제물포로 탈출했다. 그 혼란의 와중에 대궐을 장악한 대원군은 고종에게 정권을 위임받은 다음 왕후 민씨의 국상을 선포하고 맏아들 이재면에게 재정권과 병권을 위임했다.

왕후 민씨는 얼마 후 군란의 열기가 가라앉자 고종에게 밀서를 보내 자신의 안전을 통보한 다음 청에 지원을 청하게 했다. 그러자 청의 해군 제독 오장경과 정여창 등이 신속하게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들어온 다음 방심한 대원군을 납치하여 보정부에 연금해 버렸다. 그 결과 조정이 정상화되자 왕후 민씨는 서울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 무렵 청나라를 배경으로 점진적 개화를 모색하던 민영익, 김윤식 등의 온건개화파는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일본의 지원을 통해 전면적인 개화를 주장하는 급진 개화파 인사들은 조선의 전통과 서양 문명을 절충하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정책 노선을 추구하던 온건개화파 인사들을 사대당 혹은 수구당이라고 조소했다.

1884년 9월 안남 문제로 청불 전쟁이 일어나자 급진개화파 요인들은 청나라가 당분간 조선에 관심을 갖지 못할 것이라고 오판했다. 그리하여 10월 17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기회로 온건개화파 인사를 참살하는 일대정변을 일으켰다. 이른 바 갑신정변이었다.

이튿날인 18일, 정변의 성공을 확신한 개화당은 경우궁에서 새 내각을 조직하고, 14개조의 혁신정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사흘 째 되는 날 그들은 예기치 못한 청군의 개입으로 위기를 맞는다. 그날 창덕궁에서 벌어진 일전에서 개화당을 후원하던 일본군이 패배하면서 정변은 3일천하로 귀결되었다.

이 갑작스런 정치적 소요 이후 서울에 눌러앉은 위안스카이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고종은 신임하던 베베르의 나라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을 견제할 요량으로 박정양, 이범진을 주축으로 하는 친러내각을 출범시켰다.

얼마 후 조선이 러시아에게 영흥항을 조차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1885년 3월, 러시아의 라이벌 영국이 거문도를 무단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청도 친러정권을 누르기 위해 연금했던 대원군을 석방하는 강수를 두었다. 이런 미묘한 국제 분위기 속에서 왕후 민씨는 수차례 정부 고문으로 와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와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통해 러시아와 비밀조약을 맺으려 했지만 위안스카이의 방해로 실패하고 만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오판

1892년 봄, 운현궁에서 원인 모를 폭발이 일어났다. 또 건물 여기저기에서 폭발물이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과거 민승호의 죽음을 앙갚음하기 위한 왕후 민씨의 음모라고 수런거렸다. 하지만 당시 그녀는 조선을 둘러싸고 러시아, 일본, 청나라 간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조정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 붓고 있었다.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에서 동학교도들이 탐관오리의 퇴출과 외세 축출을 주장하는 대규모집회를 열었다. 이듬해인 1894년 1월에는 전라도에서 동학 접주 전봉준을 필두로 고부군수 조병갑을 탄핵하는 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왕후 민씨는 동학교도이 대원군을 추종하면서 조정을 뒤엎으려는 비적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특히 흥선대원군과 전봉준의 관계에 주목했다. 전봉준은 1890년부터 운현궁의 식객 노릇을 했고, 이후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봉준은 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민중을 위해 한번 죽고자 하는 바입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해 4월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이 대원군의 사주를 받아 한양에 진입하면 고종을 폐위하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분개한 왕후 민씨는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민영준을 청나라에 보내 원병을 청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당시 그녀는 ‘동학의 무리를 내 어찌 왜놈처럼 여기랴만 임오군란과 같은 일을 다시는 참을 수 없다.’면서 청병을 주저하는 민영준을 꾸짖었다 한다. 그 결과 청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톈진조약의 상호 군대파견조항을 내세운 일본이 기다렸다는 듯 대군을 급파했다.

그런데 일본군은 아산에 상륙하자마자 서울로 물밀듯이 치고 들어와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해 버렸다. 그들의 목적은 조선에 괴뢰정부를 수립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개혁을 통하여 향후 조선의 병합에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고종 부부를 연금한 채 김홍집 친일내각을 앞세워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소위 갑오개혁을 추진한다. 당시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왕후를 겁박하여 정계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내기까지 했다.

이때 일본 측의 회유에 넘어간 대원군은 일본상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입궐한 뒤 정권 회복을 꿈꾸었고, 손자 이준용은 고종과 명성황후 폐위를 꾀하기까지 했다. 이준용은 두 차례에 걸쳐 일본공사관을 찾아가 오토리 공사를 설득했지만 스기무라 서기관의 반대로 실패하고 만다.

얼마 후 일본은 아산과 둔포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습격하여 조선에 대한 노골적인 야심을 드러냈다. 급기야 청과 일본의 전쟁은 조선 전역으로 확산대어 청일전쟁이라는 대회전으로까지 발전한다.

