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영국 여왕
빅토리아 영국 여왕
영국을 최고 번영기로 이끈 여왕
빅토리아 여왕에 대한 영국 국민의 사랑과 존경심은 여전하다. 위에서 말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60주년에 즈음해 영국 『텔레그래프』가 시행한 역대 영국 군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을 묻는 설문 조사에서도 35퍼센트로 1위를 차지한 엘리자베스 2세에 이어 빅토리아 여왕이 24퍼센트를 받아 2위를 차지했다. 엘리자베스 2세가 현역인 것을 감안하면 빅토리아 여왕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빅토리아 여왕은 1819년 5월 24일 조지 3세의 넷째 아들인 켄트공 에드워드 왕자와 독일 하노버 왕가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난 이듬해에 사망하고, 이후 그녀는 엄격한 교육 방침을 가진 어머니의 통제 속에서 과잉보호를 받으며 자란다. 이 때문에 그녀는 철이 든 후부터는 어머니의 교육 방침과 어머니의 정부로 알려진 콘로이 경(Sir John Conroy)의 후견인 역할을 줄곧 탐탁치 않게 여겨 여왕이 된 후 어머니를 멀리하고 콘로이 경을 해고한다.
원래 그녀는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와 세 명의 삼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후사가 없었고 또 한 사람은 두 딸이 있었지만 모두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다섯 번째 왕위 계승 서열에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1820년 그녀의 할아버지 조지 3세가 사망하자 가장 큰삼촌이 조지 4세(George IV)로 왕위에 오른다. 조지 4세의 재위 기간 중인 1827년 둘째 삼촌이 사망하자 이제 그녀 앞에 남은 후계자로는 셋째 삼촌밖에 없게 된다.
셋째 삼촌은 조지 4세가 결국 후사 없이 1830년에 사망하자 65세의 고령으로 왕위에 올라 윌리엄 4세(William IV)가 된다. 그리고 그 역시 계승권을 가진 적자를 남기지 못하고 1837년에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마침내 그녀는 불과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빅토리아 여왕이 된다.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할 당시 영국 정부는 휘그당 출신 총리인 멜버른 경(Lord Melbourne)이 이끌고 있었다. 첫 결혼에 실패한 데다 자녀까지 없었던 멜버른은 아직 경험이 부족한 빅토리아 여왕에게 자상한 아버지의 역할이 되어주었고, 영국의 군주가 가져야 할 덕목과 위엄을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왕위에 오른 3년 뒤인 1840년, 외사촌인 색스 코버그 고터 가의 앨버트 공(Prince Albert)과 결혼한다. 평소 어머니와 콘로이 경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결혼을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조언한 멜버른 경의 도움이 컸다.
빅토리아 여왕은 앨버트를 정말 사랑하게 된다. 독일 출신인 그는 처음에는 영국 사회에서 다소 소외되었지만, 고결한 인품과 풍부한 교양으로 여왕을 사로잡았다. 그는 그때까지 조언자 역할을 해왔던 멜버른 경을 대신해 여왕의 훌륭한 조언자가 되었으며 둘은 9명의 자녀를 두게 된다. 한편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는 그녀의 결혼과 동시에 왕궁에서 나가야 했지만 이후 앨버트 공의 현명한 중재로 모녀간의 관계도 어느 정도 나아졌다.
그리고 1861년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가 사망한다. 그녀는 모친이 생전에 남긴 기록을 통해, 어머니가 그녀를 깊이 사랑했었다는 걸 깨닫고 생전의 소원했던 관계에 대해 더욱 아쉬워하며 어머니의 죽음을 비통해했다. 앨버트 공은 슬픔에 빠진 빅토리아 여왕을 대신해 국가 정무를 수행해나갔다.
그해 11월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하고 있던 장남 에드워드가 더블린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그곳의 여배우와 동침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앨버트 공은 장남의 무절제한 행실에 화가 나 즉시 케임브리지로 달려가 아들을 훈계한다. 그런데 케임브리지에 다녀온 후 그의 몸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다. 당시 의사는 앨버트 공의 병을 장티푸스로 진단했다. 앨버트 공은 결국 1861년 12월 14일 병에서 회복되지 못한 채 빅토리아 여왕과의 21년간의 결혼 생활을 뒤로 하고 마지막 숨을 거둔다.
