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연구

薩水大捷/ 을지문덕이 수나라 100만 대군을 격파

박송 입니다. 2019. 9. 6. 10:56


을지문덕이 수나라 100만 대군을 격파하다

살수대첩

薩水大捷           


시대612년

612년, 을지문덕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살수에서 수나라 대군을 크게 무찌른다. 30만 5,000명의 수나라 병사 가운데 압록강을 넘어 요동 지역까지 살아서 돌아간 이는 2,700명에 불과했다. 세계 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대승리였다. 이것이 살수대첩이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치려던 수나라의 계획이 살수대첩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간 것은 물론, 그 후유증으로 수나라는 결국 내분과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배경

590년 고구려 영양왕이 즉위하다.
591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다.
599년 영양왕이 요서 지역을 공격하자 수 문제가 30만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다.

설명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사이에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는 모두 네 차례의 전쟁이 일어난다. 598년 영양왕이 요서 지역을 선제공격하자, 이에 격분한 수나라 문제(文帝)가 30만 대군을 일으킨다. 이어 수나라 양제(煬帝)가 612년과 613년, 614년에 잇따라 고구려를 침입한다. 이 가운데 살수대첩은 2차 전쟁 과정에서 벌어졌다. 2차 전쟁에서 수 양제가 이끈 군대는 육군 113만 명과 해군 7만 명 규모였다. 이들이 늘어선 거리만 960리(364킬로미터)에 이르렀다.

이에 영양왕은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에게 북쪽에서 수나라 육군을 상대하도록 하고, 동생인 고건무(高建武)에게 수나라 해군의 격퇴와 평양성 방어를 맡겼다. 고건무가 바로 영양왕의 뒤를 이은 영류왕(榮留王, 재위 618~642)이다.

612년 1월 북경 지역을 출발해 요하를 건넌 수나라 대군은 같은 해 4월 하순부터 고구려의 서쪽 방어선인 요동성(遼東城)을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으나, 쉽사리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수나라 해군도 내호아(來護兒)의 지휘로 대동강을 통해 평양성 쪽으로 진격했으나, 고건무가 복병전을 펼쳐 이들을 대동강 하구까지 몰아냈다. 고건무가 빈 절터에 병사들을 미리 숨겨두고 일부러 패한 척하며 수나라군을 절터 쪽으로 유인한 것이다. 당시 살아서 돌아간 수나라 군사는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처럼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수 양제는 30만 5,000명의 별동대를 구성해,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별동대는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宇仲文)이 이끄는 육군 정예부대로 구성됐다.

이에 고구려군의 총사령관인 을지문덕 장군은 원정길에 오른 적군의 약점을 이용해 초기에 정면 대결을 벌이는 대신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하며 이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이들이 야영 준비를 할 때마다 공격했다가, 추격해 오면 계속 후퇴를 거듭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평양성에서 30리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수나라 별동대는 이미 심리적으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한 사람당 100일 분량의 군량미를 직접 운반해 오던 별동대 군사들은 거듭되는 전투와 행군에 지치는 바람에 이를 땅에 묻거나 버려 나중에는 굶주림에 시달렸다.

해군의 패배로 보급선마저 끊어져 상황이 호전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 같은 적의 상황을 정확히 꿰뚫은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진영에 거짓으로 항복 의사를 밝히고, 퇴각의 구실을 만들어 주며 고도의 심리전을 펼친다.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오언시(五言詩)를 지어 보낸 것이 이때다. 《삼국사기》 〈열전-을지문덕전〉에 기록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宇仲文詩)〉는 다음과 같다.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궁구하였고(神策究天文)
기묘한 계획은 지리를 통달하였구나(妙算窮地理)
싸움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戰勝功旣高)
족한 줄 알면 그만둠이 어떠리(知足願云止)

겉으로는 적장인 우중문을 칭송하며 철군의 명분을 만들어 주면서도, 은근히 그를 희롱하는 내용이다.

드디어 수나라군은 요동으로 후퇴하기로 했다. 하지만 을지문덕 장군은 이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다. 고구려군은 처음엔 퇴로를 열어 주었다가 적군이 살수를 건널 때 총공세를 벌여 이들을 궤멸시켰다. 그 결과 수 양제는 더 이상 싸울 힘을 잃고 중국 땅으로 돌아갔다.

