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연구

알렉산더 대왕/ 동방원정 

박송 입니다. 2019. 9. 19. 10:14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데모스테네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필립포스 왕이 죽고 나이 어린 알렉산더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그리스의 여러 도시에 알려지자, 반(反)마케도니아주의자인 데모스테네스는 독립을 되찾을 기회가 왔다고 웅변을 토했다.

"그리스의 자유와 독립을 다시 쟁취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저 야만스러운 마케도니아를 물리칠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 웅변에 감동된 여러 도시들이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것을 알아차린 알렉산더는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중부 그리스의 요지인 코린토스를 점령해 버렸다. 너무도 재빠른 공격에 놀란 그리스인들은 당황하여 싸움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항복하고 말았다. 알렉산더는 코린토스에서 그리스 도시들의 전체회의를 열어, 필립포스 왕 때 체결했던 코린토스 동맹 조약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북방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알렉산더는 급히 그리스로부터 군대를 빼내어 도나우 강을 건너서 트라키아를 공격했다. 그때 그리스에는 알렉산더가 북방에서 전사했다는 헛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러자 테베는 아테네와 결탁하여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알렉산더는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악물었다.

"이놈들 두고 보자, 내 이번에는 본때를 보여주리라."

그는 대군을 이끌고 급히 남하하여 그리스로 향했다. 그는 테르모필레를 넘어 테베의 영역에 들어서며, 반란의 주모자를 스스로 넘겨주고 항복하면 용서해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테베는 이 제안을 가볍게 물리치고 오히려 다른 도시들을 향해 자기들에게 협력하여 그리스의 자유를 되찾자고 외쳐댔다. 알렉산더는 더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저항하는 테베인들을 철저하게 응징했다. 이 전투에서 테베는 6천 명의 전사자를 내고 함락되었다. 마케도니아 군대가 시내에 들어오자 약탈과 파괴행위가 무자비하게 자행됐으며, 3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팔아버렸다. 이때 테베 시는 거의 다 파괴되었는데, 시인이던 핀다로스의 집만은 파괴되지 않았다. 핀다로스는 호메로스와 더불어 알렉산더가 가장 존경하는 시인이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더가 이토록 가혹하게 테베를 응징한 것은 자신에게 반항하는 자는 이렇게 된다는 본보기를 다른 도시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다시는 반란을 꾀하지 못하게 한 행동이었다. 결국 알렉산더의 예상대로 아테네가 스스로 항복을 청해오자, 아테네에 대해서는 관대한 처분을 했다.

델포이 신전

가장 영험한 것으로 알려졌던 델포이의 신탁소는 그리스 종교 동맹의 공유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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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2년여에 걸쳐 그리스 및 마케도니아의 북방을 안정시킨 알렉산더는 자신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코린토스 동맹군을 이끌고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그 당시의 관습대로 떠나기에 앞서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 신탁을 받으러 갔다. 그런데 그가 델피에 도착한 날은 불길한 날이어서 신탁을 받을 수 없었다. 신관은 문을 닫고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알렉산더는 신관을 강제로 끌어내어 신전으로 데리고 갔다. 신관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했다.

"당신은 절대로 지지 않을 사람이군요."

알렉산더는 이 말을 듣고는 외쳤다.

"이제 신탁은 필요 없다. 그 말이 내가 바라던 신탁이로다!"

이듬해인 기원전 334년 봄, 그는 대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트 해협각주1) 을 건넜다. 그의 원정군은 보병 3~4만, 기병 3~5천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식량은 겨우 한 달 정도 버틸 수 있는 양이었고, 군자금 또한 부족한 형편이었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자신의 전 재산을 전쟁비용으로 내놓으면서 말했다.

"나는 희망만 가지면 된다."

그는 소아시아 땅에 들어선 뒤, 제일 먼저 트로이의 유적을 찾았다. 그곳에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즐겨 읽던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스의 무덤이 남아 있었다. 알렉산더는 무덤 앞에 기름을 바치고 화관(花冠)을 놓으며 아킬레스를 칭송하였다.

