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려(范蠡 :處世의 達人), 서시(西施) 이야기 2000 년 전의 유명한 사학자 사마천(司馬遷)이 그의 저서 史記에서, 세 번이나 나라와 직업을 옮겨가며 크게 성공해서 후세에 이름을 날린 범려(范蠡)를 공을 세운 후 은퇴해서 편안한 삶을 산 '공성신퇴(攻城身退)'의 표본으로 특기하고 있다. (太史公曰; 范蠡三遷 皆有榮名 名垂後世.) 범려(范蠡)는 원래 초(楚)나라 宛 고을 三戶 사람인데, 그의 형 집에 얹혀살면서 미친 척 하며 세간의 풍속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놀았다.(佯狂倜儻負俗). 고을현령(宛令)이던 문종(文種)이 부하 관리를 보내 만나보려고 했는데 부하가 돌아와 말하기를 “범려는 미치광이 같은데 원래 그렇다고 한다.” 라고 하자, 문종이 “ 원래 뛰어난 선비는 미친체하는 경우가 있어서 겉으론 알아보기 어렵다고 하더라.” 라고 하며 수레(駕)를 보내 모셔오게 했지만 범려가 도망가 버렸다. 범려 본인은 현령이 직접 찾아 올 줄 알고 그의 형수에게 “손님이 올 것이니 의관을 빌려와서 준비해 달라.”고 했다. 다음날 과연 현령이 직접 찾아와서 손잡고 얘기하니 이웃 사람들이 놀라워했다고 한다. 문종은 범려를 데리고 越나라로 갔다. 그들은 원래 吳나라로 가려고 했었는데, 吳나라엔 이미 楚나라에서 먼저 도망쳐온 오자서(伍子胥)가 등용되고 있어서, 풍속 언어가 비슷한 이웃 越나라로 가자는 범려의 제의에 따라 越나라로 간 것이라고 한다. 文種을 大夫 種이라고도 부르는데 大夫가 성이란 설도 있다. 楚나라 平王 때 宛 고을의 縣令이던 文種이 범려가 사는 三戶 마을에 갔을 때, 范蠡가 개구멍(犬竇)으로 내다보며 쪼그려 앉아서 개처럼 짖어대자(蹲而吠之), 수행원이 옷을 잡아끌며 못하게 했다. 문종이“ 그냥 놔 둬라(無鄣也),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개가 나를 보고 짖는 곳에 사람이 있다 했는데, 오늘 여기 성인의 기운이 보이므로 만나 봐야겠다.” 하고 수레에서 내려 범려에게 가서 예를 표하고 데려왔다고 한다. (以上: 會稽典錄, 吳越春秋 등 기록) 범려는 곧 越王인 구천(句踐)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서 군사뿐만 아니라 일체의 국정을 총괄토록 했으나, 자기는 군사를 조련시키는 일은 문종(文種)보다 낫다고 할 수 있으나, 국사를 경영하는 일은 그가 더 잘할 것이라며 사양하고 문종을 천거해서, 둘이 함께 구천왕을 보좌하게 된 것이다. 당시 월(越)나라 동쪽 즉 현재의 소주 상해 일대에 있던 吳나라는 합려(闔閭)왕 시절 국력이 강해져서 춘추시대 패자로 되었는데, 이웃 월(越) 나라를 공격하던 중 부상을 당해서 죽게 되었다. 죽으면서 그 아들 부차(夫差)에게 “ 너는 결코 네 아비를 죽게 한 월(越)왕 구천(句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유언하였다. 부차(夫差)王도 그 말을 명심하고 10 여년을 섶(薪)에서 누워(와신:臥薪)자며 복수의 기회를 엿보다가 BC 494년 월(越)을 대파시키고 구천(句踐)과 범려 등 신하 모두를 사로잡아 吳나라로 끌고 가서 가두어 두고 종으로 부렸다. 구천(句踐)왕은 그런 굴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으려고 하다가, 忍苦를 견디고 후일 월나라를 다시 세워 복수하자는 범려(范蠡)의 충고에 따라 부차(夫差)왕의 하인 노릇까지 하는 수모를 감수했다. 선왕 합려(闔閭) 이래의 공신인 오자서(伍仔胥)가 구천(句踐)을 살려두면 안된다고 했으나, 부차(夫差)王은 범려를 따라온 미녀 서시(西施)도 탐이 나고, 월나라의 뇌물을 받아먹은 재상 백비(白嚭)의 말도 있어서 구천(句踐)과 월나라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내 주었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구천(句踐)은 범려(范蠡),문종(文鐘) 등 군신과 함께 밤낮 쓰디 쓴 쓸개(膽)를 핥으며(상담:嘗膽) 재기를 다짐 했는데, 이후 은인자중하며 후일을 기약한다는 고사성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말이 생겨난 것이다. 쓸개 맛을 보며 친히 쟁기를 몰아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 하는 등 20 여년간 국력을 키운 구천(句踐)왕은 범려 등을 앞세워 BC 474 년 오나라에 쳐들어가서 이번엔 부차(夫差)왕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20년 전 자기를 살려준 점을 감안하여 그에게 작은 식읍을 주어 살도록 제의했으나, 부차(夫差)는 자기에게 충언을 하다가 죽은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며 스스로 자결하고 말았다. 