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戰八起
칠전팔기 복서. 조지 포먼
박송 입니다.
2019. 6. 22. 13:26
조지 포먼
<img class='wiki-image' src='//w.namu.la/s/a2310e9d5a77bd4633b4e9c57404d23a9e4081123f62ba6e79b096762413974eeeea199d29bf3f08642423aa404907ec0e3d95020303e656aa6a3a5fc1864c21df0fc5f4acbc29d4f179f82dfd943c822d6b883ff40ff269c36819c04c5c4420' alt='파일:external/i.cdn.turner.com/GeorgeForemanjpg-3179697_p9.jpg'>
조지 에드워드 포먼
George Edward Foreman (1949년 1월 10일 ~ )
1. 개요[편집]
2. 파이팅 스타일[편집]
그의 복싱 스타일은 핵주먹 한 마디로 정리된다. 어니 세이버즈, 소니 리스턴, 켄 노튼 등 헤비급에는 쟁쟁한 슬러거들이 많지만, 사상 최강을 논할 때 조지 포먼은 반드시 거론된다. 우월한 체구의 강골인데다[1] 막강한 근육을 탑재한 슈퍼하드펀처라서 그냥 팔힘으로 툭툭 치는 거 같은데 상대가 픽픽 쓰러지고 붕 뜨는 것을 보면 기가 찰 정도이다. 상대가 뭘 하건 말건 간에 다가가서 냅다 내지른 주먹에 적들이 나가떨어진다. K.O 장면 모음 영상을 보면 심지어 상대방이 가드 위를 맞았는데도 다운되는 장면조차 있다(!!!)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거구의 괴물 복서인 셈.
파워와 사정거리가 너무 엄청나서 테크닉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낮은 복서였고 얼핏 보기에도 그냥 펀치를 내지르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비록 테크닉이 당대의 복서들과 비교했을 때 아주 섬세하지는 않았어도, 펀치의 정확도와 타점, 회수율 등도 파괴력 못지 않게 가공할 수준이었다. 즉, 필요가 없어서 화려한 기교를 쓰지는 않았지만 내지르는 한방한방의 정확도와 정교함만큼은 최상급이었다는 의미. 체구나 파워를 타고난 슬러거들은 많지만 이러한 그만의 기술적인 정교함 또한 그가 최강의 헤비급 슬러거로 등극한 중요한 요인이다. 사실 내지르는 펀치 한방한방도 매우 교과서적인 힙드라이브와 체중이동을 통해 몰아치는 것으로 피지컬 못지않게 기초 역시 탄탄했던 복서. 펀치력만으로는 어니 세이버즈가 포먼 이상이었다는 말도 많지만 복서로서의 전체적인 완성도는 물론 전적에서도 둘은 넘사벽의 차이가 있다.
그러다 보니 특히 상성으로까지 밀리는[2] 스워머 스타일, 즉 조 프레이저, 마이크 타이슨 같이 맷집이나 스피드, 수비력을 내세워 파고드는 복서들은 아예 상대가 안됐다.
위 동영상에 나오는 1위가 바로 프레이저 vs 포먼 전이다. 프레이저는 포먼을 상대로 한 1차전에서 레프트 훅을 가드 사이로 적중시키며 경기를 스타트하고 초반에만 포먼의 관자놀이에 한 방, 턱에 두 방의 레프트 훅을 먹였는데, 포먼이 그걸 다 씹고 프레이저의 가드 위나 이마쪽으로 펀치를 날려 프레이저를 다운시켰다. 알리와의 대결에서 알 수 있듯이, 스워머지만 맷집에 자신이 있어서 잽 정도는 몇 대 허용하면서 파고드는 게 프레이저의 스타일인데 포먼의 주먹은 맞고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프레이저는 포먼의 무자비한 펀치 세례를 두들겨 맞고 2라운드 만에 6번이나 다운되어 TKO 당하는 등 처절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프레이저 역시 복싱 올타임 베스트 20에는 들어갈 전설적인 복서지만, 상성과 체격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치기하다가 개발렸다.
저 프레이저 전의 임팩트는 실로 대단해서, 20년 가까이 지나서 아직 살아있을 때의 커스 다마토가 마이크 타이슨을 지도할 때 타이슨은 이 포먼 vs 프레이저의 명경기를 평소에도 분석차원에서 즐겨 보았다. 이 때 다마토는 "너나 프레이저처럼 짧고 탄탄한 체격의 스워머에게 있어 포먼과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다. 포먼을 상대할 수 있는 건 키가 크고 리치가 긴, 계속 물러서면서 아웃복싱을 펼칠 수 있는 상대이다."라고 조언해 줬다고 한다. 물론 커스 다마토는 1985년 11월에 죽었고 포먼은 1987년 중반에 복귀했으니, 자신의 제자와 포먼이 싸울 수도 있으리란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타이슨이 제임스 더글라스에게 패배하자 재기전 상대로 포먼이 물망에 올랐다! 당시 타이슨은 네임밸류의 회복이 필요했고 포먼은 타이슨과 싸우고 싶어 안달난 상태였으므로 권투 프로모터인 돈 킹이 매치를 제안했으나, 타이슨은 죽은 코치의 조언이 생각나서인지 포먼과의 매치를 거절했다고 한다.
