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유명 글 모음
죽음이여 뽑내지 마라/존단
박송 입니다.
2010. 8. 27. 11:24
존 단,「죽음이여, 뽐내지 말라」
Skull on a table. Are you scared of the skull? 추상명사인 죽음이 의인화되었다. 그리고 시인은 죽음에게 잘난척하지 말라고 한다. 거침 없는 하이킥이다. 왜? “Death Be Not Proud” (by John Donne) DEATH be not proud, though some have called thee Mighty and dreadfull,* for, thou art not so, dreadful For, those, whom thou think'st, thou dost overthrow, Die not, poore* death, nor yet canst thou kill me. poor From rest and sleepe,* which but thy pictures bee,* sleep/ be Much pleasure, then from thee, much more must flow, And soonest our best men with thee doe goe,* does go Rest of their bones, and soules deliverie.* soul's delivery Thou art slave to Fate, Chance, kings, and desperate men, And dost with poyson, warre, and sicknesse* dwell, poison/ war And poppie, or charmes can make us sleepe* as well, poppy/ charms And better then thy stroake;* why swell'st* thou then; stroke/ swell One short sleepe past, wee wake eternally, And death shall be no more; death, thou shalt die. *** 「죽음이여, 뽐내지 말라」― 존 단 죽음이여 뽐내지 말라, 어떤 이들은 너를 힘세고 무섭다 일컫지만, 넌 그렇지 않나니. 네 생각에 네가 해치운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죽는 게 아니다. 불쌍한 죽음아, 넌 나도 죽일 수 없다. 너의 그림에 지나지 않는 휴식과 잠에서 큰 기쁨 나오나니, 너로부터는 더 큰 기쁨 나온다. 또한 훌륭한 사람들 유골의 안식과 영혼의 해방 찾아 되도록 빨리 너와 함께 간다. 너는 운명, 우연, 제왕들, 그리고 절망한 자들의 노예. 그리고 독약과 전쟁과 질병과 함께 산다. 그뿐인가, 아편이나 마법도 너의 일격만큼 또는 더 잘 우릴 잠들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뽐내느냐. 짧은 한잠 지나면, 우리는 영원히 깨어난다. 그러면 죽음은 더 이상 없을 것. 죽음이여, 네가 죽으리라. *** [Modern Translation] Death, be not proud, though some have called Mighty and dreadful, for you are not so; For those whom you think you do overthrow, Die not, poor death, nor yet can you kill me. From rest and sleep, which but your pictures be, Much pleasure ― then, from you much more must flow; And soonest our best men with you does go, Rest of their bones and soul's delivery. You are slave to fate, chance, kings, and desperate men, And do with poison, war, and sickness dwell, And poppy or charms can make us sleep as well, And better then your stroke; why swell you then? One short sleep passed, we wake eternally, And death shall be no more; death, you shall die. Stop & Think Topics for Discussion 1. What are two figures of speech that dominate the poem? 2. Why should death not be proud? List the speaker's major reasons. Are they consistent? Logical? Persuasive? 3. Discuss the tone of the poem. Is the speaker (1) a man of assured faith with a firm conviction that death is not to be feared or (2) a man desperately trying to convince himself that there is nothing to fear in death? Commentary Death is far from fearful, but instead, an abstract figure to be pitied, for it is death that will truly die in the end. Death has no right to be proud, since human beings do not die but live eternally. |


![]() |


![]() |

|
![]() |
죽음을 제대로 농락하고 있네요. 시를 보고선 인간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기에 죽을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얘기가 생각났습니다. 사소하게 밥을 먹거나 숨을 쉬는 순간에도 종이 한장 차이처럼 인간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 앞에 있습니다.(행위를 성사시키지 못하면 바로 생명과의 단절을 의미하니까요.) 시인은 이러한 생각보다 한차원 앞서서 죽음을 삶의 일부분으로 보았던것 같습니다. 마치 죽음을 휴식이나 잠의 일부로 치부하는 것처럼 오히려 더 큰 기쁨이라고 표현한 점이 시인은 죽음이 두려워 할만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
2010-01-01 23:04:59 ![]() |

![]() |

|
![]() |
모든 일에는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생각을 항상 하면서 산다. 삶과 죽음도 마찬 가지가 아닐까... “ one short sleep passed, we wake eternally, ”(짧은 한잠 지나면, 우리는 영원히 깨어난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덜할 것 같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해 한번 쯤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2010-01-02 17:39:17 ![]() |

![]() |

|
![]() |
내 생각에는 죽음은 모두에게 두려움일 것 같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그 이후를 알 수가 없어서가 아닐까? 그렇기에 존 단은 그의 시를 통해그의 두려움을 떨쳐버리고자 한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And death shall be no more; death, thou shalt die.' 이 표현에서 그의 죽음에 대한 증오감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다. | 2010-01-02 20:20:53 ![]() |

![]() |

|
![]() |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다. 아직 저 같은 경우는 젊어서 그런 걱정을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고 죽음에게 경고를 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힘이 느껴지네요. 아니면 그도 언젠간 죽을걸 알기 때문에 그런 두려움을 떨쳐 버리기 위해 이런 시를 쓰지는 않았을까요. | 2010-01-03 20:04:53 ![]() |

![]() |

|
![]() |
이 시를 읽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시인인 존단은 평소에도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면서 살아가며 두려움을 항상 갖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추상적인 죽음을 구체적으로 의인화시키며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떠나보낸 상처로 인한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 2010-01-03 21:01:52 ![]() |

![]() |

|
![]() |
오히려 시인은 죽음이 두려워서 이런 시를 쓴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무언가가 너무나 두려울때는 무섭지 않다고 자꾸 되뇌여서 그렇지 않게 되려고 하는 듯이 말입니다. 누구나 죽게 마련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렇게 죽음에게 큰소리 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2010-01-03 22:11:11 ![]() |

