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칸의/생애
1. 개요
여러가지로 볼 때 현대 국가인 몽골의 시조. 칭기즈 칸의 통일 이후 '대(大) 야삭(ᠶᠡᠬᠡ ᠵᠠᠰᠠᠭ / Их Засаг)[5]' 이라는 사실상의 법률이 만들어지고 지배를 하면서 법전도 만들고 문자도 만들었다. 또한 세계가 놀랄만한 군사적 업적을 통해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잔인한 정복자'에서부터 '동서 문명의 교류를 촉진시킨 영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평가를 받는 인물. 살기 위해 벌인 숱한 전쟁에서 살아남다 보니 거물이 된 양반이다. 서양에서는 자존심 때문인지 칭기즈 칸의 통치에 있던 유럽 영토를 축소했지만 최근에는 다시 평가 받는 듯하다. 특히 대항해시대를 열어서 서구가 지금 세계의 주류가 됐다고 보는 학자들은 "칭기즈 칸과 몽골의 등장은 세계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그래도 이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갈아 죽일 악당 취급을 받고 있다. 정확히는 러시아처럼 제대로 털린 나라는 싫어하는 편이고[6], 불가리아, 베트남 등 칸국들이나 원나라와 엎치락뒤치락 싸웠던 나라들은 내심 몽골을 막은 일에 프라이드를 느끼고 서유럽 같은 곳은 몽골인을 직접 대면하진 않았기 때문에 싫어한다기보단 군사에나 통달한 유목민 이미지가 박혀 있다. 영국인인 리처드 도킨스는 칭기즈 칸을 사이코패스의 대표적인 예시로 들었다. 가장 싫어하는 곳은 역시 직접 제대로 털린 서아시아다. 이쪽에서는 이름도 함부로 못 꺼낸다는 말이 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 테무진 같은 몽골식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터키에서도 텡기즈(칭기즈), 아틸라 등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역사 관련 팟캐스트 진행자인 Dan Carlin은 몽골 제국 관련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나폴레옹이나 카이사르나 알렉산드로스나 대단한 업적을 남긴 위인으로 칭송받지만, 결국엔 자신의 권력을 위해 학살하고 약탈을 한 인간들이며, 그들이 남긴 '업적'들은 죄다 그 권력 다툼의 부산물"이라며 "칭기즈 칸이라고 그들보다 더 사악하다고 볼 순 없다"는 식으로 얘기했다.[7] 실제 이렇게 칭기즈 칸이 나쁘다고 해도 그래봐야 단지 학살과 파괴를 너무 잘했을 뿐이며 다른 독재자/정복자와 본질적으로 같으며 더한 사람이라고 볼 순 없다는 역사가들도 많다.
2. 칭호
'칭기스(Чингис)'는 몽골어로 '위대하다'를 뜻한다. 어원에 대해 다양한 설이 존재하는데 라시드 앗 딘은 칭의 의미는 '단단하고 강하다' 는 뜻이며 칭기즈는 칭의 복수형이라고 기술하였다. 또한 학자 펠리오에 의하면 몽골어에서 칭의 복수형이 칭기스가 될 수 없고, 호수, 바다를 의미하는 튀르크어인 tangiz에서 온 것으로 추정했다. 이 견해를 받아들이면 칭기즈 칸은 사해의 군주, 세계의 군주라는 의미가 된다. 이 외에도 중국어 천자나 새가 우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에서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3. 일대기
3.1. 어린 시절
이후 테무친이 9살 되던 해에 아버지 예수게이가 테무진을 데릴사위로 보낸 뒤 홀로 돌아오는 길에 적대적인 타타르 부족장들에게 독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15] 그러자 예수게이의 카리스마로 뭉쳐있던 부족민들이 흩어지고, 테무진 일가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닥쳤다.
칭기즈 칸은 아버지의 독살로 평생 타타르에 대한 원한을 가졌다. 물론 아버지를 살해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지만, 다른 측면도 작용했다. 몽골 초원에서는 '접대의 관습'처럼 아무리 적대시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일단 손님으로 방문한 사람은 해치지 않고 후하게 대접하는 관습이 있었다. 예수게이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타타르족을 만났을 때도 '설마 손님 자격인 나를 해칠까'라고 생각하고 잠깐 방심했는데, 되려 이를 악용해서 손님으로 대접하는 척 하고 독살한 것. 차라리 대놓고 칼싸움을 벌여서 죽였다면 모를까, 이런 식의 뒤통수 치기는 당시 몽골의 풍습에서도 대단히 질이 낮은 행위였다. 그래서 칭기즈 칸은 타타르족에 대한 원한이 유독 컸던 것이다.
테무진이 예수게이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게이 사후 부족민들이 테무진 일가를 매정히 버렸다고 하는 견해도 있는데, 그럼 테무진의 형제는 왜 버렸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혈통 때문에 테무진의 가족을 버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리고 몽골 비사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호에룬은 예수게이에게 보쌈당한 후 몇 년 동안 자식을 못 가졌다. 즉 나중의 주치의 사례와 달리 테무진이 메르키트 족의 아이일 수는 없다. 게다가 유전자 감식 같은 기법은 없는 시대라도 양이나 말 등을 많이 키우는 유목민 사회에서는, 동물의 임신이나 출산에 해박하고 자연히 인간의 임신이나 출산에도 정통하게 된다. 따라서 산달이나 다른 남자와의 접촉 등을 깐깐하게 따지기 때문에, 임신기간이나 출생에 조그마한 의심점이라도 생기면 계승권은 고사하고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다. 일례로 칭기즈 칸의 맏아들인 주치 역시 칭기즈 칸이 일단 아들로 받아들였지만, 결국 모호한 출생 문제 때문에 후계자 다툼은커녕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먼 변방으로 밀려나 병사했다.
예수게이 사후 부족의 행방은 기록마다 다른데, 우선 몽골비사에 따르면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 친척들과 씨족 사람들 모두 떠나버렸다. 주르킨, 타이치우드로 가서 가문이 완전히 망해버려 남은 부족 인원이라곤 자신과 어머니, 형제들을 포함해서 성인 남성이 하나도 없이 고작 9명이 돼버렸다. 어찌나 차갑게 버림을 받았는지, 예수게이의 부하인 콩코탄의 차카라 노인이 떠나가는 부족 사람들을 붙잡으며 가지 말라고 하자 그대로 투두엔 기르테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더불어 훗날 테무진이 자라서 부족을 버린 것을 보복할까봐 두려웠던 다른 부족장들은 테무진을 죽이기 위해 추격꾼을 풀었고, 때문에 테무진과 가족들은 초원을 떠나 숲 속과 산 속에서 숨어 살며 매우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지금의 남시베리아에서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된 9명이 추적자를 피하고 늑대 쫓아내고 고기 잡으며 살아야 했으니 그 고생은 엄청났을 것이다.(출처: 몽골 비사 67절 ~ 75절)
이러한 시기에 테무진의 이복 형제였던 벡테르, 벨구테이가[16] 테무친 형제의 사냥물을 빼앗아가 자주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낚시한 생선을 벡테르 형제가 빼앗아가자 분노가 폭발한 테무친은 동생 카사르와 같이 벡테르를 활로 쏘아 죽여버린다. 다만 벡테르가 자신의 가계를 잇게 해달다는 간청에 동생 벨구테이는 살려준다.[17] 이로 인하여 어머니 호에룬에게 "친구라고는 그림자밖에 없는 처지에 자기 형제마저 죽인 놈" 이라며 욕을 들어먹었다(...).(몽골비사 2권 76~78장)
테무친의 형제 살인을 벡테르가 나이를 앞세워 어머니 호에룬과 결혼해 [18] 테무진으로부터 가장의 지위를 빼앗으려 해서 죽였다는 설도 있다.
다만 라시드 앗 딘의 기록은 조금 다른데, 예수게이가 죽고 부족민들이 뿔뿔히 흩어진 것 까지는 같지만 그 직후 테무친의 어머니 호에룬이 직접 말을 타고 깃발을 들고 부족민들을 추격했고 호에룬을 따르는 사람과 따르지 않는 사람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전투 끝에 부족민들은 많이 축소되었지만 어느 정도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라시드 앗 딘, 칭기즈 칸 기, 2편 2장 2절)
그리고 얼마 뒤 테무진은 타이치우드족의 공격을 받게 된다. 테무친은 테르구네 고지의 숲에 숨어 9일 동안 숨어 지냈지만 결국 타이치오드족에게 발각되어 잡히고, 포로가 되어 갖은 학대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붉은 만월의 날을 기리며 축제가 벌어지자 테무친은 방심한 틈을 노려 탈출을 시도하고, 이때 평소에도 포로인 자신을 잘 대해주던 솔도스족인 소르칸 시라와 가족들 [19] 도움으로 양털 수레 속에 숨어서 탈출에 성공해 코르초코에서 흩어진 가족들과 제회한다. (출처: 몽골 비사 2권 76절 ~ 88절)
이때 테무친을 공격해 포로로 만든 사람의 이름이 기록마다 다르다. 몽골비사에는 부족장 타르고타이 키릴투크[20] 라고 되어 있고 라시드 앗딘의 기록에는 자지라트족의 부족장 자무카 세첸이 자기 친척인 테구 타치르가 울레게이 불락에 방목하던 테무친의 가축을 훔치러 갔다가 테무친의 노예[21]인 주치 타르말라의 손에 죽게된 일로 앙심을 품어 테무친을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2. 고난의 세월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안다의 서약' 을 맺어 의형제[22]를 맺은 적이 있었던 케레이드 부족의 족장인 토오릴 칸[23]을 찾아가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선물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예를 맺음으로써 부족을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이로써 세력을 키울 기회가 생긴 것 같으나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출처: 몽골 비사 2권 96절)
옹 칸을 만나 세력을 회복한 듯 싶으나 테무진의 세력은 여전히 초원에서는 약자에 불과했다. 어느 날 메르키트 부족이 테무진의 부족을 습격하여 아내 보르테를 납치해가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때 테무진 가족들은 가지고 있는 말이 9마리여서 메르키트 족이 오는 걸 처음 발견한 노파와 벨구테이의 어머니, 그리고 보르테를 버려야할 만큼 미약한 세력을 가졌었다. 당연히 테무진은 스스로 아내를 되찾아오는 일도 불가능했다.[24]
테무진은 옹 칸과,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자무카[25] 등의 도움을 받아 메르키트를 쳐서 복수하여 간신히 아내를 되찾을 수 있었다.[26] 그러나 아내인 보르테가 메르키트 족에게 붙잡혀있는 동안 메르키트 족의 장수였던 칠게르에게 겁탈당했으며[27] 칭기즈 칸이 구하러 왔을 때에는 이미 임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때 태어난 장남 주치는 두고두고 '남의 씨앗' 이란 의혹을 받아 은근히 천대를 받았다. 다만 칭기스 칸 스스로는 주치를 자신의 장남으로 대우했고 후계자를 뽑으려 할 때도 제국을 주치에게 물려주려 했다.
아내를 되찾은 후에도 조금씩 부족 세력을 불려갔으나 여전히 테무진의 힘은 약했다. 일단 그 시작부터가 자무카의 부장 정도에 불과했으며 가문빨이 끝내주던 자무카와 달리 테무진 가문은 아버지가 독살당하던 시절에 부족민들이 배신하고 흩어져 버렸기 때문에 가문의 지원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의지할 데라고는 자기 자신과 부하들뿐이었던 것이다.
3.3. 세력 확장[편집]
이후에 자신을 지지하는 부족들에게 몽골 칸으로 추대되었다.[29] 그리고 그동안 자신을 따라준 장수들과 부하들, 형제들에게 관직을 나누어 주는 등 논공 행상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테무진 칸의 말을 지키던 말지기들이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나는 말 도둑을 활로 쏘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문제는 그 말 도둑[30]이 자무카의 사촌 아우 다이차르였다. 이 때문에 자무카와 테무진 칸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테무진과 자무카는 각각의 세력을 13 쿠리엔[31][32]으로 구성해 13익의 전투를 벌인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테무진 칸은 참패를 당하고 살던 곳에서 밀려나 제레네 협곡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이 패배로 본인 직계 가족으로 이루어진 1익, 본인과 친위병으로 이루어진 2익을 제외, 친족으로 이루어진 11진영 중 8익을 제외한 나머지 진영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 이 후 기록에 10년의 공백이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후 금나라가 자카 감부와 테무진에게 옹 칸을 도와 타타르족을 공격할 것을 명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칭기즈 칸이 금나라의 노예로 있었거나 금나라에 정치적 망명을 떠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후에 오로오드족과 망고드족[33]이 테무진 칸의 세력에 합류하게 되어 이를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테무진 칸의 키야트 보르지긴과는 같은 혈통에 속하는 주르킨 부족[34]이 행패를 부리자 테무진 칸이 화가 나서 술을 먹다 말고 이들과 패싸움을 하는 진풍경이 일어나기도 하였다(...)[35] 결국 싸움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테무진 칸이 주르킨 씨족 족장의 어머니(선대 칸의 부인들)를 인질로 잡고 협박한 끝에(...) 끝이 났다.[36] 이래저래 세력이 약해서 밀리는 형국에다가 같은 부족에 속하는 씨족들마저 말을 들어먹지를 않으니 단단히 짜증이 난 모양이다. 나중에 술이 조금씩 깨자 어느 정도 적당한 선에서 화해를 하고 물러나지만 이후 앙금이...
이렇게 힘든 세월을 보냈지만 금나라 승상 왕경[37]의 요청을 받아 옹 칸과 함께 금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타타르 족을 정벌하게 되었다. 타타르 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테무진 칸은 오랜 숙적이었던 타타르를 무찌르고 타타르 족의 장수인 메구진 세울투를 잡아 죽이는 등 크게 활약하며 명성을 떨쳤다.
이 일로 공로를 인정받아 금나라로부터 백부장의 별 볼 일 없는 직위를 하사받았지만 이로써 테무진 칸의 세력은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38] 이때 말을 듣지 않아서 술판에서 싸움이 났던 주르킨 족도 쳐들어가서 완전히 밀어버렸고 주르킨 족장 사차 베키도 잡아 죽여버렸다. 또한 이복동생 벨구테이의 어깨를 칼로 베었던 원수인 부리를 잡아 벨구테이의 손에 죽게 하였다.[39]
이후 테무진은 1197년 메르키트족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뒤 노획물 전부를 옹 칸에게 보내며 옹 칸의 세력을 회복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40] 세력이 회복된 옹 칸은 1198년 테무진에게 알리지도 않고 메르키트족을 급습하고 그 노획물을 혼자서 독차지하였다. 이러한 옹 칸의 욕심과 그로 인한 전리품 분배 과정의 인색함은 둘 사이의 불화를 싹트게 만들었다.
이후 양의 해(1199년) 테무진 칸은 옹 칸과 함께 나이만 부족을 정벌, 당시 내전중이던 타이 부카[41] 부이룩 칸 형제[42]를 동시에 공격한다. 먼저 테무진 연합군은 부이룩 칸이 다스리던 '키질 바시'를 공격한다. '케 켐치우트' 지역[43]으로 피신한 부이룩 칸은 부하인 '이디 투클룩'[44]을 파견하지만 테무진의 전초군대에 패배하고 투클룩 본인도 낙마해 사로잡힌다. [45]
그 뒤 같은 해 겨울 테무친과 옹 칸 연합군은 '바이타락 벨치레'라는 지역에서 '부이룩 칸'의 부하 '쿡세우 사브락'[46]과 대치하는데 전투를 계획한 바로 전날 밤 갑자기 '옹 칸'은 주둔지의 불을 피워둬 '테무진'을 속인 뒤 밤중에 군대를 철수, '웁치리타이 쿠린 바하두르' 등이 '옹 칸'의 철수를 만류했지만 '옹 칸'은 결국 '타탈 토쿨라' 지역으로 도주한다. [47] 다음 날 '옹 칸'의 도주를 안 테무진은 "옹 칸이 나를 재난과 화염 속에 던지고 혼자 도망치려 했다"고 분노했고, 전황이 나빴기 때문에 테무진도 '사리 케헤르' 지역으로 철수한다. 테무진 연합군이 철수한 것을 안 '쿡세우 사브락'은 반격을 시작, 먼저 옹 칸을 뒤쫒아가던 옹 칸의 두 동생 '닐카 셍쿤'과 '자아 감보'의 군대를 '이데루 알타이' 지역에서 급습하고 그 뒤 옹 칸의 울루스(의미 추가바람)가 있는 '달라두 아마사라'를 공격 '옹 칸'의 백성들과 재산 가축 등을 노획한 뒤 '옹 칸'의 본진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정벌했던 메르키트 족이 쿠두와 칠라운을 중심으로 옹 칸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나라가 안밖으로 쑥대밭이 되고 자기 목숨까지 위험해지자 결국 '옹 칸'은 얼마 전에 배신했던 '테무진'에게 사자를 보내 "내 자식(양아들로 삼은 테무진)에게 4마리 준마[48]를 청하노라"라는 내용의 구원 요청을 보내고 '테무진'도 이에 응해 4명의 장수를 구원군으로 보낸다. '옹 칸'은 부하 '티킨 쿠리'와 '이투르겐 얀다쿠'가 전사하고 아들인 '셍군'마저도 부상당해 몰살당할 상황에서 테무진의 구원군이 도착해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옹 칸'은 테무진 칸에게 잘못을 빌면서 자신의 아들인 셍굼과 테무진 칸으로 하여금 서로 의형제를 맺게 함으로써 상황을 간신히 무마시켰다. 그러나 이때부터 테무진 칸과 옹 칸의 사이는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옹 칸은 이때부터 테무진 칸을 두려워하며 이를 제거할 마음을 품었던 것 같다.
