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서(草書)와 회소(懷素) 이야기





중국 한대(漢代)에 실용을 목적으로 발생한 한자체(漢字體).
초서(草書)의 기원에 대해서는 대략 4가지의 학설이 있다. 첫째, 『논어(論語)』,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의 문헌에 근거한 것이다. 『논어』에 ‘초창(草創)’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초(草)’를 ‘략(略)’의 뜻으로, ‘창(創)’을 ‘조(造)’의 뜻으로 보고 ‘초창’을 ‘초고를 대략 만든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초서의 기원을 찾는 견해이다. 초창이란 말은 뒤에 ‘초고(草藁)’란 용어로 변했다. 둘째, 진(秦) 말기에 발생하였다는 학설이다. 주로 후한(後漢)의 조일(趙壹)과 양(梁)무제(武帝)의 「초서장(草書狀)」에 보이는 초창기의 학설이다. 셋째, 서한(西漢) 초기에 발생하였다는 학설이다. 허신(許愼)은 『설문해자(說文解字)』의 서문에서 “한(漢)이 일어나자 초서가 생겨났다.”고 하였다. 이러한 학설은 자체(字體)의 연변 과정에서 설명한 것으로 설득력 있는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넷째, 사유(史游)의 「급취장(急就章)」에서 비롯하였다는 학설이다. 「급취장」의 목적은 글자의 대강을 보존하려는 것으로 당대의 유행 서체인 예서(隸書)의 필법을 간략화하여 쓴 것이라 하였다.
초서는 크게 ‘장초(章草)’, ‘금초(今草)’, ‘광초(狂草)’의 3종류로 나뉜다. 초창기의 장초에서 금초로, 금초에서 광초로 진화하였다.
‘장초’는 예서를 간략하게 쓴 데에서 비롯하였으며, 본래 ‘초’라고만 불렀다. 이 자체가 장초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은 동진(東晋) 이후에 금초가 성행하면서 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이전의 초서를 장초라고 부른 데서 연유한다. 장초라고 부르던 것이 당대(唐代)에 들어 크게 유행하면서 마침내 초서 발전의 가장 앞 단계의 서체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장초의 특징은 대략 4가지로 설명되는데, 예서나 해서처럼 글자마다 독립하여 쓰는 ‘자자구별(字字區別)’, 모든 글자를 같은 크기와 흐름으로 쓰는 ‘만자개동(萬字皆同)’, 필획(筆劃)은 끊어져 있지만 필의(筆意)는 연결되는 ‘필단의연(筆斷意連)’, 다른 서체에 비해 점을 많이 사용하는 ‘주중용점(注重用點)’이 그것이다.
‘금초’는 고초(古草)인 장초 이후에 발생한 용어이다. 서진(西晉) 이전에는 초서를 모두 장초라 하였다. 왕희지 때에 이르러 일종의 온전한 형태를 띤 초서의 전형이 만들어졌는데, 이를 금초로 불렀다. 금초의 특징은 첫째, 글자들을 연결해서 쓰는 ‘자자연락(字字連絡)’이다. 둘째, 장초가 필획을 점으로 만드는 특징이 있는 반면 금초는 점을 다시 이어서 하나의 획으로 만드는 ‘연점위획(連點爲劃)’이 있다. 셋째, 글자의 편방부수를 몇 가지로 단일화시키는 특징이 있다. 넷째, 옆으로 긋는 획의 종필(終筆)을 오른쪽으로 흐르게 뻗어 쓰는 필법인 파책(波磔)이 없는 특징이 있다. 장초는 예서의 필의를 다소 포함하고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파책이다. 그러나 금초는 이 파책을 제거하고 필의의 연면(連綿)을 강조한다. 다섯째, 한 글자가 여러 형태를 지니는 ‘일형상중(一形象衆)’의 특징이 있다.
‘광초’는 대략 당(唐) 현종(玄宗) 시기부터 발생한 초서의 한 지류이다. 수당(隋唐) 이후 초서는 실용적인 성격을 떠나 예술성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초서를 쓰는 사람은 자신의 성정을 초서에 담고자 노력하였고, 장욱(張旭)·회소(懷素) 등 광초의 명가(名家)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광초의 특징은 다른 서체에 비해 신속한 운필과 자획과 글자 사이의 연면에 있다. 또한 빨리 쓰기 때문에 그 형태가 매우 분방(奔放)하다. 광초는 전통적 기법이나 고정관념, 이성 등의 영향을 배제하고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손이 움직이는 대로 쓴다는 측면에서 20세기 초 초현실주의 회화의 자동기술법(自動記述法, [automatisme])에 비견되기도 한다.