"당신은 살아서는 파트로클로스와 같은 좋은 친구가 있었고, 죽어서는 호메로스와 같은 위대한 시인이 당신의 공을 후세에 전하니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구려."

알렉산더의 군대가 페르시아군과 처음으로 충돌한 곳은 그라니코스 강가였다. 그 강은 깊고 물살이 셌는데, 강 저편의 높은 벼랑 위에서는 페르시아 대군이 알렉산더의 군대가 강을 건너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살의 급격함을 알고 알렉산더의 부하들은 함부로 강을 건너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기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윽고 알렉산더가 빗발치는 페르시아군의 화살을 뚫고 강을 건너 벼랑을 오르기 시작했다. 페르시아군은 희고 커다란 새의 깃털을 단 투구를 쓴 그를 알아보고는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그때 적병이 던진 창이 그의 가슴에 와서 부딪쳤으나 상처를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계속해서 적장 두 명이 뒤에서 일시에 그에게 덤벼들었다. 알렉산더는 한 명을 창으로 찔러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으나, 그만 창이 부러져버렸다. 그때 다른 적장이 그를 향해 칼을 힘껏 내리쳤다. 다행히 그 칼은 투구에 맞아 장식만 떨어져 나갔을 뿐 다치지는 않았다. 실패한 적장이 다시 알렉산더를 공격하려는 순간 마케도니아의 용장 클레이토스가 달려와 창으로 적장의 가슴을 찔러 왕을 구해냈다.

이렇게 알렉산더의 기병대가 고전을 하면서도 적장 두 명을 쓰러뜨리자 페르시아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반면 때맞춰 강을 건너온 마케도니아 보병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페르시아군은 차츰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무너져 앞을 다투어 달아났다. 그라니코스에서 대승한 알렉산더는 손쉽게 소아시아를 평정해 나갔다.

고르디온

지금의 터키 앙카라 지방. 고대 프리지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고르디온의 매듭의 무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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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싸움에서 승리하자 소아시아 연안의 도시들이 대부분 저항 없이 항복하였고, 알렉산더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알렉산더의 원정군이 고르디온이란 곳을 지날 때 신전 기둥에 복잡한 매듭이 매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지방에는 그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의 지배자가 된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 전설을 들은 알렉산더는 단칼로 그 매듭을 내리쳐서 풀어버렸다. 결국 그는 그 칼로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가 고르디온을 떠나 소아시아의 동남쪽으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다리우스 3세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알렉산더를 이수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그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으니, 그것은 바로 알렉산더가 큰 병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알렉산더는 그때 큰 병에 걸려 휴양하고 있었다. 그런데 알렉산더의 주치의들은 아무도 대왕에게 약을 권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약을 먹고 잘못이 생긴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필립포스라는 의사가 용기를 내어 알렉산더에게 약을 권했다. 그런데 필립포스가 들어오기 조금 전에 알렉산더한테는 어느 장군으로부터 비밀편지 한 통이 전해졌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의사 필립포스는 페르시아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았습니다. 그는 또한 페르시아의 왕녀와 결혼을 시켜주는 조건으로 대왕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것 같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알렉산더는 이 편지를 아무도 몰래 베개 밑에 감춰 두었다. 잠시 후 필립포스가 약을 권하자 알렉산더는 베개 밑에서 그 편지를 꺼내어 필립포스에게 보여주었다.

"필립포스, 이 편지를 보게."

그러고는 약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편지를 읽고 다른 한 사람은 약을 마시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알렉산더의 얼굴은 환하게 피어났으나, 필립포스의 얼굴은 새파래졌다. 필립포스는 두 손을 내밀고 엎드리며 알렉산더에게 말했다.

"이 편지의 내용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알렉산더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필립포스, 걱정하지 말아라."

그러나 그 약은 독한 약이었다. 대왕은 한때 의식을 잃고 인사불성이 되었으나, 차츰 제정신이 돌고 병세가 호전되었다. 건강을 회복한 알렉산더는 시리아를 떠나 다리우스가 기다리고 있는 이수스로 진군했다. 이수스란 곳은 산이 바다와 접해 있고 강이 흐를 뿐 아니라, 땅이 울퉁불퉁해서 다리우스와의 싸움에는 불리한 지세였다.