원숭이해(1200년) '테무진'은 '옹 칸'과 '사리 케헤르' 지역에서 '쿠릴타이' 회의를 개최한다. 라시드의 기록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옹 칸'은 테무진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우수 노얀'이 견제해서 실패했다고 한다. 그 뒤 '테무진'은 '우수 노얀'에게 자신의 부족인 '바아린 부족'의 만호 직위를 주었다고 한다. '쿠릴타이' 회의 직후 '테무진'과 '옹 칸'은 '타이치우드' 부족을 공격한다. 테무진 연합군은 타이치우드 군대와 '오난' 초원에서 전투해 승리한다. '타이치우드'의 패배 이후 이들과 친하고 반대로 테무진을 적대시하던 '카타킨'과 '살지우트' 종족은 다른 '타타르', '두르벤', '쿵크라트' 족을 모아 '테무진', '옹 칸'과 전쟁을 하기로 서약하고 연합군을 만든다. '테무진'은 '세첸'의 밀서로 이 연합을 파악하고 다시 군대를 모아 부이르 나우르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
이후 1201년 구르 칸으로 추대된 자무카가 자다란, 타타르, 타이치우드, 메르키트 연합군을 구성하여 공격해오자 함께 타타르를 정벌했던 케레이트의 옹 칸과 몽골 - 케레이트 연합군을 결성하여 쿠이텐[49]에서 맞서 싸워서 이겼다. 그러나 회전 승리 이후 타이치우드[50]를 추격하던 테무진이 적의 화살에 목을 맞아 피를 많이 흘려서 사경을 헤메게 된다. 다행히 사준사구 중 하나인 젤메가 밤새도록 테무진 칸의 피를 입으로 빨고 뱉으며 지혈해주고[51] 적진으로 들어가 말 젖을 훔쳐와 마시게 함으로써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테무진은 이후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는 제베를 거두어들이게 된다. 비사에 따르면 테무진이 자신이 아끼는 말의 목을 쏜 녀석이 누구냐며 포로들을 심문하는데 이때 제베가 나서서 자신이 산 위에서 쐈다고 이야기 하였다. 솔직담백한 걸 좋아하는 테무진 칸은 '날(화살촉, 칼날 등을 총칭)' 이라는 뜻의 새 이름 제베를 하사하고 크게 기용했다.[52] 제베는 이후 몽골 제국의 원정에서 크게 활약하는데 유럽에서는 화살 백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집사에선 내용이 약간 다른데, 집사에 따르면 타이치우드족이 패배한 후 도망친 제베를 포위한 후 보오르추가 테무진에게 받은 말을 타고 제베와 일전을 겨뤘으나 제베가 말을 쏴 명중시키고 도망쳤다. 그러나 얼마 후 곤경에 빠진 제베가 투항하였고 테무진이 그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3.4. 통일 전쟁
한편 테무진은 옹 칸과 결혼 동맹을 맺기 위해 주치와 옹 칸의 딸, 자신의 딸과 옹 칸의 손자를 결혼시키려 했으나 옹 칸의 아들 셍굼이 이 제안을 거부하게 되면서 옹 칸과 테무진 사이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자무카, 알탄, 쿠차르 등은 셍굼과 연합을 했고 셍굼은 아버지를 설득, 결국 옹 칸과 테무진 사이의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옹 칸은 혼인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거짓말을 한 후 갑작스럽게 배신을 하고 몽골족을 급습하였다.[56] 옹 칸 연합은 칼라카지트에서 테무진의 군대를 격파하였고[57] 테무진 칸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였다. 쿠일다르와 주르체데이의 분전과 셍굼의 부상 덕에 완전한 궤멸은 면했지만 그 피해는 심각하여 이후 점검을 한 결과 병사의 숫자가 2600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발주나 호수에서 19명의 지휘관들과 함께 서로의 충성과 신의가 계속될 것이라는 맹약을 하고 호수의 흙탕물을 술 대신 들이킨다.
이후 테무진은 발주나에서 자신의 세력을 회복하며 옹 칸, 셍굼, 알탄, 쿠차르, 자무카 등에게 서신을 보내 이들을 이간질시키고 약화시키려 하였다. 효과가 있었는 지는 모르지만 자무카는 옹 칸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나이만으로 도망치게 되었고 자무카에게 속해있던 다이타르를 비롯한 일부 몽골 부족민, 그리고 이 때 옹 칸의 처신에 실망한 케레이트 부족민들이 테무진과 연합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던 중 테무진의 동생인 카사르가 발주나에 도착하자 테무진은 이를 이용하여 카사르의 이름으로 옹 칸에게 항복한다는 서신을 보내었다. 옹 칸은 이에 속아넘어가고 테무진은 무방비 상태로 연회를 하던 중인 옹 칸을 밤중에 급습하였다. 케레이트족은 끈질기게 사흘동안 저항하였으나 결국 패배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옹 칸과 그 아들인 셍굼은 그야말로 목숨만 건져서 달아났다.[58]
이렇게 중앙 몽골 고원의 최강 세력이었던 케레이트를 꺾은 테무진 칸은 서부 몽골 고원의 최강 세력이었던 나이만 족 또한 공격하여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크게 이겼으며 자신의 아내를 납치한 원수 메르키트 족[59]도 재차 공격하여 복수함으로써 몽골 초원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나이만에 가서 붙어있던 자신의 친구이자 숙적이었던 자무카의 세력을 완전히 꺾어서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이후 자무카는 대여섯 명 정도의 부하들만을 데리고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 도적 생활을 하던 중에 부하들에게 배신 당하여 테무진 칸 앞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테무진 칸은 자무카를 끌고 온 자무카의 부하들을 비겁하다고 모조리 처형시켰다. 그리고 자무카에게 자신과 함께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자무카가 명예로운 죽음을 원하자 피를 보지 않고 죽도록 해주었다.[60]
이렇게 케레이트, 나이만, 자무카 등을 비롯한 모든 숙적들과 싸워 이긴 테무진 칸은 몽골 초원의 명실상부한 독자 세력으로 부상한다. 그리고 통일 전쟁을 마친 1206년 소집한 쿠릴타이(몽골 지역의 대족장 회의)에서 몽골 제국을 세우고 칭기즈 칸의 자리에 오른다.[61]
3.5. 통일 전쟁 이후
칭기즈 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칸 못지 않은 권력을 지녔던 무당[62]을 처형한 것이다. 칭기즈 칸은 몽골 고원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무당의 신탁을 선전용으로써 곧잘 써먹었다. 그런데 샤먼 텝 텡그리가 자신의 동생 카사르를 구타해 카사르가 칭기즈 칸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칭기즈 칸은 카사르에게 '평소에 잘난 척 하더니 뭔 소리냐'하는 식으로 냉대하자, 토라지고 만다. 이에 텝 텡게리는 카사르가 위험하다며 제거를 종용하였고, 칭기즈 칸은 카사르를 문책한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 호에룬이 '같은 젖 먹고 자란 놈이 쌈박질이냐?' 라는 식으로 상반신 노출 시위를 하며 다그치자, 칭기즈 칸은 부끄러워하며 카사르 문책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어머니 몰래 카사르의 백성을 빼앗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제 테무게 옷치긴 역시 텝 텡게리에게 모욕을 당하고, 하소연하였다. 그러자 부르테가 "당신이 살아있는데도 횡포가 이러한데 당신이 죽으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어요?" 라고 말하니, 그제서야 동생들의 말을 들어준다. 결국 칭기즈 칸은 무당을 체포해서 등뼈를 끊어버리는 형벌을 내려 죽여버렸다. 이때 무당을 죽이고 길을 나서던 칭기즈 칸은, 텝 텡게리의 여섯 형제들에게 위협적으로 둘러싸였으나, "비켜라, 나가야겠다!" 라고 말한 뒤 그들을 뿌리치고 나왔다. 이후 텝 텡게리 자리에는 온순하고 나이 든 샤먼을 임명했고 그 결과 몽골에서 칭기즈 칸에 대적하는 자는 없었다.[63][64]
이 갈등은 정치적 지도자인 칭기즈 칸과 종교적 지도자인 무당 간의 권력 싸움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료를 살펴보면 애초에 이 당시 샤먼들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간섭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샤머니즘 신앙은 당시 몽골 고원에 광범위하게 뿌리내리고 있었고 샤먼은 이 환경에서 특수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담당한 직능 즉 치병, 예언 등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힐책당하거나 살해당하기까지 하였다. 텝 텡게리가 통상적인 샤먼들 가운데서 왜 유독 튀는 존재였는지 생각해보면 다른 정치적인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가 살해된 것 역시 정치적인 힘 싸움의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또한 몽골 초원의 모든 부족들이 지켜야 할 하나의 공통된 법률을 제정하였으며 이는 곧 '야샤' 라는 법전으로 성문화하였다. 현재 원본은 남아있지 않지만 고려를 포함해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특징으로는 처벌이 강한 편으로 금지 행위의 대부분이 사형으로 끝난다(...). 그 내용은 대개 몽골의 낡은 풍습이나 악습 등을 폐지, 개혁하며 오래 전부터 초원에서 생겨났던 크고 작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 야사는 관습법적 측면도 강했는데, 불에 칼을 대는 행위, 문지방을 밟는 행위, 물에 손을 담그는 행위, 동성애 등을 엄격히 금지하고 어길 시 처형했다. 또 초원 사람들이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신부나 신랑을
경제 체제도 개혁하여 유목과 수렵에 의존하는 대신 상업을 발달시키려고 했다. 그에 따라 교역로를 개발하고 주위에 존재한 나라들과 교역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하나 서요, 호라즘 왕국 등의 외국들과 접촉하지만 곧 여러 가지 이유로 충돌이 발생하여 교역로가 침략로로 변하였다(...) 결국 원할한 교역로를 닦으려는 노력이 전쟁으로 변하게 되어버렸다는 것.
3.6. 대외 정복
그 중 하나는 칭기즈 칸이 본래 관심을 두었던 것은 세계 정복이 아니라 교역이었다는 것이다. 원래는 북중국과 서요[66] 정도로 만족하려고 했고 서쪽과의 교역은 호라즘 왕국과 교류하는 정도로 그치려고 했는데, 호라즘 왕국이 거부하는 바람에 "그럼 직접 길을 트겠다" 라는 식이 됐다는 것. 그래서 서쪽으로 계속 진출하다보니 일이 더 커졌다는 결론이다.
다른 가설로 몽골족은 원래 싸움이 끊이지 않다가 겨우 통일 국가를 이룩한 상태라서 얼마든지 내부 분쟁의 씨앗이 존재했고, 이러한 내부 불만을 억제하기 위해 밖으로 원정을 나갔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론, 테무진이 "칭기즈 칸"의 호칭을 얻으면서부터 세계를 지배한다는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고, 그것이 타국과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주었다는 시각도 있다.
칭기즈 칸의 정복 활동을 살펴보면 연경을 포위한 후에도 정치적 복속과 조공품의 상납만 약속받고 초원으로 돌아가는 등, 정말로 '지배' 하는 것에 큰 욕심을 가졌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원정은 지배가 아니라 대부분 재정 충당이 목적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응징과 복수를 명분으로 내걸었을 뿐이다. 몽골이 그나마 정복전에 가까운 전쟁 양상을 띄게 된 것은 오고타이 카안 시절부터이며, 아무리 빨리 잡아도 칭기스 칸 말년부터다.
칭기즈 칸이 정복한 대외 영토가 워낙 넓은지라 평생을 대외 정복에 힘 써온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칭기즈 칸의 생애 대부분은 몽골 통일 전쟁을 하면서 보냈다. 가문이 망하고 부족들이 흩어진 후 적대 부족에 노예로까지 붙잡히는 등, 완전히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났기 때문이다.[67] 몽골 통일이 1206년이고 칭기즈 칸 사망년도가 1227년이니, 대외 정복에 힘을 기울인 시기는 21년 밖에 채 되지 않는다. 고작 그 정도 기간에 세계 제국의 건설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세운 것이다.
3.6.1. 서하 원정[편집]
3차례에 걸친 전쟁 동안 서하군은 우수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산개 전술을 펼치는 몽골군에게 참패를 면치 못하였다.[69][70] 몽골 군대는 쳐들어올 때마다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약탈을 일삼아 서하인들에게는 죽음의 사자와도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결국 몽골군은 서하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서하 수도 영하(현 인촨)를 포위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공성전 경험이 부족해서 이래저래 난항을 겪었다. 둑을 지어서 황하 물줄기를 돌려 영하를 물에 잠기게 하려는 작전도 펼쳤지만 몽골인들이 물줄기를 다루는 법에 무지해서 되려 수해를 겪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수도가 포위당한 상황에서 급한 쪽은 서하였고 국왕 양종은 금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결국 오랜 대치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1207년, 칭기즈 칸에게 딸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3.6.2. 금나라 원정
북중국을 지배하며 남송과 대치하고 있었던 금나라는 과거에 칭기즈 칸의 증조부 안바가이 칸을 사로잡아서 목마에 못박아 죽인 일이 있었다. 따라서 칭기즈 칸에게 금나라는 조상의 복수를 위해 반드시 꺾어야 할 원수였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금나라가 대대로 북방의 유목 민족들에게 서로 싸움을 붙여 견제해왔는데[71] 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일하자 이를 경계하고 나섰으므로 불가피하게 이들과 싸워야 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몽골군이 금나라를 침략하자 거란족들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들이 과거에 거란족에게 쌓인 원한이 있어 이들을 박해하였기 때문이었다. 몽골족과 거란족 연합군은 거용관 부근의 야호령에서 금나라 총사령관 완안승유[72]의 40만 대군과 맞붙어 이들을 크게 격파하고 만리 장성 부근으로 밀고나갔으나 역시 공성전에는 익숙하지 못하여 관문을 돌파하고 화북으로 진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73]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기즈 칸은 후주(도시 이름)를 점령하고 이어서 거용관의 완강한 저항을 뚫고[74] 들어가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오늘날의 북경)까지 공격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이때 금나라의 동경 유수(요양 태수) 포선만노가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동진국을 건국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 결과 금나라는 만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금나라 선종은 칭기즈 칸에게 안바가이 칸의 유물을 돌려주면서 화의를 청하여 마침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칭기즈 칸이 받아들여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챙겨 철수하였다. 그러나 선종이 수도를 중도에서 개봉(오늘날의 카이펑)으로 옮기자 칭기즈 칸은 금나라 황제가 변심을 했다고 여겨 다시 한 번 중도를 포위 공격하였다. 그동안 중국의 단단한 성벽들을 공격하면서 단련된 몽골군은 능숙하게 공성전을 수행해나갔고 오랜 포위에 지친[75] 중도는 방어 사령관 완안복흥[76]이 자살함으로써 끝내 무너졌다. 성을 함락한 몽골군은 중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엄청난 약탈을 하고 돌아갔다.