조선시대 초서의 모습은 실로 다양하고 그 범위가 넓다. 이를 대략 3가지로 대별해보면, 첫째, 법첩(法帖)을 임서하고 자신의 서풍을 만들어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이름을 떨친 서예가의 초서를 들 수 있다. 둘째,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해 나타나는 초서 간찰을 들 수 있다. 간찰은 당시 지식인들의 문화적 소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대부분 초서로 작성하였다. 셋째, 고문서에 나타나는 초서이다.
서예가의 초서는 애초 예술적인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초서 명가로는 양사언(楊士彦), 황기로(黃耆老)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대의 윤규(尹珪)·공부(孔俯)·정구(鄭矩), 세종대의 성석린(成石璘)·신장(申檣), 단종대의 박팽년(朴彭年)·강희안(姜希顔), 명종대의 이산해(李山海), 선조대의 한호(韓濩)·정작(鄭碏) 등이 초서를 잘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간찰을 초서로 쓰는 전통은 위진남북조시대로부터 유래하였다. 간찰에 쓰인 초서는 주로 실용성에 목적이 있으며, 소자(小字) 초서의 전형이 되었다. 간찰은 개인의 안부를 사사로이 묻는 것으로 건강이나 혼례, 상례, 제사 등 주로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아주 짧게 기록한다. 따라서 간찰에서의 초서는 예술성보다는 실용적인 측면이 강하다.
고문서의 초서는 실용성이 아주 높은 서체이므로 서예가와 간찰의 초서와는 양상이 다르다. 조선시대 고문서에 나타난 초서는 그 서사자(書寫者)가 대부분 서리(書吏)였다. 서리들의 서체는 각종 상급 관서에 올리는 문서의 작성이나 서책의 등사(謄寫)에 사용한 해서(楷書)와, 어떤 사실을 적어서 내려줄 때 사용한 초서 2가지가 주류를 이룬다. 이때 초서는 주로 속기와 위조의 방지를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예술성보다는 주로 실용성을 위해 작성되었다. 한편 성종대에는 여러 아문의 아전이나 서리들이 공문서를 초서로 쓰는 현상에 대해, 초서는 옮겨 적을 때 틀리기 쉬울 뿐만 아니라 뒷날 상고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일체의 문서에 초서를 쓰지 못하도록 하였다.(『성종실록』 4년 6월 12일)
초서의 발생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행서(行書)가 출현한 뒤 이를 쓰기에 편리하고 속사(速寫)할 수 있도록 짜임새와 필획을 간략하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록상으로 볼 때, 전서(篆書)를 사용하였던 중국 전국시대에 이미 초고(草藁)라 하여 속사를 위한 초체(草體)가 있어 정체(正體)와 구별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넓은 뜻에서의 초서는 모종의 자체(字體)를 초략(草略)한 서체 모두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또한, 서체사(書體史)에서 말하는 고정된 의미의 초서도 예서(隷書)를 사용하였던 한초(漢初)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그 변천과정에 따라 장초(章草)가 선행하며 이후 금초(今草)·광초(狂草)의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장초는 예서를 간략하게 속사한 것으로 서한(전한) 원제(元帝) 때, 사유(史游)가 창안하였다고 전하며, 후세인들이 그가 쓴 『급취장 急就章』으로 인하여 이를 장초라 이름하였다 한다. 일설에는 두도(杜度)가 만든 것으로 동한(후한) 장제(章帝)가 이를 애호하여 장초라 하였다고도 전하나, 모두 신빙할 수 없다.
이 밖에 당(唐)장회관(張懷瓘)은 한 장제와 위(魏)문제(文帝)가 초서로 장주(章奏)하라 하였으므로 장초라 이름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후 송(宋) 황정견(黃庭堅)·미불(米巿) 등의 명서가와 대부분의 소학가(小學家)들이 이 설을 따르고 있어 믿을 만한 설로 본다.
장초는 예초(隷草)·급취(急就)라고도 하는데, 예서 필획의 특징인 파책(波磔)이 남아 있으며 글자가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
근래에 출토된 한대의 목간(木簡)은 초기의 장초로서 아직 일정한 규범은 정하여지지 않고 있으나, 동한의 장지(張芝)에 이르러 점차 정리되며 위진시대에 이르면 더욱 정비되어 장초의 규범이 이루어진다.
