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 행사 소식

2019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음

박송 입니다. 2019. 7. 20. 15:10


2019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음

17. 대전일보 - 그녀가 뛰기 시작했다(임 호)

18. 강원일보 - 측백나무 울타리(송연숙)

19. 문화일보 - 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조온윤)

20. 경남신문 - 명왕성 유일 전파사(김향숙)

21. 경인일보 - 숲에서 깨다(하채연)

22. 광남일보 - 혀를 삼키는 나무(조경환)

23. 머니투데이 - 당산나무 연대기(정지윤)

24. 한국경제 - 물고기의 잠(설하한)

25. 영남일보 - 이름(서진배)





대전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녀가 뛰기 시작했다/임 호


출근길, 그녀가 뛰기 시작했다

은행알들이 비좁은 그녀의 구두에 밟혀 터진다

"헬로 에브리바디~ 근데 내가 좀 바쁘거든요~!"

우리의 그녀는 바쁘다

우리의 그녀는 뛰지 않을 수 없다

어깨에 당겨 맨 앙증맞은 가방엔

있어야 할 약간의 센스와

없어도 될 약간의 의심을 담고

우리의 그녀는 뛴다

한꺼번에 많이 벌릴 수 없어 조금씩 뛴다

누군가에게 잡히지 않을 만큼씩 뛴다

먹이를 쪼는 비둘기처럼 뒤뚱거리며 뛴다

그녀는 뛴다

늦지 않기 위해, 울지 않기 위해, 모자라지 않기 위해, 같아지기 위해?

그녀의 치마는 그녀가 선택할 수 없는 바람에 흩날리고

그녀의 가슴은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안도로 출렁이고

그녀의 쇄골은 떡볶이처럼 흐느적거리고

그녀의 뺨은 뿌듯함으로 달아오른다

우리는 이런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본다

우리는 그녀의 페이트런

그녀의 협잡꾼, 그녀의 앞잡이

상처의 방향이 다를 뿐

우리는 한 이불에서 뛰기 시작했다

누가 그녀를 미워할 수 있겠는가

명랑한 그녀의 부주의를

누가 그녀를 모른 체 할 수 있겠는가

자꾸만 예뻐지는 그녀의 미래를

누가 그녀를 손가락질 할 수 있겠는가

그녀만의 달콤한 모멸을

그러므로 우리는 그녀의 피앙세

도려낸 시간에서 흐르는 육즙을 받아 마시며

저 푸른 초원 위에 녹초가 되어 쓰러질 때까지 달리다가

돌아와 그녀가 사라진 엘리베이터앞에 앉아

포크를 움켜쥐고 그녀의 퇴근을 기다리는

우리는, 우리는 모두

그녀의 그녀




강원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측백나무 울타리/송연숙

누가 아무도 없는 들판에

측백나무 울타리 세워놓았나

안쪽도 바깥도 없는 그 울타리 드나들며

나는 안쪽에서 바깥을, 또 바깥에서

안쪽을 넘겨보거나 내다보곤 했다

또 아주 오래전 허물어진 옛집을 수습해서

울타리에 기대 놓았다

그럴 때면 앞마당과 뒤란이

저희들끼리 순서를 정하곤 하였다

집을 품지 않은 울타리는 울타리가 아니어서 벌판으로 몇 천리 가면 기차가 떠나는 간이역이 있고 또 어느 쪽에서 몇 시간 동안 그 기차를 타고가면 어리둥절할 양떼들이 있다 양들에게 측백나무 울타리에 관해 물으면 예전 자신들이 구름의 일족으로 흘러 다닐 때 언뜻 본 것도 같다는 말을 하였다

측백나무 울타리에

오래전에 무너진 집을 다시 세운다

거미는 아침이슬로 기둥을 세우고 처마도 만드는데

머리가 먼저 이슬에 들어가 집을 짓는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둥근 배마저 이슬의 방을 하나씩 차지한다

안쪽도 바깥쪽도 없는 집

순서도 모서리도 신음도 만들지 않는 집

측백나무 울타리엔

거울 하나 둥실 매달려 있다




문화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조온윤

할머니가 있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가판대 위 물고기의 눈알처럼

죽어가면서도 시선을 잃지 않아서

그 아득한 세월의 흔들의자에 앉아 여전히

이승의 장경을 관망하고 있는

아무르 강가에서 늙고 지친 호랑이가

밀렵꾼들에게 가족을 잃은 마지막 호랑이가

수면 위로 얼굴을 비추는 순간

마르고 거친 혓바닥을 내밀어 적시는 순간

늙은 호랑이는 마주하게 되지

마지막 할머니를

초원 위를 뛰어다니는 사슴들을 멀리서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한 있는 위구르족 여자의 시선을