이 무렵에 칭기즈 칸은 당시 요나라 왕족 출신의 금나라 관리였던 야율초재를 등용하였다. 실무와 정치에 능한 야율초재는 이후로 몽골 제국 내정을 다듬는 데 일조하였다. 본래 칭기즈 칸은 금나라 땅을 점령한 후에 그곳에 살던 농민들을 모두 죽이고 모든 땅을 가축을 키우기 위한 방목지로 개간할 생각이었으나(...) 야율초재의 조언에 따라 점령지의 농민들을 죽이지 않는 대신 조세를 거둬들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77]
3.6.3. 서요, 호라즘 원정[78][편집]
칭기즈 칸은 아바스 왕조를 누르고 중동의 새로운 강자로 군림하던 호라즘 왕국과 교역을 하기 시작하였다.[88]
그러나 칭기즈 칸이 호라즘에 보낸 사절단이 오트라르 성의 성주인 이날축에게 물건을 모두 빼앗기고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호라즘과의 관계는 차츰 험악해졌다. 이후에 칭기즈 칸이 사과를 요구하는 전령을 보냈으나 사절단을 해친 이날축은 국왕 호라즘 샤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았다. 사과를 받으러 갔던 전령들은 되려 수염이 깎인 채로 돌아오는 수모를 겪었다.[89]
이에 격노한 칭기즈 칸은 친히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호라즘 원정을 떠났다. 당시 쇠퇴한 아바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짧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호라즘 왕국은 40만에 달하는 대군을 거느린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러나 몽골군 역시 그동안 많은 실전을 통해 발달한 전략과 전술을 터득하였을 뿐 아니라, 중국의 성곽을 공략하면서 공성전 경험을 충분히 쌓은 상태였다. 몽골군은 뛰어난 기동력을 앞세워 순식간에 오트라르 성을 무너뜨리고 내지로 진입하여 호라즘 전 국토가 몽골인들의 말발굽에 탈탈 털리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오트라르 성이 함락된 후에 몽골 사절단을 죽였던 이날축은 양쪽 눈에 쇳물[90]을 붓는 형벌을 받아 죽었다.[91]
크게 참패한 호라즘 샤는 모든 것을 잃고 카스피 해의 작은 섬으로 들어가 숨어있다가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으며 수도인 부하라가 함락당하면서 그의 아들들은 몰살당하였다. 또한 이날축의 처벌을 반대했던 호라즘 샤의 어머니 테르켄 카툰은 수도가 함락된 후에 몽골군에게 끌려가서 몽골인들의 하녀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몽골군은 호라즘 샤의 첫째 왕자 잘랄 웃 딘은 끝내 생포하지 못하였다. 칭기즈 칸은 달아난 잘랄 웃 딘을 추격하여 그가 숨어있던 사마르칸트까지 박살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랄 웃 딘은 기여코 몽골군의 추격을 따돌려 인도 인접 지역까지 달아나서 끝까지 대항하였다. 호라즘에 치를 떨던 칭기즈 칸도 잘랄 웃 딘만큼은 높이 사고 인정해줬다 한다.
그리고 몽골은 끝까지 인도를 정복하지 못하고 서아시아로 전력을 집중했다. 심지어 인도는 후에 차가타이 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3.7. 최후
그러나 서하 원정 도중에 칭기즈 칸은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사고를 당했을 당시의 칭기즈 칸은 이미 나이가 60세가 넘은 노인이었기 때문에 낙마 사고는 굉장히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원조비사에 따르면 이후로 건강이 크게 악화되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칭기즈 칸은 점차 병이 깊어져서 죽음을 눈 앞에 둔 와중에도 끊임없이 서하 정벌을 지시하였다. 당시 서하의 왕은 말제 이현이었고, 재상은 야사감푸였다. 서하는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식량이 떨어지고 피해가 커지자 말제는 항복하고 만다. 이때 야사감푸는 칭기즈 칸의 앞에 끌려오자 목숨을 구걸했으나 칭기즈 칸에 대한 욕을 한
칭기즈 칸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아들들에게 "금나라의 성들이 단단하니 남송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해서 남쪽에서 공략하라" 라는 말을 유언으로 한다. 칭기즈 칸이 죽은 후에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충실히 받들어 황하 이남의 개봉(현재 카이펑)에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던 금나라를 남송과 함께 공격하였다.[97][98]결국 금나라는 마지막 황제인 말제 완안승린이 금나라 애종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은 지 하루 만에(...)[99] 몽골군에 잡혀 죽음으로써 1234년에 완벽히 멸망하였다.
칭기즈 칸의 최후는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낙마설이 대표적이다.
4. 평가
이후에 나오겠지만 평이 아주 많이 엇갈린다. 위의 영상은 TED에서 이에 대해 다룬 강의.
몽골인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문명들인 이슬람, 중국, 유럽 문명과 달리 자신들은 기록을 남기는 데 관심이 없던 유목민이었으니, 남들 입장으로만 역사가 기록되어 나쁜 놈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당시 몽골 민족들은 심리전의 일환으로 자신들을 나쁜 놈으로 표현하는 데 능숙했다고 하며 이것이 그대로 반영되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는 계급 폐지[100], 종교의 자유 보장[101], 약탈혼 금지, 인종차별 금지[102] 등등 지금 관점에서 보기에는 상당히 훌륭한 정치를 펴기도 했다.
다만 위에 언급한 제도적 개선이 다른 민족, 다른 지역에는 기존 지배층을 다 잡아 죽이고, 종교 질서도 다 뭉개놓고, 우리 모두 평등이란 식이어서 토착민들의 입장에서 몽골인 정복자들에 대해 증오심과 혐오감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유목민족인 그들은 기록을 거의 하지 않으니, 아무래도 학살당한 피해자들의 입장에 근거한 기록들로만 추정하였으니 좋은 소리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협박같은 것도 많이 했으니... 하여튼 이 통에 네스토리우스교가 덕을 많이 봤고 이는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퍼져나가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4.1. 인재 중시
사실 칭기즈 칸이 일생에 걸쳐 가문이나 부족보다는 스스로 얻은 '인재'를 믿은 편이었다. 친척이라는 사람들은 그를 자주 배신했지만[105] 혈연 없이 맺어진 관계는 끈끈했고[106][107] 이 때문에 가족보단 다른 사람을 더 믿는 때도 있었다. 타타르족 학살 후 테무르의 휘하에 있던 남은 타타르 부족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칭기즈 칸은 본인이 좋은 혈통을 가지긴 했지만 한 번 몰락한 후 혈통으로 이어진 자들에게 배신당했고, 자신과 혈연이 없는 부하들의 능력을 활용해 성공했기 때문에 핏줄빨로 먹고 사는 귀족을 낮게 본 것. 호라즘 왕국만 해도 왕인 무함마드 2세의 어머니 테르켄 하툰을 하녀로 만들었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와 아내를 존중하며 잘 대접해준 것과는 차이가 난다. 물론 알렉산드로스와 다리우스 3세는 별다른 은원관계 같은 것이 없는 단순한 적장의 입장일 뿐이었고 무함마드 2세의 어머니는 모든 일의 원흉이라 할 만했지만(호라즘 왕국 항목 참고). 이런 가차 없는 점이 서양에서 안 좋게 보는 이유 중 하나다.
칭기즈 칸 사망 당시 몽골 제국의 영토.
20세기 초까지 등장했던 어떤 정복자들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정복했다. 그야말로 인생이 정복. 많이 비교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경우에는 사실상 정복했던 영토 대부분이 거대한 대제국 하나를 흡수해서 얻은 영역이였고 죽자마자 제국이 4개로 갈라져 아들도 죽은 데 비해 어쨌건 칭기즈 칸의 후손들은 짧지 않은 백여 년간 나름대로 질서 있는 체계를 유지하며 원나라라는 세계제국을 경영할 수 있었다. 카이두의 난 이후로는 이런 질서도 무너져 가긴 했지만... 물론 알렉산드로스는 단순한 정복자를 넘어서 헬레니즘이라는 엄청난 문화적 업적을 잉태했기 때문에 평가가 훨씬 부드럽고 긍정적이다.
그리고 정복 영토의 경우 과거 카라한 왕조 등이 있던 서요 등의 지역은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는 영역에 비해 영토가 워낙 큰 편이라 지도를 그리면 엄청나게 커지는 점은 고려하는 편이 좋다. 칭기즈 칸이 직접 친정하여 물리친 호라즘의 경우는 확실히 그 위세는 절정기였지만 워낙 빠르게 복속이 된 탓에 '제국' 이라고 부를 만한 기반은 전무한 상태였다. 이를테면 아프가니스탄이 호라즘에 속한 건 몽골군이 쳐들어오기 4년 전이었고 서부 페르시아가 호라즘의 영역이 된 것 역시 칭기즈 칸이 진군하기 불과 3년 전이었다.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는 호라즘에 속한 지 10년도 아직 되지 않았으며 사마르칸트는 수많은 기습과 학살이 벌어졌던 곳이었다. 호라즘의 영역이 확정된 것은 가장 빠르게 봐도 1217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부 기반을 다져야 할 상황에서 어그로를 끌어 몽골군이 쳐들어오게 했다는 게...
워낙 임팩트가 강해서 칭기즈 칸 시대에 중국 끝까지 다 밀어버린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있긴 있다. 칭기즈 칸은 금세종의 절정기 이후로 쇠퇴기에 접어들던[108] 금나라를 손봐주는 데 그쳤다. 다만 금나라의 경우는 호라즘과는 달리 자리를 잡은 지 오래되고 생산력 역시 강대한 나라라 꽤나 여러 번 공격을 해야 했고 결국 칭기즈 칸 시대에는 완전히 멸망을 시키지 못했다.[109] 이건 칭기즈 칸이 금나라를 공격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서쪽으로의 진군에 집중한 탓도 크지만.
여하간 다른 전선에 신경을 쏟았기 때문에 의외로 칭기즈 칸은 생전에 중국 땅에 그리 오래 있지 않았다. 칭기즈 칸 생전에 대 중국 전선을 주로 담당한 사람은 무칼리였다.
칭기즈 칸의 진격로.
칭기즈 칸 본인은 유럽 땅을 직접 밟은 적이 없지만 그의 명령하에 호라즘의 칸을 추격하던 수부타이와 제베가 카프카스로 빠졌다가 칼가강 전투에서 키예프 공국을 중심으로 뭉친 연합군을 발라버린 적은 있다. 이 전투로 러시아 공국들의 야전 역량이 뿌리채 뽑혀 이후 몽골의 서방 진군 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각개격파당한다. 당시 러시아는 흔히 알려진 제국이 아니라 공국들의 연합체였다. 게다가 내부의 도시들은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면 목책에 둘러싸인 마을이었고 나무를 많이 쓰다보니 몽골군의 화공에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이후 바투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황금 부대에게 현 우크라이나 지역은 완전히 초토화되었으며 북쪽 도시 몇 개만이 살아남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몽골군이 발길을 돌렸던 당시 공화정이었던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세금 징수하던 모스크바다.
4.3. 성격[편집]
참고로 저런 말살 명령을 보면 은근히 비유적인 문구가 많다. 수레 바퀴보다 큰 남성은 다 죽이라거나 두 발로 걷는 것들은 다 죽이라거나...[112]
지휘관으로서의 재능은 뛰어난 편으로 13익 전투, 카라칼지드 사막 전투 외에는 그는 패배를 당한 적이 없었다.[113] 기후 변화가 승리의 주요 요인으로 꼽히는 쿠이텐 전투에서조차 신속한 기동력을 이용해 유리한 지형을 점거하는 노련함을 보이고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는 횃불을 이용해 나이만을 속이는 등 군사적 재능도 뛰어났고 특히 몽골 통일 이후에 그의 군사적 능력은 빛을 발휘하면서 금나라 정벌, 호라즘 정벌, 서하 정벌 등 자기가 지휘한 전투에서는 모두 승리를 거둔다.[114] 문맹인데도 불구하고 슬로-슬로-퀵-퀵 같은 몽골의 전략 전술을 짜낼 정도다.
하지만 테무진 자신은 인간적으로는 강인한 전사 내지는 마초로만은 해석될 수 없는 부분이 주를 차지하는 남자였다. 인간적으로도 상당히 털털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세계 정복 프로젝트가 이뤄지던 말년의 죽기 며칠 전에 한 말이 "다시 태어난다면 평범한 사람으로 평범한 게르(Ger, 몽골식 천막)에서 살다 평범하게 늙어 죽고 싶다" 라는 부분은 그의 안습한 전반기 인생 여정을 아는 이들을 슬프게 한다(...) 물론 자신의 악행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유언도 있다(...)[116] 이러한 테무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및 분석은 딴지일보에서 연재한 기획물 '테무진 to the 칸' 에 잘 녹아있다. 현재까지 나온 인터넷 연재물 중 칭기즈 칸과 몽골사 전반에 대한 가장 치밀한 분석이 담긴 연재물이다.[117][118]
몽골족 풍습을 죽을 때까지 따랐고 사치를 싫어했다. 자신을 높이는 형용사마저도 싫어하여 황족은 그를 테무진이라 불렀으며 공문서에도 그의 이름 앞에 다른 명칭이 붙는 것을 싫어했다. 각종 종교들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 때문에 몽골의 풍습이 침식되는 것은 절대 바라지 않았다.[119] 이러한 태도는 현대 몽골인들이 그를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이며 그의 후손으로 몽골 제국의 중국화를 몇 단계나 가속시켰다고 평가되는 쿠빌라이 칸과 자주 비교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가 죽을 무렵 도교의 사제 장춘 진인(구처기)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때 그 자신에 대한 상세한 얘기를 했다. 칭기즈 칸 본인은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적들이 사치스럽고 불경하여 승리한 것이라고 얘기했고[120] 본인은 사치를 싫어한다고 얘기했다. 그의 백성은 자식처럼, 능력 있는 자는 출신을 불문하고 형제처럼 대했다고 얘기했으며 그의 장군들과는 끈끈한 우애로 이어져 있다고 얘기했다.[121]
장춘 진인은 처음 칭기즈 칸을 만났을 때 칭기즈 칸이 살육을 멈추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은 그와 긴 시간 얘기한 뒤 그를 마음에 들어해서 그가 중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편안히 가도록 조치를 취해주었으며 그로 하여금 중국의 도사들을 통제하도록 해주었다. 장춘진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자신을 따라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 카리스테네스가 아시아식으로 자신을 숭상하는 것을 거부하자 나중에 죽인 데 비해 칭기즈 칸은 장춘 진인이 칭기즈 칸의 저녁 초대를 거부하고 도사로서 술을 거부해도 그를 공경하며 대했다.
칭기즈 칸의 주 전술은 심리전이었다. 대표적으로 일부러 마을들을 공격한 뒤 마을 사람들을 성 안에 몰아넣어 성 안의 식량이 떨어지게 만들어 스스로 공격하게 하는 것. 또한 몽골군에 대한 악명을 부풀려서 적들이 스스로 기게 만들었다. 이런 소문이 과장되어 중동 역사서에서는 나쁜 부분만 적히게 되었고 칭기즈 칸을 사이코패스로 보는 서양인도 존재. 타임지에서는 13세기의 인물로, 워싱턴 포스트도 칭기즈 칸을 지난 1000년간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으로 골랐지만 깡패라고 썼다. 반대로 19세기 유럽이 아시아를 야금야금 정복하는 일에 반발한 아시아인들 사이에선 칭기즈 칸을 영웅으로 보기도 했다(예로 인도의 네루). 물론 같은 아시아지만
칭기즈 칸 본인은 고문을 법적으로 금지하고[122] 죽일 거면 그냥 죽이고 살릴 거라면 그냥 살렸다. 후일 구육 칸 때 구육 칸이 정치에 간섭한 여인 파티마를 죽이며 이 법을 깼다. 또한 살육으로 유명하지만 원조비사에서 호라즘 왕국 정벌시의 이야기에선 자신의 허락 없이 근접 국가를 공격한 부하에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다. 죽일 땐 엄청 죽이지만 이유 없이 죽이지는 않은 것. 자무카를 잡았을 때도 자무카가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자 이유 없이 그를 죽일 수 없다고 해서 먼 과거에 있었던 일을 죄명으로 하고 죽였다.
