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연구

범려 / 서시

박송 입니다. 2019. 9. 2. 09:14


서시



중국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절세 미녀 西施. 그녀의 본명은 이광(夷光)이며, 절강 (浙江) 저라산(苧羅山) 근처에서 나무장수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얼마나 미녀였으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강물에 비추니 수중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하여 침어(浸魚)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그 지방의 여자 들은 무엇이든 서시의 흉내를 내 면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 생각하고, 병이 들었을 때의 서시의 찡 그리는 얼굴까지 흉내를 냈다고 하여 效嚬(효빈)이라는 말까지 생겼겠는가?

한편, 월왕 "구천'은 오나라에서 포로가 되어 3년간의 굴욕을 씻기 위하여 "범여"는 군 양성에, "문종"은 나라살림에 온 힘을 쏟으며, 원수를 갚기위하여 "와신상담"이란 고사를 낳으며 7가지의 전략을 세우고 하나 하나 실천에 옮기게 된다.

월왕 "구천"국방력이 강화되자 7가지 계책중 미인계를 실천에 옮기기로 하고 적합한 인물로서 절세가인 "西施"를 선정하여 예능을 집중 교육하게 된다.

그러나 서시는 "대신 범여가 너무도 사랑하는 삶인데 가능하겠는가?"라고 말 하자.

서시는 "........지금 나라가 망해가는데 우리가 어찌 사랑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오왕이 저의 몸을 가질 수 있어도 저의 마음은 영원히 가질 수 없을 겁니다."라고 하면서 기꺼히 응하였다.

이렇게 하여 월왕(越 王) 구천(勾踐)의 충신 "범여"가 "西施"를 데려다가, 호색가인 오왕 "夫 差(부차)"에게 바치니, 오왕 부차는 넋이 나간 듯 한참 동안 옴짝달싹 못하고 멍하니 앉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수면에 비친 수선화 같고,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몸짓은 미풍에 하느적그리는 수양버들 같았다.

부차는 갑자기 사지가 흐늘거리고 정신이 몽롱해 졌다.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 취하고, 미색이 사람을 유혹하지 않아도 스스로 미혹된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오나라의 충신 "오자서"는 "폐하! 월왕 "구천"이 세상에 보기 드문 선녀 같은 미인 "서시"를 헌납한 이유가 딴데 있으니 주의하셔야 된다."고 경고 하자,.

아첨에 능하고 부차의 비위를 잘 맞추면서 충신 오자서를 시기해오던 간신 "백비"가 "후궁에 미인들이 1,000 명이 넘는데 미인 한,둘이 더 온다고 해서 무슨 큰 일이 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끼어 들었다.

"西施"의 출중한 미모뿐만 아니라 부차에 대한 그녀의 부드러운 태도와 배려, 존경은 부차로 하여금 날마다 훈훈한 봄바람속에 목욕하고 구름을 타는 듯한 황홀감을 느끼게 했고, 부차가 탄복을 금치 못한 것은 서시의 독특한 재능과 지혜, 그리고 우아한 말투였다.

그녀가 하는 말은 구절구절 세속을 벗어난 것처럼 우아하면서도 비범하여 조정의 상대부나 의전대신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통찰력을 갖고 있어 부차는 그녀의 지지가 없이는 어떤 일도 혼자서 결정하거나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시로 오나라에 곡식을 꾸어달라 하여 창고를 비게 하고, 화려한 궁궐을 지어 재물을 탕진케 하며, 오나라 충신들을 궁지에 몰아 인재를 제거해 나갔다.

BC 482년 11월, 마침내 부차는 "西施"의 종용으로 대군을 거느리고 晉 定公(진 정공)과 회맹하기 위하여 黃池(황지;오늘의 하남성 봉구)에 간 틈을 노려 월왕 "구천"은 13만 대군을 이르켜 오나라를 공격하고,

BC 473 년 2차에 오나라를 공격함으로써 마침내 "臥薪嘗膽(와신상담)" 18년 간의 끝자락을 보게 되었다.