일본은 이 회심의 일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청으로부터 요동반도를 양도받고 조선에 대한 권리까지 위임받았다. 바야흐로 조선 병탄의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 그러자 일본의 대표적인 정한론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내 생전이 이런 대사를 보다니 저승에 있는 친구들이 부러워할 것이다.”라며 환희작약했다.

들꽃처럼 지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껏 고조되었던 일본의 기세는 삼국간섭으로 금세 허리가 꺾였다. 극동에서 남하정책을 펴던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함께 요동반도에서 일본의 퇴거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때까지 열강의 힘을 두려워하던 일본은 1895년 5월 초순 눈물을 머금고 요동반도에서 군대를 물려야 했다.

이런 국제정세를 면밀히 주시하던 왕후 민씨는 1895년 7월 이노우에와의 약속을 파기하고 정치활동을 재개하면서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바탕으로 재차 박정양, 이범진, 이완용을 망라한 친러내각을 출범시켰다. 또 민영환을 비롯해 민씨 척족 16인을 조정에 불러들인 다음 1894년 6월 이후 친일내각이 추진해 왔던 내정개혁을 백지화했다.

이때 고종은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여 국왕인 자신이 매일같이 대신들과 접촉하여 대소사를 심의한 다음 시행하겠다는 조칙을 발표했다. 이어서 관복을 옛날식으로 환원시키고 일본군 휘하에 들어 있는 훈련대를 해산시키려 했다.

이같은 조선의 민활한 움직임이 일본에게는 커다란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요동반도의 포기로 정부가 비난받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도 버거운 상태였다. 결국 일본의 정객들은 현 정세를 뒤집을 비책으로 친러정책을 주동하는 조선의 왕후 민씨를 제거하기로 했다.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공사는 그와 같은 계획을 입안한 뒤 자신의 후임으로 미우라 고로 자작을 발령했다. 그러자 미우라 공사는 관저에서 불경을 외면서 고종 부부를 방심케 하면서 비밀리에 왕후 시해계획을 밀어붙였다.

그는 궁중의 간신을 제거하여 국정을 바로잡는다는 명분 아래 대원군을 입궐시키고 명성황후를 시해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자신들이 훈련시킨 조선군 훈련대를 내세워 내부 쿠데타를 가장하면서 일본 낭인부대를 투입하기로 했다. 이들을 위한 엄호와 전투의 주력은 일본군수비대가 담당할 것이었다.

운명의 8월 20일 새벽 4시경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가 이끄는 일본 낭인 30여명이 대원군을 앞세우고 경복궁 앞에 도착했다. 이윽고 조선군 훈련대가 춘생문과 추성문을 포위하자 낭인들이 거사에 돌입했다. 한밤중에 궐내에서 급보를 받은 고종은 적도들이 왕의 침전만은 감히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고 왕후를 옥호루에서 자신이 머물던 곤령합으로 불러들였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왕후에게 궁녀 복장을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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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를 시해한 낭인들

ⓒ Isageum | Public Domain

이윽고 폭도들은 경복궁 남쪽의 광화문, 동북쪽의 춘생문, 서북쪽의 추성문 등 3개의 문으로 침입했다. 궁궐의 경비병은 총인원 1500명에 장교가 40명이나 되었지만 대부분 도망치고 5시 10분경 남아 있는 사병은 300여 명뿐이었다. 새벽 5시 30분경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군부대신 안경수와 함께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을 이끌고 광화문으로 들어오는 흉도들과 첫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10분 만에 홍계훈이 전사하고, 안경수와 시위대 병력은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춘생문 쪽에서 침입한 폭도들은 이학균 부령이 수비한 작은 문을, 추성문 쪽의 난입자들은 다이 장군과 사바틴이 지키고 있던 대문 수비를 거의 같은 시간에 무너뜨렸다.

기세가 오른 폭도들은 두 패로 나누어 건청궁 안에 있는 곤령합과 옥호루 안으로 들어섰다. 이때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두 팔을 벌려 가로막다가 양 팔목을 잘리고 살해되었다. 그들은 방 안으로 난입한 다음 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궁녀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들은 10~12명의 궁녀들을 2미터가 넘는 창밖으로 내던졌는데 한 사람도 달아나거나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고종 역시 폭도들에게 옷을 찢겼고 저항하던 왕세자는 부상을 입었다. 왕세자비도 현장에 있었는데 왕후를 보호하려다 넘어져 기절하고 말았다. 결국 왕후 민씨는 뜰 아래로 뛰어나가다 붙잡혀 가슴을 짓밟히고 칼에 찔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 충격적인 왕후 시해범의 정체는 전 조선군부 고문 일본인 오카모토와 스즈키, 와타나베로 밝혀졌다. 그들은 왕후의 시신을 녹원(鹿園) 숲속으로 옮긴 다음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질렀다. 1895년 8월 20일 오전 8시경이었다. 이로서 밀려오는 외세에 당당히 맞서며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일으키려던 비운의 여인 민자영은 44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왕후 시해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이 들끓어 올랐다.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국제사회의 비난이 쇄도했다. 궁지에 몰린 일본은 범인들을 체포하여 일본에 압송한 뒤 재판에 회부했지만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파렴치한 왕후 시해범들은 시간이 흐른 뒤 모두 풀려났고, 향후 승승장구하여 일본의 명사로 거듭나기에 이른다.