참고로 선전포고 없이 쳐들어간 적은 없다. 선전 포고는 언제나 "내가 참작할 기간 줄 테니까 그때까지 항복해. 항복 안하면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니 기대해라" 라고 했고 이 말을 어긴 적이 없다. 물론 당연하게도 자신이 죽은 적도 없다. 물론 처리도 엄격해서 항복한 지역에서는 약탈을 금지했고, 맞서 싸웠던 곳은 철저히 파괴했다.
몽골 통일 과정에서 점령한 부족과의 사이를 호전시키기 위해 그들의 여자들과 결혼하고 각 부족에서 찾은 아이들을 자신의 어머니로 하여금 입양하게 하여 자신의 형제의 위치를 주었다. 초창기(보르테를 되찾은 첫 전투부터 자무카와 결별하기 이전까지쯤)엔 아버지가 죽은 후 고생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일종의 보상 심리에 따른 행동이었지만 나중엔 몽골 통합에 큰 도움이 되는 정치적 행동이 되었다. 또한 '우리는 모두 (의)형제' 라는 의식에서 반란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야만스럽고 잔인하면서도 자신의 사람, 믿는 사람에겐 관대하며 친절한 사람이었다. 일단 장수를 채용할 때 제1조건이 바로 능력과 충성이었다. 자신에게 반항했던 첫 아들 주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며칠 동안 자신의 게르에 틀어박혀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자신의 친아들이 아닐지도 모르는 주치를 큰아들로서 사랑한 것만 봐도 인간적인 부분이 있는 사람인데 동양권에선 이 부분에 신경 쓰지만 당연히 서양권에서는 신경 안 쓴다...
적을 용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유일한 예외가 의형제였던 자무카. 자무카와 몇 번이고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자무카가 자신에게 잡혀오자 그를 자신의 2인자로 회유하려고 했다. 하지만 자무카가 죽여달라고 간청해서 결국 피를 보지 않는 방식으로[123] 자루에 넣은 뒤 말발굽에 밟히게 해 죽이게 된다. 다만 자무카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전승이 있다. 자무카 항목 참고.
반면 자신의 명령을 어기는 자는 그 누구도 용서치 않았다. 아들들이 자신의 말을 안 듣고 싸웠을 땐 엄청 화가 나있다가 볼츠의 중재로 설교로 끝났지만 항복한 도시는 약탈하지 말라는 그의 명령을 어긴 칭기즈 칸의 사위는 즉시 일반병으로 강등되어 싸우다 죽었다. 이 덕분인지 페르시아의 역사서에서도 '칭기즈 칸 그 자식 재수 없긴 한데 나름대로 공평한 면은 있었다' 라고 기록한다.
어릴적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자마자 아버지 부하들에게 배신받아 일가족 전체가 고생한 덕분에 배신자들을 매우 싫어했다. 물론 전쟁 전에 자신에게 항복한 자들은 환대하였지만 자신들 주군이 강성할 때는 온갖 꿀을 빨다가 자신들 주군이 전쟁에 져서 불리할 때 자신들 주군을 배신하거나 죽여서 항복한 자들은 신뢰가 없는 자라 하여 모두 사형에 처했다. 그중에 자무카를 배신하여 자무카를 포박하여 투항한 자무카의 옛 부하 5명을 사형에 처하였고 자신이 어랄 적의 태무친과 태무친 가족을 버린 것도 모자라 죽이고자 했던 키릴투크의 목을 잘라서 온 키릴투크의 옛 부하들도 모두 처형하였다.
4.4. 세계 각국의 평가[편집]
4.4.1. 동양[편집]
몽골에 있는 40m 기마 동상. 현존하는 기마 동상 중 가장 높다.
당연한 얘기지만 몽골에선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다. 비록 죽은 지 800년이 다 되어가는 사람이지만 몽골인들의 국부와도 같은 존재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하는 두 인물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합친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하다. 허나 공산주의 시절에는 칭기즈 칸에 대한 찬사가 금지되었던 역사가 있으며 지금처럼 공개적으로 칭기즈 칸을 국부 취급하게 된 것은 몽골이 민주화가 된 이후의 일이다.[124] 2013년에는 한때 수흐바타르 광장이었던 울란바토르 시내 광장 이름를 칭기즈 칸 광장으로 바꿔서 옛 공산주의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갈등이 있기도 했는데 결국 명칭 변경이 위법이라는 사법부의 판결을 받고 다시 수흐바타르 광장으로 환원되었다.
몽골 사람들은 칭기즈 칸이 없었다면 외국인들은 몽골이란 나라가 존재하는 줄도 몰랐을 거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몽골 족은 칭기즈 칸이 부족을 하나로 모아 통일하지 못했더라면 초원의 격렬한 물살에 휩쓸려 여타 부족들이 그러하듯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몽골인들의 칭기즈 칸 사랑은 한도 끝도 없을 정도.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칭기즈 칸이 바로 몽골의 문자를 만들고[125] 법전도 만들고 이름값도 높인 사람이다. 거기다가 본인도 자신의 고향을 매우 사랑했으니 국부로 모시기엔 이만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몽골에서는 좋은 것이나 랜드마크에는 죄다 칭기즈 칸을 붙이고 있다. 칭기즈 칸 국제공항 등이 그 사례. 이런저런 상표에도 쓴다.
2010년에는 기마 동상을 세웠는데 높이 40미터로 현존하는 기마 동상 중 가장 크다.(참고로 저 동상의 말 머리에 올라갈 수 있는데 칭기즈 칸 동상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위치가 심상치 않다.)사진.
일본의 경우 자국과 상관없는 역사라도 칭기즈 칸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던 편이라 일제강점기에 영향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가 이웃에 있던 금나라, 남송, 서하가 완전히 갈려나가고 원나라 통일 후에도 개 취급 받았다는 문제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대우를 받았다는 점도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원의 약화와 사대주의등의 영향으로 초기부터 고려는 오랑캐에 굴복했다는 걸 강조했기에 굉장히 이미지가 악화되었었다.
중국에서는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전반적으로 좋아하는 편이다. 중국인 논리에 따르면 일단 칭기즈 칸 자체가 몽골족이고 몽골족은 중국의 소수민족, 즉 몽골인⊂중국인이니, "칭기즈 칸도 중화영웅이다."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심지어 시진핑 찬양가에서도 저 논리를 써먹고 있다. 실제로 칭기즈 칸과 몽골의 원정 관런 동영상들을 보면 "중화민족이 세계를 재패했다."며 흡족해하는 중국인들의 댓글을 심심찮게 볼수 있다. 대체로 내몽골족 출신 중국인들은 칭기즈 칸을 중국인이라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중화사상에 써먹는 모델로서, 내몽골자치구에서 가짜 무덤까지 만들고, 몽골이 지배한 곳은 죄다 중국 땅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126]. 물론 몽골족에게 당한 다른 출신 중국인들은 원나라 황제들이라면 몰라도 칭기즈 칸에 대해서까지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한다. 하긴 당한 게 어느 정도인데... 물론 이런 주장에 몽골은 피꺼솟한다.
참고로 중화민국 시대에는 몽골이 중국 땅이였으며 중국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정착한 뒤 요즘도 타이완에서 판매되는 중국 지도를 사서 보면 몽골이 중국 영토로 되어있다. 중화민국/미수복지구 참고.
일본에서도 세계정복의 로망 때문인지, 자기들이 밟지 못한 서양을 군사적으로 짓밟은 동양인이라고 대리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나쁘게 보는 시각은 별로 없다. 일본에서의 칭기즈 칸과 원나라의 호의적인 시각은 비록 자연 재해 때문이라지만 원나라의 침공을 저지했기에 오히려 원나라와 칭기즈 칸을 띄울수록 그걸 막았다는 자신들의 자부심이 더 높아지기 때문인데, 실제로 카미카제만 봐도 일본의 부심이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쉬웠던 일제 시대에는 군국주의 사상하고 결합해 역사 연구가 활발했는데 자국의 역사하고 별 상관없는 몽골에 조사단을 파견할 정도로 칭기스 칸과 원나라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에 잘 알려졌던 코에이의 게임 징기스칸 시리즈에서도 제목부터가 몽골이 주인공이며, 몽골계 세력은 매우 강력하며 부정적인 묘사는 전혀 없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일본의 일부 재야 사학계에서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 칭기즈 칸의 동일인설을 우기기도 한다. 다행히도 현재 일본의 주류 사학계에서는 당연히 무시하고 있고 지금이야 대중 문화물에서 흥미 위주로 다루고 있지만 일본 제국 시절에는 사학적으로 연구도 된 설. 이쪽의 대표자는 오야베 젠이치로로 오슈, 만주, 몽골을 돌며 자료를 수집해 '칭기즈 칸은 요시츠네' 라는 책을 써내기도 했다. 읽어보면 말도 안 되는 논리 전개다. 심지어 이건 정식 학문으로 연구까지 되었으니 훨씬 질이 나쁘다. 하는 말을 들어보면 억지 위증 자료까지 증거랍시고 내놓고 그걸 빌미로 학살과 침략을 실현화한 것들일 뿐. 다나카 요시키는 창룡전에서 이런 주장을 하는 일본인 선생에게 몽골에 보란듯이 조상 기록까지 남은 사람을 억지로 일본계라고 왜곡하고 그걸 믿는 건 전 세계에서도 당신같은 극히 일부 멍청이나 그런다고 주인공 입으로 신랄하게 깠다. 참고로 각종 영령들이 나오는 Fate 시리즈의 팬들 사이에서 '여기엔 왜 칭기즈 칸과 몽골계 인물들은 서번트로 나오기는커녕 아예 언급 자체가 없냐?' 라는 말이 나오면 우시와카마루(Fate 시리즈)가 몽골로 건너가서 칭기즈 칸이 된다 또는 나중에 칭기즈 칸이 나오면 무고의 괴물 능력을 받으면서 우시와카마루 페이스로 나온다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반면 아시아 대륙 안에서도 서쪽으로 가면 평가가 크게 갈리는데, 페르시아의 역사서에서 칭기즈 칸은 아예 악마와 손을 잡았다고 기록되기도 하고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에드워드 기번은 칭기즈 칸과 그의 후손들 때문에 전 세계가 떨었다고 쓸 정도였다. 거기다가 기독교 연대기 중에도(Chronicle of Novgorod) 몽골군은 신이 내린 징벌이라 불릴 정도의 포스[127]를 보여주었으니 서구 쪽에서 좋게 보긴 힘들겠다. 거기다가 살아 생전에 초상화도 못 그리게 하고 그에 대한 역사도 못 쓰게 했던지라 그에게 당했던 국가들은 온갖 나쁜 이미지를 그에게 덮어씌웠고, 나중엔 '자신들의 나라가 못 사는 건 몽골족이 다 수탈해가서' 란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예로 중동 정치인들이 칭기즈 칸이 중동을 발라버리지 않았다면 미국보다 핵폭탄을 먼저 만들었을 거라고 할 정도. 뭐, 실제로 몽골 침입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관개 설비가 완전히 파괴되어 농업이 괴멸하고, 이란 지역 역시 아케메네스 왕조 이래 천여 년간 축적해 온 국력과 문화적 저력의 상당 부분을 몽골의 수탈로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핵폭탄을 누가 먼저 만들었을지야 따져봤자 별 의미 없는 뻘짓거리지만, 중동권에 비해 문화적, 기술적, 경제적으로 명백히 열세였던 서유럽권이 중동을 따라잡고, 추월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몽골 제국의 공격으로 인해 중동 지방이 받은 타격이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란, 이라크 같은 중동권 나라들에선 알렉산더 대왕과 살라흐 앗 딘
4.4.2. 서양[편집]
근데 정작 동유럽 일부가 잠깐 갈린 거 빼곤 딱히 접촉이 없었고[129] 오히려 십자군 왕국들은 일 칸국의 유력한 동맹 후보국으로 몇 차례씩 동맹 요청 사신이 오갔다는 걸 감안하면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딱히 틀린 것만도 아니었을 듯. 캅카스에 있던 기독교 국가인 조지아 같은 경우에는 몽골과 많이 엮여서 고생하긴 했다. 조지아는 몽골군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존중을 얻고 몽골의 속국으로 편입되었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후진 약소국이었던 러시아는 노브고로드를 제외하면 말할 것도 없이 갈렸다. 후손인 몽케 칸이 본격적인 유럽 정벌(로마까지..)을 준비하다가 병들어 죽는 통에 몽골의 전통에 따라 이미 떠난 원정군들도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해 반쯤 갈아놨던 중부 유럽을 그냥 포기하고 돌아오다보니 때를 놓치고 무산되어버렸다. 만일 몽케 칸이 이때 안 죽고 좀 더 살았더라면 정말로 이슬람 사신이 말한대로 유럽 여러 나라가 몽골 말발굽에 밟혔으리라는 주장을 펼치는 이도 있지만.
아마 서양에 가장 잘 알려진 동양인 중 하나일 것이다. 지옥에서 만나게 될 사람 목록에 올라가 있다거나(히틀러와 함께), 훈족의 수령 아틸라와 더불어 완전 무식한 야만인으로 묘사된다. 닥터후에서만 봐도 닥터가 "칭기즈 칸의 군대가 다 몰려와도 타디스는 안전했다" 라고 말하면서 완전 야만인 취급.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을 다룬 영화 몽골의 리뷰 중엔 칭기즈 칸의 인간적인 모습이 나오자 헛소리하지 말라고 야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안 좋거나 희화화된 이미지와는 반대로 몽골과 칭기즈 칸을 역사상 최고의 Badass 취급하면서 숭배에 가깝게 좋아하는 서유럽인도 많다. 아무래도 몽골에게 직접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이기 때문에 그런 듯하다. [130]
해롤드 램은 몽골인을 이란과 튀르크계의 혼혈로 보았다만 이 사람은 몽골인의 이야기 몇 개를 듣고 그걸 야사의 법문이라고 써놨다고 하니 믿음이 갈 리가 없다. 원래 유목 민족들이야 서로 같은 유목 생활권을 공유했고 거기다 동돌궐이나 위구르는 원래부터 내, 외몽골에 있었으며 더 나아가 위구르 수도 카라발가순은 현재 울란바토르 인근이다. 두 민족이 얽히는 거 자체는 당연하다. 그리고 이곳에 잔류하던 튀르크인들은 서아시아의 연계성은 거의 없었고 중국과의 접촉이 가장 많고 돌궐이야 당에게 시시때때로 괴롭히고 정복하러 다닐 정도로 밀접한 관계였다.
이전 작성자가 튀르크를 무조건 현재 터키와 결부시키고 있는데 튀르크인의 분포는 시베리아에서 동유럽까지를 커버하는 유라시아 전역이다[131]. 칭기즈 칸의 모계에는 적어도 키르기즈나 카자흐인 혈통이 섞였다는 주장들도 제기되고 있으며 현재 야쿠트 공화국의 야쿠트인은 몽골 고원에 살다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로 인해 축출당하여 북쪽으로 간 사람들이다. 그렇다곤 해도 이란과 튀르크계의 혼혈이라는 말은 중국 사서에도 안 나오고 당사자인 튀르크나 페르시아 사서에도 안 나오는 주장이다.
'징기스칸은 이란과 튀르크계의 혼혈이다' 라는 이 해괴망측하기 짝이 없는 주장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짚어보려면... 일단 유라시아 유목민의 주된 활동 터전이었던 대초원(스텝 지대)의 위치부터 좀 생각해봐야 한다. 지도를 펴보면 알겠지만 스텝 지대는 동쪽으로는 만주에서 서쪽으로는 동유럽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의 북부를 관통하는 동서로 긴 띠 형태의 지역이다. 그리고 이 땅이 그렇게 광대한 만큼 이 땅에서 활동하던 유목민들은 뭉뚱그리자면 생활과 생산 양식, 문화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유목민' 으로 뭉뚱거릴 수 있지만 반대로 세분하자면 문화와 생활양식의 차이나 언어적 차이, 혈통과 부족의 구별등을 기준으로 수십갈래 이상으로 분류할 수 있는 집단이다.