중국 역대 최고의 미인이라는 서시(西施)는 원래 越나라 시골 저라(苧羅)에서 나무꾼(樵夫) 아버지와 베 짜는(織女) 엄마 사이에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선시(先施), 이광(夷光) 등으로 불리며 엄마를 도와 약야계(若耶溪) 냇가에서 빨래하던 소녀였다. 15세 때 범려가 데려다가 가무와 예절, 그리고 房中術 등 온갖 교육을 받아 그야말로 재색겸비의 미녀가 되었는데, 그녀가 근처 냇가에라도 나가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그녀를 보려고 몰려와서 길이 막힐 정도였다고 한다. 범려는 서시(西施)를 보려고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 나라의 군자금으로 충당했는데, 그 돈이 막대했다고 한다. 타고난 미모에 온갖 여자다운 교육을 받은 서시(西施)는 결국 오나라 부차(夫差)의 왕비가 되었고, 그녀는 곧바로 오나라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부차(夫差) 왕은 그녀를 위해서 太湖와 영암산(靈岩山) 이 어우러진 곳에 아름다운 관왜궁(館娃宮)을 지어주고 밤낮으로 그녀와 놀며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미녀 서시(西施)는 발걸음 소리도 듣기 좋았던 듯, <관왜궁> 안에는 문공랑(聞跫廊) 또는 향섭랑(響屧廊)이라 하는 그녀의 나막신 발걸음 소리를 듣는 회랑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태호(太湖) 연안에 있는 여원(蠡園)이라는 범려와 서시를 기념하는 공원에 가보면 문공랑(聞跫廊)이란 회랑도 볼 수 있다. 오(吳)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범려(范蠡)는 그 후 벼슬을 버리고 미련 없이 물러나 일찍이 그가 키우며 장래를 약속했던 미녀 서시(西施)와 더불어 평안한 여생을 보낸 소위“공성신퇴(功成身退)”의 모델케이스이며 처세의 달인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범려(范蠡)는 일찍이 목이 길고 입이 새 주둥이처럼 튀어나온(長頸鳥喙:장경조훼) 구천(句踐)의 관상을 보고, 어려운 시절은 함께 당해도 즐거움은 함께 누릴 수 없는(可與共患難 不可與共樂) 위인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20 년간 와신상담 끝에 오(吳)나라를 멸망시킨 후 구천 왕에게 사표를 내면서, “ 신하된 자는 주군이 치욕을 당하면 목숨이라도 버려야 하는데, 주군께서 오나라 왕에게 치욕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죽지 못한 것은 오로지 오나라에 보복을 하기 위함이었고, 이제 그 목적을 이루었으니 그 때의 죄를 받고 싶은 것입니다.” 하였다. 구천(句踐)왕이 그를 만류했지만 끝내 사양하므로 회계산 일대 삼백리 땅을 그의 식읍으로 해주고 떠나보냈다. 범려는 그의 평생 동료였던 대부 문종(文種)에게도 구천(句踐)의 관상이 산에 토끼가 없어지면 사냥개를 삶아먹는(兎死狗烹: 토사구팽) 식으로 공신을 퇴출시킬 위인이니, 떠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문종(文種)도 범려의 현명함을 알았지만 재상 자리에 미련도 있어서 병을 핑계 삼고 조회에 나가지 않고 있다가 결국 구천(句踐)에게 트집잡혀 죽어서, 범려의 <토사구팽> 예언이 적중했음을 증명하며 이 말이 유행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말았다. 범려(范蠡)는 벼슬을 내놓고 약혼녀였던 미녀 서시(西施)를 데리고 작은 조각배를 타고 아무도 모르게 바다 같이 넓은 태호(太湖) 속의 섬으로 들어가서 시이자피(䲭夷子皮)라고 이름을 바꾸고 양어(養魚)로 큰 돈을 벌어서 근처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었다. 그러나 차츰 그의 정체가 알려지자 다시 山東 齊나라로 가서 이름을 다시 주공(朱公)으로 바꾸고 도자기 사업을 했는데 또다시 억만장자 거부가 되었다. 그의 능력을 인정한 제나라 왕이 재상으로 삼으려 하자 그는 “필부의 몸으로 상장군이 되고, 거부가 된 후 다시 재상이 되라 하는데, 榮華는 오래 가지 않은 법이다” 하고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가 키운 절세미녀와 함께 언제 어디서 저세상으로 갔는지 궁금하지만, 원체 오랜 옛날의 일이고 기록도 없어서 더 이상 추적할 방법이 없다. 과연 처세의 달인이라 할만 하다. 범려(范蠡)의 무덤이라고 하는 곳은 두 군데 있다고 한다. 하나는 그의 옛 고향 근처 荊州 서쪽에 陶朱公冢이 있는데 나무비석(樹碑)에 越 范蠡라고 되어 있고, 또한 산동성 濟州 平陰縣 동남쪽 陶山 아래에도 그의 무덤이라는 陶公冢이 있는데 어느 곳이 진짜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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