이수스 전투

폼페이에서 출토된 기원전 3세기경의 모자이크. 알렉산더 대왕과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의 싸움을 묘사한 것이다. 이 싸움으로 알렉산더는 아시아 정복의 길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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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지세에서는 페르시아가 자랑하는 기병대도 제대로 활동할 수가 없었다. 그 약점을 노린 알렉산더는 보병을 몰고 자신이 선두가 되어 맹렬한 공격을 개시했다. 페르시아군은 알렉산더 군대의 용맹 앞에 쩔쩔매며 대열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알렉산더는 이것을 보고 다리우스를 사로잡으려 적의 본진을 향하여 뛰어 들어갔다. 이때 그는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다리우스를 쫓았으나 잡지는 못하였다. 이수스에서의 전쟁은 마케도니아의 대승리였고, 많은 전리품도 얻게 되었다. 다리우스의 천막 속에는 황금으로 된 욕조며, 향유, 항아리, 훌륭한 가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이것을 본 알렉산더는 놀라워하며 넋을 잃었다고 한다.

다리우스는 워낙 급하게 도주하느라 자기의 가족들도 내버려두고 혼자만 가버렸다. 다리우스의 모후, 왕비, 왕녀 등이 모두 포로가 된 것이다. 알렉산더는 이들을 친절하게 대해 주면서 그들이 지금까지 누리던 왕족으로서의 생활을 계속 누리게 해주었다.

이수스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알렉산더는 옛부터 페르시아 해군의 근거지였던 페니키아 지방을 평정했다. 이때 대부분의 도시들은 쉽게 항복을 했지만 티루스(Trus)라는 도시만은 예외여서 알렉산더의 군대가 이 성을 함락시키는 데 7개월이 걸렸다. 티루스를 함락시킨 알렉산더는 예전에 테베에게 가했던 것처럼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시민들을 노예로 팔아버리는 가혹한 보복을 행했다.

그 후로는 별다른 저항 없이 곧바로 이집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당시 페르시아의 가혹함에 치를 떨었던 이집트는 알렉산더를 해방자로 환영하면서, 그에게 이집트의 왕임을 나타내는 파라오(Pharaoh) 칭호를 바쳤다. 이때 알렉산더는 토양이 좋은 나일 강의 델타 지역에 그리스식의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게 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 불렀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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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해에 그는 식수부족과 모래바람 때문에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리비아 사막을 횡단하여 시바의 오아시스에 있는 아몬 신전을 참배하러 갔다. 그가 어째서 그렇게 위험한 행군을 하면서까지 아몬 신전을 찾았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여하튼 그는 아몬 신전에서 행한 신탁에서 '신의 아들'이란 신탁을 받았다. 그곳의 신은 이집트의 국가적인 태양신 숭배와 융합되어 뒤에는 아몬-레라 불린 신으로서, 그리스의 제우스에 해당하며, 그 신탁은 예전부터 그리스 세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 위대한 신으로부터 자기의 아들이란 신탁을 얻었으니 알렉산더의 권위가 새삼 더 높아졌을 것임은 물론이지만, 그가 단지 신탁 때문에 행군을 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때의 행군은 아마도 이집트의 국경 일대의 치안을 확실히 하기 위한 시찰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음해 봄이 되자, 알렉산더의 군대는 페르시아의 심장부인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기 위하여 출발했다. 한편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3세는 이수스의 패전에 대한 복수로 대군을 모아 티그리스 강변의 가우가멜라에서 알렉산더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페르시아 대군은 이수스의 패전을 거울삼아 200대에 달하는 전차들을 활동하기에 편리한 평지에 배치해 놓았다.

기원전 331년 10월 초하루, 해도 저물어 밤이 차차 깊어 갈 무렵 페르시아의 군대는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듯 횃불을 밝히고 열병식을 거행했다. 이것을 본 마케도니아 군대는 그 위세에 기가 눌려 야습할 것을 알렉산더에게 건의했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말했다.