앨버트 공이 허무하게 사망하자 빅토리아 여왕의 상심이 매우 컸다. 그녀는 남편이 죽게 된 것은 장남 에드워드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아들을 내내 원망했다. 이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은 왕위 계승권자인 에드워드에게 오랫동안 국정에 전혀 손대지 못하도록 했다. 그는 5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내각의 회의록을 보고받을 수 있었다.
앨버트 공의 사망 이후 빅토리아 여왕은 평생 검은 옷을 입고 지내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런던에도 거의 들리지 않고 윈저궁에 칩거하며 실질적으로는 정무에서 손을 땐 채 생활했다. 앨버트 공은 이렇게 빅토리아 여왕의 애도 속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오늘날 엘리자베스 2세에 이르기까지 영국 왕실은 모두 그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남편과 일찍 사별하는 아픔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여왕은 정치적으로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재임 기간 중 국내외적으로 크고 작은 사건들이 계속 일어났지만, 각료들의 뛰어난 능력과 충성심이 그녀의 치세를 영광스럽게 만들어나갔다. 특히 명수상들로 평가받는 디즈레일리와 글래드스톤은 각각 보수당과 자유당의 대표로 선의의 경쟁을 벌이면서 양당 체제의 의회 민주주의를 확립해가며 영국을 정치적으로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다. 이 가운데 디즈레일리는 영국의 식민지 확대에 정책의 중점을 두고, 1876년 5월 1일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의 여황제’라는 공식 직함을 헌정하면서 대영제국의 영광을 다시 한 번 드높인다.
빅토리아 여왕은 제임 기간 내내 기본적으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정치 원칙을 따랐다. 그러나 앨버트 공의 사망 이후 윈저궁으로 물러앉아 있으면서도 중요한 국가 사안의 최종 결정권만은 끝까지 손에 쥐고 국정을 큰 틀에서 조율해나갔다. 이는 결과적으로 정파에 관계없이 정치인들로 하여금 그녀를 신뢰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으며 일반 대중의 지지와 존경을 받는 바탕도 되었다.
앨버트 공의 사망 이후 여왕을 이야기할 때 존 브라운(John Brown)을 빼놓을 수 없다. 존 브라운은 투박하면서 강건한 스타일의 전형적인 스코틀랜드 고지대(하이랜드) 출신의 남자였다. 그가 빅토리아 여왕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빅토리아 여왕이 스코틀랜드에 들렀을 때 그녀의 야외 활동을 보좌하는 개인 시종으로 일하면서부터였다. 존 브라운은 빅토리아 여왕의 우아한 품격에 매료되었고, 그녀도 지금까지의 궁중 남자들과는 다른 매력과 성실성을 지닌 그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진다.이런 상태에서 앨버트 공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빅토리아 여왕이 존 브라운과 가까워지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의 사망으로 허전해진 마음을 그와의 교제로 회복해보려는 듯했다. 이후 그들의 관계는 존 브라운이 1883년 사망할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당시에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소문이 횡행했다. 심지어 두 사람 간의 비밀 결혼설까지 나돌 정도였으며 이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을 ‘미시즈 브라운(Mrs Brown)’으로 격하해 부르는 사람까지 생겼으나 그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공식적인 증거는 밝혀진 것이 없다.
빅토리아 여왕의 만년은 행복했다. 1887년에는 즉위 50주년 행사인 골든 주빌리(Golden Jubilee)를, 1897년에는 영국 역사상 최초로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성대히 치른다. 보어전쟁이 한창이던 1901년 1월 22일 빅토리아 여왕은 64년간의 치세를 마치고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곁에는 왕위를 계승한 장남 에드워드 7세(Edward VII)와 외손자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Wilhelm II)가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다.
싸구려 술 스카치위스키
빅토리아 여왕은 긴 재위 기간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술에 관한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여왕이라는 지위 때문에 폭음하거나 본격적인 애주가의 반열에 오르기는 어려웠겠지만 그녀 역시 술을 종종 즐겼다. 이런 빅토리아 여왕의 술에 관한 일화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한 스카치위스키의 로열 워런트에 관한 것이다.
로열 워런트(Royal Warrant)란 왕실에서 구매하는 제품과 서비스에 왕실 조달품임을 뜻하는 왕실 문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허가증을 말한다. 이 허가증은 해당 상인에게는 큰 영광이며, 제품에 왕실 문장을 사용하면 경제적 실익도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현재 영국 왕실에서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포함해 에딘버러 공(여왕의 남편)과 왕세자(찰스)가 로열 워런트를 수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왕세자비도 허가 권리가 있으나 공석인 관계로 현재는 세 명만이 로열 워런트를 가지고 있는데 문장의 모양은 수여자에 따라 다르다.