여기서 해롤드 램의 주장이 해괴망측하다고밖에 평가받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일단 징기스칸은 튀르크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징기스칸이 (튀르크계 부족들과 자주 교류하였음에도) 튀르크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는 역사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튀르크 제족은 물론 혈통이나 부족집단, 주 활동 지역을 통해서도 구별할 수 있지만 북방 유목민 중에서 '튀르크 제족'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튀르크계 언어'의 사용여부였던 것이다. 즉 튀르크족이란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인데, 징기스칸은 튀르크어를 사용하지 않았다(할 줄 몰랐다.). 그렇다면 징기스칸은 1) 튀르크족이 아니었거나 2) 자기 부족 사람들과 언어(말)로 대화하지 못했을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것. 물론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당연히 징기스칸이 자기 부족 사람들과 말 대신 손짓발짓이나 텔레파시로 대화했을거라는 2번 분석보다는 튀르크계가 아니었을 거라는 1번 분석이 더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징기스칸이 이란계 혼혈이라는 주장은 징기스칸의 행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최소한의 관심조차도 없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주장이라는 점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위에 설명된 것처럼 스텝은 기본적으로 동서로 긴 형태의 지역이고, 따라서 이 지역을 지리적으로 구별하는 가장 대중적인 방법은 '스텝 동부' 와 '스텝 서부' 로 구별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부와 서부를 구별하는 인문사회학적 방법, 즉 어떤 세력이나 사람(의 활동 영역)이 스텝 동부에 속해있는지, 아니면 스텝 서부에 속해있는지를 구별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 사람이나 세력이 어떤 '제국'과 상호작용을 하는지를 보면 된다. 중국과의 상호작용이 강하면 동부, 이란(페르시아)와의 상호작용이 강하면 서부다[132]. 그리고 실제로 튀르크족은 튀르크사의 초기인 돌궐 시기에는 중국[133]과 강한 상호작용을 주고받았지만 이후 점차 서진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여왔던 것. 실제로 몽골족이었던 징기스칸의 일대기에서 등장하는 튀르크계 부족들의 경우도 주로 몽골족 영역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만약 징기스칸이 이란계 혼혈이었다면, 이는 징기스칸이 스텝 서부 출신이었다는 매우 강력한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칭기스칸은 금나라로부터 백부장의 칭호를 받고, 징기스칸의 정치적 협력자, 또는 라이벌이었던 옹 칸은 어떻게 금나라로부터 왕작을 받았으며 몽고 통일 이후에는 왜 하필 스텝 동부의 주요 제국이던 서하와 금나라 원정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일까?
물론 근친혼을 철저히 금기시하던 당대의 유목민들의 풍토상[134] 유목민 사회의 혼인은 대부분 다른 부족 사이에서 이루어졌고, 투르크족의 광대한 영향력 범위는 분명 몽골족의 영향 범위와도 서로 맞닿아 얽혀있었던 만큼 징기스칸의 혈통에 투르크계가 섞여있었다해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명백한 몽골계(그것도 칸의 자격이 있는 하얀 뼈 씨족) 출신이라고 족보까지 멀쩡히 남아있는 징기스칸의 혈통에서 몽골계를 뺀다는 것 자체가 해괴한 발상이고, 역사적 사료가 남아있기는 커녕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했을지의 개연성조차 한없이 의심스러운 '이란계 혈통'까지 집어넣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삼류 대체역사소설에서나 가능한, '일본에서 도망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몽골에 가서 징기스칸이 되었다' 는 뻘소리와 별다른 차이도 없는 수준의 망상인 것이다. 더욱 황당한 것은 이런 해롤드 램의 역사 인식은 말하자면 중세~근세 유럽인의 역사인식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 바로 아래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에서 징기스칸이 '우크라이나 남쪽에 살고 러시아와 싸운 걸로 유명했으며' '날 때부터 무슬림이었다' 고 묘사되었다고 나와있는데, 사실 당시의 서유럽인, 그것도 서유럽의 서쪽 끝인 영국인의 동양에 대한 인식상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에 가까웠다. 동양의 문화나 역사는커녕 지리, 공간적 상황에 대한 이해조차 부족했던 당시 서유럽 사람들의 관점에서 징기스칸이라고 하면 '먼 동쪽에서 온 정복자' 니까 그들이 그나마 잘 아는 가장 동쪽, 예를 들어 '이란' 이나 '우크라이나 동쪽' 정도에 대입하여 이해할 수 밖에 없었던 것. 문제는 20세기 초중반에 저술활동을 했던 해럴드 램의 동양 인식이 중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일 뿐이다. 중국어까지 능통했다고 알려진 인물로써 분명히 징기스칸의 정복활동이 중국에 가까운 스텝 동부에서 시작되었음을 알고 있던 인물이 뜬금없이 '징기스칸 이란계 혼혈설'을 내세운 것은 차라리 제국주의적 프로파간다라고 보는 쪽이 합리적으로 보일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것.
오래전부터 평이 엇갈려서 중동 쪽에선 아예 갈아먹을 악당으로 묘사되지만,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에서도 이름이 언급되는데 여기선 킹왕짱이란 식으로 묘사된다. 이름이 라틴어식인 Camius Khan의 변형이라 설명이 없으면 이게 누군지 알기 힘들지만... 연회를 여니까 아랍의 왕들이 알아서 선물을 보내올 정도로 묘사되지만 켄터베리 이야기가 원래 역사적 고증 같은 건 잘 안 따지는지라 칭기즈 칸이 우크라이나 남쪽에 살고 러시아와 싸운 걸로 유명한 걸로 나온다.[135] 거기다가 태어날 때부터 이슬람 교도였다고 나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인이라는 것 같은 소리다. 참고로 이 이야기가 나오는 건 수습 기사(Squire)의 이야기인데 아쉽게도 미완이다. 여하간 칭기즈 칸이 좋은 이미지로 나오는 드문 중세 유럽의 이야기일 것 같지만... 위에 나온 대로 중세 유럽에서 몽골을 기독교 나라로 멋대로 좋게 쓴 편이였다는 걸 생각하면 외외로 더 많을지도 모른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봐도 원나라에서 기독교에 흥미가 있다고 쓴 걸 봐도.
러시아에서도 악랄한 적이었다. 물론 그때의 러시아 지방은 작은 소공국으로 나뉘어 있던 지역이긴 했지만 이런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240년이나 지배한 몽골의 지배를 치욕으로 여기며 '타타르의 멍에' 라고 부르며 칭기즈 칸도 증오했다.[136] 러시아의 유명한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타타르가 지배한 것은 파괴밖에 남긴 게 없다고 글을 남길 정도였다. 실제로 몽골 이후 러시아는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서 굉장히 낙후된 상태로 사실상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137]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키예프와 그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상당히 상실하였으며, 이는 현대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별개의 정체성을 주장하며 친 서방 행보를 보이는 경우가 많은 데까지 이르고 있다. 즉,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키예프 공국 성립 이후 350년간 개발이 진행되었던 알토란 같은 영토를 몽골의 침입으로 인하여 상실하고, 춥고 척박한 동북쪽에서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250년 가까이 몽골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러시아는 심각한 문화적 퇴보를 겪었고, 그 사이 과거 대등한 상대였던 서유럽 국가들은 러시아를 아득히 추월하며 발전하였으며, 러시아는 18세기 ~ 19세기가 되어서야 이를 다시 어느정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애초에 러시아가 열강으로써 유럽사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 18세기 초중반, 표트르 1세의 개혁 이후임을 생각해 보면...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 피폐해진 국력을 수습하는 데 20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몽골의 침략과 정복, 지배가 열강 러시아의 탄생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굳이 찾아보자면 기존의 루시 공국들을 철저하게 파괴하여 모스크바 공국에 의한 재통합을 용이하게 만들었다는 정도인데, 그 철저한 파괴를 수습하고 회복하는 데 걸린 시간이 수백년에 이르는 상황에서 이것을 몽골의 덕을 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사실 몽골의 침략 이전 교통과 통신, 통치 기술의 미비로 인하여 루시 공국들은 도시 국가 연합체 비슷한 형태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종주국 격인 키예프 공국에 의한 재통합이 몇 차례 이루어졌음을 생각한다면 몽골의 파괴가 없었다고 한들 루시 공국들의 통합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의견 자체가 섣부른 면이 있다. 이를 두고 몽골 제국 덕분에 러시아가 통일되어 대제국이 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일제와 김일성 덕분에 한국이 신분제의 잔재를 털어내고 현대 국가로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139]
소련은 몽골에서 칭기즈 칸에 대한 흔적을 없애고자 악랄하게 노력했으나 몽골의 친소파 정치인 같은 허수아비들조차도 칭기즈 칸만은 위대하다고 여겨 목숨 바쳐가며[140] 칭기즈 칸의 흔적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소련이 무너지기 전에 민주화된 몽골은 아주 열심히 찬양하며 기리며 소련의 이런 뻘짓을 소심하게 복수했다고 비난한다. 다만 이런 소련의 행태를 꼭 몽골 제국의 지배에 대한 복수라고 봐야 할지는 의심스럽다. 꼭 몽골이 아니더라도 원래 소련은 특유의 세계 인민주의(?)로 자국이나 위성국에서 민족주의적 성향이 발호하는 것을 싫어했다. 몽골 이외의 위성 국가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던 것. 그 예로 스탈린만 해도 고향인 조지아에서 민족주의를 똑같이 처절하게 박살냈고 이전이나 이후에도 소련은 각 위성 국가 민족주의자 및 독립주의자는 학살로 싸그리 대했다.
터키에선 조금 다르다. 굴욕이라고 부르며 싫어하는 이도 있지만 튀르크인과 같은 유목민으로서 그 위치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싸우긴 했어도 이슬람이라고 탄압한 게 아니고 종교적으로 관용을 베푼 점이라든지 다른 유럽 기독교 나라보단 낫다는 평이다. 물론 터키에서도 기왕이면 같은 이슬람인 티무르 쪽을 좀 더 보기 좋게 여기기도 하고 여기에는 튀르크계 민족과 몽골계 민족이 유목하던 시절에 얽힐 대로 얽혀있어서 그렇긴 하지만. 일부 범투란주의자들은 칭기즈 칸을 터키 민족의 영웅이라고 보기도 한다. 애초에 터키인 남성 이름 중에서 상당히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이름 중 하나가 바로 젱기즈(Cengiz) 혹은 티무친(Timuçin)이다. 둘 다 당연히 칭기즈 칸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튀르크인과 몽골인은 원래 같은 생활 공간을 공유했고 오랜 유목 생활로 제법 많이 섞이기도 했다. 그리고 튀르크계인 러시아의 투바 공화국은 몽골의 영향을 걸쭉하게 받았다.
미국에서는 몽골 제국의 치세를 좋게 얘기해서 팍스 몽골리카를 팍스 아메리카나와 비교해서 자신들을 띄운다고 한다. 여하간 죽은 뒤에 이곳 저곳에서 정치적이나 쫀심 싸움에 쓰이는 신세가 되었다.
기독교를 특별히 싫어하지 않은 데다가 중립적으로 대하고 손자인 쿠빌라이 칸이 바티칸에 요청하여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한 사례 등 때문에 의외로 서방계 그리스도교에서는 큰 감정은 없는 편이다. 훈족의 아틸라마냥 유럽에 '하느님의 징벌' 급의 포스를 뽐내었지만, 정작 서유럽은 점령 당하지 않은 것도 있고. 물론 동방 교회 쪽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몽골에게 분명 타격을 크게 입었다.
이런 칭기즈 칸의 다양한 면모가 조명되고 있는 현재, 전반적으로 서양 쪽에서는 지도자로서는 최고(Best Leader)였지만 적으로서는 최악(Worst enemy)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4.5. 총평[편집]
칭기즈 칸이 고결한 지도자이자 훌륭한 통치자인지, 반대로 피에 굶주린 살인자인지는 당신이 누구에게 묻느냐에 달려 있다. 오늘날 몽골에서, 그는 그들이 좋아하는 나라의 아버지이고, 그의 많은 정치 개혁은 선구적이었다고 지지받고 있다. 그러나 이전에 점령지였던 이라크나 이란에서는 그를 학살적이고, 견디기 힘든 파괴와 피해를 일으킨 광적인 폭군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의 스토리가 위대함인지 잔인함인지에 대한 논쟁과 온갖 과장과 관계없이,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고대 세계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영향을 많이 끼친 지도자이며,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강하고 뚜렷하게 남아 있다.
칭기즈 칸의 등장과 몽골의 부흥은 세계사의 시각에서도 그야말로 혜성과 같았는데, 이를 좋게 말하자면 그만큼 몽골이란 나라가 큰 족적을 남겼다는 것을 뜻하며, 부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서양에서 재앙의 징조로 여겨졌던 혜성에 빗댈 수도 있다.
누군가는 동양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pre 폴 포트라고 할 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칭기즈 칸이지만, 적어도 세계 역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거인이라는 것 하나만큼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흔히 비교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수식하는 '설령 위대한 군주가 아니었다고 해도, 거대했던 군주'라는 칭호는 칭기즈 칸에게 좀 더 알맞다는 말이 많다.
5. 가족 관계[편집]
그는 본처 보르테 우진과의 사이에서 아들만 4명(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툴루이)으로 자식을 많이 얻었다. 그리고 이 4명의 자식들에게 몽골 풍습에 따라 유산을 갈라주다 보니 몽골 제국 내에는 필연적인 대립과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뭐 이걸 칭기즈 칸 본인 탓으로 돌리긴 그렇지만. 후궁도 많이 거느렸고 후궁 소생 아들, 딸들도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알려진 딸들은 이키레스족의 보투 쿠레겐과 결혼한 코친 베키, 오이라트족의 투랄치 쿠레겐과 결혼한 체체겐(치체겐), 칭기즈 칸의 딸 중 가장 지략적인 공주로 부친을 대신해 내정을 관리하고, 전장을 나간 적도 있다고 전해지며 웅쿠트족의 셴구이와 결혼한 알라가이 베키, 옹기라트 부족의 싱쿠 쿠레겐과 결혼한 투말룬, 역시 옹기라트 부족의 차우르 세겐과 결혼한 알탈룬이 있다.
실제 역사 기록 등을 볼 때 칭기즈 칸이 가장 총애했던 것은 조강지처 보르테였다. 처음 그녀가 메르키트 족에 납치당했을 때도 어머니 호에룬의 전 남편처럼 포기할 수도 있었지만 찾으러 나섰던 것도 그렇고 그가 대칸으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보르테는 많은 조언과 뒷바라지를 하며 도왔다. 기록에서도 그녀의 현명함을 찬양하는 표현이 많이 보인다. 게다가 결국 몽골 제국을 물려받은 건 보르테의 자식들이었다. 그녀는 4남 5녀를 낳아서 가장 많은 자식을 두었으며 그녀가 낳은 아들들만이 후계자로 간주되었고 다른 어머니를 둔 아들들은 애시당초 논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총애했다는 쿨란의 아들도 좋은 대우는 받았지만 후계자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 보르테가 지닌 정처 겸 제1황후[142]로서의 지위는 부동이었으며 후손들에게 대황후로서 극진한 존경을 받았다.
메르키트 족 출신인 제2황후 쿨란이 낳은 아들은 보르테가 낳은 아들들 다음으로 대우받았고 왕의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 칭기즈 칸이 정복 활동이 잦다보니 정복지에서 얻은 여자들이 3명 있는데 창작물 등에서는 2황후인 쿨란을 가장 총애했다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근데 이 쿨란은 칭기즈 칸이 가장 싫어했던 메르키트 부족 출신이었다(...)[143] 아마 이렇게 싫어하는 부족 출신임에도 2황후까지 올랐기에 칭기즈 칸이 총애한 것이라 해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다른 여성, 특히 최후의 원정인 서하 원정까지 같이 간 예수이 카툰 역시 원수인 타타르 부족 출신이었고 그녀도 칭기즈 칸에게 여러 충고를 했다는 점을 볼 때 추정의 근거로는 적당하지 않다. 그보다는 사흘 동안 쿨란을 보호하고 있던 수하를 신문한 후 별 일이 없었단 것을 확인한 후에야 분노를 가라앉혔다는 비사의 구절에서 유래한 것인 듯 하다. 참고로 중국으로 간 한국 여배우가 이 역할을 맡아서 뉴스에 오른 적이 있다.