장초의 법첩(法帖)으로는 사유의 『급취장』과 『순화각첩 淳化閣帖』에 실린 장지·황상(皇象)·삭정(索靖) 등의 장초가 대표적이며, 근래 돈황(敦煌)·누란(樓蘭)·거연(居延) 등지에서 발견된 한·위진의 목간은 장초의 실물사료로 매우 귀중하다.
금초는 오늘날 흔히 사용되는 초서로, 장지가 장초에서 파책을 제거하고 글자 상하의 혈맥(血脈)을 이어 창안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동진시대 왕희지(王羲之)·헌지(獻之) 부자에 의하여 금초는 극치를 이루어 후대의 표준이 되었다. 금초의 법첩으로는 장지로부터 왕희지·헌지에 이르는 명서가들이 모두 초서에 뛰어나 『순화각첩』 등의 집첩(集帖)에 많이 실려 있으며, 독첩(獨帖)으로 왕희지의 『십칠첩 十七帖』 등과, 쌍구본(雙鉤本)으로 왕희지의 『상란첩 喪亂帖』, 왕헌지의 『지황탕첩 地黃湯帖』 등이 다수 전한다.
그 뒤 진수대(陳隋代) 지영(智永)의 『천자문 千字文』, 당 손과정(孫過庭)의 『서보 書譜』가 유명하다. 이 밖에 당의 장욱(張旭)·안진경(顔眞卿)과 송의 황정견·미불, 원(元)의 조맹부(趙孟頫), 명(明)의 동기창(董其昌)·미만종(米萬鍾) 등 역대의 명서가들 중에 금초에 뛰어난 인물이 많았다.
광초는 당 장욱에서 비롯된 것으로, 위진시대 이래 왕희지의 전통적인 초서필법에서 벗어나 술이나 자연계의 현상으로부터 정서(흥취)나 영감을 불러일으켜 광사(狂肆)하게, 즉 방종(放縱)한 태도로 썼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당 회소(懷素)가 개성적인 광초서풍을 이루었다. 광초의 대표적인 예로는 장욱의 『자언첩 自言帖』과 회소의 『자서첩 自言帖』이 있다.
한편, 금초에 관련된 용어로 독초(獨草)와 연면초(連綿草)가 있다. 전자는 글자마다 필획이 단독으로 떨어진 것을 말하며 후자는 여러 글자의 필획이 서로 이어진 것을 말한다.
또, 반초(半草)와 전초(全草)가 있는데, 전자는 행서와 초서 사이 정도로 흘려 쓴 것으로 특히 왕헌지가 이에 뛰어났다고 하며, 행서와 초서를 섞어 쓴 행초(行草)와 혼용되기도 한다. 후자는 상대적으로 모두 초서로 쓴 것을 이른다.
또한, 대초(大草)와 소초(小草)가 있는데, 전자는 자형이 크고 필획이 매우 간단한 것으로 광초에 가깝다고 하겠으며, 후자는 비교적 자형이 작고 필획이 단정하여 알아보기 쉬운 것을 말한다. 이 밖에 유사초(遊絲草)라 하여 필획이 실처럼 가늘고 실테처럼 이어지는 유희적 글씨도 있는데 송 오열(吳說)이 유명하다.
참고로 초서는 필사의 속도, 먹의 활삽(滑澀), 자형의 크기, 필획의 곡직(曲直), 점획의 태세(太細), 짜임의 소밀(疎密) 등의 변화가 오체(五體) 중 가장 심하고 다양하여 작가에 따라 개성이 잘 드러난다. 더욱이, 작품용으로 의식하지 않고 쓴 편지나 문고(文稿)류 등에서 오히려 진면목을 살필 수 있기도 하다.
우리 나라에는 한자의 전래와 함께 중국의 서법이 들어왔으나 초서 발달의 초기 과정을 보여 주는 유물은 없다. 이후의 초서 진적은 고려까지 수종에 불과하며, 더욱이 금석문에서는 초서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 까닭에 전하는 예가 없어, 서예사 서술의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단지, 삼국 말기부터 고려까지에 걸쳐 행서로 된 금석문 중에서 왕희지풍이 주류를 이루고 그 품격도 높았음을 볼 때 초서도 왕풍(王風)을 근간으로 유행되었으리라 추측된다.
또한, 고려 말 조선 초에 유행한 조맹부체 역시 왕희지체를 전형으로 삼은 것이므로 크게는 왕체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겠다.