가뜩이나 한방 한방이 살인적인데 경기운영도 무자비의 극치로, 전성기였던 20대에는 가장 무식하게 상대방을 패는 선수라고 알려졌다. 포먼은 선수 시절에는 KO를 바로 앞둔 그로기 상태의 상대도 무지막지하게 패는 잔인함으로 유명했고, 대중을 기피하며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여 인기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3]
그는 당대의 라이벌 조 프레이저와는 두 번 싸워 모두 이겼으나, 무하마드 알리에게는 아래 언급된 부상이란 불운과 알리의 기가 막힌 운영에 걸려들어 한 번 패했다. 알리와 재대결을 원했으나, 이후 무명인 지미 영에게 패하자 권투계를 은퇴했다.
그 이후 개신교 목사로 지내다가, 80년대 말에 다시 40대 복서로 복귀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프로복싱이 장난이냐며 그의 도전이 무모하다고 평가했지만, 조지 포먼은 그런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20~30대 팔팔한 젊은 복서들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만 45세의 나이에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다시 따내는 위대한 업적을 이뤘다. 오늘날 인터넷 등에서 조지 포먼이 유명한 것은 초창기 활동시절 보다는 재복귀 이후 활약의 영향이 더 크다. 여담으로 그는 복귀하면서, 또 그 이후에도 마이크 타이슨과 대결하기를 여러차례 희망했으나, 마이크 타이슨이 철창 신세였기 때문에 등등으로 결국 이 대결은 성사되지는 못했다. 지금도 "둘이 붙었으면 어땠을까?"라며 많은 복싱팬들이 궁금해하는 부분. 1997년을 끝으로 다시 은퇴했다.
여담으로 재은퇴 이후에는 사업가로서 면모를 과시하여 크게 돈을 벌었고, 성공학 강사로도 유명하다. 물론 목회 활동도 계속 했고 방송출연도 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
포먼의 리즈시절은 헤비급의 전성기로서 조지 포먼은 이 시대를 수놓은 전설적인 복서중 하나였다. 권투 전문 잡지인 미국의 링매거진이 선정한 역사상 펀치가 가장 강력한 복서 100명[4] 중 당당히 9위에 선정되었다.
3. 어린 시절[편집]
텍사스 주 마셜에서 태어나, 휴스턴에서 자라났다. 어머니는 전남편 포먼과 별거하는 사이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져 포먼을 임신해서 출산했다. 그러므로 포먼이라는 성은 어머니의 남편의 성이지, 실제 아버지의 성은 아니다. 몇몇 복서들처럼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세월을 보냈고 (학교에 도시락도 못싸갔다고 한다.) 어린시절을 문제아로 보냈다. 제대로 3끼를 먹어본적이 없을 정도로 빈곤했다. 모든 흑인들에게 있어서 무하마드의 알리(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아니라, 흑인 이슬람 지도자)는 신성시 되었는데 밥을 굶더라도 무하마드 알리의 음성을 듣기위해 라디오가 있는곳을 기웃거렸다고 한다.
17세가 되었을 때 당시 대통령이었던 린든존슨의 서민 교육정책이었던 직업학교 광고가 TV에 실리고 있었는데 짐 브라운 (JIM BROWN) 미식축구 선수의 훈련 광고를 보게 되면 인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직업학교로 더이상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됐기에 어머니가 흔쾌히 사인을 해주었다고 한다. 제대로 글과 공부를 배우고 제대로된 식사를 하면서 여러 고민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 직업학교에서도 특유의 거친 문제아 기질은 남아 있어서 툭하면 시비에 휘말렸다. 그러자 친구 중 한 명이 "조지, 니가 그렇게 터프하다면 복싱을 해보는게 어떻니?" 며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
원래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고, 191cm의 남다른 신체조건 때문에 아메리칸 풋볼 선수도 고려했으나 최종적으로 복싱선수가 되었다. 아마추어로 시작하여 22승 4패, 1968년 멕시코 올림픽 금메달의 커리어를 남겼다. 통상적인 아마추어 복서들은 경기 일정이 굉장히 빡빡한 탓에 체력도 비축할 겸 정교한 유효타로 포인트를 쌓는 경우가 많은데, 포먼은 그냥 프로 복서들처럼 KO를 노리는 붕붕 펀치를 휘두르며 올림픽 금메달까지 수집했다.