![]() |

|
![]() |
죽음, 모든만상들의 끝은 '죽음'이라는 단어에 약해지고 무릎꿇기 마련이라 생각되어지지만 존단의 시에서 죽음은 오히려 별것 아닌 것이며, 후에 영원히 깨어날 우리들이 거쳐가야할 하나의 과정에 있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어진다. 존단의 시를 잃으니, 막연히 두렵게만 느껴졌던 죽음이라는 것이 조금은 덜 두렵게 느껴지게 된다. 존단은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던 작가인 것 같다. 그 생각끝에 죽음에 대해 초연한 마음과 달관의 자세를 가지려는 마음으로 이러한 시를 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시 안의 화자가 초연해 보인다기 보다는 굴복하지 않고, 무서워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더 돋보이긴 합니다. | 2010-01-03 23:01:40 ![]() |

![]() |

|
![]() |
시인은 죽음에 대해 대담하고 용감한듯 묘사했지만, 오히려 ..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더 의지적으로 저렇게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존단의 시는... 다른 일반적인 시인들의 시와는 느낌이 너무도 달라서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더 알고싶은 욕심이 생기는 시인이다. |
2010-01-03 23:45:03 ![]() |

![]() |

|
![]() |
죽음을 향해 의연하고 단호한 어조로 경고하는 시로서 특히 죽음을 휴식, 잠등으로 표현한 것은 죽음에 대한 의연함의 이유가 된다고 볼수 있다. 죽음을 영원한 소멸이 아닌 휴식이나 잠과 같은 것으로 생각 했기에 그에게 죽음은 더이상 두렵고 도망치고 싶은 존재가 아니게 된것이다. | 2010-01-04 17:04:36 ![]() |

![]() |

|
![]() |
시인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듯이 시를 썼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죽음이 너무 두려운 나머지 자기최면을 걸듯이 이런 시를 쓴게 아닐까요? 죽음은 꼭 두려워해야 할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죽음으로 인해 더 좋은 세상으로 갈 수도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을 하고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슬프기도 합니다. |
2010-01-04 19:03:29 ![]() |

![]() |

|
![]() |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들 중에 하나가 바로 죽음일 것이다. 사실 죽음을 경험해본적도 없고 죽음이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르는데 막연한 공포심을 갖고 있는 것같다. 시를 보니 존 단은 이런 죽음에 대해서 아주 당당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운명, 우연, 제왕들, 그리고 절망한 자들의 노예일 뿐이고 죽음이 할 수 있는 잠재우는 일은 아편이나 마법이 더 잘할 수 있다고 죽음을 깎아내리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고있다. 이 시를 읽고나니 정말 우리가 두려워했던 죽음이란 무엇일까 다시한번 생각해보게되었다. | 2010-01-04 22:06:45 ![]() |

![]() |

|
![]() |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하는 시인 과연 진심일까요 아니면 죽을을 떨쳐내버리려고 저런 시를 지었을까요 의문입니다. 저도 다른사람들 처럼 죽음이 두렵고 어떻게 죽을지 무섭지만 아직 직접 겪어 본것이 아니라 시인의 시를 이해 할것 같습니다. 아직 죽음을 겪어 보지 않았기에 저렇게 죽음을 농락하는 시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
2010-01-04 22:45:24 ![]() |

![]() |

|
![]() |
정말 강렬한 느낌이 드는 시였습니다. 죽음이여 죽을 준비를 하라라니, 말장난같으면서도 굳센 의지가 보였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가장 두려워할만한 소재를 저렇게 강렬하게 맞받아 치면서 통쾌하게 용기를 보여주다니.... 존 단의 용기와 당당함이 정말 눈에 띄는 시였던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뭔가 초월의 경지에 올랐을 것 같구요 ! | 2010-01-04 23:12:22 ![]() |

![]() |

|
![]() |
죽음을 하찮은 존재로 격하시켜 말 그대로 Skull에 하이킥을 날리는군요. 죽음의 역할은 아주 미미한 것일뿐, 마약에도 못 미치는 그 죽음이 무엇이 두렵냐며 정면으로 일격을 날립니다. 존 단은 죽음 이후의 영속성에 주목하고 있는 듯 합니다. 죽음에 관한 긍정적인 사고 방식. 멋집니다. 배워야겠습니다. |
2010-01-04 23:15:42 ![]() |

![]() |

|
![]() |
포스터를 읽어내려가면서 과연 시인이 죽음에 대해 정말 두려워하지 않아서 이 시를 썼을까? 일말의 두려움이라도 존재했기 때문에 굳이 죽음에 대해 하이킥을 날리는 이런 시를 쓴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는데 과연 위의 댓글들을 보니 많은 분들이 그런 생각을 하셨나 보네요. | 2010-01-05 01:55:14 ![]() |

![]() |

|
![]() |
저 시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본 죽음의 역설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위의 시는 죽음은 삶을 끝장 내지 않고 오히려 영생을 얻게해준다는 내용이지만, 오히려 죽음이 너무나 두려워서 죽지않으려 발버둥 치며, 저시를 완성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 2010-01-06 17:22:13 ![]() |

![]() |

|
![]() |
어릴 때부터 가끔씩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는데..(지금도요) 존 단의 이 시를 읽고 나니 시인에게 엄청나게 감사하게 되네요. 두개골이 책 위에 있고, 그 책 아래 깃펜이 있다는 것은, '죽음은 단지 글에서 놀아나는 바보'라고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읽고나니 저 좋을데로 해석이 되서 그런 것일 테지만요.. | 2010-01-12 00:39:59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