이후 서적(書蹟)이 그나마 남아 있는 조선 초기·중기의 초서로 이름난 최흥효(崔興孝)·이용(李瑢)·김구(金絿)·이황(李滉)·황기로(黃耆老)·양사언(楊士彦)·한호(韓濩) 등도 대략 왕희지풍의 전통적 초서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최흥효와 이용은 조맹부체의 영향이 배어 있으며, 이황은 단아하고 기품 있는 독초를, 황기로는 회소풍을, 양사언은 활달하고 연면성이 강한 초서풍을 각각 이루었다.
후기를 대표하는 윤순(尹淳)은 청아한 미불풍을, 신위(申緯)는 단정한 동기창풍을 이루는 등 다양한 초서가 나타났지만, 저변을 이루는 초서풍은 역시 진대(晉代)의 전통적인 초서였다.
이후 18세기 후반에 중국으로부터 비학(碑學)의 전래로 전서·예서에 대한 관심이 쏠리면서 초서의 예술성이 상대적으로 위축된 감은 없지 않으나, 여전히 일상생활에서 초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근래에 들어와 한글 교육과 필사도구의 발달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한자교육이 점점 퇴보되고 한문을 이해하는 계층이 엷어짐에 따라, 초서는 생활에서 멀어지고 어렵게 느껴졌으며, 단지 예술 분야에서 서예가들의 창작대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아울러 상당 부분이 초서로 작성된 고문서를 해독할 수 있는 인력 또한 격감되어 국학(國學)연구를 위한 기초 작업에도 적지 않은 장애요인이 되었다.
역대 서예가들의 작품중 초서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회소의 자서첩> 탁본을 구입했습니다.
장욱과 더불어 광초의 달인으로 꼽히는 회소의 초서는 <장욱의 반야심경>탁본과 대비해 볼 때 참으로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얼마 전에 <천금첩>이라 불리는 <회소의 초서 천자문> 탁본을 소개했습니다만 이 탁본과 함께 회소의 초서가 얼마나 훌륭한지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글씨는 비록 탁본으로나마 볼 수 있다는 것이 서예를 하는 입장에서 무한한 행운이며, 한 번 보는 것 만으로도 눈높이가 확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회소(懷素)의 성은 전(錢)씨이며 자는 장진(藏真)으로 회소는 그의 법명이다. 호남성(湖南省) 영릉현(零陵縣)에서 태어나 훗날 장사(長沙)로 옮겨왔다.
어려서부터 불교를 신봉하여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초서 예술에 심취하였다. 대력(大曆) 7년(772)북쪽 지방으로 가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에서 발전의 기회 찾았다.
개성이 탈속하고 초서에 매우 탁월하여 안진경(顏真卿) 등 서예가와 시인 등 당시 명류(名流)와 귀족들의 찬송을 받았고 다투어 시를 증정하였다.
대력 12년(777)증정 받은 시와 서문을 뽑아서 광초(狂草)로 써서 완성하는데 바로 이 자서첩이다
이 작품에서 회소는 가는 붓으로 큰 글씨를 쓰고 있다. 둥글고 강건하며 기세가 좋은 필치는 마치 둥글리고 구부려진 철강선과 같고, 필획의 시작과 마무리가 갈고리나 바늘같이 예리한데 ‘철강과 같은 당당한 기세와 은과 같은 부드러운 필체(鐵畫銀鉤)’가 융합한 것과 같음을 일컫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어지는 초서의 기세를 강조하고 있는데 운필에 있어서 상하좌우로 종횡무진하며 기복이 요동치는 듯 하지만 그 중에 빠른 것과 느린 것이 있고 또 가벼운 것 무거운 것이 있어 마치 박자가 분명한 음악 선율처럼 동감이 풍부하다.
서로 떨어져 있는 필과 획들이 끊어짐이 없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필세(筆勢)를 형성하며 글자와 행, 행과 행 사이 점과 획들도 서로 호응하고 있다. 이 작품은 법도를 지키면서도 자유롭고 변화무쌍하여 초서 예술의 최고 경지를 표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自敍帖
1. 懷素家長沙하고 幼而事佛하며 經禪之暇에 頗好筆翰이라 然恨未能遠覩前人之奇迹하고 所見甚淺하여 遂擔笈杖錫하고 西遊上國하여 謁見當代名公하고 錯綜其事하니 遺編絶簡을 往往遇之하고 豁然心胸하여 略無疑滯하다 魚牋絹素에 多所塵點을 士大夫不以爲怪焉이라.