17세가 되었을 때 당시 대통령이었던 린든존슨의 서민 교육정책이었던 직업학교 광고가 TV에 실리고 있었는데 짐 브라운 (JIM BROWN) 미식축구 선수의 훈련 광고를 보게 되면 인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직업학교로 더이상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아도 됐기에 어머니가 흔쾌히 사인을 해주었다고 한다. 제대로 글과 공부를 배우고 제대로된 식사를 하면서 여러 고민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 직업학교에서도 특유의 거친 문제아 기질은 남아 있어서 툭하면 시비에 휘말렸다. 그러자 친구 중 한 명이 "조지, 니가 그렇게 터프하다면 복싱을 해보는게 어떻니?" 며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
원래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고, 191cm의 남다른 신체조건 때문에 아메리칸 풋볼 선수도 고려했으나 최종적으로 복싱선수가 되었다. 아마추어로 시작하여 22승 4패, 1968년 멕시코 올림픽 금메달의 커리어를 남겼다. 통상적인 아마추어 복서들은 경기 일정이 굉장히 빡빡한 탓에 체력도 비축할 겸 정교한 유효타로 포인트를 쌓는 경우가 많은데, 포먼은 그냥 프로 복서들처럼 KO를 노리는 붕붕 펀치를 휘두르며 올림픽 금메달까지 수집했다.
4. 초기 프로 경력[편집]
4.1. 초창기[편집]
4.2. 리즈시절: 선샤인 쇼다운(Sunshine Showdown) [편집]
당시 헤비급에는 전설적인 조 프레이저와 무하마드 알리가 버티고 있었고, 프레이저는 당시 WBA, WBC 통합 챔피언이었다. 조 프레이저는 아무도 못 이긴다는 무하마드 알리를 판정으로 이겼고, 당시 무패(29전 29승)를 자랑하고 있었다. 포먼의 신체조건이 월등히 우세하였으나(프레이저는 헤비급 선수로는 작은 편인 181cm의 신장을 가졌다), 대부분 프레이저의 승리를 점쳤다.
포먼과 프레이저의 대결을 선샤인 쇼다운이라고 하는데, 1973년 1월 22일 자메이카에서 열렸다. 포먼은 프레이저를 시작부터 무지막지하게 두들겨서 1회에 3 번, 2회에 3 번의 다운을 빼앗았고, 프레이저의 상태를 본 주심은 경기를 중지시키고 TKO를 선언하였다[5]. 포먼은 챔피언이 되었고, 첫번째 방어전에서 호세 로만을 1회 2분만에 KO로 이기기도 했다. 이는 타이슨 때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이었다.
위의 영상이 선샤인 쇼다운의 풀 경기 영상. 프레이저가 붙지 못하게 저지하며 핵펀치를 날리는 포먼. 1라운드 중반부터 이미 포먼이 여유있게 펀치를 날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두번째 상대는 전해에 무하마드 알리와 1승 1패의 호각을 이뤘던 켄 노턴이었다. 이 방어전에서도 포먼은 2회 KO로 이겼다. 이때까지 전적은 40전 40승 37KO(92.5%)
위의 영상이 선샤인 쇼다운의 풀 경기 영상. 프레이저가 붙지 못하게 저지하며 핵펀치를 날리는 포먼. 1라운드 중반부터 이미 포먼이 여유있게 펀치를 날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두번째 상대는 전해에 무하마드 알리와 1승 1패의 호각을 이뤘던 켄 노턴이었다. 이 방어전에서도 포먼은 2회 KO로 이겼다. 이때까지 전적은 40전 40승 37KO(92.5%)
4.3. 무하마드 알리와의 대결[편집]
당시에도 전설적이었던 무하마드 알리와 포먼의 대결은 세기의 대결이었다. 아프리카 자이레(현재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열린 이 대결은 The Rumble in the Jungle (정글의 대소동)이라고 불린다. 이때 포먼에게 불운이 닥쳤는데 훈련하다가 눈위가 찢어진 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경기를 한 달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부상 때문에 훈련량이 부족해졌다는 점이었다. 왜냐하면 다시 상처가 날까봐 스파링을 중지했기 때문이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알리는 예상과는 달리 맹공격을 퍼부었다. 그러자 포먼은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고, 2회부터는 포먼이 공세를 취했다. 그래서 알리는 빠른 스피드로 파워풀하지만 느린 포먼의 펀치를 피하는 전법을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링 로프의 반동을 이용한 일명 rope-a-dope 수비[6]와 지능적인 클린치로 포먼의 포화를 피해갔다. 그리하여 포먼은 알리에게 특유의 살인펀치를 제대로 맞출수가 없었고, 이렇게 연장전이 되자 점점 피로해지기 시작했다. 포먼은 대부분 3회 이내에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이런 지구전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포먼이 힘이 빠지자 알리는 맹공격을 하다가 8회 포먼에게 결정타를 날려 KO승을 거두었다. 포먼의 첫번째 패배였다.