제3황후는 예수이로 타타르부 출신이다. 칭기즈 칸이 타타르부를 공격하고 먼저 예수게를 아내로 삼았는데, 예수게[144]가 자신의 언니인 예수이가 더 아름답고 안주인에 어울린다고 하였다. 이에 칭기즈 칸은 예수이를 아내로 삼았으며, 이때 예수이의 전 남편을 처형하였다. 그녀는 칭기즈 칸에게 후계자를 선정할 것을 충고하였으며 서하 원정에도 따라가 원정 도중 칭기즈 칸이 사망하자 그 뒷정리를 맡았다.[145]
그리고 쿠빌라이 칸은 이 문제와 상관없이 자신의 아버지인 툴루이는 물론, 큰아버지들에게도 모두 묘호와 시호를 올려 황제로 추숭했다.
고려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가 칭기즈 칸의 증손녀이며,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는 칭기즈 칸의 5대손이다.[146]
6. 이야기거리[편집]
그의 무덤은 아직도 어디 있는지 미스터리. 여기에 대해 좀 으시시한 전설이 하나 있다. 칭기즈 칸의 무덤을 옮기는 과정에서 마주친 살아있는 모든 것을 몰살시켰다는 것이다. 이걸로도 모자라 칭기즈 칸의 무덤은 묻은 후 파헤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기병대가 수없이 짓밟아 평지로 만들어버린 상태라고... 당연히 그 밟은 말들과 기수들도 모두 몰살되었다 카더라. 부르한 산 참고. 물론 전설일 뿐 확실한 건 아니다.
또다른 이야기로는 '그냥 평범하게 몽골식 장례를 치렀다' 고 한다. 칭기스 칸이 생전에 사치를 싫어하고 유목민의 전통을 지킨 것을 상기하면 이쪽도 신빙성이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칭기즈 칸의 유해를 그의 충복이 매장한 것으로 되어 있다.[148]
일본이 중일전쟁 때 찾으려고 무진 애[149]를 썼지만 실패하고 대신 몽골의 고고학 기술만 어마어마하게 발전했다고 한다.
그의 친위대인 케식(한자로는 겁설, 怯薛)은 몽골 기병의 스테레오타입으로 유명하며, 몽골을 주제로 한 게임이나 매체에서는 심심치 않게 들어간다. 이 친위대는 원래 1203년 칭기즈 칸이 다른 부족의 자객을 막으려고 창설한 부대인데 원래 100명에서 시작했던 게 전성기까지 만 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자식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은 편이었는데 다른 것보다 주치가 문제였다.[150] 주치의 진짜 아버지가 누구냐는 문제로 2남인 차가타이와 갈등이 있었고 이런 와중에 오고타이가 칸이 되었다.
아시아의 약 8%(전 세계의 0.5%)의 남성 인구는 같은 Y염색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며 이들의 조상이 칭기즈 칸이라는 학설도 존재한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초반부에 영국인이면서 이 아저씨 후손인 사람이 나오는데 선량한 사람이지만 현관에 도끼를 장식하고 싶어한다든지, 가끔씩 피와 연기와 말울음 소리의 환상에 시달린다든지, 털모자에 대한 깊은 애착을 보인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등지에는 없다고. 있을 리가 없는 게 칭기즈 칸 생전에는 고려에 대한 침공은 없었고[151] 수부타이만 고려 근처에 가서 종이를 받아왔을 뿐이며 당연히 일본은 구경도 못했다. 고려와 몽골의 전쟁은 오고타이 칸 때 발발하였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꼽은 가장 중요한 정치인 50명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워싱턴 포스트의 예를 볼 때 좋은 얘기는 별로 안 썼을 듯하다.
다만 워낙 효과적으로 정복하고 부하들 관리도 잘한지라 비즈니스 계에선 꽤나 호의적으로 보는 듯하다. 칭기즈 칸의 경영을 배우자는 얘기는 동양 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간간이 나오는 얘기다.
여담으로, 칭기즈 칸의 후손을 황금씨족이라 부르기도 한다.
6.1. 환경전사 칭기즈 칸[편집]
이 때문에 문명들을 침공하고 파괴하여 탄소 배출량을 줄였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자, 농담으로 칭기즈 칸을 환경전사라 칭하기도 한다. 원 출처
7. 이름 표기[편집]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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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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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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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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Чингис хаа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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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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جنكيز خا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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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키즈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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چنگیز خا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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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기즈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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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ghis K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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겡기스 칸 혹은 젱기스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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Чингисха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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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기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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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hinghis K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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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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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giz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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젱기즈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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Çingiz x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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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기즈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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Чыңгызха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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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그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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Шыңғыс ха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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셩그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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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吉思汗(Chéngjísī Há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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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지쓰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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チンギス・カン[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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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기스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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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ành Cát Tư Hã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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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 깟 뜨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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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어록?[편집]
페르시안 사서 중
이 말은 대중 사이에서 코난의 영화화 버전에도 쓰일 정도로 Bad Ass하다고 여겨졌다.[154] 전문은 "사람의 쾌락은 배신자를 복종시키고 적을 모두 멸망시켜 그 소유물을 약탈하고 그들의 종복들에게 소리 높여 울게 하여 그 얼굴이 콧물과 눈물로 얼룩지게 하고 우스꽝스럽고 우둔한 그들의 말에 걸터앉으며 그들 처첩의 배와 배꼽을 침대나 이부자리로 삼고 그 장밋빛 뺨을 즐기며 입 맞추고 그 붉은 입술을 빠는 데 있다"로, 페르시아의 사료에서 나온 말이며 잭 웨더포드 같은 칭기스 칸 옹호파와 일각에선 페르시아의 기준에서 나온 자료이니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 나오고 있으며,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정복당한 나라들이 그를 얼마나 무자비한 사람으로 바라보았는지 잘 알려주는 말이다.
"하늘의 도움으로 너희를 위해 커다란 나라를 정복했다. 하지만 세계를 정복하기에 내 삶은 너무 짧았다. 그 일은 너희에게 달린 일이다."
이 말은 죽기 전 아들에게 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다른 사서에서는 죽기 전에 금나라 정복을 완수할 작전을 얘기하고 죽었다고 한다.
"나는 수많은 잔혹한 행위를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내가 한 일이 옳은지도 모르고 행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평범한 사람으로 평범한 게르(Ger, 몽골식 천막)에서 살다 평범하게 늙어 죽고 싶다."
"나의 자손들은 훌륭한 옷을 입을 테지, 맛있는 것을 먹고 준마를 몰고 아름다운 계집을 안을 테지, 그 모든 것이 누구의 덕분인지도 모르는 채."[155]
죽기 전에 말했다는 이 말 역시 위에서 나온 페르시아 사서(일 칸국의 재상이었던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서 나온 말로 전문은 "우리가 죽은 뒤 내 부족의 자손이 비단 바탕에 호화찬란하게 금실로 짠 옷을 몸에 걸치고 맛있는 안주와 좋은 술을 제멋대로 마시며 좋은 말을 타고 미녀를 품에 안고도 그것을 가져다준 것이 그 아버지와 제 형임을 말하지 않거나 우리와 그 위대한 날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 외에 부하라 점령 후 지배 계층에게 설교를 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이건 주와이니의 사서에서만 나오는 말이다. 내용은 신이 그들에게 자신과 같은 재앙을 내린 것은 그들의 왕이 너무나도 부도덕하고 음란했기 때문에 벌을 내리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칭기즈 칸 이야기는 이런저런 설이 막 엇갈리며 모든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진위 여부의 논란이 있다.
8.1. 인터넷발 칭기즈 칸 어록[편집]
“한국의 젊은이들아!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푸른 군대의 병사들아.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어려서는 이복형제와 자랐고, 커서는 사촌들의 시기에 두려워했다. 가난하다고 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내가 살던 마을에서는 시든 나무마다 시린내, 누린 나무마다 누린내가 났다. 나는 먹을 것을 위해 수많은 전쟁을 벌였다. 목숨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유일한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하지 마라.
나는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는 곳, 꼬리 말고는 채찍도 없는 곳에서 자랐다. 내가 세계를 정복하는데 동원한 몽골인은 병사로는 10만, 백성으로는 200만도 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누볐고, 그들을 위해 의리를 지켰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땡볕이 내리쬐는 더운 여름날 양털 속에 하루 종일 숨어 땀을 비오듯 흘렸다.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고, 가슴에 화살을 맞고 꼬리가 빠져라 도망친 적도 있었다. 나는 전쟁을 할 때는 언제나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이겼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극도의 절망감과 공포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아는가? 나는 사랑하는 아내가 납치되었을 때도, 아내가 남의 자식을 낳았을 때도 눈을 감지 않았다. 숨죽이는 분노가 더 무섭다는 것을 적들은 알지 못했다.
군사 100명으로 적군 10000명을 마주칠 때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죽기 전에 먼저 죽는 사람을 경멸했다. 숨을 쉴 수 있는 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개척해나가고 있었다. 적은, 밖이 아닌 내 안에 존재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깡그리 쓸어 버렸다. 나 자신을 극복하자 나는 칭기스칸이 되었다.”
『칭기스칸의 리더십 혁명』. 도입부.
9. 각종 매체에서[편집]
9.1. 역사서, 소설, 만화[편집]
원조 비사에서의 모습은 화도 잘 내지만 주변 사람의 조언을 듣고 진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기할 만한 점은 칭기즈 칸 본인이 특별한 무력[156]이나 대활약을 벌이는 부분은 많지 않다는 것. 오히려 사준사구의 재치나 용맹을 보여주는 일화가 많다.
미국의 밀리터리 잡지인 암체어에서 역사상 최고의 명장들 순위를 정한 적이 있는데,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여담으로 부하 장수인 수부타이와 제베가 각각 6위와 37위다. 이들을 상대한 적들에게 명복을 빌 뿐이다.
더글러스 애덤스가 쓴 단편 'The Private Life of Genghis Khan' 에선 서구적 스테레오 타입에 맞춰 잔인한 정복자로 나오는데 정복 사업에 지쳐 의욕을 잃었다가 갑툭튀한 외계인이 그를 욕하자 열 받아서 아시아를 불태우는 걸 까먹고 유럽으로 쳐들어 가버렸다고 나온다.
사조영웅전에도 등장한다. 대체적인 행보는 역사 그대로지만, 가상의 주인공 곽정과 얽히는 관계로 어느 정도 픽션이 가미되어서 등장한다. 막내딸 화정을 곽정에게 내려 부마로 삼는다거나, 곽정을 회유해서 송나라 공격의 선봉으로 삼고자 하는 등. 사실 매를 쏜 영웅의 이야기라는 작품의 타이틀이 상징하는 또 다른 인물로, 만년에 곽정과 나누는 영웅에 대한 짤막한 담론이 이 작품의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등장 비중보다 훨씬 높은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다. 곽정이 '영웅이란 타의 모범이 되는 의로운 행위를 하고 백성을 아껴야 한다'고 말하자 칭기즈 칸은 '내가 무수히 많은 적수를 꺾어놓고 영토를 확장했는데도 영웅이 되지 못한단 말이냐?' 라고 반문하지만, 임종 시에는 '영웅, 영웅....'을 유언처럼 읊조리고 죽어가는 것으로 보아 곽정의 용기 있는 발언에 평생을 돌아보며 영웅의 의미를 고심한 듯하다.
악비를 주인공으로 하는 청나라 때의 중국 소설인 설악전전에서도 뜬금없이 등장한다. 금나라가 북송을 침공하는 전쟁에 참가했으며 한세충의 아들을 몰아붙이다 한세충이 난입하면서 머리에 칼을 맞고 죽는...가 싶더니 투구에서 자동으로 쉴드가 쳐지면서 막아내고 테무진은 깜짝 놀라서 도망간다. 그런데 그 원인이 가관인데 훗날 태어날 그의 아들인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 황제가 될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화 등의 매체에서는 권왕이나 한마 유지로 같은 괴수 같은 이미지로 등장하는 경우가 다수.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에서는 칭기즈 칸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답게 당연히 주인공.
슈토헬 속에서는 최종보스로 등장한다.
마블 코믹스 시리즈에선 아이언맨의 숙적인 만다린의 조상인 걸로 설정되어 있으며 아틀라스란 조직은 칭기즈 칸의 후예를 리더로 하여 세계를 정복하려는 조직이다.
DC 코믹스에서는 불멸자 반달 새비지가 과거 칭기즈 칸의 신분으로 활동했다. 애니메이션 영 저스티스 세계관에서는 칭기즈 칸 시절에 아포칼립스의 침공에 맞서 싸워 협정을 맺은 바 있다.
만화책 스타크래프트 에쒸비의 주인공 이름이 태무진이다. 거기서는 고딩 주제에 세계 대회 우승한다. 정복왕의 피를 이어받아 세계 대회를 정복.
이 만화에서 볼 수 있듯이 서양인 대부분은 칭기즈 칸이 사람을 많이 죽인 야만인 정도로만 알고 있다. 그리고 유능한 군주였단 걸 알면 학살은 뒷전이 된다는 것도 꼬집고 있다.
김은정(만화가)의 만화 아스피린(만화)에서는 사방신 중 한명으로 등장한다. 아스피린에서는 사방신 중 하나인 주작으로 묘사되며 작중에서는 본명인 테무진으로만 불린다. 생김새는 붉은 머리를 한 미청년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름만 실존 인물에서 따왔지 실상은 그저 찌질이로 사방신 중에서도 가장 약하다고 언급된다. 그러면서도 성격은 무척 더럽고 잔혹하며 거기다 바보다.[157] 인간과 관계를 맺어 낳은 아들 주치가 있으나 그 아들 역시 아버지의 성격을 물려받아 잔인하기 짝이 없는데 자기 입으로 말하길 자신을 낳아준 인간 어머니까지 자기 손으로 없애버렸다. 온달을 죽이려 할 때 엄마를 죽였을 때는 금방 죽어버려서 재미가 없었는데 넌 좀 즐겁게 해주려나? 하는 막장 패륜아. 다른 사방신들과 함께 하백에 의해 봉인구에 봉인되어 있었으나 봉인구가 깨져 간신히 세상 밖으로 탈출하서는 동굴에 은신하여 힘을 보충하면서도 같은 사방신 중 한 명인 초류향과 무언가 음모를 짜고 있는 것 같다. 온달이 자신을 가두었던 하백의 아들임을 눈치채고는 죽여버리려고 하였고 아돌프가 이를 저지하자 강력한 마력으로 기절시켜서 초류향에게 보내버렸다. 그러나 곧 해모수가 들이닥치자 혈투 끝에 밀리기 시작하다 주치와 함께 후퇴를 한다.[158] 해모수가 하백과의 계약으로 인해 본래 마력과 전투 능력의 상당 부분을 봉인한 상태로 쓰지 않는다는 걸 감안해보면 최약체가 확실하다. 당장에 해모수의 반응부터 보면 알 수 있는 게 메타트론이 뜨면 위험하다고 튈 준비부터 하는 해모수가 테무진의 경우에는 그냥 허접이라면서 바로 맞짱 떴다.
딴지일보의 기획특집 테무진to the칸에 등장. 딴지 일보에 2년여간 연재된 24편 분량의 징기스칸 일대기. 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상당히 실감 나고 딴지 일보 특유의 찰진 묘사로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젊은 시절에 징기스칸이 목숨을 부지하며 살다가 칸으로 오르기까지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가며 상황을 분석한 작품으로 꽤 상세하고 날카롭다.
2017년 5월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제목은 '테무진 to the 칸-테무진, 실패를 딛고 초원을 평정하다'. 딴지일보 특유의 적나라한 표현은 부드럽게 다듬어졌지만 상세함과 날카로움은 그대로다.