懷素1)는 長沙2)에서 살았고, 어려서 부처를 섬겼으며, 讀經과 參禪하는 여가에 매우 글쓰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멀리 전인들의 기이한 자취를 보지 못하고, 볼 수 있는 것은 매우 淺近함을 한탄하여, 마침내 책 상자를 메고 錫杖3)을 집고, 서쪽의 上國(洛陽)을 유람하여, 그 당시의 明公을 만나보고, 그 일을 錯綜4)하게 되었으니, 남아있는 책과 끊겨진 편지들을 때때로 보고, 마음을 豁然하게 하여 전혀 막힌 것이 없게 되었다. 魚箋5)과 흰 비단에 많은 얼룩진 점들을 士大夫들은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2. 顔刑部는 書家者流이며 靜極筆法하다 水鏡之辨(喩)은 許在末行이라 又以尙書는 司勳郞盧象과 小宗伯張正言으로 曾爲歌詩하여 故敍之曰 開士懷素는 僧中之英으로 氣槩通疎하며 聖靈豁暢하다. 精心草聖하야 積有歲時하더니 江嶺之間에 其名大著라 故吏部侍郞偉公陟은 覩其筆力하고 勖以有成하다 今禮部侍郞張公謂 賞其不羈하여 引以遊處하며 兼好事者同作歌以贊之하니 動盈卷軸이라하다.
顔刑部6)는 書家者의 流派이며, 필법에 精密하고 至極하였다. 水鏡7)의 辨은 末行에 있다. 또한 尙書(:刑部尙書,稱顔眞卿)는 司勳郞盧象8)과 小宗伯張正言9)과 함께 한때 시가를 지었기 때문에 서문에 말하기를, “開士(보살)인 懷素는 중 가운데에 영재로, 氣槩가 通疎10)하며, 性靈이 널리 통하였다. 草聖11)에 오로지 마음을 갖고 여러 세월동안 계속 하더니, 江嶺12)의 사이에 명성이 크게 떨쳤다. 故人인 吏府侍郞韋公陟13)은 그의 필력을 보고서 힘써 성취함이 있게 하였다. 현재 禮部侍郞張公謂는 그가 拘束되지 않음을 讚揚하고, 그를 이끌고 유람하며 쉬었다. 아울러 好事者들과 함께 시가를 지어 贊하니, 순식간에 卷軸(권축: 두루마리)을 채웠다.”
3. 夫草藁之作은 起於漢代에 杜度․崔瑗是以妙聞하고 迨乎伯英尤擅其美라. 羲․獻玆降엔 虞․陸相承하여 口訣手授하여 以至吳郡長旭하다. 長史 雖姿(資)性顚逸하고 超絶古今하나 而模楷精法1)詳하여 特爲眞正이라.
草藁(:草書)2)가 쓰여 진 것은 漢代에서 시작되었고, 杜度3)와 崔瑗4)이 매우 뛰어난 명성이 있었고, 伯英5)에 이르러서 그 명성이 더없이 우뚝 솟았다. 羲之6)와 獻之7)이후에는, 虞世南8)과 陸柬之9)가 서로 이어서, 口訣을 손으로 전하여, 吳郡의 張旭10)에 까지 이르렀다. 長史(:張旭)은 資質과 天性이 顚逸11)하여 고금에 가장 뛰어났으나, 楷書를 익힘이 精密하고 仔詳하여 특히 眞正이라 했다.
4. 眞卿早歲에 常接遊居하고 屢蒙激昻하여 敎以筆法하나 資質劣弱하며 又嬰物務하여 不能懇習하여 迄以無成하다 追思一言하니 何可復得이리오. 忽見師作인데 縱橫不群하고 迅疾駭人하니 若還舊觀이라. 向使師得親承善誘하고 函揖規模하면 則入室之賓은 捨子奚適리이다. 嗟歎不足하여 聊書此以冠諸篇首하노라.