이후 설욕전을 바랐으나 기회가 돌아오지 않고,목표가 없어지자 1년간 쉬다가 1977년에 페드로 아고스토를 이긴후 2달[7] 만에 다시 신예인 지미 영과 맞붙지만, 포먼이 방심한건지 너무 쉽게 펀치를 허용하는 등 좋지 않은 퍼포먼스를 보이며 12라운드 경기 후 판정패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경기후 탈의실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거의 죽을 뻔한 경험을 하였는데, 이것이 포먼의 인생을 크게 바꾼다.
무하마드 알리를 다룬 2002년작 <Ali>는 이 조지 포먼과 알리의 대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4.4. 은퇴하고 목사가 되다 [편집]
이 심장마비를 일으켰을때 포먼은 가사 상태에서 종교적 체험을 하고 기적적으로 수술이 성공해서 살아남은 뒤로는 열렬한 기독교 신자가 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저승사자에게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었는데, 하나님께 자기를 살려줄 것을 빌었고,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그를 구해줬다 카더라.
그 전까지 종교와는 거리가 멀었던 포먼은 죽다 살아난 그 다음부터 기독교 전도사가 되었다. 전도사에 그치지 않고 목사 자격증까지 따서 텍사스에서 목회활동을 하였고, 전국적인 기독교 관련 방송에 나와서 자주 간증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전도활동에 그동안 모은 돈을 쓰고, 여기에 더해 남은 돈도 청소년 센터를 건립하기 위해 다 내놓은 후, 포먼은 신앙활동만으로 부족한 돈을 벌기 위해 현역 복귀를 결심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38세(한국나이로 치면 거의 40이다).최강의 목사
그 전까지 종교와는 거리가 멀었던 포먼은 죽다 살아난 그 다음부터 기독교 전도사가 되었다. 전도사에 그치지 않고 목사 자격증까지 따서 텍사스에서 목회활동을 하였고, 전국적인 기독교 관련 방송에 나와서 자주 간증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전도활동에 그동안 모은 돈을 쓰고, 여기에 더해 남은 돈도 청소년 센터를 건립하기 위해 다 내놓은 후, 포먼은 신앙활동만으로 부족한 돈을 벌기 위해 현역 복귀를 결심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38세(한국나이로 치면 거의 40이다).
5. 40대에 복귀[편집]
5.1. 복귀 초반[편집]
before and after.
초창기 포먼의 외모와 복싱계내에서의 이미지는 아무런 캐릭터성도 없는 스트리트 파이터 1의 미국 스테이지 복서 마이크, 또는 록키 4에 나왔던 소련인 복서 이반 드라고와 비슷하다. 대중적인 인지도는 어느정도 있지만던 그냥 무표정하게 상대를 줘패는 흑인 복서 수준이며 전술한대로 무자비한 강자에 알리의 현란한 게임운영에 놀아나 패한 이미지만 있을뿐 캐릭터성이나 상업성은 전무했던 선수. 반면 복귀후의 포먼은 대머리에 약간 배나온 겉으로만 보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에다, 이전까지 무표정과 달리 항상 웃는 표정이라 이는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와 같은 느낌이 생겨 복귀전과는 확연히 다른 링 캐릭터를 갖게 되었다.
1987년 복귀한 그는 당시 무적의 챔피언이었던 마이크 타이슨과 상대하기를 바랐으나, 타이틀 매치를 위한 지명전을 위해서는 승수를 쌓아야하는 것이 복싱계의 룰이라서 처음에는 잔챙이 복서들과 대결을 하여 승수을 쌓았다. 10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워낙 사기적인 포먼의 피지컬에 공백이 길긴 했어도 70년대 레전드들과 치고받았던 그 가락만으로도 젊은 잔챙이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포먼은 또다시 연승행진을 기록하였다.