로열 워런트를 받는 기본적인 절차는 5년 이상 왕실과 꾸준히 거래를 한 업체를 대상으로 신청을 받은 뒤 심사위원회에서 심사 대상 리스트를 만들고 로열 워런트 수여자 가운데 한 명에게 최종 결정을 받는 형식을 취한다. 영국 기업이 아니어도 받을 수 있다. 인가를 받게 되면 5년 기간의 허가증이 나오는데 이후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으면 자동으로 연장된다. 로열 워런트는 상속·계승·양도가 될 수 없으며, 은행가·변호사·회계사 등 특정 전문 직종, 구인 중개·이벤트 회사 등 에이전시 형태의 사업자, 정부기관·언론사·유흥 등 엔터테인먼트 관련 직종은 허가 대상에서 배제된다.
영국에서 로열 워런트의 역사는 1155년 헨리 2세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아무래도 빅토리아 여왕 시절에 국력이 획기적으로 신장되면서 로열 워런트도 크게 활성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빅토리아 여왕이 처음으로 위스키 제품에 대한 로열 워런트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브래클러(Brackla)라는 스카치위스키를 통해서였다. 사실 영국에서는 19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진이 가장 인기 있는 술이었으며, 부자들은 프랑스산 와인과 브랜디를 즐겼다. 스카치위스키는 거의 대부분 불법 밀주 형태로 제조되고 있었기 때문에 품질이 낮았을 뿐 아니라 스카치위스키에 대한 인식 자체도 형편없었다. 1810년 한 해에 스코틀랜드의 스페이사이드(Speyside) 지역에서만 400개의 불법 증류기들이 압수된 것만 보더라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큰삼촌인 조지 4세는 1822년 그의 역사적인 스코틀랜드 방문에서 스코틀랜드의 국민적 역사 소설가이자 시인인 월터 스콧 경(Sir Walter Scott)을 만나게 된다. 이 자리에서 조지 4세는 당시만 해도 영국 귀족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던 하이랜드 몰트위스키(Highland Malt Whisky)를 마시면서 모두의 건강을 기원하는 건배를 제의한다. 명백히 스카치위스키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마침내 이듬해 관련 법령이 정비되어 스카치위스키의 제조와 판매가 합법화되고, 글렌리벳(The Glenlivet)이 최초의 스카치위스키 회사로 등록한다. 이후 스카치위스키는 영국 상류사회에서 꾸준히 그 위상을 높여간다.
위에서 말한 브래클러 위스키는 1812년에 프레이저(William Fraser)가 만든 회사다. 브래클러는 위스키의 합법화 이후에도 여전히 성행하던 스코틀랜드 고지대의 불법 밀주업자들과의 부당한 경쟁을 피해 주로 스코틀랜드 남부 지역과 영국에 판매를 치중시켜나갔다. 그 결과 마침내 1835년 제품의 가치를 인정받아 윌리엄 4세의 로열 워런트를 받았다. 위스키 역사상 최초의 로열 워런트였다. 감격한 브래클러 사는 신문 지상에 자사 제품을 ‘왕의 위스키’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한다. 그러나 불과 2년 후인 1837년에 병사하면서 조카인 빅토리아 여왕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때문에 정작 윌리엄 4세는 이 술을 제대로 즐길 순 없었을 것이다. 왕위를 이어받은 빅토리아 여왕은 선왕의 의견을 존중하여 브래클러에 로열 워런트를 재허가해준다. 이것이 오늘날 이 위스키가 ‘로열 브래클러(Royal Brackla)’라고 불리게 된 배경이다.
이런 영광에도 불구하고 브래클러 증류소는 한동안 침체기를 맞이하다 1985년에 폐쇄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그러다가 1991년 다시 생산을 재개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로열 브래클러라는 이름의 위스키는 독립 제품으로는 소비자들이 만나기 힘들고, 조니워커 골드나 듀어 같은 블렌디드 위스키의 재료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로크나가 증류소를 방문한 빅토리아 여왕
빅토리아 여왕의 위스키 로열 워런트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은 1848년에 이루어진다.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자연 풍광과 문화를 사랑해 종종 스코틀랜드를 방문했다. 첫 방문은 즉위 5년 후인 1842년, 앨버트 공과 결혼한 지 2년째 그와 함께 이루어졌다. 그 후 1844년과 1847년에도 방문한 빅토리아 여왕 부부는 주치의의 권고에 따라 조금 더 안정되고 기후가 좋은 장소를 찾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장소가 바로 지금까지 왕실 저택으로 남아 있는 밸모럴성(Balmoral castle)이었다.