顔眞卿은 일찍부터 항상 한가하게 거처하며, 자주 激昻(마음속에 분발하여 감정이 고조됨.)하여 필법으로 가르침을 입었으나, 자질이 용렬하고 나약하며, 또한 당면한 일에 얽매여, 능히 정성 들여 익히지 못하고, 끝내는 이루지 못했다. 一言을 미루어 생각하니 언제 다시 얻겠는가? 문득 스승(張旭)의 작품을 보았는데, 자유자재하여 뛰어나고, 글씨를 신속히 쓴 것이 사람을 놀라게 하니, 마치 옛날에 보던 때로 돌아온 것 같다. 가령 스승으로부터 친히 가르침과 인도함을 받고, 規模(書法)를 函挹(남모르게 취하다.)할 수 있다면 入室之賓12)은 스승을 버리고 어디론가 갈 것이다. 嗟歎하여도 부족하여 더욱이 이를 써서 글의 첫머리에 올린다.” 라고 하였다.
5. 其後繼作不絶하여 溢乎箱篋하다 其述形似엔 則有張禮部니 云奔蛇走虺勢入座하고 聚雨旋風聲滿堂이라하다.
그 후에도 계속하여 글 쓰는 것이 끊이지 않아 箱篋(상자)에 넘쳤다. 그 形式과 外觀이 비슷함을 저술한 것에는 張禮部(張謂)가 있으니, 이르기를 “나르는 뱀과 달리는 이무기의 형세가 자리에 들어오고, 소나기와 회오리바람 소리가 집에 가득하다.”라고 하였다.
6. 盧員外는 云初疑輕煙澹古松요 又似山開萬仞峰이라하다.
盧員外(盧象)은 이르기를, “처음에 가벼운 안개는 澹澹(담담)한 古松인가 여기고, 또한 산이 열리게 되니 萬仞의 봉우리와 같다.”라고 하였다.
7. 王永州邕 曰寒猿飮水撼枯藤하고 壯士拔山伸勁鐵이라하다.
王永州邕1)은 이르기를, “ 추운 원숭이는 물을 마시며 마른 등나무를 흔들고, 壯士는 산을 뽑아 강철을 伸張한다.”라고 하였다.
8. 朱處士遙(逵) 云筆下唯看激電流요 字成只畏盤龍走(去)이라하다.
朱處士遙2)는 이르기를,“글을 쓰는 신속함이 오직 번개 치는 것을 보는 것과 같고, 글자의 완성은 서려 있는 龍이 가려고 하는 자태를 心腹한다.”라고 하였다.
9. 敍機格엔 則有李御使舟니 云昔張旭之作也에 時人謂之張顚이라하고 今懷素之爲也에 余實謂之狂僧이라하다. 以狂繼顚인데 誰曰不可리오하다.
機格(格式)을 서술하는 데에는 李御史舟3)가 있는데 이르기를, “옛날에 張旭이 글을 씀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張顚이라고 불렀고, 지금 懷素가 글을 쓰니, 나는 실로 그를 狂僧이라고 불렀다. 狂(懷素)이 顚(張旭)을 잊는데, 누가 아니라고 말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10. 張公 又云稽山賀老粗知名이나 吳郡張顚曾不面(易)이라하다.
張公(張謂)은 또한 이르기를, “稽山賀老4)는 대략 그의 이름을 알고 있으나, 吳郡의 張顚은 아직도 보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11. 許御史瑝(瑤) 云志在新奇無定則이오 古瘦灕纚半無墨이라 醉來信手兩三行는 醒後却書書不得이라하다.
許御史瑤1)는 이르기를, “意志가 新奇에 있으니 일정한 법이 없고, 古瘦(나이가 많아 쓴 획이 가느다란 것)는 灕纚(스며들어 이어지는 것)하여 반은 먹물이 없더라. 술기운에 손 가는 데로 쓴 두서너 줄의 書는, 술이 깬 후에는 오히려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12. 戴御史叔倫 云心手相師勢轉奇하니 詭形怪狀飜合宜라 人人欲問此中妙나 懷素自言初不知이라하다.
戴御史叔倫2)이 이르기를, “마음과 손이 서로 본받아 筆勢가 기이하게 변하여, 怪異한 형상을 해도 도리어 서법에 합치되더라. 사람들은 이 가운데 오묘함을 물으려 했으나, 懷素자신은 말하기를, ‘처음부터 알 수 없다.’ ”라고 하였다.
13. 語疾速엔 則有竇御史冀니 云粉壁長廊數十間에 興來小豁胸中氣하야 忽然絶叫三五聲하니 滿壁縱橫千萬字이라하다.
빨리 쓰는 것을 말함엔 竇御史冀3)가 있었으니 말하기를, “석회 바른 긴 행랑 수십 간에 興이 일어 가슴속의 氣가 다소 소통된다. 忽然히 三五 聲을 絶叫하니, 벽안에 縱橫으로 천만 자가 가득했다.”라고 하였다.