오왕 "부차"는 죽어서 충신 "오자서"를 볼 낯이 없으니 나의 얼굴을 비단으로 세겹 싸달라고 유언을 남기게 되고,

얼마후 "범려"는 월왕 구천에게 친필 서신 한 통을 남기고 西施와 더불어 모습을 감추었다. "대왕 폐하! 폐왕께서이 서신을 읽으실 때쯤엔 저와 서시를 찿으실 수 없을 것입니다.오나라를 멸하고 지난날의 설한을 푸는 동안 저희는 월나라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으나, 이미 소원이 이루어진 지금은 폐하께 더이상 저희가 필요치 않습니다. 오히려 저희는 폐하의 치세에 장애가 될 것입니다. 뛰어난 미색으로 오왕을 유혹했던 서시는 폐하마저도 유혹하게 될 것이고, 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저 자신도 세력이 강대해져 폐하의 근심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해서 저희는 먼저 폐하께 작별을 고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범려는 문종에게 한통의 편지가 전달 되었다.

"구천은 長頸烏喙(장경오훼)의 상,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같이 할 구 없응으며,교활한 토끼가 죽고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 것처럼 적국이 멸하면 전역의 공신들이 죽임을 면치 못하는 법일세. 이것이 바로 나와 서시가 멀리 떠나는 이유일세." 서시의 미색에 빠져 정치를 태만하게 한 부차를 마침내 멸망시켰 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후에 서시는 범여와 함께 오호(五湖)로 도피했다고도 하고 또는 강에 빠져 죽었다고도 한다. 서시는 양귀비((楊貴妃), 왕소군(王昭君), 초선(貂嬋)과 더불어 중국 고대 4대 미녀 로 꼽히는데, 이들 중 으뜸은 서시이며, 미의 화신(化身)이자 대명사이다.

(중략) 춘추 시대, 월나라 왕(越王) 구천(勾踐)과 오나라 왕(吳王) 합려(闔閭)의 전쟁에서 합려는 적의 화살에 부상한 손가락의 상처가 악화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B.C. 496). 임종 때 합려는 태자인 부차(夫差)에게 반드시 구천을 쳐서 원수를 갚으라고 유명(遺命)했다. 오왕이 된 부차는 부왕의 유명을 잊지 않으려고 맹장 오자서(고사성어 일모도원 참조)와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무의 도움과 '섶 위에서 잠을 자고[와신(臥薪)]'하는 등 절치부심으로 결국 월왕 구천에게 복수를 하였다. 전쟁에 진 월나라 왕 구천은 부차에게 항복하고 항상 곁에다 쓸개를 놔두고 앉으나 서나 그 쓴맛을 맛보며[상담(嘗膽)] 일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군사력을 키우면서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고사성어 와신상담 참조) 이 과정에서 오(吳)나라 부차(夫差)에게 패한 월나라 왕 구천(勾踐)의 충신 범려(範려)가 보복을 위해 월나라 최고 미인인 서시(西施)에게 예능을 가르쳐서 호색가인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다. 즉, 전쟁에 패한 월 구천이 승자인 오 부차에게 준 여인이 바로 서시이다. 서시의 출생 및 사망 연도는 기록에 없다. 하지만 두 나라의 전쟁 중에 있었던 사실이니 대략 기원전 500년 정도에 출생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녀는 땔나무 장수의 딸이었고 선천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

서시는 가슴앓이 병이 있었는데 가끔씩 눈살을 찌푸리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매우 아름다웠지만 눈살을 찌푸릴 때 더욱 아름다워 추녀들로 서시의 행동을 모방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고사성어 서시빈목 참조) 결국 미인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은 부차는 구천에게 패하게 되었다. 서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미녀을 바쳐 미인계를 쓰고자 했던 월 구천의 모사 범여가 서시를 궁중으로 불렀다. 서시의 얼굴이 얼마나 예뻤던지 구녀를 한 번이라도 보고자 하는 구경꾼들이 인산이해를 이루어 서시를 태운 수레가 길이 막혀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 겨우 사흘만에 궁전에 도착했는데, 그녀를 본 궁전의 경비병이 그 아름다움에 빠져 기절했다고 한다.

