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송 입니다. 2019. 9. 6. 17:33


드골

다른 표기 언어 Charles(-André-Marie-Joseph) de Gaulle                         


       

요약 테이블
출생1890. 11. 22, 프랑스 릴
사망1970. 11. 9, 콜롱베레되제글리즈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군인·저술가·정치가.

샤를 앙드레 조제프 마리 드골(Charles André Joseph Marie de Gaulle)

프랑스의 군사지도자, 정치가

ⓒ wikipedia | CC BY-SA 3.0 de

개요

프랑스 제5공화정을 건설했다.

초기경력

드골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로마 가톨릭계 중상류 가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드골 가문은 역대로 숱한 역사가와 작가들을 배출했으며 아버지는 철학과 문학을 가르쳤으나 어린 샤를은 군사학에 관심을 보였다.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수료한 샤를은 1913년 임관과 동시에 필리프 페탱 대령 휘하의 보병연대에 편입되었다(페탱).

드골은 명석하고 성실하며 열의에 찬 장교로서 군대경력을 거치는 동안 자신감과 용기, 그리고 독창적인 사고를 갖춘 인물로 유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베르됭 전투에 참가한 그는 3번씩이나 부상을 입고 2년 8개월 동안 포로생활을 했으나 5회에 걸쳐 탈출을 시도했다. 프랑스 육군 수훈보고서에는 3차례 드골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군사 사절단 요원으로서 폴란드를 방문하고 생시르에서의 교관생활 1년, 그리고 육군대학에서 2년과정의 전략·전술·특수훈련을 마친 뒤, 1925년 드골은 페탱 원수의 추천을 통해 최고군사회의 참모부에 배속되었다.

드골은 1927~29년과 1936~38년 라인란트 점령군 소령으로 복무하면서 독일의 침공 가능성과 프랑스군의 허술한 방비상태를 알게 되었으며, 2년간 중동에서 근무한 후 중령으로 승진하여 4년 동안 국방위원회 사무국원으로 일했다.

드골의 저술활동은 1924년 〈적의 내분 La Discorde chez I'ennemi〉에서 독일 내 민간정부와 군부세력의 갈등을 다룸으로써 시작되었고, 리더십에 관한 견해를 피력한 〈칼날 Le Fil de I'epée〉(1932) 및 군사이론서인 〈미래의 군대 Vers l'armée de métier〉(1934)로 이어진다.

〈미래의 군대〉는 독일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마지노 선'과 같은 정적인 군사이론보다는 고도로 기계화되어 기동력을 갖춘 소수정예부대가 필요함을 주장한 것이다. 한편 비망록도 저술했는데, 1940년 1월이 될 때까지 정치인들이 자신의 입장으로 시각을 전환할 것을 줄곧 역설했다. 군부의 상관들은 드골의 관점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는 역사적 연구인 〈프랑스와 프랑스의 군대 La France et son armée〉(1938)를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하는 문제를 놓고 페탱 장군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쟁이 발발하자 드골은 제5군 소속 기갑여단을 지휘했고 1940년 5월에는 제4기갑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2차례의 전차전에서 자신의 이론을 적용했던 그는 정력적이며 대담하고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평을 얻었다. 6월 6일 드골은 폴 레노 내각의 국방차관이 되었고 전쟁수행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수차례 영국 정부와 접촉을 가졌다. 독일과의 휴전을 모색하고 있던 페탱 원수가 레노를 대신하게 될 무렵 영국으로 망명한 드골은 6월 18일 런던에서 동포들을 향한 최초의 라디오 방송을 내보냈고 자신을 중심으로 대(對) 독일 항전을 계속하자고 호소했다.