이 과정에서 상대한 복서들은 세계 타이틀 수준과는 거리가 있었고 각국 챔피언 출신이나 대륙 챔피언 출신, WBF등 마이너 기구 챔피언 출신 정도였지만, 철저히 무명 복서들하고만 경기를 가진 것은 아니고, WBC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출신의 J.B. 윌리엄슨이라든지, 백인의 희망이라 불리던 강타자 제리 쿠니[9]등 일부 유명 선수들도 KO로 압살해버리는 등 나이먹어서도 죽지 않은 전설의 복서다운 실력을 보여주었으며, 복귀 후 타이틀 도전 직전까지 20회가 넘게 가진 경기를 전승한 것도 모자라서 판정승 1회, 기권승 1회를 빼면 모조리 KO승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복귀 전 젊은 시절과 비교해서 캐릭터가 변화하면서 경기 스타일도 조금 변했다. 물론 힘과 체격을 바탕으로 일격필살로 상대를 요단강(?) 건너게 하는 것은 동일했으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상대에게도 무자비하게 확인사살 펀치를 날려대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상대방이 그로기 상태에 빠지면 더 이상 펀치를 내지 않고 무표정하게 코너로 물러서는 신사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더 인기를 끌었다. 물론 이게 더 무서워 보인다는 의견도 있었다(...)
아래 영상은 1990년 1월 15일에 열린 제리 쿠니와의 경기. 당시 포먼은 41세, 제리 쿠니는 33세였으며 제리 쿠니는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해버렸다. (...) 어딘지 조급해보이는 쿠니에 비해, 경쾌한 풋워크는 없지만 웬만한 공격은 막거나 흘려버리며 여유있게 강펀치로 대미지를 누적시키는 포먼을 볼 수 있다. 뚜벅뚜벅 걸어오다가 어퍼컷과 스트레이트 연속기로 제리 쿠니를 컨버스에 처박아버리는 마지막 KO 장면은 공포심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런 연승행진을 벌였는데도 타이틀전을 갖기까지 뚜렷한 프로모션을 받지 못하고 20회가 넘는 경기를 가지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는 점이 당시 그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아쉬울 따름.
5.2. 챔피언 재등극[편집]
포먼은 계속 승리를 거듭하여 타이틀 도전권을 땄고, 1991년 만42세의 나이로 27세의 헤비급 챔피언 에반더 홀리필드와 타이틀 매치를 벌였다. 물리적으로는 조지 포먼이 나이 때문에 이기기 힘든 경기였다. 그럼에도 12라운드까지 가는 저력을 보여주었고, 아깝게 판정패했다.[10]
홀리필드전. 확실히 잘 싸우기는 했지만 유효타 수가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등 이기기는 어려운 경기였다. 심판 전원일치 판정패.
이후에도 계속 선수생활을 이어갔고, 다시 한 번 세계 타이틀 도전 기회를 얻어 WBO 챔피언이던 토미 모리슨과 경기를 가졌지만 또다시 판정패를 당했다. 허나 이번에도 굴하지 않고 1994년 45세의 나이로 에반더 홀리필드를 꺾고 당시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던 마이클 무어러를 10라운드 KO로 이기고[11] IBF, WBA 헤비급 챔피언을 따냈다. 이전까지만 해도 무어러는 무패의 복서였다. 이때 포먼이 입은 트렁크는 바로 20년전 알리와 싸울때 입었던 것이었다.
무어러전.[12]
5.3. 재은퇴[편집]
포먼은 다시 마이크 타이슨과의 대결을 원했으나, 성사되지 않았고, 토니터커와의 방어전과 IBF 1차 방어전 상대였던 악셀슐츠와의 재대결을 포기하면서 WBA, IBF 타이틀을 반납한다. 이후 IBA, WBU 등의 마이너 타이틀을 지키며 크로포드 그림슬리, 루 새버리스등 젊은 선수들을 꺾고, 1997년 섀논 브릭스[13]와 대결하였으나, 12라운드까지 가는 끝에 판정패했다. 이 판정에 대해서 여러가지 말이 많았으나, 포먼은 이 경기를 끝으로 다시 은퇴하였다. 은퇴시 나이는 48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다. 1999년에 다시 복귀한다는 떡밥을 던지며 80년대 초반의 강펀처였던 래리 홈즈[14]와 대결을 추진하였으나, 결국 대전료 차이로 무산되었다.
6. 은퇴 이후[편집]
이후 요리기 및 주방용품을 사업을 하던 러셀 합스 사에 고용되어서 그의 이름을 붙은 브랜드가 나왔고,[15] 노익장으로 이미지가 좋아졌기 때문에 이는 매우 성공했다. 특히 이 요리 기구들이 기름기를 쪽 빼주어 건강에 좋다는 홍보가 매우 효과가 좋았다. 실제로 그와 동시대의 전설적인 복서인 알리는 펀치 드렁크 증세와 파킨슨병으로, 프레이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음을 상기한다면, 그는 멀쩡한데다가 은퇴후 돈도 복서 때보다 벌었으니, 복받은 노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두번째 패배를 안겨준 지미 영은 56세로 펀치드렁큰+약물중독으로 50대에 세상을 떠났다.