그녀를 구경하려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범여는 그녀를 보는데 1전씩 돈을 내도록 하였는데 모인 돈이 산처럼 쌓였다고 한다. 범여는 그 돈으로 무기를 만들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태백은 오서곡이란 시에서 서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姑蘇臺上烏棲時 吳王宮裏醉西施 吳歌楚舞歡未畢 靑山猶銜半邊日 銀箭金壺漏水多 起看秋月墜江波 東方漸高奈樂何 고소대 위에 까마귀 깃들이려 할 적 부차는 궁중에서 서시에 흠뻑 취했었네. 오가 초무의 환락 끝나지 않았는데 푸른 산은 어느 덧 지는 해를 반쯤 삼켰었네. 은 바늘 세운 금 항아리에선 물 많이 새었고 일어나 바라보면 가을 달 물결 속에 빠져 있었네. 동녘 어느새 밝아 왔으니 못 다한 즐거움 어이 했을까.
 


                     범려(范蠡 :處世의 達人), 서시(西施) 이야기 | 역사

하늘타리 | 조회 78 |추천 0 | 2013.04.02. 13:41


 

 

범려(范蠡 :處世의 達人), 서시(西施) 이야기  문학-명시산책

 

 

범려(范蠡 :處世의 達人), 서시(西施) 이야기

2000 년 전의 유명한 사학자 사마천(司馬遷)이 그의 저서 史記에서,

  세 번이나 나라와 직업을 옮겨가며 크게 성공해서 후세에 이름을 날린

범려(范蠡)를

      공을 세운 후 은퇴해서 편안한 삶을 산 '공성신퇴(攻城身退)'의 표본으로

 특기하고 있다.

(太史公曰; 范蠡三遷 皆有榮名 名垂後世.)

범려(范蠡)는 원래 초(楚)나라 宛 고을 三戶 사람인데,

                  그의 형 집에 얹혀살면서 미친 척 하며 세간의 풍속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놀았다.(佯狂倜儻負俗).

고을현령(宛令)이던 문종(文種)이 부하 관리를 보내 만나보려고 했는데 부하가 돌아와 말하기를

“범려는 미치광이 같은데 원래 그렇다고 한다.” 라고 하자,

문종이 “ 원래 뛰어난 선비는 미친체하는 경우가 있어서 겉으론 알아보기 어렵다고 하더라.” 라고 하며

수레(駕)를 보내 모셔오게 했지만 범려가 도망가 버렸다.

범려 본인은 현령이 직접 찾아 올 줄 알고 그의 형수에게

“손님이 올 것이니 의관을 빌려와서 준비해 달라.”고 했다.

다음날 과연 현령이 직접 찾아와서 손잡고 얘기하니 이웃 사람들이 놀라워했다고 한다.

문종은 범려를 데리고 越나라로 갔다.

그들은 원래 吳나라로 가려고 했었는데,

吳나라엔 이미 楚나라에서 먼저 도망쳐온 오자서(伍子胥)가 등용되고 있어서,

풍속 언어가 비슷한 이웃 越나라로 가자는 범려의 제의에 따라 越나라로 간 것이라고 한다.

文種을 大夫 種이라고도 부르는데 大夫가 성이란 설도 있다.

楚나라 平王 때 宛 고을의 縣令이던 文種이 범려가 사는 三戶 마을에 갔을 때,

范蠡가 개구멍(犬竇)으로 내다보며 쪼그려 앉아서 개처럼 짖어대자(蹲而吠之),

수행원이 옷을 잡아끌며 못하게 했다.

문종이“ 그냥 놔 둬라(無鄣也),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개가 나를 보고 짖는 곳에 사람이 있다 했는데,

오늘 여기 성인의 기운이 보이므로 만나 봐야겠다.” 하고

수레에서 내려 범려에게 가서 예를 표하고 데려왔다고 한다. (以上: 會稽典錄, 吳越春秋 등 기록)

범려는 곧 越王인 구천(句踐)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서 군사뿐만 아니라 일체의 국정을 총괄토록 했으나,

자기는 군사를 조련시키는 일은 문종(文種)보다 낫다고 할 수 있으나,

국사를 경영하는 일은 그가 더 잘할 것이라며 사양하고 문종을 천거해서,

둘이 함께 구천왕을 보좌하게 된 것이다.

당시 월(越)나라 동쪽 즉 현재의 소주 상해 일대에 있던

吳나라는 합려(闔閭)왕 시절 국력이 강해져서 춘추시대 패자로 되었는데,

이웃 월(越) 나라를 공격하던 중 부상을 당해서 죽게 되었다.