부부는 1848년 9월 8일 밸모럴성에 도착해 그곳에서의 첫 휴가를 즐기게 된다. 그런데 9월 11일 저녁 9시경 여왕의 개인 비서가 인근에 있는 로크나가(Lochnagar) 위스키 증류소의 존 베그(John Begg)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편지의 요지는 “존경하는 여왕님께 위스키 제조 과정에 대해 직접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내일 6시까지 증류소가 가동될 예정이니 그때까지 오셨으면 합니다”였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불경스러운 내용이었다.
로크나가 증류소는 존 베그가 1845년에 만든 위스키 증류소였다. 빅토리아 여왕에게 초청 편지를 보낸 존 베그는 그다음 날 초초한 마음으로, 과연 여왕이 올 것인지 반신반의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4시경 여왕 부부가 증류소 쪽으로 오고 있는 것을 본다. 그는 한달음에 달려가 여왕을 맞이했다. 여왕의 일행에는 왕세자와 공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증류소 문을 들어서면서 앨버트 공이 대표로 “베그 씨, 당신 일을 구경하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감격한 존 베그는 왕실 가족에게 스카치위스키 제조 과정을 정성껏 설명했다. 시음 시간에는 빅토리아 여왕과 왕실 가족 일행이 로크나가 위스키를 한 잔씩 맛보았다. 여왕 일행도 로크나가 증류소 방문을 매우 의미 있게 생각해 방문 며칠 후 바로 로크나가 증류소에 로열 워런트를 수여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이 방문을 통해서 스카치위스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그녀가 즐겨 마시던 프랑스 보르도산 와인인 클라레(Claret)에 로크나가 위스키를 약간 섞어 마시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와인에 위스키를 섞는 칵테일을 ‘빅토리아 여왕의 술’로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로크나가 위스키는 로열 워런트를 수여받은 후 ‘로열 로크나가(Royal Lochnagar)’라는 이름이 된다.
좋은 위스키를 만든다는 자부심을 지닌 존 베그 입장에서는 정성껏 만든 위스키를 와인에 섞어 마시는 용도로 사용한 것이 탐탁했을 리 없었을 것이다. 사실 빅토리아 여왕의 음주 방법은 보르도 와인과 스카치 몰트위스키라는 두 가지 훌륭한 술을 모두 망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술에 관한 전문가도 아닌 빅토리아 여왕이 그 위스키를 마셔주는 것 이상 다른 영광을 바랄 수 있겠는가?
로크나가 증류소와 영국 왕실과의 인연은 오래 이어져 1965년 증류소 설립 150주년 기념식에 찰스 왕세자가 공식적으로 증류소를 방문하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의 수많은 증류소 가운데 로열 워런트를 받아 로열이라는 글자를 제품에 붙이게 된 증류소는 로열 브래클러와 로열 로크나가 이외에 하나가 더 있다. 바로 글레너리 로열(Glenury Royal)이다. 하지만 이 증류소는 아쉽게도 1985년 폐쇄된 이후 아직까지 생산을 재개하지 못하고 있다.
빅토리아 여왕은 로열 로크나가 증류소 방문 이후에도 수시로 밸모럴성에 머물면서 영국의 귀족, 정치가, 유력 사업가들을 초청했다. 그리고 이때마다 참석자들에게 스카치위스키를 소개하면서 당시만 하더라도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위스키가 영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 좋은 전기를 마련했다. 이런 인연에서인지 1897년 빅토리아 여왕의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기념해 지은 한 증류 회사의 증류소는 이름을 아예 ‘임페리얼 증류소(Imperial Distillery)’로 지었다.
물론 당시는 몰트위스키의 맛이 거칠어 영국 상류사회의 입맛을 사로잡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스카치위스키는 발전을 거듭하며 훌륭한 제품들이 등장해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술을 제대로 마실 줄 모른다는 주위의 비난을 감수할 자신만 있다면, 빅토리아 여왕처럼 좋은 레드 와인에 스카치위스키를 살짝 타서 마셔보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