특히나 위 사진에 나온 그릴[16]이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아예 명사가 되어버린 고유명사가 될 정도로 성공했다. 세로로 여러개의 홈이 파이고 위 아래 모두에 열선이 들어간 양면 그릴을 브랜드 불문하고 조지 포먼 그릴[17]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대표 MC 코난 오브라이언이 Clueless Gamer에서 아타리 2600게임을 했을때, 아타리 2600의 본체를 보고 "이거 조지 포먼 그릴 아님?"이라고 드립을 쳤을 정도. 한국에서도 조지포먼 그릴의 유사품이 초창기 홈쇼핑 등에서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을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특히 쇠고기 스테이크나 햄버그 패티를 자주 요리한다면 추천할 만하다. 이 그릴 사업으로 수억 달러를 벌었다. 포먼 그릴 판권을 1억 2750만 달러+회사 주식 1000만 달러에 팔았는데, 그러고도 매년 그릴 수익도 일부 받고 있다(!) 이는 조지 포먼이 평생동안 받은 파이트 머니보다 훨씬 많다. 참고로 조지가 받은 가장 많은 파이트머니는 홀리필드전. 1250만 달러를 받았다. 덕분에 조지 포먼은 복서 재산 통계에서 넘사벽 복싱재벌 플로이드 메이웨더 바로 아래 2위로 거의 항상 꼽힌다.
그외에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이미지를 남겼기 때문에 성공학 강사로 뛰기도 하고, TV에도 자주 나온다.
12명의 자식들을 키웠다고 하는데, 한 여자가 모두 낳은게 아니라 입양한 자식과 배다른 자식들을 포함한 수라고. 재미있는 점은 아들들의 이름을 모두 조지로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5명의 아들들이 순서대로 조지 Jr. 부터 조지 VI(...)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딸들의 이름도 조지로 하고 싶었지만 그건 좀 심한 것 같아서(...) 다른 이름으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딸들 중 한 명의 이름이 "조제타"라고 한다(....)) 그리고 조지 포먼 3세는 복서로 데뷔해서 16전 16승 15KO라는 좋은 성적을 내고 사실상 은퇴했다. [18]
한때는 무하마드 알리가 자신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사이가 안좋았으나 2000년대 초반의 인터뷰에서는같이 행사에도 참여한적 있다며 "알리에게 유감없다"고 밝힌바 있다.
NBC에서 제작하는 꽃보다 할배의 미국판 리메이크(2014년 9월 tvN 정식 라이선스)인 "Better Late Than Never"에 출연하게 되었다. 30일간 촬영된 총 6화 분량의 에피소드 중 1개 분량을 촬영하기 위해 한국도 방문했다. 에피소드 내내 적응력이 매우 빠르고 사람 좋은 캐릭터로 나오는데, 윌리엄 섀트너가 위에 나온 조지 포먼 그릴 드립을 치는 게 깨알같다.
자타가 공인하는 자동차광이다. 페라리, 람보르기니 할 것 없이 억소리나는 슈퍼카의 오너로 유명하다. 하지만 의외로 본인이 가장 아끼는 차는 1977년형 폭스바겐 비틀로, 본인의 첫 차라고 한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였다.
UFC 파이터 데릭 루이스가 포먼에게 복싱을 배웠다고한다.
7. 첫번째 조지 vs 두번째 조지[편집]
처음 복서 생활할 때와 은퇴하고 신앙에 귀의하다 복귀했을 때 성격, 이미지, 파이팅 스타일 등이 달라도 너무 달라(...) 전자를 첫번째 조지(no.1 george)후자를 두번째 조지(no.2 george)로 부른다.
복싱 팬들 사이에서는 첫번째 조지와 두번째 조지 둘 중 누가 낫느냐는 얘기를 하는데, 각종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본인까지 두번째 조지가 인성에서나 복싱에서나 더 낫다고 평가한다.
조지 포먼은 대중을 기피하는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사람이었고, 시합에선 비틀거리는 상대도 죽일듯이 달려들어 두들겨 팰만큼 냉혹했다. 그러나 두번째 조지는 농담도 자주 하고, [19] 항상 웃고 긍정적인 이야기들을 했으며, 그로기인 상대는 더 때리지 않았다.
복서로서도 더욱 발전했다. 첫번째 조지 시절, 조지 포먼은 강력한 펀치 덕분에 3라운드보다 길게 가는 시합이 별로 없었다. 때문에 감정적으로 불안했고, 힘으로만 상대를 두들겨패는 복싱에 익숙해져 무하마드 알리의 지능적인 저항으로 8라운드까지 시합을 끌고 가자 흥분해서 펀치를 퍼붓다 스태미너 배분에 실패해 기진맥진한 틈을 타 역공을 얻어맞고 패배했을 정도다. 즉 피지컬과 펀치력에 비해 멘탈과 경기운영이 약한 것이 단점이 맞다.