죽으면서 그 아들 부차(夫差)에게

“ 너는 결코 네 아비를 죽게 한 월(越)왕 구천(句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유언하였다.

부차(夫差)王도 그 말을 명심하고 10 여년을 섶(薪)에서 누워(와신:臥薪)자며

복수의 기회를 엿보다가 BC 494년 월(越)을 대파시키고 구천(句踐)과 범려 등

신하 모두를 사로잡아 吳나라로 끌고 가서 가두어 두고 종으로 부렸다.

구천(句踐)왕은 그런 굴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으려고 하다가,

忍苦를 견디고 후일 월나라를 다시 세워 복수하자는 범려(范蠡)의 충고에 따라

부차(夫差)왕의 하인 노릇까지 하는 수모를 감수했다.

선왕 합려(闔閭) 이래의 공신인 오자서(伍仔胥)가 구천(句踐)을 살려두면 안된다고 했으나,

부차(夫差)王은 범려를 따라온 미녀 서시(西施)도 탐이 나고,

월나라의 뇌물을 받아먹은 재상 백비(白嚭)의 말도 있어서

구천(句踐)과 월나라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내 주었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구천(句踐)은 범려(范蠡),문종(文鐘) 등 군신과 함께

밤낮 쓰디 쓴 쓸개(膽)를 핥으며(상담:嘗膽) 재기를 다짐 했는데,

이후 은인자중하며 후일을 기약한다는 고사성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말이 생겨난 것이다.

쓸개 맛을 보며 친히 쟁기를 몰아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 하는 등 20 여년간 국력을 키운 구천(句踐)왕은

범려 등을 앞세워 BC 474 년 오나라에 쳐들어가서 이번엔 부차(夫差)왕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20년 전 자기를 살려준 점을 감안하여 그에게 작은 식읍을 주어 살도록 제의했으나,

부차(夫差)는 자기에게 충언을 하다가 죽은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며 스스로 자결하고 말았다.

중국 역대 최고의 미인이라는 서시(西施)는

원래 越나라 시골 저라(苧羅)에서 나무꾼(樵夫) 아버지와 베 짜는(織女) 엄마 사이에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선시(先施), 이광(夷光) 등으로 불리며 엄마를 도와 약야계(若耶溪) 냇가에서 빨래하던 소녀였다.

15세 때 범려가 데려다가 가무와 예절, 그리고 房中術 등

온갖 교육을 받아 그야말로 재색겸비의 미녀가 되었는데,

그녀가 근처 냇가에라도 나가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그녀를 보려고 몰려와서 길이 막힐 정도였다고 한다.

범려는 서시(西施)를 보려고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 나라의 군자금으로 충당했는데,

그 돈이 막대했다고 한다.

타고난 미모에 온갖 여자다운 교육을 받은 서시(西施)는 결국 오나라 부차(夫差)의 왕비가 되었고,

그녀는 곧바로 오나라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부차(夫差) 왕은 그녀를 위해서 太湖와 영암산(靈岩山) 이 어우러진 곳에 아름다운 관왜궁(館娃宮)을 지어주고

밤낮으로 그녀와 놀며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미녀 서시(西施)는 발걸음 소리도 듣기 좋았던 듯, <관왜궁> 안에는 문공랑(聞跫廊)

또는 향섭랑(響屧廊)이라 하는 그녀의 나막신 발걸음 소리를 듣는 회랑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태호(太湖) 연안에 있는 여원(蠡園)이라는 범려와 서시를 기념하는 공원에 가보면

문공랑(聞跫廊)이란 회랑도 볼 수 있다.

오(吳)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범려(范蠡)는

그 후 벼슬을 버리고 미련 없이 물러나 일찍이 그가 키우며 장래를 약속했던 미녀 서시(西施)와 더불어

평안한 여생을 보낸 소위“공성신퇴(功成身退)”의 모델케이스이며 처세의 달인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범려(范蠡)는 일찍이 목이 길고 입이 새 주둥이처럼 튀어나온(長頸鳥喙:장경조훼) 구천(句踐)의 관상을 보고,

어려운 시절은 함께 당해도 즐거움은 함께 누릴 수 없는(可與共患難 不可與共樂) 위인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20 년간 와신상담 끝에 오(吳)나라를 멸망시킨 후 구천 왕에게 사표를 내면서,

“ 신하된 자는 주군이 치욕을 당하면 목숨이라도 버려야 하는데,

주군께서 오나라 왕에게 치욕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죽지 못한 것은

오로지 오나라에 보복을 하기 위함이었고,

이제 그 목적을 이루었으니 그 때의 죄를 받고 싶은 것입니다.” 하였다.