1940년 8월 2일, 드골은 궐석재판에 의해 계급박탈, 재산몰수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드골은 엄청난 부담을 안고 이제는 정치지도자로서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의 주위에는 나중에 '자유 프랑스 위원회'를 형성하게 되는 무계획적으로 충원된 정치적 후원자와 자원자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정치적 지위도 없었고 영국과 프랑스에서 사실상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자신의 지도자적인 자질과 임무에 대하여 절대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드골은 전적으로 조국에 헌신했으며 종종 영국인들에게는 고집불통으로 비쳐지기는 했으나 국익에 위배된다고 생각되기만 하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투쟁에 몰입하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프랑스 내에서 드골의 평판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좌파 정치인들은 가톨릭교도인 군인 출신을 정치지도자로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우익 진영은 그를 국민적 영웅인 페탱 장군을 배신한 반역자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런던으로부터의 방송, 자유 프랑스 위원회의 활동 그리고 자신의 조직이나 영국 비밀첩보기관을 통한 레지스탕스 지하운동에의 협조 등은 프랑스 내에서 드골의 지도력을 점차 부각시켜갔다.

그러나 연합국들이 드골의 위상을 수용하게 된 것은 파리 해방 이후의 일이었다.

영국 정부와 드골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으며 때때로 그의 오만과 성급한 기질로 말미암아 긴장이 고조되었다. 1943년 드골은 자유 프랑스 위원회를 알제리로 옮겨 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로 개편하고 앙리 지로 장군과 함께 공동위원장에 취임했다.

드골이 지로를 몰아낸 책략은 그의 면밀한 정치조작능력을 엿볼 수 있는 실례가 된다. 1944년 9월 9일 드골은 알제리로부터 파리로 개선했다. 그뒤 2차례에 걸쳐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그는 1946년 1월 20일 돌연히 사퇴했는데, 표면상으로는 제정당의 연립내각형성 움직임에 동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드골은 1958년까지 제4공화정(1946 성립)과 대립했다.

그는 제3공화정의 체제적 모순을 재현할 여지가 크다는 이유로 신헌법 거부운동을 전개했다. 1947년 드골에 의하여 창설된 프랑스 공화국연합(Rassemblement du peuple Fran이미지ais/RPF)은 대중운동조직으로서 급성장을 거듭하여 1951년에는 하나의 유력한 정당이 되었고 그해 치러진 총선에서 120석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RPF 운동에는 헌법과 정당정치, 특히 모스크바의 지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반감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RPF에 불만을 갖게 된 드골은 1953년 결별을 선언했고 RPF는 이내 해체되었다(1955). 1955~56년에 드골은 일체의 공적 활동을 피한 채 고향인 콜롱베레되제글리즈에 머물면서 〈영예로운 소명 L'Appel〉(1940~42)·〈화합 L'Unité〉(1942~44)·〈구원 Le Salut〉(1944~46)으로 이루어지는 회고록 집필에 몰두했다.

〈구원〉은 1958년 정계로 복귀한 직후 완성되었는데, 그가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부터 공직생활의 재개를 고려하게 되었는지는 해석이 분분한 문제로 남아 있다.

전후의 공직생활

프랑스 국민들은 샤를 드골의 정치재개 문제를 둘러싸고 의견이 크게 나뉘었다.

그들이 드골 장군을 맞아들이는 데 주저한 이유는 당시의 정치상황과 직접 관련이 있었다. 1958년 5월 알제리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프랑스는 내란 직전의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가 이 기회를 일생일대의 정치적 도박으로 파악하고 치밀한 계획을 수립했음은 분명하다. 그는 신중했다. 왜냐하면 의회가 그 자신이 수용할만한 조건으로 정계 복귀를 승인할 가능성이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드골은 오로지 적법한 절차에 따를 것이라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으며 측근들이 그를 위하여 음모를 꾀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5월 15일과 19일 그리고 27일에 발표된 일련의 신중한 성명서들은 어떠한 종류의 모반을 촉발시켰음이 확실하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1958년 6월 1일 르네 코티 대통령은 드골이 등용되지 않는 이상 사퇴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밝혔고 드골은 총리 지명자로서 의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튿날 정식으로 총리의 서임을 받게 된 샤를 드골은 헌법개정권과 함께 스스로 요구한 특권을 부여받았다.