두번째 조지 시절엔대부분을 3라운드 내로 끝장내는 건 여전했지만 40세가 넘은 나이에도 훨씬 젊은 챔피언 홀리필드를 12라운드 판정까지 끌고 갔고, 마이클 무어러를 10라운드에서 눕혀 챔피언이 되기까지 했다! 나이들고 피지컬은 좀 떨어졌어도 정신적으로 훨씬 안정되고 여유가 생기면서 스태미너, 끈기, 시합운영에서 크게 발전한 것.
성급하게 굴던 파이팅 스타일도 변했다. 무하마드 알리 전에서 그는 알리를 한방에 눕히려고 계속 풀스윙을 해 체력을 다 깎아먹었다. 알리가 로프에 기대서 도발하자 바디가 비어있음에도 얼굴만을 맞추려 들다가 전부 빗나간 적도 있다. 마이클 무어러 전에서 그는 한방을 노리는 척 크게 레프트훅을 두 번 날려 무어러를 왼쪽으로 피하지 못하게 심리적으로 압박한 후, 침착하게 턱을 계속 때려 기어이 K.O 시켰다.
이와 같은 이유로 포먼 스스로 '두번째 포먼은 두뇌까지 쓰고 있어요. 첫번째 포먼이 틈을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 쓰러뜨릴 겁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두번째 포먼이 이깁니다.'고 했으며 거의 모든 전문가들도 '한방만을 노리는 슬러거 일변도에서 각종 올라운드 테크닉을 구사하도록 변한 두번째 조지가 이긴다.'고 인정을 한다. 또 '두번째 조지가 알리와 붙었으면 게임은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평할만큼 두번째 조지는 굉장히 고평가를 받고 있다. 비록 젊을 때보다 육체가 훨씬 뒤떨어질지 모르나, 다시 태어난 조지 포먼은 인격에서나 권투에서나 훨씬 나은 복서가 되었다.
복싱 팬들 사이에서는 첫번째 조지와 두번째 조지 둘 중 누가 낫느냐는 얘기를 하는데, 각종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본인까지 두번째 조지가 인성에서나 복싱에서나 더 낫다고 평가한다.
조지 포먼은 대중을 기피하는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사람이었고, 시합에선 비틀거리는 상대도 죽일듯이 달려들어 두들겨 팰만큼 냉혹했다. 그러나 두번째 조지는 농담도 자주 하고, [19] 항상 웃고 긍정적인 이야기들을 했으며, 그로기인 상대는 더 때리지 않았다.
복서로서도 더욱 발전했다. 첫번째 조지 시절, 조지 포먼은 강력한 펀치 덕분에 3라운드보다 길게 가는 시합이 별로 없었다. 때문에 감정적으로 불안했고, 힘으로만 상대를 두들겨패는 복싱에 익숙해져 무하마드 알리의 지능적인 저항으로 8라운드까지 시합을 끌고 가자 흥분해서 펀치를 퍼붓다 스태미너 배분에 실패해 기진맥진한 틈을 타 역공을 얻어맞고 패배했을 정도다. 즉 피지컬과 펀치력에 비해 멘탈과 경기운영이 약한 것이 단점이 맞다.
두번째 조지 시절엔
성급하게 굴던 파이팅 스타일도 변했다. 무하마드 알리 전에서 그는 알리를 한방에 눕히려고 계속 풀스윙을 해 체력을 다 깎아먹었다. 알리가 로프에 기대서 도발하자 바디가 비어있음에도 얼굴만을 맞추려 들다가 전부 빗나간 적도 있다. 마이클 무어러 전에서 그는 한방을 노리는 척 크게 레프트훅을 두 번 날려 무어러를 왼쪽으로 피하지 못하게 심리적으로 압박한 후, 침착하게 턱을 계속 때려 기어이 K.O 시켰다.
이와 같은 이유로 포먼 스스로 '두번째 포먼은 두뇌까지 쓰고 있어요. 첫번째 포먼이 틈을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 쓰러뜨릴 겁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두번째 포먼이 이깁니다.'고 했으며 거의 모든 전문가들도 '한방만을 노리는 슬러거 일변도에서 각종 올라운드 테크닉을 구사하도록 변한 두번째 조지가 이긴다.'고 인정을 한다. 또 '두번째 조지가 알리와 붙었으면 게임은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평할만큼 두번째 조지는 굉장히 고평가를 받고 있다. 비록 젊을 때보다 육체가 훨씬 뒤떨어질지 모르나, 다시 태어난 조지 포먼은 인격에서나 권투에서나 훨씬 나은 복서가 되었다.