사랑하고 의지하던 왕후를 잃고 나서 고종은 한 동안 폐인처럼 지냈다. 대원군이 조정에 들어와 국사를 좌지우지했지만 관심이 없었다. 모든 것은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기 수순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삼엄한 일제의 감시 속에서 절치부심하던 고종은 정동의 외교관들과 친미파 인사들의 지원을 받아 미국공사관으로 도피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고종은 포기하지 않고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함으로써 일본의 너울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2월, 조선 내에서 일본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자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이어한 다음 그해 10월 대한제국령을 발표하고 황제에 올랐다. 1897년 1월 6일, 고종은 죽은 왕후 민씨에게 문성황후라는 시호를 내리고, 능호를 홍릉으로 고쳤다. 3월 2일에는 ‘문성(文成)’이란 시호가 정조 임금과 같다 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로 바꾸었다.

그녀는 조선의 국모다

《서유견문》의 저자로 개화파이자 친일파였던 유길준은 명성황후 시해 직후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를 영국의 메리 여왕과 프랑스의 마리 앙투와네트보다도 더 악질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명성황후가 일본의 너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리에 접촉했으며, 1894년 가을 개화당 인사들을 전부 암살하려다 대원군에게 발각되어 실패했다고 혹평했다. 아버지 윤응렬과 함께 대를 이어 친일파로 활동했던 윤치호 역시 명성황후가 가족에 대한 집착으로 미신에 현혹되어 나라를 망쳤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런 악평은 주로 일본인과 친일파 인사들의 저열한 자기변호에 다름 아니다.

독립협회 설립자이며 독립신문의 주필이었던 서재필은 그녀가 매우 영민한 두뇌의 소유자로서 상황 분석에 뛰어난 인물이라고 상찬했다. 당시 사람들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의 지략에 자신까지 넣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 일컬었지만, 그 다섯이 명성황후 앞에 나가면 으레 기선을 제압당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나왔다고 한다.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으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을 남긴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서울에 들어와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의 집에서 5주간 머물 때 네 차례에 걸쳐 고종과 명성황후를 알현한 다음 이렇게 썼다.

‘왕후는 40세가 넘었는데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은 윤이 나는 흑단이었고 피부는 투명하여 진주빛을 띠었다. 눈빛은 차갑고 예리했으며 반짝이는 지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나는 왕후의 우아하고 매력적인 예의범절과 사려 깊은 호의, 뛰어난 지성과 당당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통역자를 통해 나에게 전달되기는 했지만 그녀의 화법은 탁월한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국왕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출처 입력

여기에 나타난 명성황후 민씨는 아주 이지적이며 사려깊을 뿐만 아니라 친절하며 특출한 정치력을 가진 인물이다. 한편 우리가 무능력하고 우유부단하다고 여기고 있는 고종에 대한 평가도 색다르다. 우리는 그 동안 조선사편수회에서부터 내려준 일방적인 역사교시에 따라 고종을 폄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왕의 표정은 온화했다. 왕은 놀라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선의 역사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떤 종류의 질문을 해도 명확하고 상세하게 답변할 수 있었다.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 지역과 연고까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통치자로서 지극히 근면한 사람이며 각 부처의 모든 일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많은 신하들의 갖가지 보고에도 지치지 않고 정성으로 이들을 수렴했다.’

출처 입력

미국의 외교관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 역시 명성황후가 “뛰어난 학문과 지성적인 강한 개성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력을 지녔으며, 시대를 추월한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애쓴 분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이 모두가 조선의 황혼기를 온몸으로 버텨냈던 명성황후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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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건청궁

1895년 옥호루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다.서태후

엽혁나랍 난아, 西太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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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35년 11월 29일

사망

1908년 11월 15일

본명

엽혁나랍 난아(葉赫那拉 蘭兒)

국적

중국 청(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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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으로 청나라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서태후(西太后)는 여러 가지 면에서 측천무후와 비교되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측천무후가 '사악한 찬탈자'인 동시에 '훌륭한 통치자'였던 반면, 서태후는 '사악한 찬탈자'라는 점은 마찬가지였지만 국익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개인적인 사치에 우선한 '탐욕스러운 통치자'였다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태후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아직 진행 중이다. 그녀로 인해 청 제국의 붕괴가 가속화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긴 하지만, 반대로 그녀로 인해서 왕조의 몰락이 반세기 정도 늦춰졌다는 견해도 있다.