1958년 12월 21일 드골은 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58년 9월 28일의 국민투표에서 인준된 신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권한, 특히 국민투표의 사용과 국가비상사태시 대통령의 통치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여러 권한들은 강대국에는 결단력이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그의 확고한 신념을 반영하고 있었다. 오로지 위기상황에서만이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 드골은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고 도전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는 의회와 정당기능을 약화시켜야 했다.

그의 정략은 먼저 대통령 1인의 정책통제에 대하여 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한 다음 선거나 국민투표와 같은 정기적인 여론자문을 통하여 통제력을 갱신한다는 것이었다. 드골의 대통령 재임기간은 사실상 지속적인 선거운동의 연속이었다. 지방순회여행의 형식을 빌어 각 주를 방문했으며 유지들 및 일반 시민들과 접촉하고 1년에 몇 번씩 텔레비전 출연도 했다.

그는 전쟁 때부터 충성을 다해온 드골파 각료들을 최대한 활용했는데, 이들은 의사진행을 방해하고 행정부를 곤경에 빠트리는 의원들의 세력을 제어하기 위해 헌법조항을 내세웠다. 그러나 드골 대통령은 비판을 통한 정부불신임이라는 대의정치의 본질을 침해하지는 않았으며 라디오 방송의 친여성향은 예전에도 통상 있었던 일이었다. 드골 정권만큼 대통령 모욕죄를 빈번하게 들먹인 체제는 일찍이 없었지만 신문 지상이나 정당 내에서 드골의 정책이나 드골파 장관들을 비난하는 일에는 하등의 법적인 규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대(對) 정부 비판은 확대일로에 있었다.

드골은 정국불안정을 초래하지 않으면서 알제리 전쟁을 종식시킴으로써 1962년까지 심각한 도전을 면할 수 있었다. 알제리 전쟁은 그러나 드골이 장차 적극적인 정책을 펴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되었다. 아프리카의 프랑스령을 12개의 독립국가로 전환시키기 위한 헌법개정에 착수함으로써 알제리의 이탈을 방지한 그는 경제사정을 호전시키고 군대의 개편을 추진했으며 독자적인 핵억지력(核抑止力)을 확보했다.

1962년 중반기로 접어들면서 알제리의 독립이 인정되고 정치지도자로서의 드골의 가치가 경감되자 새로운 신임투표를 통하여 자신의 위상을 공고히 다질 필요가 생겼다.

그가 체득한 한가지 교훈은 대전 당시와 전후의 몇 년 처럼 정쟁과 당쟁에서 초월하는 것이 자신의 입지를 보다 확고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드골은 1958년 총선을 앞두고 지지자들에게 어떠한 선거운동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1962년 대통령은 자신의 사임과 헌법개정의 수락 2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을 유권자들에게 제안했으며, 헌법개정은 시장이나 지방유지들로 구성된 정족수 8만의 선거인단을 보통선거권 체제로 대체한다는 내용이었다.

유권자들은 압도적으로 헌법의 개정을 지지했다. 11월의 보통선거에서 드골파는 64석을 더 획득하고 보수파 의원 30명의 후원을 받아 하원에서 다수당이 되었다. 드골이 국민의 후원 속에서 '위대한 프랑스'의 재건을 위한 주요정책들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그의 정치적 투쟁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전쟁으로 약화된 프랑스를 세계 열강의 위치로 끌어올리고 자신의 계획에 대한 국내적 반발을 극복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이 동원되었다.이러한 드골의 책략은 곧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정치학자 레몽 아롱은 "이기주의, 오만, 냉담, 교활"이라고 했고, 통찰력이 뛰어난 〈드골 De Gaulle〉의 저자인 장 라쿠튀르는 "경험·직관력·영혼이 아니면 이성의 융통성"이라고 평가했다.

1962~65년 대통령으로 재선되기까지 그는 프랑스의 이익, 특히 농업분야의 이익을 위해서 유럽경제공동체(EEC)를 이용했다. 프랑스가 초국가적 군사방위조직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점진적으로 이탈했던 이유는 드골의 외교정책이 주권국가의 독립성을 전제로 오직 협약에 근거한 국제협력을 지향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1965년 대통령선거전의 주요쟁점이기도 했다.