14. 戴公 又云馳毫驟墨列奔駟하니 滿座失聲看不及이라하다.
戴公(戴叔倫)은 또한 이르기를, “몰아치는 붓과 먹물은 달리는 사륜 말을 列擧하니, 가득히 앉은 사람은 숨을 죽이고 보았으나 미치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15. 目愚劣엔 則有從父司勳員外郞吳興錢起니 詩云遠錫(鶴)無前侶하고 孤雲寄太虛로다 狂來輕世界하고 醉裏得眞如이라하다.
愚劣을 지목하는 데는 從父司勳員外郞吳興錢起1)가 있었으니, 이르기를,“遠錫은 전에도 벗할 것이 없고, 외로운 구름은 太虛(하늘)에 기대고 있다. 狂(懷素)이 와서 세계를 경시하고, 취중에 眞如(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얻었다.
16. 皆辭旨激切하고 理識玄奧하여 固非虛蕩之所敢當하다 徒增愧畏耳이로다.
모두 말한 뜻이 지극히 간절하고, 理解와 認識이 깊고 奧妙하여, 진실로 虛蕩(허랑 하고 방탕함)한 말이 감당 할 바가 아니다. 다만 부끄럽고 두려움을 더할 뿐이다.
時는 大曆丁巳冬十月卄有八日이다.
때는 대력(大曆) 정사(丁巳: 777)年 겨울 10月 28日 이다.
인물탐구 ; 회소(懷素, 725년~785년)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 술을 좋아해서 만취한 상태로 붓을 종횡으로 놀려 연면체(連綿體)의 초서 즉 광초(狂草)를 잘 썼다고 한다. 필적으로 《자서첩》, 《초서천자문》, 《성모첩》등이 남아 있다.
원래는 승려로, 자는 장진(藏眞), 속성(俗姓)은 전씨(錢氏)이다. 창사[長沙] 출생. 일찍이 불문에 들어갔으며 어려서부터 서도를 좋아하여 연찬(硏鑽) 끝에 일가를 이루었다. 초서로는 그 당시 장욱(張旭) 다음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술을 좋아해서 만취가 되면 흥에 못 이겨 붓을 종횡으로 놀려 연면체(連綿體)의 초서, 즉 광초(狂草)를 잘 썼다고 한다.
필적으로 《자서첩(自敍帖)》 《초서천자문》 《성모첩(聖母帖)》 《장진첩(藏眞帖)》 등이 남아 있다.
<회소의 초서를 찬양한 시>
회소스님의 초서를 노래하다 / (懷素上人草書歌)
소환(蘇渙)
張顚沒在二十年 장욱이 세상을 떠난 지 어언 20년
謂言草聖無人傳 초성의 글씨 전하는 이 없다고 하네.
零陵沙門繼其後 영릉의 스님인 회소가 그 뒤를 이어
新書大字大如斗 새로 쓴 큰 글씨는 말만큼 크네.
興來走筆如旋風 흥이 일어 휘호하면 회오리바람 이는 것 같고
醉後耳熱心更凶 술 마신 후 취기 오르면 마음 더욱 거세지네.
忽如裴旻舞雙劍 문득 배민이 쌍 칼춤 추는 것 같이
七星錯落纏蛟龍 칠성보검은 검법이 교룡을 휘감아 놓은 듯.
又如吳生畵鬼神 또 오도자가 귀신을 그린 것 같아
魑魅魍魎驚本身 도깨비와 괴물이 놀라게 하는 듯.
鉤鎖相連勢不絶 획과 획이 필세는 끊어지지 않고
倔强毒蛇爭屈鐵 꿋꿋하고 굳세어 독사가 굴철을 다투는 듯.
西河舞劍氣凌雲 서하검기라는 칼춤을 본 후
孤蓬自振唯有君 초서 필법 깨달은 자 오직 그대뿐이네.
今日華堂看灑落 오늘 대청에서 얽매임 없는 글씨를 보고
四座喧呼嘆佳作 사방에 앉은 이들 소리 내어 감탄하네.
回首邀余賦一章 머리 돌려 나에게 시 한 수 지어 달라 하니
欲令羨價齊鍾張 성망의 지위를 종장과 나란히 올리고자 하였네.
琅誦○句三百字 시구 300자를 또랑또랑 낭송하나
何似醉僧顚復狂 어찌 취승이 쓴 광초와 같겠는가?