그 시선의 수심을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어서

심해어의 눈처럼

어딘가에 있겠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무언가 보고 있겠지만 무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초점이 없이도 자전하는 지구본처럼

물고기 눈알이 빨간 국물에 적셔졌다면, 지금쯤 식탁 위에서

눈알을 도려냈다면 어두컴컴한 하수구 어디쯤에서

삼켰다면 고래의 뱃속에서

여전히 관망하지

세계를

그곳의 공감각을

머지않아 모든 할머니들이 사라진 시대가 온다고 해도

목을 축이러 찾아간 아무르 강가에서

저 멀리 초원 위를 뛰어다니는 사슴들밖엔 바라볼 수 없다고 해도

호랑이는 그 눈을 죽는 그 순간까지 기억하지

죽은 뒤에도 시선을 잃지 않아서

흔들의자는 혼자서도 오랫동안 흔들거리지




경남신문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명왕성 유일 전파사/김향숙


모든 가전엔 명왕성 하나 두둥실 들어있다고 했다 목숨 다하면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제 몫을 못하는 것이 제명이라고, 별명이 백과사전인 그 사내는 모르는 게 없다 이 빛나는 지구도 저 없으면 돌지 않는다고 사십년 기름때 묻은 공구함을 가리킨다 공구들의 명칭마다엔 알파벳 하나씩 휘어지고 벗겨진 곳곳에 일본식 표현이 살짝 묻어있다

오일마다 망가진 것들이 몰려있는 난전, 배운 적 없는 어깨너머의 기술로 만지작거리면 고장 난 밥솥이 빨간 눈을 켜고, 커피포트 녹음기 선풍기와 마음 고장 심하게 난 이웃까지 불러 앉혀놓고 막걸리 한 잔 따라주면서 다독다독 고친다

십자와 일자, 플러스와 마이너스만 있으면 퇴출당한 명왕성도 거뜬히 고친다고 큰소리치는 명왕성 유일 전파사 그 사내

봄날이어서 수리 마친 가전들

저러다 파란 이파리들 막 돋아날까 걱정스러운데

고친 카세트 들고 집으로 가는 사람들

흥겨운 듯 절절한 트로트가 그 뒤를 따라간다



경인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숲에서 깨다/하채연


등을 받치고 잠들었던 나무기둥에서

새벽이슬 냄새가 훅 끼쳐온다

사방에 울울창창하게 뻗은 녹음들

현시를 잊은 채 창공에 닿아 빛나고

꿈결처럼 말을 거는 선선한 바람에

나는 나무들이 지어놓은 미몽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새소리로 엮어놓은 문패를 열고 들어가자