8. 기타[편집]
[1] 동시대 복싱계를 수놓던 알리와 프레이저는 노년기에 투병 중 사망했지만 이 양반은 1차은퇴때 심장마비로 삼도천 직전까지 간거 빼면, 복싱 커리어내내 큰 부상으로 경기를 쉰 적도 거의 없고, 40대에도 복귀해서 챔피언에 또 등극하고 은퇴했다. 게다가 은퇴한 이후 현재까지도 후유증 그런거 없이 팔팔하다.[2] 보통 복싱 스타일의 상성은 아웃복서 > 슬러거 > 스워머 > 아웃복서로 돌고 도는 형태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복싱이 많이 진화하여 한 가지만 할 줄 아는 선수는 반쪽짜리 취급을 받는다.[3] 이점에 있어서는 알리와 매우 대조적인데, 알리는 링 밖에서 아무리 흥분된 설전을 벌여도 그로기 상태의 상대에게 불필요한 확인사살성 펀치를 날리지는 않았다. 이는 소니 리스튼과의 2차전 팬텀 펀치나 포먼과의 경기에서도 드러난다. 비틀거리면서 쓰러질 듯한 상대에 대해 알리는 펀치를 날리지 않았다. 반면 포먼은 그로기 상태로 링에 걸쳐져 있는 상대에게도 펀치를 날리곤 했다.[4] 원제는 The 100 Greatest Punchers of All-Time!으로 2003년 발표하였는데, 1위에서 8위까지는 미국 스포츠의 흔한 과거보정 시스템에 의해 19세기 혹은 20세기 초반의 인물들이다. 포먼과의 나이 차이는 최소 30년 이상[5] 6번이나 벌떡벌떡 일어나는 프레이저도 사람의 맷집이 아니었다. 노년의 프레이저의 코멘트를 빌리자면 "젠장, 내가 뭘 잘못했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지?"(...) 여담이지만 이때 아나운서가 외쳤던 "Down goes Frazier! Down goes Frazier!"은 농구의 "Havelicek stole the ball" 야구의 "He dropped the ball!" 등과 함께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유명한 멘트 중 하나이다.[6] 사각 링 로프의 반동을 이용해 포먼의 강펀치 충격을 교묘하게 분산시키고 포먼의 신경을 긁는데 성공했다.[7] 복서의 회복기로는 매우 짧은 기간이다.[8] 당장 이 위의 두 사진의 표정을 비교해보자. 같은 인물인지조차 의심스럽다[9] 게리 쿠니라는 표기로도 유명. 실제 발음은 제리 쿠니에 가깝다. 80년대 한국 언론에도 심심찮게 등장하던 선수. 신문 기사에서 에서 검둥이란 표현을 대놓고 쓰다니.. [10] 아마도 영화 록키 6의 스토리 라인은 아마 이경기를 토대로 만들어 졌을 것이다.[11] 사실 경기 내용,점수면에선 무어러가 8:2:1로 크게 앞서고 있었으나, 고질적으로 턱이 약한 무어러가 평소 스타일이 아닌 파고들며 공세를 펼치는 스타일을 펼쳤기 때문에 턱이 열렸고 결국 10라운드에 포먼의 원투에 그로기가 되어 다시 투를 맞고 나가 떨어진다. 아래 경기 영상을 보면 포먼은 무어러의 정타를 많이 맞아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경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12] 운명의 10라운드는 정확히 40분부터 시작한다.[13] 훗날 WBO 세계 챔피언이 된다[14] 전 WBC, IBF 헤비급 챔피언. 포먼처럼 30대 후반에 복귀하여 당시 통합 챔피언던 타이슨, 홀리필드와 각각 대결하고 40대를 훌쩍 넘기고도 선수 생활을 지속했지만, 왕좌 복귀에는 끝내 실패하였다. 포먼만큼 공백기가 길진 않았다는 것도 차이점.[15] 그가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만 빌려주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운영한다고 생각.[16] 본인 트윗에 따르면 알리에게 KO당했을 때 거대한 고깃덩어리가 "날 구워줘"라고 하는 환각을 본 게 제품을 발명하게 된 계기라고 한다.[17] 보통 줄여서 Foreman Grill. 자매품으로 밀폐형으로 된 Foreman Oven도 있다.[18] 딸 중 한명은 2019년 3월 42세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19] 홀리필드 전에서는 '제가 이길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챔피언이 뱃살 때문에 벨트를 못 두르는 광경을 보실 거에요!'라고 농담해 좌중이 폭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