미스터 피바디와 셔먼쇼에서 악역 3인방 중 한 명으로 등장 은행[159]을 털려고 하다 피바디에게 잡힌다. 성격이 순진하고 온순하고 무식하다
9.2. 영화, TV[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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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아누 리브스가 이름 없던 시절 나온 1989년 영화 엑설런트 어드벤쳐에도 나온다. 101마리 달마시안 영화를 감독한 스테판 헤렉이 감독하여 1000만 달러로 만들어 4천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흥행했다. 국내에서도 개봉하고 KBS-2 일요 특선 외화로 더빙 방영한 이 영화는 타임머신을 타고 잔 다르크, 루트비히 판 베토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에이브러햄 링컨 같은 역사적 위인을 현대로 데리고 오면서 벌어지는 코미디 영화인데, 다른 위인들도 모두 희화화되었다지만 칭기즈 칸은 인종차별주의적 시각 때문에 가장 무식하게 나온다. 대사조차 없이 괴성만 질러대고 괴력으로 나오는게 영락없는 대중매체에 묘사되는 원시인 수준이다. 칭기스 칸은 항우나 리처드 1세와는 달리 직접 전선에서 용력을 떨치는 유형의 지휘관이 아니고 정치적인 재능까지 갖춘 전형적인 제왕의 모습을 지닌 인물이었음에도 서양인의 몽골인에 대한 그릇된 관념이 여과없이 반영된 결과라 볼 수 있다.
한번 리처드 1세가 이따위로 표현될 경우 반응이 어떠할지 생각해보라...사용 무기도 당시 몽골군이 사용한 곡도나 철퇴도 아니고 원시인이 쓸만한 몽둥이일 정도다. 빌과 테드가 과거로 가서 보니 야만인처럼 여자랑 헤롱거리고 있었고 빌과 테드가 트윙키로 유인해서 데려간다. 게다가 현대에 와서 화장실 청소시키는데 변기물을 마시기까지 한다. 그렇긴 해도 칭기즈 칸만 망가뜨린 게 아니라 다른 위인들도 현대로 와서 망가진다. 나폴레옹은 아이스크림만 신나라 먹고, 수영장에서 미끄럼틀에 환장하여 계속 그것만 타며, 주인공 둘의 사촌 꼬마에게 저런 멍청이가 나폴레옹이라고? 말도 안돼 소리를 대놓고 듣는다. 잔 다르크는 에어로빅 강사, 빌리 더 키드는 백화점 안에서 총질이나 하고, 프로이트는 현대인들에게 정신 분리학 연설을 하지만 지나가던 사람들이 미친 놈 쳐다보듯 하며.... 미국에서 존경받는 링컨조차도 연설하는데 사람들이 당연히 웬 놈이 링컨 코스프레 하네라는 투로 웃는다. 그나마 베토벤 홀로 전자 키보드 연주를 신나게 하여 사람들에게 박수 갈채를 받으며 망가지지 않을뿐. 여기서 칭기즈 칸 배역을 맡은 배우인 알 리옹(Al Leong)은 중국계 미국 배우로 다이 하드에서 초콜릿을 먹던 테러범으로 나왔고 리썰 웨폰, 래피드 파이어, 전격 Z 작전, 환상특급 등 꽤 많은 영화에서 조역 및 악역을 연기하던 배우이다. 참고로 이 영화에서 테드 역으로 나오는 키아누 리브스와 같이 빌로 나오는 또다른 주인공 알렉스 윈터는 나중에 프릭스 대모험을 감독, 주연하게 된다. 1991년에 두 주연이 그대로 나온 속편이 나왔으나 기대 이하 흥행으로 사라졌다. 속편은 타임머신을 타긴 하지만 700년 뒤 미래에서 온 가짜 두 주인공(로봇이다.)이 두 주인공을 죽이려 들고 뭐하고 코미디판 터미네이터 같이 기획되었지만 문제는 그리 웃기지 않고 전편보다 훨씬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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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자(The Conqueror) : 1956년 존 웨인 주연의 미국 영화. 국내에서도 1982년 11월 27일 주말의 명화 시간에 더빙 방영했고 여러번 공중파 방영 및 2000년대에도 케이블 영화 방송으로 자막판이 방영했다. 화이트워싱의 전형적인 예이다. 게다가 비평도 엄청난 혹평을 받았는데, 어찌나 혹평이 자자한지 요즘 개봉했으면 닦이 소리를 충분히 들을 수 있을 정도다. 일단 포스터부터 고증은 개나 줘 버리는 복장과 배경에, 주연 배우가 남 녀 모두 미국인이고, 여주인공을 맡은 수잔 헤이워드는 그냥 서양인 캐릭터이니 우리 나라 사람이 보기엔 감정 이입이 될 리가 없다. http://www.telegraph.co.uk/film/the-conqueror/making-of-movie-that-killed-john-wayne/ 이 영화를 핵실험 했던 데서 찍어서 존 웨인이 암에 걸리게 되었다는 설이 나온다.
관객을 암 걸리게 하는 정도를 넘어서 연기자, 촬영 스태프까지 암 걸리게 한 영화.여담인데 리 밴클리프가 조역으로 나온 바 있다. 600만 달러로 만들어져 9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흥행도 실패.
9.3. 게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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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에도 온라인 카드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9 시절이나, 전 카드 무장 중에서 제일 높다(278).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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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신성 엔터테이먼트에서 유통한 동명의 게임이 존재한다. RTS 방식에 영웅 및 유닛들이 스킬을 사용하는 방식이나 게임의 한글화가 무척이나 이상하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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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지 오브 엠파이어2 : 에이지 오브 킹에서는 플레이어가 그의 부장으로 행동한다. 1탄에선 오프닝 때 잠깐 등장하고 만다. 영웅 중에선 이순신(거북선)이나 윌리엄 월레스(챔피언)처럼 매우 강한데 유닛이 만구다이고 연사력이 좀 빠르고 체력이 티무르에 낮지만 250에 공방은 티무르보다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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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 마이어의 문명에선 전통적으로 몽골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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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시나리오를 맞추면 곧바로 플레이할 수 있으며 1187년 시나리오에서는 유목군주의 가신이지만 시나리오 날짜를 돌리다 보면 독립 세력을 갖추며 1206년에는 몽골 제국을 세운 상태에서 시작한다. 1220년 시나리오에서 Ironman 모드를 켠 몽골 제국으로 플레이하면 유럽 대륙을 점령하는 도전 과제를 진행할 수 있고 징기스칸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게임 시작 전에 몽골 침공 설정이 켜진 상태에서[166] 때가 되면 이벤트로 컴퓨터 징기스칸이 등장해서 몽골을 통일하고 중앙아시아를 침공한다. 중국도 국가 상태에 몽골 침공이 뜰 때가 있는데 침공이 성공하면 왕조가 원나라로 바뀐다. 또한 Horse Lord DLC부터 보르지긴 가문의 선조 족보가 모두 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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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나 미디블2: 토탈 워 등 중세 유럽을 다룬 역사 게임에서도 항상 개근한다. 나중으로 갈수록 플레이어 세력이 커져서 루즈해지기 쉬운 게임이니만큼 몽골 세력은 끝판왕 기믹을 가지고 등장한다. 미디블 토탈워 시리즈에서도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지만 이쪽은 오히려 티무르가 끝판왕이라 조금 취급이 안 좋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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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블2: 토탈 워에서 직접 등장하는 것 같진 않지만 일단 게임에서 몽골군이 쳐들어올 때면 칭기즈 칸이 한창 활약할 때라 간혹 몽골군의 힘에 치를 떠는 사람들은 "칭기즈 칸은 존재가 사기" 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모든 몽골 유닛들에겐 "적을 겁에 질리게 한다" 라는 특성이 붙어있다. 따라서 공성전 말고 어지간한 부대 끌고 간 야전은 압도적 수로 밀어붙여도 모랄빵 맞고 끔찍한 사상자를 내게 된다. # 더불어 몽골은 자연 재해라는 말도. 몽골 때문에 나오는 인명 피해와 자금 피해가 흑사병보다 더할 정도이니 틀린 말도 아니다(...)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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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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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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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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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2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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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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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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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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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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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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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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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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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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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식 씨름, 레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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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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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센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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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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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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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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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식 격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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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칭기즈 칸의 일본어 표기는 당시 기준으로 チンギス・ハーン(칭기스 하안)[168]이지만 본 작품에서는 ジンギスカン(징기스칸)으로 표기된다. 원본과 차이를 주기 위해서 이름을 변형시켰는데, 한국 입장에서는 원본 이름과 더 가까워져버린 아이러니한 케이스.
검은색 갑주와 투구를 쓰고 덥수룩한 회색 수염을 기른 거한으로 묘사되는데 전체적인 이미지는 우리가 상상하는 칭기즈 칸과는 큰 괴리가 있다.
캐릭터 자체는 전형적인 파워형 캐릭터로 큰 덩치에 강하게 밀어붙이는 기술이 발달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그냥 쓸만한 성능.
월드 히어로즈 퍼펙트 엔딩에선 하렘 엔딩. 근데 여자들이 있으니까 왠지 쑥스럽다고 한다. 역사상의 칭기즈 칸을 생각하면 개그 같지만 사실 부하들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여자를 취하지 않은 편이고 그나마도 대부분이 정략성이라 의외로 들어맞는다. 그 외에 다른 편에서 엔딩을 보면 강한 남자와 결혼하길 원하는(...) 잔 다르크가 최종 승자인 칭기즈 칸의 강함에 반해서 청혼하며 달라붙자 식겁하며 달아나기도 했다.
기술을 찾아보면 패극도라는 돌진기가 주요 기술인데 카드 파이터즈에서도 랜덤으로 상대 캐릭터 1인에게 데미지를 주는 나름 쓸모 있는 카드로 되어 있다. 다이나마이트는 헤비 D!가 쓰는 솔 플라워와 비슷한 형태의 기술이며 JET 버전에서는 다운 포즈가 달라지는 속성이 붙어있다. 의외로 삼각점프가 가능하다.
9.4. 그 외 매체[편집]
여기서는 칭기즈 칸은 북미권에서 알려져있는 그의 성격인 무자비, 이기적인 이라는 뜻의 단어로 사용된다.
해당 항목 참조.
몽골제국과 원나라 |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을 선택하자면 칭기즈 칸이 1206년에 세운 몽골 제국이다. ![]() 칭기즈 칸
![]() 칭기즈 칸의 역사와 영토를 나타내고 있는 지도로 프랑스 역사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동해를 한국해(Mer De Coree)로 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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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사
징기스칸이 나타나기전 북아시아초원(현재 지명 몽골 - 바이칼호 초원까지) 역사를 간단히 설명할께요.
흉노(투르크족 + 몽골족 연합국가) -> 선비/오환(동이족) -> 유연(투르크 + 동이족) -> 돌궐(투르크족) -> 위그르(투르크계열) -> 거란(동이족) -> 금(동이족) -> 몽골
북아시아 초원지역에서 제국을 건설했던 국가순은 위와 같습니다.
몽골이란 단어는 징기스칸 이후에 널리 사용된 단어인데
오늘날 가장 넓은의미로는 황인종 모두를 가르키는 말로도 쓰이고
중간정도 넓은 의미로는 북아시아 지역에 살고 있는 유목민족중에 황인종 전체를 통칭하는 단어로도 쓰이고
가장 좁은 의미로는 징기스칸 후손민족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현재 쓰이는 가장 좁은 의미의 몽골족이라고 해도 징기스칸 당시 몽골족 보다 수십배 많은 여러 부족를 통합하여 부르는 말입니다.
즉 첫번째 흉노가 투르크 + 몽골족 연합국가 라는 말에서 몽골족은 중간정도 넓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님이 질문한 몽골족에 대한 질문은 징기스칸 직계선조의 몽골족이 누구인지를 물어 보는 말로 생각되어 지는데,....
징기스칸의 선조 몽골족은 위그르 또는 유연 전성기까지는 어디서 살았는지 어떤 역사과정을 겪었는지 정확하게 알수 없습니다.
징기스칸 직계선조 몽골족의 존재는 거란(요나라) 시절 부터 윤곽을 볼수 있습니다.
거란당시 몽골초원지역은 나이만, 게레이트족, 타타르족, 몽골족, 키르기스, 오이라트, 웅기라트족, 메르키트족, ................. 등이 주요부족이었는데 여기서 몽골족은 안흥령산맥(만주경계선)에서부터 현재지명 몽골 북동쪽에 거주하던 부족입니다.
징기스칸이 여러 주변지역 민족들을 다 점복해서 현재는 나이만(투르크족), 오이라트(준가르), 키르기스를 뺀 모든 부족이 다 현재의 몽골사람이 되었다고 보면됩니다. 심지어 우리가 많이 배운 거란도 현재는 몽골족이 되었다고 봐도 됩니다.
흠 쓰다 보니 점점 더 어려워 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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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쉽게 쓰자면 몽골에서 북동쪽에 있는 작은 부족 몽골이 징기스칸때 북아시아 초원 전체를 통일하면서 현재는 여러 군소부족들이 몽골족이 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
징기스칸은 몽골족 부족장 예수게이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타타르족에게 죽고 고아로 성장한 (징기스칸 성장시는 인구가 아주 적은 씨족수준) 다음 당시 몽골초원의 지배자 게레이트족 왕칸과 도움을 받다가 세력을 키우고(몽골족을 대표하는 자리에 오른다음) 아버지의 원수 타타르족을 멸족시키고 점차로 몽골의 모든 부족(게레이트, 웅기라트, 나이만등)을 다 정복하여 쿠릴타이회의에서 칸의 지위에 오릅니다.
몽골초원을 모두 정복한 다음 금나라(북중국)에 타격을 입히고 전쟁중간에 호레즘(중앙아시아에서 이란)를 멸망시키고 인접지역(카라키타이, 킵착, 서하등) 모두를 정복하고 사냥중 말에서 낙마해서 죽게 됩니다.