그녀의 출신배경이나 황궁에 들어오는 과정은 측천무후의 것과 비슷하다. 1835년생인 서태후는 만족(滿族) 출신으로 그녀의 성은 엽혁나랍(葉赫那拉)이며 어릴 적에는 난아(蘭兒)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녀의 아버지 혜정(惠征)은 감찰 업무를 수행하던 하급 관리로 여러 지방을 전전하면서 근무하던 사람이었다. 난아가 태어난 시기는 유럽 열강들의 중국 침탈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그녀가 다섯 살 때인 1839년 제1차 아편 전쟁이 터지고 남경조약을 체결하면서 중국의 굴욕적인 근대사가 시작되었다.

난아는 열여섯 살 때 하위계급의 궁녀인 수녀(秀女)로 선발되어 황궁에 들어가 이때부터는 자희(慈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의 황제는 함풍제(咸豊帝)였는데, 나이는 자희보다 네 살이 많았으며 이제 막 제위를 이어받은 상태였다. 그는 그리 뛰어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무능하지도 않은 평범한 황제였다. 또한 부지런하고 대단히 선량한 사람이었던 반면에 겁이 많고 나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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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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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선량한 사람이었던 함풍제는 백성들을 위하는 좋은 군주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격변의 시기를 맞이해 빅토리아 여왕의 대영제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열강들과 맞서기에 적합한 통치자는 아니었다.

자희는 원래 처세에 능한 사람이라 수녀로 출발해서 의빈(懿嬪)에 이르기까지 고속으로 승진했으나 오랫동안 황제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함풍제의 눈에 들어 입궁한 지 4년 만에 처음 황제의 성은을 입은 자희는 대단히 큰 행운을 잡았다. 스물한 살에 아들 재순(載淳)을 낳은 것이다. 재순은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자희는 의비(懿妃)를 거쳐 의귀비(懿貴妃)가 되었다. 내명부에서 황후 바로 다음 서열로 올라선 것이다.

자희 개인에게는 행복한 시절이었겠지만 300년 전에 만족의 영웅 누루하치가 세운 청 왕조는 이 시기에 급속한 몰락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자희가 입궁했던 시기는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이라는 농민반란이 일어나 전국의 절반 이상이 태평군에 의해 점령되어 있는 상태였다.각주1) 한때 무적을 자랑하던 청 왕조의 팔기군(八旗軍)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으며, 증국번(曾國藩)과 이홍장(李鴻章), 두 한인 출신 지방총독들이 지휘하는 군대만이 가까스로 이들을 상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 와중에 영국 상선 애로우 호 사건을 빌미로 제2차 아편 전쟁이 터졌다. 빅토리아 여왕의 영국과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노골적으로 중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한 것이다. 그들의 요구는 자국 공사의 북경 주둔, 교역항 개항, 선교활동 보장과 같이 다분히 제국주의적인 것들이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의 연합함대가 천진을 거쳐 북경까지 위협하자 근대식 군대에 대항할 능력이 없는 함풍제는 굴욕적인 천진 조약을 맺어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영국과 프랑스는 북경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천진 항을 개방하라는 압력을 가했고 이를 위해 무력 시위를 감행했다. 그런데 이들이 무력 시위를 하던 중에 전근대적인 몽골 기병 2만 기가 맹활약을 하면서 이들을 행동을 저지했다. 그러자 이 작은 승리에 고무된 함풍제는 천진 조약을 폐기한다고 선언하고 영국 영사를 구금했다. 이에 서구 연합군은 북경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제국의 수도가 서구의 근대식 군대에 의해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자, 함풍제는 이복동생인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에게 수도의 방위를 위임하고 자신은 황후인 자안(慈安), 그리고 자희와 재순 모자만을 데리고 열하(熱河)로 도피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혁흔은 영국, 프랑스와 협상을 벌였으며, 그 결과가 북경 조약이었다. 천진 조약이 유효함을 인정하고 천진 항을 개방하며 막대한 전쟁배상금까지 물어야 하는 조건이었다. 여기에다 홍콩 섬을 마주보고 있는 구룡 반도까지 영국에게 할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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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풍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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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풍제는 자포자기에 빠져서 한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잡기에 몰두하다 중병에 걸렸다. 서른한 살의 나이에 죽음을 앞둔 황제가 여섯 살 난 후계자를 위해 상황을 정리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장 위험한 인물은 그와 사이가 좋지 않은 동생 공친왕 혁흔이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는 그는 추종자들도 많이 거느리고 있어 제위에 도전할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이었다.

두 명의 황후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명문가 출신인 자안 황후는 온화하고 다정한 성격이라 주변에 인물이 많이 모이는 스타일이었다. 그녀가 권력을 잡으면 외척들이나 측근들이 득세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태자의 생모인 귀비 자희를 믿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무척 영리하지만 권력욕이 강했으며 권모술수에 능했다.각주2)

두 황후 외에도 선왕 시절부터 정권을 장악해온 팔대신(八大臣)이라는 막강한 세력이 더 있었다. 이 여덟 명의 중신들 중에는 함풍제에게 숙부가 되는 선왕의 형제가 두 명, 사위가 한 명 끼어 있었으며, 이들의 리더인 숙순(肅順)은 황실의 종친이었다. 후계자를 위해서 과감한 숙청을 감행할만한 성격이 되지 못하는 함풍제는 세력 간의 견제를 통해서 균형을 유지하도록 조치했다.