忽然告我游南溟 갑작스레 나에게 광주 유람 간다고 알리기에
言祈亞相求大名 아상인 서호를 만나 명성 얻기를 기원하였네.
亞相書翰凌獻之 서호의 붓글씨는 왕헌지를 능가하니
見君絶意必深知 그대를 보면 반드시 깊이 알아주리라.
南中紙價當日貴 남방의 종이 가격 당일로 비싸질 것이고
只恐貪泉成墨池 단지 탐천이 묵지가 될까 걱정스러울 뿐이라네.
스승 회소의 초서를 노래하다
(懷素師草書歌) / 마운기(馬雲奇)
懷素才年三十餘 회소 나이 30이 넘도록
不出湖南學草書 호남에서 초서를 공부 하였네.
大夸羲獻將齊德 이왕을 칭찬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였지만
切比鍾繇也不如 내심 종요와 비교하니 미치지 못하네.
疇昔闍梨名蓋代 도리의 명성은 세상에서 으뜸이었고
隱秀于今墨池在 지금의 묵지에서도 그윽한 품위가 있네.
賀老遙聞怯後生 하지장의 칭찬소리가 멀리에서 들리고
張顚不敢稱先輩 장욱은 스스로를 선배라고 기업렵다 하네.
一昨江南投亞相 일전에 강남에서 아상에게 의탁하여
盡日花堂書草障 종일 화려한 대청에서 가리개에 초서를 썼었네.
含毫勢若斬蛟龍 필호의 기세는 교룡을 벨 듯하고
挫管還同斷犀象 필관의 움직임은 코뿔소 뿔을 자를 덧하네.
興來索筆縱橫掃 흥이 나면 붓을 찾아 종횡으로 휘호하니
滿望詞人皆道好 성망이 높은 문인들 칭찬이 대단하였네.
一點三峰巨石懸 점획의 기운은 낭떠러지 바위 같고
長畵万歲枯松倒 필획은 고송의 기세로세.
叫噉忙忙禮不拘 술 마시고 취함이 구속 받지 않았으며
萬字千行意轉殊 수많은 작품들은 변화와 남다른 운치가 있네.
紫塞傍窺鴻雁翼 큰기러기 날개 같이 빼어난 자태
金盤亂撒水晶珠 금 쟁반에 수정 구슬처럼 진귀한 가치로세.
直爲功成歲月多 공적은 수많은 세월도 같이하여
靑草湖中起墨波 청초호에 먹물 물결 일어났네.
醉來只愛山翁酒 술 취하면 오직 취옹됨을 좋아하고
書了寧論道士鵝 서작은 차라리 도사의 거위와 같이 여하네.
醒前猶自記華章 깨기 전에도 여전히 화려한 시문을 기록하고
醉後無論絹與墻 술 취한 후에는 비단과 담장을 가리지 않네.
眼看筆掉頭還掉 시선은 붓 가는대로 따라가고
只見文狂心不狂 외형은 제멋대로 인듯하나 흐트러짐 없네.
自倚能書堪入貢 작품 실력은 황제에게 바칠 자신이 있었지만
一盞一回捻筆弄 술 한 잔 마시고는 붓을 잡고 놀았네.
壁上颼颼風雨飛 벽에 쌩쌩 비바람 나리더니
行間屹屹龍蛇動 행간은 용과 뱀이 꿈틀거리네.
在身文翰兩相宜 작품은 문장과 필묵이 서로 잘 맞으며
還如明鏡對西施 또한 거울상의 서시를 보는 것 같네.
三秋月澹靑江水 9월의 달빛 가늘고 강물은 푸르고
二月花開綠滿枝 2월의 꽃 피고 가지는 녹색이라네.
聞道懷素西入秦 회소가 서쪽 진나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客中相送轉相親 여행 중에도 배웅하여 서로 가까워졌네.
君王必是收狂客 임금이 반드시 회소를 받아들인다고
寄語江潭一路人 강가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전하네.
이 시는 회소가 서호(徐浩)에게 의탁한 후 장안(長安)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마운기가 지었다. 회소의 뛰어남을 들은 작가는 회소를 만나 그의 초서를 직접 확인하고 감동하여 회소를 스승으로 모시고 시를 바쳤다. 당나라 시대에는 아주 뛰어난 서예가가 많았고 또 왕후장상이나 문인묵객의 칭찬을 받은 서예가도 매우 많았다. 그러나 당시 문인묵객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은 바로 회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