수 양제

수 문제에 이어 즉위한 양제는 무리한 토목 공사를 일삼아 백성으로부터 원망을 샀으며, 무리하게 고구려 원정을 추진하여 실패한 채 결국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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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장군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의 가계(家系)나 생몰(生沒) 시기, 전쟁 당시 나이 등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몇 가지 전설이 그가 평안남도 증산군 석다산 사람일 것이라는 추정을 낳게 할 뿐이다.

2차 전쟁 당시 수나라는 각종 최신 무기를 동원해 고구려군을 공략했다. 성에 쉽게 오를 수 있는 사다리인 운제(雲梯), 성문을 부술 수 있도록 만든 충차(衝車), 큰 돌을 던져 성벽을 부술 수 있도록 한 발석차(發石車), 불을 지르기 위한 화차(火車) 등이 그것이다. 수 양제는 고구려 정벌 출정식에서 고구려를 ‘더러운 꼬마’에 비유하며 군사들에게 필승의 의지를 북돋우기도 했다.

하지만 수나라 군사들의 사기는 전쟁 초기부터 한풀 꺾여 있었다. 598년 1차 전쟁 당시 대규모 군사가 희생당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책 《자치통감》에는 수나라군이 2차 전쟁을 위해 출정할 당시 〈무향요동낭사가(無向遼東浪死歌)〉(요동에 가서 떠돌다 죽지 말자는 노래)가 나라 안에 퍼졌다고 기록돼 있다.

반면 고구려 쪽의 분위기는 달랐다. 수나라 별동대가 평양성 쪽으로 진격할 당시 군 지휘부의 청야전술(淸野戰術,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농작물이나 군수물자를 모두 없애는 전술)에 군사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 적극 참여하는 등 적군을 물리치기 위해 하나로 뭉쳤다. 또 영양왕은 수나라의 침략에 대비해 일찌감치 요동성을 비롯한 전방의 주요 거점에 군량미와 식수 등을 충분히 갖추도록 하고, 적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 해군을 강화했다.

수나라의 최신 무기에 맞서기 위한 방어용 무기도 정비했다. 끝이 뾰족한 네 갈래의 쇠침을 연결한 마름쇠를 성벽 주위 땅바닥에 뿌려 적군의 성벽 진입을 막도록 했고, 적군에게 돌덩이를 날려 보낼 수 있는 포차를 성벽 쪽에 설치했다.

앞서 1차 전쟁에서 영양왕은 말갈(靺鞨)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요서 지역을 공격했으나 수나라에 패배했다. 이어 수 문제가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홍수와 장마, 폭풍, 전염병으로 3개월 만에 철군했다. 《삼국사기》는 당시 수나라군 30만 명 가운데 살아서 돌아간 이가 열 명에 한두 명 정도였다고 전하고 있다.

2차 전쟁에서 을지문덕 장군에게 대패한 수 양제는 이듬해인 613년 고구려의 요동성을 다시 공격했으나, 수나라 내부에서 잦은 전쟁과 대규모 희생에 따른 반란이 일어나 급히 회군했다. 반란군을 진압한 수 양제는 614년에 다시 고구려 정벌에 나선다. 이번에는 해군을 이용해 요동 반도 남단에 상륙해 비사성(卑奢城, 지금의 중국 다롄 시 진저우에 위치)을 함락시킨 뒤,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그러자 영양왕은 잇따른 전쟁으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를 우려해 수 양제에게 화의를 청했고, 수 양제는 이를 받아들여 철군했다.

고구려와 수 나라의 공방전은 여기서 마무리된다. 패전의 후유증으로 수나라는 반란에 휩싸였고, 그 과정에서 수 양제가 부하에게 살해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618년에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등장한다. 바로 그해 영양왕도 세상을 떠나고 영류왕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주변 상권(商圈) 장악과 외교적, 군사적 패권을 건 피할 수 없는 충돌이었다. 이는 남북조의 혼란 끝에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부터 어느 정도 예견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충돌의 결과는 중국 왕조의 교체로 나타났다. 당시 동북아시아의 역동적인 정세 변화 속에서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이 역사적인 대사건으로 기록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