함풍제는 팔대신들과 두 황후가 서로 견제하도록 장치를 했다. 팔대신을 고명대신(顧命大臣)각주3) 으로 삼아 자신의 유지를 집행하도록 하면서 두 황후가 이들을 견제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다. 함풍제는 어상(御賞)이라는 도장과 동도당(同道堂)이라는 두 개의 도장을 만들어 어상은 자안에게, 동도당은 자희에게 주었다. 팔대신들이 황제의 명령인 조칙(詔勅)을 입안한 뒤에 어상과 동도당 두 개의 도장이 모두 찍혀야 비로소 그 문서가 효력이 발생하도록 한 것이다.

함풍제는 서른 살을 갓 넘긴 나이에 젊은 두 황후와 어린 태자를 남긴 채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죽었다. 권력의 균형을 위해서 함풍제가 세심하게 배려했던 장치는 그의 장례식과 더불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먼저 언제라도 찬탈자가 될 수 있는 공친왕 혁흔은 함풍제의 사후 권력구도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었다. 팔대신은 공친왕이 문상을 하려고 하자 이를 제지하려고 했다.

팔대신과 두 황후가 충돌하게 된 데는 자희의 권력욕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시빗거리를 제공한 쪽은 팔대신이었다. 함풍제가 죽었을 때 자희의 나이는 불과 스물일곱 살이었으며 자안 황후는 자희보다도 두 살이 어렸다. 노회한 팔대신은 이 젊은 여인들을 자신들이 정치할 때 존중해야 할 파트너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황적으로 사실이기도 했다. 당시 관리들이나 군대 내에서 두 황후를 따르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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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안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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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숙순은 함풍제에게 권력욕이 강한 자희의 잠재적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그녀를 아예 제거해서 후환을 없애자는 청을 올린 사실이 있었다. 그들은 두 황후를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큰 오산이었다. 자희는 물론이고 자안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자안은 영리하고 단호한 여자였지만, 정치적인 야심을 앞세우지 않고 겉으로 온화한 태도만 유지할 뿐이었다. 노 대신들은 그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자희와 자안 두 태후는 권력구도의 개편을 결심했으며,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북경에 머물고 있던 공친왕을 끌어들였다. 자희가 총애하는 태감이 밀사로 북경에 파견된 후 공친왕은 팔대신의 극력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상을 명분으로 북경을 떠나 열하로 왔다.

또한 팔대신이 권력을 오랫동안 독점해 왔기 때문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중신들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앞장서 신하가 황제를 대신해 조칙을 작성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아 두 황후의 수렴청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공친왕 혁흔은 실제로 병사들을 움직이는 군사책임자들인 병부시랑, 몽골친왕 등 야전군 사령관들을 포섭해서 병권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에 두 황후를 지원하고 나섰다. 함풍제가 죽고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벌어진 실질적인 쿠데타였다. 팔대신은 함풍제의 운구가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실각했다.

이 사건을 신유정변(辛酉政變)이라고 한다. 숙청이 그리 큰 규모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자희보다도 평소에는 온화한 성품이었던 자안 황후가 더 강경했다. 그녀는 팔대신이 황제의 권위에 도전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들의 우두머리였던 종친 숙손은 처형되었으며, 두 명의 황숙은 자살을 강요받았다. 나머지 대신들은 해임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신유정변을 계기로 자안과 자희가 수렴청정을 하고, 공친왕이 의정왕(議政王)으로 봉해져 새로이 설립된 기관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책임지며 대외 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이로써 세 사람이 권력을 분점해서 서로 균형을 유지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 시기부터 자안 태후는 동태후(東太后)로, 자희 태후는 서태후(西太后)로 불리게 된다. 자안이 자금성 내의 동쪽, 자희는 서쪽에 위치한 내궁에 각각 거처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두 태후의 갈등을 강조하는 갖가지 소설이나 영화에서와는 달리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자안과 자희 두 사람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공친왕 혁흔까지 가세한 이 삼두체제의 리더는 서태후가 아니라 동태후 자안이었다. 서태후는 분주하게 갖가지 정사에 직접 관여하고 사람을 모아 파당도 만들었지만, 자안의 경우에는 가만히 있어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어 강력한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공친왕조차 그녀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자안은 평소에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성격이었고 정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정도를 벗어난 경우에는 가차 없이 처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순간에 결정을 내리는 일은 항상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신유정변의 와중에 황실의 종친인 숙손의 신병을 처리하면서 자희와 공친왕은 그의 신분 때문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자안은 그가 황실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단호하게 참수형으로 다스렸다.

공친왕만 내심 동태후를 무서워했던 것이 아니다. 서태후의 총애를 받았던 대태감 안덕해는 서태후와 정신적인 교감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신유정변 때 위험한 밀사 역할을 수행해 나름대로의 공도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서태후의 비호를 믿고 마음대로 황궁을 벗어나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서 재산을 축적하다 멀리 산둥성에서 지방관리에게 체포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동태후는 환관이 황명을 받지 않으면 도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내규를 위반했다며 그를 주살했다.