억겁의 땅으로부터 솟은 나이테의 내력이

기둥을 키우며 나의 발목에 작고 푸른 원주를 새기고

육신과 나무, 나무와 육신 사이를 비집고 난 샛길 사이로

와본 적 있는 것만 같은 울렁이는 향수가 지천에 빛난다

목피들이 전생을 벗겨내는 소리가 알싸한 그 길목에선

곤줄박이 한 마리가 잎새 한 장을 전해준다

해독할 수 없는 이끼들의 필체로 쓰인 문장들

지워지지 않을 나의 태곳적 이름을 발설하고 있다

무한한 혈맥으로 엮인 나무 그늘 속

편안히 누워 흙이 된 이름들을 짚어본다

끝없이 이어져 불거진 이 뿌리들은 나를 이어주는 끈이었을까

억겁의 계절을 지나도 숨 쉬는 숲은

태양과 달을 이고 은빛 땀을 대지로 흘려보내고

나는 한 장의 연서를 쥐고 숲에서 깬다

뒤돌아보면 푸른 절경이 등허리에 축축하다




광남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혀를 삼키는 나무/조경환


그를 떠나보낸 건 혀였다

혀가 어른이 된 나무를 스튜디오에 불렀다

머나먼 이국으로 흙 한 줌, 물 한 모금 보자기에 싸여 보내졌다

어른의 모습으로 그가 돌아왔다

-어머니 찾으러 왔어요

1번 카메라 앞에서 젖은 가지를 후드득 턴다

붉은 혀가 더듬더듬 어떻게 살았느냐며 묻는다

허공에 파노라마처럼 나무의 성장과정이 실금처럼 얽히고 설킨다

-누굴 원망한 적은 없는 걸요

심호흡 한번으로 다 풀 수 없다는 듯이 고개떨군다

-우는 법도 잃어버렸어? 혀가 묻는다

-오는 내내 비가 내렸어요

더 가벼워지지 않으려고 무너지지 않으려고 날아왔죠

뿌리를 내리기까지 나무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더군요

새 뿌리에 새 말이 고인다 새 흙이 덮이고

새 잎이 수북이 쌓인다

혀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꺾꽂이 된 거군요

혀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혀가 3번 카메라를 보는 사이

내가 어미라는 말이 들린다

혀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저음이다

아랫입술 밑에서 나오는 작은 소리다

갑자기 그가 꺼이꺼이 운다

혀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그의 등을 두드린다

어른이 된 나무가 몸속 깊이 혀를 꿀꺽 삼킨다




머니투데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당산나무 연대기/정지윤


마을이 사라지면 그뿐,

그 누가 전설을 남겨두겠는가

마을보다 먼저 뿌리내렸을 당산나무

나이테에 지나간 그림자들이 기록되어 있다

황량한 벌판의 바람이 주인이었던 때가

아름드리 등고선에 박혀있다

할머니의 할머니가 드린 치성이

깊은 주름 골로 새겨 있다

점차 들어오는 발길보다 나가는 발길 잦아진

내리막 황톳길 희미하게 새겨 있고

사십 넘겨 맞선 보러 간 큰집 삼촌

퇴짜 맞고 거나하게 부르던 '목포의 눈물'이 묻어 있다

고모가 맡기고 간 젖먹이를 업어 키우는 할머니

아이가 칭얼거릴 때마다

해거름 당산나무 가지에 자장가를 걸어두었다

족보의 어디쯤 마디를 잘랐는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내 가지들

당산나무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수백 년 전 어느 그림자 내 지문을 닮아있다

마을은 캄캄한데 당산나무만 밤새

팔이 근질거린다

-머니투데이 2019 신춘문예 당선작 기사에서 발췌 -

한국경제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물고기의 잠/설하한

뜰채에서 튀어 오른 물고기가 수조로 돌아간다 물고기는 잠을 잔다 비가 수면을 두드린다 물살이 물고기를 조금씩 밀어낸다 한 물고기는 물에서 헐떡거리다 죽는다 물고기들의 미래에 놓인 것은 얇고 길고 번쩍이는 흰 것

물고기는 꿈을 꾼다 롤러코스터는 트랙을 달린다 정해진 낙차를 따르는 플롯 눈이 먼 늙은이는 젊었을 때 괴물이 낸 문제를 풀어 왕이 되었다 비가 끝없이 내렸다 그는 진창이 된 길 위에서 지쳐버렸다 자신을 이끄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눈물 흘린다 그는 쓰러져 숨을 몰아쉬다 죽었다

몸 위로 칼날이 떨어지는 꿈을 자주 꾼다 어떤 사람들은 물로 뛰어 내린다 바깥은 있습니까 나는 잠에서 깬다 마적 떼는 도착하지 않았다

비는 그치지 않는다 딸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오빠를 땅에 묻고 죽는다 죽은 반역자와 왕좌에 앉은 사람은 하나의 트랙을 번갈아 달리는 열차들 비가 무덤의 흙을 다진다 나는 슬프지 않으면 두려워진다 우리가 신의 손등 위에 있는 공깃돌이라면 어쩌지? 끝도 없이 떨어지는 꿈을 꾼다

나는 하루에 세 번 약을 먹듯 떠올린다

죽은 늙은이의 볼에 비늘처럼 일어난 피부, 그것을 적셔주는 빗물 같은 것, 가축의 숨통, 물고기의 깊은 잠




영남일보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름/서진배


엄마는 늘 내 몸보다 한 사이즈 큰 옷을 사오시었다

내 몸이 자랄 것을 예상하시었다

벚꽃이 두 번 피어도 옷 속에서 헛돌던 내 몸을 바라보는

엄마는 얼마나 헐렁했을까

접힌 바지는 접힌 채 낡아갔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 이름을 먼저 지으시었다

내가 자랄 것을 예상하며

큰 이름을 지으시었다

바람의 심장을 찾아 바람 깊이 손을 넣는 사람의 이름

천 개의 보름달이 떠도

이름 속에서 헛도는 내 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에서

까마귀가 날아갔다

내 이름은 내가 죽을 때 지어주시면 좋았을 걸요

이름대로 살기보다 산 대로 이름을 갖고 싶어요

내 이름값으로 맥주를 드시지 그랬어요

나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걸요

아무리 손을 뻗어도 손이 소매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걸요

이름을 한 번 두 번 접어도 발에 밟혀 넘어지는 걸요

한 번도 집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이불처럼 이름이 있다

하루 종일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없는 날 저녁이면 나는

이름을 덮고 잠을 잔다

뒤척이며 이름은 나를 끌어안고 나는 이름을 끌어안는다

잠에 지친 오전

새의 지저귐이 몸의 틈이란 틈에 박혔을 때,

이름이 너무 무거워 일어날 수 없을 때,

내는 내 이름을 부른다

제발 나 좀 일어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