"전 세계를 평정하려는 자들이 어찌해서 용렬한 계책으로 승리를 구하려 하는가? 내일 대낮에 정정당당히 싸워 승리를 거두리라."

이윽고 밤이 가고 대결전의 아침이 밝아오자, 마케도니아의 여러 장군들은 알렉산더에게 아침인사 겸 전략을 협의하러 찾아갔다. 막상 천막에 도착하니 왕은 아직도 코를 골며 기분 좋게 자고 있는 게 아닌가. 여러 장군들이 큰소리로 몇 번을 불러 잠을 깨우자, 그는 비로소 눈을 떴다.

"왜들 이 소란인가. 적들이 넓은 평야에 진을 친 이상, 쉽게 도망을 치진 않을 게 아닌가? 결국 일전은 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 아닌가?

알렉산더는 큰소리로 웃으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알렉산더

기원전 2세기에 만들어진 알렉산더 대왕의 모자이크. 이수스 전투 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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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양군의 함성과 함께 전투가 시작되자, 알렉산더는 자신의 근위병들을 직접 이끌고 페르시아의 본진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그러자 페르시아군은 중심을 잃어버리고 뒤죽박죽되어 마케도니아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비록 이번 싸움에서도 알렉산더는 다리우스를 놓쳤지만 페르시아의 수도인 수사를 점령하였고, 계속해서 페르세폴리스로 진격하여 그곳마저 점령했다. 그곳에는 장대하고 화려한 왕궁과 곳곳에 호화로운 조각이나 아름다운 비석들이 세워져 있어 페르시아의 번영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뿐만 아니라 페르시아를 포함하는 세계 제국의 왕위에 오른 것이다.

알렉산더의 관대한 처분

전쟁이 끝나고 다리우스 3세의 가족들과 만난 알렉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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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동맹군을 해산시켜 그리스로 귀국시키고 자신은 용병(傭兵)과 마케도니아 장병들로 새로운 부대를 편성하여 다리우스를 추격하는 동시에 북동부 지방을 진압하러 나섰다.

파르티아(Parthia)에 이르자 도망치던 다리우스가 박트리아(Bactria) 태수한테 붙들렸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더가 급히 추격을 하자, 박트리아 태수는 부하들을 시켜 다리우스를 창으로 찌르고 도망쳐버렸다. 알렉산더의 선발대가 다리우스를 찾아냈을 때는 이미 중상을 입은 채 내버려져 있었다. 알렉산더가 도착하여 마지막으로 물을 주자 다리우스는 앞서 사로잡힌 자기 가족들을 후하게 대접해 주고 있음에 깊이 감사한다는 말을 남기고 숨졌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왕'임을 자칭하며 동방으로 도망친 박트리아 태수를 1년여 만에 붙잡아 처형하였다. 그리고 그는 2년에 걸쳐 이란인들과 싸워가면서 차츰차츰 동으로 진군하여 마침내 기원전 327년에는 인더스 강에 도달했다. 다음해에는 그 지방의 강력한 군주인 포루스(Porus) 왕과 결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알렉산더와 포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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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알렉산더는 토착민들로부터 동쪽에 갠지스라는 큰 강이 바다로 흘러간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당시의 그리스인은 구대륙을 실제보다 훨씬 더 적게 생각했고, 그 주위는 큰 바다가 에워싸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갠지스 강은 세계의 끝이고, 거기까지 가기만 하면 전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알렉산더는 그의 부하들에게 동으로 진군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은 이미 오랜 전쟁에 지쳐 있었고, 장기간 계속되는 장마로 더는 진군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급기야 부하들은 진군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알렉산더는 화가 났지만 결심을 바꾸어 그들의 요구대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더는 군을 둘로 나누어 해로와 육로의 두 길을 통해 귀환하게 했다. 그러나 귀환길도 그리 순탄하지는 못했다. 지친 군대에 대해 원주민들이 간간이 저항했고, 질병과 식량 부족이 그들은 괴롭혔다. 마침내 기원전 324년 봄, 그들이 수사에 도착했을 때 남은 병력은 인도를 출발할 때의 4분의 1밖에 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