12월 21일 비록 2차 투표이기는 했으나 그는 재선되었다. 1966년 3월 7일 프랑스는 NATO로부터 탈퇴했지만 대서양동맹에는 남아 있었다.

2번째 임기의 남은 기간 동안 그의 관심영역은 점차 확대되어갔다. 공산진영과의 긴장완화 및 협력이라는 드골의 정책은 소련, 동유럽국가와의 통상·문화교류, 중국의 승인(1964. 1) 등으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인도차이나 분쟁의 해결을 위하여 모든 관계국들이 중립정책을 채택할 것을 촉구했으며 그 기초가 되는 것은 미국의 베트남 철군이 실행된 후의 평화협상이었다.

드골은 이와 아울러 남아메리카 국가들과 캐나다, 극동지역을 순방함으로써 프랑스어권 국가나 라틴 문화의 기반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 지역에 대하여 영향력을 증대시키려고 애썼다. 그는 EEC 회원국과 비회원국 사이의 혹은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의 분열이 조만간 극복될 것이며 세계적으로도 미국과 소련이 중심이 된 양극체제가 와해될 것을 예견했다.

국제정세는 그의 성공을 방해했고 드골은 통상 반미적인 것으로 규정되는 일련의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유럽 국가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점차 완화될 것이라는 소위 '탈위성국가화' 이론은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의하여 설득력을 잃었다. 또한 그가 영향권 내에 두기를 바랬던 나라에서도 프랑스가 실제로 비중을 갖고 있다는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1968년 5월의 정치·경제 위기가 발생했을 당시, 프랑스는 드골의 표현대로 "대서양에서 우랄 산맥까지의 유럽"을 주도할 국민적 결속도 재원(財源)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의 힘은 1940년 독일에 대해서와 1958년 파괴 및 시민불복종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화합을 호소할 때만 빛을 발했다. 1968년에는 더이상 공동의 적이 없었다. 일단 질서가 회복되자 학생과 노동자들의 소요는, 진정한 불만을 갖고 있으나 전체 공동체의 목표와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일부 사회계층의 히스테리 분출로 조명되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지도자의 타고난 통솔력보다는 정부의 끈질긴 협상 노력이 요청되었다. 5월 30일의 방송은 대규모 지지시위와 함께 뒤이은 선거에서 드골파가 압승을 거두었음을 보도했지만 그 승리는 대통령이나 정부시책이 아니라 평화와 정국 정상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1969년 4월 드골 대통령은 또 한차례의 국민투표를 요구했다.

이번에는 진정 권좌에 남아 있기를 원하는 지 아닌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국민투표는 이전에도 그랬었던 것처럼 양자택일적인 성격을 띠었는데, 행정구역 개편과 상원의 개혁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대통령직에서 사퇴하겠다는 내용이었으나 상원 문제는 일반적으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위대한 프랑스를 역설함으로써 첫번째 임기중에 환영을 받았던 외교노선들도 지난 몇 년 동안 점차 불안을 자아내고 있었다. 1966년의 베트남 중립화안은 드골 개인의 반미 감정이 표출된 것으로 널리 인식되었고, 이듬해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는 프랑스계 캐나다의 분리를 조장하는 듯이 보였다.

중동전쟁에서 그의 중립선언은 친아랍 성향을 띠는 것 같았다. 프랑스는 대서양동맹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탈퇴한 상태도 아니었다. 또한 이른바 독자적인 핵억지력도 실현되지 못했으며 프랑스의 자력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었다. 1968년 드골은 6년간 총리를 역임한 조르주 퐁피두를 해임하여 그를 만족스럽고 신뢰할 수 있는 후계자로 받아들임으로써 "드골 이후, 프랑스의 대통령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스스로 해답을 주었다.

국민투표에서 패배한 뒤 1969년 4월 28일 콜롱베레되제그리즈로 은퇴했고 회고록의 완성에 힘쓰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대통령 샤를 드골의 정치적 목표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여러 정책들은 프랑스 정치사를 통하여 가장 다양한 해석과 추론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