이 일은 서태후의 가슴에 큰 한을 남겼다. 그러나 원래 처세의 달인이었던 그녀인지라 가급적이면 동태후 자안과 충돌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문제를 삼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역사적으로 유래가 매우 드문 두 황후의 동시 수렴청정, 실질적으로는 공친왕까지 세 사람이 동시에 국가를 이끌던 시기는 무려 20년간이나 유지되었다. 이 시기를 중국사에서는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고 부른다. 서태후 자희의 아들 재순이 황제가 되면서 동치제(同治帝)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그가 여섯 살의 나이에 제위에 올라 열여덟 살에 천연두로 급작스럽게 사망할 때까지 13년의 기간과 그의 뒤를 이어 나이가 세 살밖에 안 된 조카 광서제(光緖帝)가 즉위하면서 두 태후의 수렴청정과 삼두체제의 권력구조는 계속 유지되었다.

이 기간 동안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했던 증국번과 이홍장을 필두로 장지동(張之洞), 좌종당(左宗棠)과 같은 개방주의자들이 발탁되어 양무 운동(洋務運動)이라고 하는 개혁정책을 주도했다. 이 개혁은 절대 왕권 치하에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한계를 갖고 있지만, 수천 년 동안 절대적인 왕조체제에만 순응하던 중국에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적인 자본주의의 실험이 시도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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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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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1860년대를 기점으로 광공업, 해운, 조선 등의 분야에서 근대적인 산업이 시작되었으며, 새로운 교육체제가 도입되고 해외유학생들이 파견되기 시작했다. 서구의 근대적 포함에 놀랐던 중국인들이 가장 관심이 많았던 분야는 해군 함정이었다. 서구 열강들도 양무 운동에 우호적이었으며 특히 영국은 세 사람의 권력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서구 열강의 주선으로 중국 최초의 근대식 함선이 도입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동치중흥의 번영기는 동태후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갑자기 방향을 잃고 말았다. 동태후 자안이 급작스럽게 사망한 시기는 광서 7년이었다. 당연히 서태후의 암살 배후설이 제기되었지만, 밝혀진 바는 아무 것도 없다. 정사의 기록이 아닌 당시의 소문에 기초한 기록에서는 서태후가 남몰래 남자를 황궁에 불러들여 즐기다 임신을 하는 바람에 동태후가 예부와 폐후(廢后)를 논의했으며, 이를 눈치 챈 서태후가 독이 든 떡을 보내 독살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궁궐 깊숙이에서 일어난 일을 세월이 지난 지금 알 도리는 전혀 없다. 사실 동태후와 서태후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문서나 서한문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독살설이 사실이라고 해도 당시에 이미 동태후가 죽은 이상 홀로 남은 서태후에게 독살 혐의를 두고 조사를 벌일만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각주4)

만약 동태후의 죽음에 서태후가 배후였다고 한다면 그녀의 사생활 때문이 아니라 권력축의 이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동태후와 공친왕은 점점 더 긴밀해져 가고 있었으며, 서태후는 서서히 밀려나고 있었다. 그것은 두 여인의 성격 차이에 기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치제조차 철이 들고 나서는 친어머니인 서태후와는 소원해지면서 동태후와 가까워져 문안인사를 가서도 오래도록 그녀와 함께 머물곤 했다고 한다.

동태후의 죽음을 계기로 권력은 서태후에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권력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서태후는 공친왕을 제거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당시 청나라는 서구 열강들의 눈치만 보고 있었고, 공친왕은 20년 이상 외교 책임자로 일하면서 영국을 위시한 서구 열강들의 신뢰를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동태후가 사망하고 3년 후에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공하면서 그곳에 주둔 중이던 청나라 군대가 쫓겨나자 프랑스와의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 전쟁과 관련해서 서태후는 공친왕에게 책임을 물어 그를 해임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서태후의 권력 독점과 함께 거대한 제국도 몰락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서태후는 첫 위기부터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전적으로 두 나라의 문제로 간주한 다른 열강들은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이때 청나라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단결하여 놀라운 투지를 발휘해서 근대적인 프랑스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며 전쟁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서태후는 갑자기 이홍장에게 서둘러 종전 협상을 벌이도록 지시했다.각주5)

비록 이 전쟁에서 청나라의 궁극적인 승리를 원하지 않았던 서구 열강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라고 해도, 자신의 안위, 자신과 서구 제국과의 관계만을 생각해 이기고 있는 전쟁에서 굴욕적인 협상을 선택한 것이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권력이 민족적인 자긍심보다 우선이었던 것이다. 이 전쟁의 여파로 서태후는 민중들로부터의 신망을 잃게 되었지만, 달콤한 권력의 맛에 빠진 그녀는 이 점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민중들은 이제 삼두체제하의 동치중흥 시절과 달라진 점에 대해서 인식하기 시작했다. 서태후가 동태후, 공친왕과 함께 권력을 나누고 있던 시절에는 최소한 황궁 내에서의 호사로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없을 정도로 권력자들이 모두 자숙했다. 바로 이러한 점이 권력이 분산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지만 서태후는 권력을 독점하고 나서 무너져 가는 제국의 경제에 부담이 될 정도로 호사를 즐겼다.