구천(句踐)왕이 그를 만류했지만 끝내 사양하므로

회계산 일대 삼백리 땅을 그의 식읍으로 해주고 떠나보냈다.

범려는 그의 평생 동료였던 대부 문종(文種)에게도

구천(句踐)의 관상이 산에 토끼가 없어지면 사냥개를 삶아먹는(兎死狗烹: 토사구팽) 식으로

공신을 퇴출시킬 위인이니, 떠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문종(文種)도 범려의 현명함을 알았지만 재상 자리에 미련도 있어서

병을 핑계 삼고 조회에 나가지 않고 있다가 결국 구천(句踐)에게 트집잡혀 죽어서,

범려의 <토사구팽> 예언이 적중했음을 증명하며 이 말이 유행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말았다.

범려(范蠡)는 벼슬을 내놓고 약혼녀였던 미녀 서시(西施)를 데리고

작은 조각배를 타고 아무도 모르게 바다 같이 넓은 태호(太湖) 속의 섬으로 들어가서

시이자피(䲭夷子皮)라고 이름을 바꾸고 양어(養魚)로 큰 돈을 벌어서 근처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었다.

그러나 차츰 그의 정체가 알려지자 다시 山東 齊나라로 가서 이름을 다시 주공(朱公)으로 바꾸고

도자기 사업을 했는데 또다시 억만장자 거부가 되었다.

그의 능력을 인정한 제나라 왕이 재상으로 삼으려 하자 그는

“필부의 몸으로 상장군이 되고, 거부가 된 후 다시 재상이 되라 하는데,

榮華는 오래 가지 않은 법이다” 하고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가 키운 절세미녀와 함께 언제 어디서 저세상으로 갔는지 궁금하지만,

원체 오랜 옛날의 일이고 기록도 없어서 더 이상 추적할 방법이 없다.

과연 처세의 달인이라 할만 하다.

범려(范蠡)의 무덤이라고 하는 곳은 두 군데 있다고 한다.

하나는 그의 옛 고향 근처 荊州 서쪽에 陶朱公冢이 있는데 나무비석(樹碑)에 越 范蠡라고 되어 있고,

또한 산동성 濟州 平陰縣 동남쪽 陶山 아래에도 그의 무덤이라는 陶公冢이 있는데

어느 곳이 진짜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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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人 之 計 (2) 沈魚 西 施


中國 春秋時代 월(越)나라의 절세 미녀 西施. 그녀의 本名은 이광(夷光)이며, 절강 (浙江) 저라산(苧羅山) 근처에서 나무장수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얼마나 美女였으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강물에 비추니 水中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하여 "침어(浸魚)"라는 칭호를 받았겠는가,

그 지방의 女子 들은 무엇이든 "서시"의 흉내를 내면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 생각하고, 병이 들었을 때의 "서시"의 찡그리는 얼굴까지 흉내를 냈다고 하여 "效嚬(효빈)"이라는 말까지 생겼겠는가?

월왕 "구천'은 吳나라에서 포로가 되어 3 年간의 굴욕을 씻기 위하여 "범여"는 군 양성에, "문종"은 나라살림에 온 힘을 쏟으며, 원수를 갚기 위하여 "와신상담"이란 고사를 낳으며 7가지의 전략을 세우고 하나 하나 실천에 옮기게 된다.

월왕 "구천"은 국방력이 강화되자 7가지 계책중 美人計를 실천에 옮기기로 하고 적합한 인물로서 절세가인 "西施"를 선정하여 예능을 집중 교육하게 된다.

그러나 "西施"는 "충신 "범여"가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인데 그를 美人計의 희생물로 가능하겠는가?"라고 말 하자.