그녀는 끼니마다 100가지의 요리를 차리도록 했다. 그러니 매일 그녀의 식비로만 은화 200냥이 지출되었는데, 당시 서민들 100명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 하루의 식비로 책정된 것이다. 또한 프랑스와의 전쟁이 클라이맥스에 있을 때, 서태후는 거금을 들여 자신의 거처인 저수궁(儲秀宮)을 신축했다. 또한 자신의 은퇴를 위해 광서제에게 명 왕조부터 조성되어 있던 황실의 휴양지인 서원(西苑)을 대대적으로 확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현재 북경의 관광 명소 중 하나인 서원은 거대한 인공호수로 삼해(三海)라는 이름으로 유명한데, 이 호수는 남해, 중해, 북해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주변에는 수많은 누각들이 건설되어 있다. 서태후는 이 삼해에 철로를 건설하고 그녀의 전용기차를 프랑스에 특별 주문해서 제작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대규모의 건설공사야 왕조의 위엄을 과시하고 후세를 위해서도 나쁠 것이 없지만, 공사 시기와 국고의 상태가 문제였다. 황실은 이 공사 대금을 모두 지불하지 못해서 공사를 책임졌던 흥륭목창(興隆木廠)각주6) 에 거액의 차용증을 써 주어야 했다. 서태후의 은퇴 이후를 대비한 건설공사에 당시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이 혼신의 노력으로 확보한 북양함대에 투입된 비용의 네 배 이상을 지출했던 것이다.

이 정도로 끝이 아니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이 종결되고 10년 후에 서태후는 환갑을 맞이했다. 그녀의 환갑잔치를 위해서 2년 전부터 거국적으로 행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바로 이 해에 청일 전쟁이 발발했다. 이홍장의 북양함대가 일본 해군의 기습을 받아 전멸하고, 일본군이 대련 항에 상륙해서 대대적인 민간인 살육과 약탈행위를 벌이고 있는 동안 서태후는 청나라 역사상 가장 호화스러운 축하연을 즐기고 있었다. 그것도 3일 동안이나 계속된 연회였다.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당한 참패는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청나라는 거액의 전쟁배상금과 함께 요동 반도까지 일본에 할양하는 조건으로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비록 요동 반도는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돌려받았지만, 백성들은 분노했다. 이제 민중들은 왕조 자체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왕조를 타도하고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자는 반제멸양(反帝滅洋)의 기치를 내걸고 의화단(義和團) 운동이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의 민중은 이 패전을 계기로 각성하기 시작했지만, 당연히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하는 서태후는 각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광서 11년에 황제는 열다섯 살이 되었다. 청나라 황실의 전통에 따르면, 이 시기가 되면 당연히 수렴청정을 거두어야 했다. 하지만 훈정(訓政)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정치에 관여하던 서태후는 광서제가 장성해서 혼례를 치른 이후에도, 또 그 이후에도 계속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재가를 하고 있었다.

청일 전쟁 당시 광서제의 나이는 스물네 살이었다. 그는 열혈청년이었다. 황제의 권위에 대한 의식도 뚜렷했고 백성들에 대한 애정도 강했던 이상주의자였다. 다만 그 이상을 실천할만한 실질적인 권력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그는 처절하게 행동했다. 광서 24년인 1898년 그는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 담사동(譚嗣同)과 같은 개혁주의자들을 중용하면서 자신의 이름으로 변법(變法)에 대한 조서를 발표했다. 스스로 의화단 운동의 중심에 뛰어든 셈이었다.

이 사건이 중국 역사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도 있었던 무술변법(戊戌變法)이고, 이 전반적인 개혁 운동을 변법자강 운동(變法自疆運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광서제의 개혁은 불과 100일 만에 좌절되고 말았다. 서태후가 야심가인 원세개(遠世凱)를 움직여 쿠데타를 일으켜 개혁파를 모두 숙청하고, 광서제를 삼해의 가운데에 위치한 조그마한 섬 영대(瀛臺)에 감금한 것이다. 그녀는 광서제를 폐하고 새로운 황제를 세우려 했으나 청나라 국민뿐 아니라 외국으로부터의 지지도 얻지 못했다.

이 쿠데타와 황제의 연금에 대해 서구 열강들이 반발하며 황제에게 통치권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자, 서태후는 이번에는 의화단의 편을 들어 서구 열강 8개국에 대해서 전격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녀의 선전포고는 서구 열강의 힘으로 의화단을 분쇄하려는 비열한 노림수였던 것이다. 청나라의 정규군과 의화단은 연합해서 서구의 군대와 전면전을 벌일 것처럼 보였지만, 한편으로 이중의 배신행위를 자행하고 있었다.