"서시"는 "........지금 나라가 망해 가는데 우리가 어찌 사랑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吳王이 저의 몸을 가질 수 있어도 저의 마음은 영원히 가질 수 없을 겁니다."라고 하면서 기꺼히 응하였다.

이렇게 하여 월왕(越 王) 구천(勾踐)의 충신 "범여"가 "西施"를 데려다가, 호색가인 오왕 "夫 差(부차)"에게 바치니, 오왕 부차는 넋이 나간 듯 한참 동안 옴짝달싹 못하고 멍하니 앉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수면에 비친 수선화 같고,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몸짓은 미풍에 하느적그리는 수양버들 같았다.

부차는 갑자기 사지가 흐늘거리고 정신이 몽롱해 졌다.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 취하고, 미색이 사람을 유혹하지 않아도 스스로 미혹된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吳나라의 忠臣 "오자서"는 "폐하! 월왕 "구천"이 세상에 보기 드문 선녀 같은 美人 "西施"를 헌납한 이유가 딴데 있으니 주의하셔야 된다."고 경고 하자,.

아첨에 능하고 부차의 비위를 잘 맞추면서 충신 오자서를 시기해오던 간신 "백비"가 "후궁에 美人들이 1,000 名이 넘는데 美人 한,둘이 더 온다고 해서 무슨 큰 일이 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끼어 들었다.

"西施"의 출중한 미모뿐만 아니라 부차에 대한 그녀의 부드러운 태도와 배려, 존경은 부차로 하여금 날마다 훈훈한 봄바람속에 목욕하고 구름을 타는 듯한 황홀감을 느끼게 했고,

부차가 탄복을 금치 못한 것은 서시의 독특한 재능과 지혜, 그리고 우아한 말투였다.

그녀가 하는 말은 구절구절 세속을 벗어난 것처럼 우아하면서도 비범하여 조정의 上大夫나 의전대신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통찰력을 갖고 있어

"부차"는 그녀의 지지가 없이는 어떤 일도 혼자서 결정하거나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西施"는 수시로 吳나라에 곡식을 꾸어달라 하여 창고를 비게 하고, 화려한 궁궐을 지어 재물을 탕진케 하며, 吳나라 忠臣들을 궁지에 몰아 人才를 제거하여 吳나라를 弱化시키는데 中心的인 역할을 하였고,

BC 482 年 11月에 吳王 "부차"를 종용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晉 定公(진 정공)과 회맹하기 위하여 黃池(황지;오늘의 하남성 봉구)에 간 틈을 노려 월왕 "구천"은 13만 大軍을 이르켜 吳나라를 공격하도록 공작을 꾸몄으며,

BC 473 年 2차에 吳나라를 공격함으로써 마침내 "臥薪嘗膽(와신상담)" 18 年 간의 끝자락을 보게 만들었다.

吳왕 "부차"는 월나라에 패하여 자결하면서 "西施"를 경고하였던 忠臣 "오자서"를 볼 낯이 없으니 내가 죽거던 나의 얼굴을 비단으로 세겹 싸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한다,

18 年이란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吳나라를 멸망시킨 忠臣 "범려"는 월왕 "구천"에게 친필 서신 한 통을 남기고 "西施"와 더불어 모습을 감추었다.

"大王 폐하! 폐왕께 저의 서신을 읽으실 때쯤엔 저와 "西施"는 찾으실 수 없을 것입니다.吳나라를 멸하고 지난날의 설한을 푸는 동안 저희는 월나라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으나, 이미 소원이 이루어진 지금은 폐하께 더이상 저희가 필요치 않습니다.

오히려 저희는 폐하의 治世에 장애가 될 것입니다. 뛰어난 美色으로 吳王을 유혹했던 "서시"는 폐하마저도 유혹하게 될 것이고,

吳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저 자신도 세력이 강대해져 폐하의 근심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해서 저희는 먼저 폐하께 작별을 고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범려는 또 "문종"에게 한통의 편지를 썼다.

"구천은 "長頸烏喙(장경오훼)"의 상으로,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같이 할 수 없으며,교활한 토끼가 죽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 것처럼 적국이 멸하면 전역의 공신들이 죽임을 면치 못하는 법일세. 이것이 바로 나와 "서시"가 멀리 떠나는 이유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