그녀는 밀사를 각국 공사관으로 파견하여 영사관을 보호할 것을 확약하면서 화의의 뜻을 은밀하게 전했다. 청나라의 정규군은 북경을 향해 진군하는 서구의 연합군을 막아설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북경은 의화단이 무장한 칼이나 창과 같은 전통무기를 제외한다면 서구의 군대에 무방비로 노출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연합군이 북경으로 진격해 오자 그녀는 변장을 한 채 광서제만 데리고 서안(西安)으로 피난을 가면서, 이홍장에게 8개국과 강화를 지시했다. 동시에 그녀는 의화단에게 우호적이었던 대신들을 모두 처형했다.

결국 의화단은 청나라의 정규군과 연합군 양쪽의 공격으로 완전히 와해되었다. 그녀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벌인 도박에 서구 열강들과 의화단이 모두 걸려들어 마치 장기판의 말처럼 그녀의 뜻대로 움직였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권력 기반이 침략자들이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광서 26년인 1900년, 서구의 열강들이 12개 조의 요구사항을 제출하자 그녀는 별다른 협상절차도 없이 모두 수용했다.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보장하기 위해서 주요 재정 수입원인 관세와 염세(鹽稅)는 모두 차압당했으며, 외국군이 주요 도시에 진주하게 되었다. 또한 청나라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중 운동을 알아서 탄압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중국사의 가장 큰 굴욕인 신축조약(辛丑條約)이다. 이 와중에 서안에 머물던 서태후는 북경에서와 같은 호화판 생활을 계속했다. 하루에 200냥씩 지출되는 식사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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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서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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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는 신축조약이 체결된 다음해에 북경에 돌아왔으며, 다시 예전의 호사스럽고 안락한 생활로 돌아갔다. 전쟁기간 중에 전면에 내세웠던 광서제는 다시 영대에 감금되었으며, 4년 후에 그곳에서 삶을 마감한다. 이제 서구 열강들은 서태후의 통치를 환영하게 되었다. 토지의 임차, 이권의 확보 등 요구하기만 하면 모두 들어주는 멋진 파트너를 싫어할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서태후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도 다수 존재한다. 인도의 경우와 비교하면서 그녀의 통치로 인해서 거대 제국 청의 멸망이 반세기 정도 늦춰졌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이 가지고 있던 힘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다. 그러한 주장들도 미국과 유럽의 학자들과 저술가들을 통해서 처음 제기되었고, 그들 밑에서 공부한 중국 출신의 유학파들이 뒤를 이었다.

인도와 중국의 역사에는 근본적으로 차이점이 있다. 인도는 중국과 같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거대한 땅이었지만,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기 이전까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된 역사가 없다. 사실 영국의 통치는 역설적으로 인도인들에게 '인도'라는 단일한 정체성을 가지게 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인도'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국주의 세력은 인도의 역사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분열과 다양성의 틈새를 파고들면서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중국은 수천 년 이상 통일된 하나의 국가 형태로 존재해 왔으며, 근본적으로 단일한 문화에 기초한 거대한 땅이었다. 단일한 문화에 기초한 거대 제국을 힘으로 정복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후일의 역사가 입증하듯이 청 제국의 몰락이 중국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제국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서태후도 이러한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권력뿐이었지 그 권력의 뿌리는 항상 민중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이 측천무후와 그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측천무후에 대한 이미지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냉혹함'일 것이다. 그렇지만 서태후의 그것은 '탐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태후는 분명히 측천무후와 같이 냉혹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통치자에게는 냉혹함보다 다스리는 사람들에 대한 무지함이 훨씬 더 큰 죄악인 것이다.

중국의 양무 운동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그 진행 과정은 메이지 유신 쪽이 훨씬 더 혼란스러웠다. 메이지 유신은 폭력과 광기가 수반된 개혁 운동이었지만, 양무 운동은 현명한 지도체제 아래 온화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양무 운동의 성과를 원점 이하로 돌려놓은 사람이 바로 자신의 탐욕과 허영에 모든 통치력을 쏟아 부은 서태후였다.

서태후의 권력욕은 끝이 없었다. 비운의 황제 광서제가 연금되고, 10년 만에 죽음을 맞이하자 그녀는 세 살 먹은 부의(溥儀)를 선통제(宣統帝)로 세웠다. 세 번째의 수렴청정을 시도하기 위해서였지만, 그녀는 선통제가 즉위하고 바로 다음날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향년 74세였다. 만약 인생의 목표가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모두 맛보고,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곳에 살면서 모든 사치를 다 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아첨을 받는 것이라면 서태후는 최고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그러한 것들을 누렸다. 그녀가 권력을 잡고 있던 기간은 48년이었으며, 권력을 독점했던 기간도 무려 28년이나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제국이 무너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통치했던 시기는 대제국을 300년 가까이 통치했던 청 왕조와 그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중국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길었던 잃어버린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