동방의 영웅 칭기즈칸 1.칭기즈칸의 생애와 업적... 칭기즈칸의 본명은 테무친으로 1155년에 오논강 상부지역에서 테어났다. 하지만 1162,1167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그의 아버지 에수게이가 타타르의 왕인 테무친을 잡았을 때 태어나서 이름을 테무친으로 삼았다. 테무친은 태어날 때 한손에 핏덩어리를 쥐고 있었기에 주위사람들이 몽골을 통일할 인물로 점지하였다. 원래 영웅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고 시련과 고난이 있기 마련이듯 테무친 역시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아버지 에수게이가 타타르에게 독살 당한 것이다 그 후 그의 아버지를 따르던 물들은 키릴투크를 따라나서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 테무친의 나이가 너무 어려 부족민들을 잡지 못하고 오히려 어머니 호엘룬과 그의 동생들만 데리고 도망을 쳤다. 그 후 호엘룬은 메르키트의 칠르게 보코의 아내였다 에수게이에게 납치되어 아내가 되었었는데 그걸 빌미로 그의 이복동생들은 테무친을 메르키트 자식이라고 놀려 화가난 테무친은 이복동생중 한명을 활로 쏘아 죽인다.그 후 테무친은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 타이추트족(키릴투크의 부족)에게 잡혀 죽을 위기에 쳐해 있었다. 그 때 키릴투크의 시종인 소르간 시라의 도움으로 구사 일생되어 도망을 쳤다. 그 후 몽고제국의 최고의 가신이 되는 보루츠와 안다(의형제)가 되고 아내 보르테를 맞아들인다.. 하지만 메르키트부족이 쳐들어와 보르테를 납치해 가버린다. 이에 테무친은 절망하는데 호엘룬이 에수게이의 안다였던 커레이트족의 토릴칸을 찾아가라 조언한다. 토릴칸을 찾아간 테무친은 토릴칸이 자무카를 끌어 들인다면 군사 4만을 내어 준다고 하자 순순히 허락한다. 그 이유는 테무친과 자무카는 3번이나 안다의 연을 맺은 인물이 었기 때문이다. 자무카를 찾아간 테무친은 그의 부족 잘라이르의 진영을 보고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자무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자 자무카도 순순히 그의 부탁을 들어 정병2만을 보내어 테무친을 도와 준다. 약6만대군을 이끌고 메르키트를 치니 메르키트는 버티지 못하고 대패하였고 테무친은 보르테를 구한다. 하지만 또다른 가족간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되고 만다. 보르테가 임신을 한 것이다.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게 아버지가 누군지 모를 상황이 되어버렸다. 어째든 보르테를 구한 테무친은 자신의 부족민을 이끌고 자무카에게로가 그에게 의탁한다. 그리고 상인들을 이용해 자신에게 항복하면 배신자도 받아준다고 한다. 그러자 많은 부족민들이 그의 그늘로 들어왔고 자무카의 부족민 부다 테무친의 부족민이 더 많은 실정이었다. 그 에 자무카는 테무친에게 자신을 떠나 독립해라 하고 테무친은 부족민을 이끌고 자무카를 떠난다. 이에 테무친의 부족에서는 테무친을 칸으로 추대한다. 그리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칭기즈칸에 오른다. 이에 자무카는 테무친이 자신보다 먼저 칸에 자리에 오른 것을 질투 하여 13개 부족을 연합하여 테무친을 쳐 승리한다. 세월이 흘러 테무친의 부족은 다시 부흥하여 자무카 테무친 토릴칸 3개 부족으로 몽골 고원을 통치하는 구조가 되었다. 하지만 자무카 동생의 죽음으로 또다시12개 부족을 연합 테무친을 친다 이번에는 테무친이 토릴칸과 연합하여 오히려 승리 자무카는 패망하여 토릴칸에게 의탁한다. 나머지 11개 부족도 거의 멸망하다시피 하여 고원은 테무친과 토릴칸 2개의 강력한 부족만이 남았다. 하지만 토릴칸은 늙었기 때문에 테무친에게 모든 것을 넘겨 주려 하였지만 그의 아들 쉠김이 반대 테무친을 기습하여 승기를 잡아 테무친은 커레이트 족에게 대패하여 동쪽으로 후퇴를 한다. 하지만 또 다시 기운을 차린 테무친은 커레이트를 공격 커레이트를 멸망시키고 쉠김을 죽인다. 자무카는 나이만에게 의탁하고 토릴칸은 나이만에게 죽는다. 테무친은 고원을 통일하기로 마음먹고 나이만을 치기 위하여 군사를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만은 서고원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군사는 50만에 육박했는데 어려운 상대였다. 그러나 나이만의 왕인 타양칸은 왕비인 퀴베르에게 놀아나는 존재임을 안 테무친은 10만대군을 일으켜 나이만을 공략 지도부의 무능력으로 50만대군은 힘함번 쓰보지 못하고 멸망하고 만다. 그후 테무친은 역사상 처음으로 고원을 통일하게 되고 쿠릴타이(고원 최대의 회의 기구)를 개죄 대칸의 자리에 오른다. 이 때 삼림족이 반란을 하고 3번의 원정으로 힘들게 진압하게된다. 그 후 금나라 황제인 장종이 죽자 칭기즈칸은 금을 치기위해 군사를 모으고 후방의 안전과 금의 반격을 시험하기 위해 하나라(서하)를 공략 항복을 받아낸다. 그러자 그 서쪽에 있던 위그르가 복속을 자청하고 항복한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10만 대군을 이끌고 서하를 우회하여 금나라를 공격한다. 그 거대하고 강하던 금나라도 만리장성이 돌파되자마자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100년간 한족에 동화되어 힘을 잃은 것은 물론 부패 한인들의 불만 지도부의 분열등이 그 원인이었다(모든 북망민족이 망하게 된 원인) 칭기즈칸의 기병대는 순식간의 금나라의 대부분의 영토를 정복 수도를 둘러싸고 금나라는 항복하게 된다. 이에 칭기즈칸은 만족하고 군대를 고원으로 물린다. 하지만 금나라는 수도를 버리고 남하 변경으로 천도한다. 이에 칭기즈칸은 군대를 보내 도발한다. 그 때 호라즘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안 칭기즈칸은 그나라에 600명의 상인사신단을 보내 교역하고자 하였으나 호라즘의 이날축 성주가600명의 상인들은 모조리 죽여버린다. 이에 칭기즈칸은 분노하고 군대를 이끌로 호라즘을 치게된다. 호라즘은 아랍인들의 나라로 그 왕을 술탄이라고 칭하고 신을 알라라 칭하는 중아아시아의 최대 강국이었다. 하지만 그 왕인 술탄이 무능력하고 겁이 많아 전쟁은 칭기즈칸의 몽고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게되었다. 이에 수도와 최고의 도시가 함략되자 술탄은 모든 것을 버리고 도주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죽는다. 하지만 칭기즈칸의 군대도 피해가 켰다. 징기즈칸이 가장 아끼던 손자와 사위가 죽고 장자 주치가 호라즘의 영토 정복과정에서 징기즈칸에게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칭기즈칸이 다음 대칸의 후계자로 주치가 아닌 오고타이를 지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징기즈칸은 주치에게 계속하여 소환명령을 내리지만 주치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뒤 주치는 나이만과 메르키트의 잔당이 쏜 독화살을 맞고 킵차크고원에서 죽어 징기즈칸에게로 돌어갔다. 칭기즈칸은 분노하고 고통스러워하다 귀환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가장 아끼던 맹장 제베(뛰어난 활솜씨를 가진 인물로 고려인으로 추정되었다. 원래 칭기즈칸의 적이었다 칭기즈칸의 빰에 독화살을 쏘아 인연을 맺은 인물로 칭기즈칸에게 귀순한후 최고의 용맹과 지략의로 칭기즈칸을 보좌한다. 고려을 공략하다 김윤후에게 죽은 살리타이가 이때 제베의 부장이었다)를 잃게 된다. 그러자 칭기즈칸 자신도 죽음을 생각하게된다. 그때 서하가 배신하였다는 보고를 들은 칭기즈칸은 고령으로 전쟁에 친정하였다 그러나 원정하던 도중 낙마로 부상을 당하고 유언으로 제국을 나누어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게된다. 첫째 주치가에게는 킵차크고원을 포함한 알타이 서쪽을 지배하게하고 국호는 킵차크한국이라하였다. 둘째 차가타이가에게는 남부 호라즘과 위그르 서요를 지배하게 하고 차가타이한국으로 명명하였다. 셋째 오고타이가에게는 나이만의 영지만 알타이 서쪽의 기슭 즉 중가리아 대평원을 주고 오고타이란국이라 이름지었고 마지막으로 막내 톨루이가에게는 트란속사니아 남부와 서쪽의 호라산 일대를 주어 일한국으로 명명 했다. 그 후 칭기즈칸은 죽어 브르칸산으로 그의 시체를 옮겼다. 하지만 정말 부르칸산에 묻혔는지는 모른다. 2.칭키즈칸의 몽고 제국 칭기즈칸의 몽고제국의 정식 명칭은 에케 몽골 울르스 이고 수도는 울란바토르 황제의 칭호는 대칸 혹은 카한이라고 했으며 대칸에 오르는 길은 후계자로 점찍어서 오르는 것이 아니라 쿠릴타이라는 몽골 고원의 관습에 의해 만장일치제로 대칸이 된다. 몽고 제국의 영토는 인도, 고려, 일본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 영토 남시베리아. 터키등 동 유럽 까지였다. 그 큰 영토를 다스리는 방법은 현지인이 다스리고 다루가치나 자루가치등은 보내 감시 간섭 명령등을 하였다. 그리고 역참제도를 마련 정복지의 정보를 신속하게 정단 보고 받았다. 법은 대야사라는 법을 사용 하였는데 이 대야사에는 전쟁에 관한 법과 여자에 관한 법 물에 관한법 등이 많이 계시되어 있다. 그리고 군대제도는 호장을 사용하였다 (십호장, 백호장, 천호장, 만호장) 전쟁의 군대 대부분은 기마대로서 이는 칭기즈칸이 대 제국을 이룩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국교로는 라마교를 받아들였지만 모든종교의 활동이 가능했다(그러나 빈약함)하지만 전쟁의 시기, 중용한 일의 성패, 길흉등 나라안의 중요한 일은 무당이 다른 종교를 대신하여 무당의 권위가 대칸에 맞먹을 정도로 높은 나라다. 경제의 대부분은 목축이다. 그렇기에 정복지의 대부분의 지역에 있는 성을 파괴하여 가축을 기르기 용이 하게 하였다. 하지만 상업도 많이 발전 하였기에 아랍상인들이 세금만 내고 제국 어디든 상업을 할 수도 있었다.(이 아랍상인들은 몽고제국에 많은 공을 기여하였다. 사신단이 되어 호라즘을 방문, 칭기즈칸에 대한 소문을 뿌리기도 하고 다른 지역의 정보를 물어다 주기도 하였다.) 인재등용은 가문보다는 능력위주로 하였다. 비참한 노예도 재상이 될수 있엇다. 실제로 금나라의 신하였다가 칭기즈칸의 무장의 노예가 된 아율초재라는 인물은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제2대칸 오고타이칸대에 재상이라는 고원2번째 자리에 오르게 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배신자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적 포함)은 모두 받아 들여 인재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비단길을 통한 서역으로의 정복 활동으로 인해 중국의 많은 문물들이 아랍과 유럽등지로 이동하게 된 큰 계기가 되었다. 3.칭기즈칸 사후 칭기즈칸이 서하원정 후 죽자 제국은 한번의 위기를 맞이 하였다. 바로 제2대칸의 선출이었다. 물론 칭기즈칸의 생에 셋째인 오고타이를 다음 대칸으로 지명했기에 오고타이가 오르면 되었지만 몽골의 고원 관습상 막내인 톨루이가 대칸에 올라야 했기에 문제는 커졌다. 뿐만아니라 쿠릴타이를 통해 대칸이 선출되어야 했는데 그 쿠릴타이를 열 수있는 사람이 톨루이 뿐이 었기에 그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고 2년간 그 결과 2년간 몽고제국의 대칸이 선출되지 못하고 공석으로 남아있었다. 이에 톨루이의 측근들은 유언은 무시하고 대칸에 자리에 올라라고 하였다. 하지만 둘째 차가타이의 권유로 쿠릴타이를 열어 오고타이는 대칸의 자리에 선출되어 올랐다. 대칸의 자리에 오른 오고타이는 금나라를 완전히 멸하고 싶어 직접 친정(이 당시 몽고제국은 대칸이 무조건 전쟁에 나서 지휘해야 했음)하여 금을 치고 고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승리에 기뻐 오고타이는 술로 세월을 보냈는데 형 차가티이의 충고로 다시 원정 준비를 하였다. 이 때 재상이었던 아율초재가 오고타이에게 러시아 원정을 하라고 하고 오고타이는 제국(4한국 포함)모든 장수들을 불러 의논한다. 이에 고려, 남송, 러시아3곳을 원정하기로 하고 고원 처음으로 오고타이가 원정을 친정하지 않고 수도에 남아 성을 세웠다(몽고는 성을 세우지 않음. 징기즈칸의 유언이기도 함)고려는 김윤후의 손에 죽은 살리타이의 부장이 그 원정을 계속하고 남송은 오고타이의 셋째 고추가 러시아 원정은 주치의 둘째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나머지 징기즈칸의 손자들이 이원정을 떠 맡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서방의 나라들이 몽고의 공격을 받게 된것이다. 이 원정은 고려 남송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러시아 만은 성공적으로 일을 마쳤는데 원정군을 러시아 뿐만아니라 터키 독일 폴란드 오스트리아 등 동유럽을 모조리 쓰어 버렸고 서유럽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사촌간의 불화가 터져 그 원정은 실행되지 않았다. 오고타이는 형제간의 불화를 직접 체험한 인물로 사촌들간의 불화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었기에 원정군을 소환 서 유럽은 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엇다. 그 후 오고타이가 사망하나 바투를 비롯한 추치가의 후손 톨루이의 후손은 그 장례식에 참석 하지 못하고 만다. 이때 쿠릴타이를 열 인물은 주치가의 장손(첫째가 죽어 둘째 바투가 장손역을 대신하였다) 바투뿐이었는데 오고타이 한국과 차가타이 한국은 바투의 러시아 원정군을 두려워해 수도로 오는 것을 저지하고 약간의 부족장들만 모아 임시 쿠릴타이를 개최 오고타이의 장남인 쿠유크를 대칸에 선출한다. 이에 바투는 그것은 가짜라고 선언하고 군사력으로 쿠유크의 오고타이한국과, 차가타이 한국을 위협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에서 쿠유크가 죽고 바투는 수도인 울란바토르로 정병을 이끌고와 군사력으로 장악하고 새로이 구릴타이를 개죄 톨루이의 장남 몽케를 대칸에 선출한다(바투자신이 대칸에 올라야 하나 아버지 주치의 유언으로 대칸에 오르지 않음) 이에 몽케는 대칸에 오르고 일한국과 킵차크한국의 관계는 더욱 우호적이 되어갔다. 몽케는 전쟁을 치러 축소된 대칸의 위엄과 제국의 권위를 세웠다. 하지만 몽케는 얼마 안돼 죽고 그뒤를 그의 동생 쿠빌라이가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몽케때 세력을 모으던 오고타이한국과 차가타이한국 그리고 쿠빌라이의 막내동생도 대칸의 자리가 탐이나 군대를 일으키게된다. 쿠빌라이는 남송원정군을 고원으로 보내 그들을 군사력으로 제압 대칸이 된후 수도를 개봉으로 옮기고 황제의 칭호를 섰으며 국호를 원으로 고쳤다. 그때부터 제국이 완전이 금이가 원제국과 4한국이 서로 대립 연합한다. 4.원제국과 4한국의 관계 원제국과 4한국은 몽고제국에서 나온 같은 핏줄이었다. 하지만 원제국과 4한국의 관계는 많은 갈등을 일으켰다. 원제국의 황제 쿠빌라이는 킵차크한국 일한국의 원조로 나머지 두 한국인 차가타이한국과 오고타이 한국을 누를 수있었다. 왜 원제국과 4한국의 관계과 이렇게 되었냐하면 징기즈칸이 살아 있을 때부터 그러한 기미를 보였다 바로 징기즈칸의 4아들 중 주치와 차가타이의 갈등으로 킵차크한국과 차가타이한국이 이러한 갈등을 보였다. 주치가 장자이기 때문에 대칸에 올라야 하는데 차가타이의 반대로 대칸의 자리가 오고타이에게로 넘어갔기에 그의 후손들이 서로 대립한 것이다. 오고타이한국과 일한국의 관계도 비슷하다. 그럼 원은 왜 일한국과 킵차크한국과 연맹한 것일까는 원제국의 대칸 즉 몽고제국의 대칸이 바로 일한국의 후손이기 때문이다(톨루이의 둘째 아들) 또 킵차크한국과 일한국이 서로 연맹한 이유는 원제국의 대칸이 일한국에서 나오도록 킵차크 한국의 군사적 도움때문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3개의 제국이 연맹하여 원을 다스렸다. 한마디로 원의 권략이 4한국을 다스리지 못하고 4한국이 독립된 권한을 가져 제국이 운영되게 된 곳이다. 5.몽고제국이 망하게 된 원인. 몽고제국이 망하게 된 원인은 여러게 있지만 가장큰 원인은 지배층의 분영과 대립이었다. 몽고제국의 지배층은 황금씨족으로 징기즈칸의 후손들이다. 징기즈칸은 자신이 죽고난 후 권력을 다툴까 큰 영토를 5개로 나누어 4개를 자식에게 1개를 대칸에게 물려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 제국의 단합은 없어지고 4개의 한국에서 대칸이 되기위해 전쟁을 일삼았다. 그 결과 대칸의 명령이 4한국에 미치지 못하고 4한국이 독립된 권한을 가지게 된것이다. 이로 인해 제국이 완전 분열되어 버려 강력한 임을 잃어 원제국이 망하고 나아가 몽고제국 자체가 망해버렸다. 다른 하나는 한족을 너무 무시 하였다. 비록 인재는 능력위주로 사용하였으나 그 외의 백성들 특히 한족(남송)들은 살기가 힘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징기즈칸때에 부터 농경민은 우대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농경민은 전투력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징기즈칸은 자신의 후손들중 한족에 동화되어 성을 짓고 살거나 문자를 배우는 등 고원의 것을 버리는 사람이 없기를 재차 강조하였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또 다른 것으로는 제국이 너무커 명령체제가 전달이 잘되지 않고 전쟁때마다 많은 사람을 죽여 나라를 다스릴 인재나 백성의 수가 부족했던 것도 그이유중 하나이다. 6.평가 사인에 대해서는 서정 참가를 거부하였던 서하를 응징하려다 낙마로 부상하여 중국 육반산 남쪽 땅에서 죽었다는 설, 서하의 수도 닝샤를 포위하였으나 간쑤성 칭수이현 시장강 부근에서 병사하였다는 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업적으로는 전무후무한 대제국을 건설하여 비단길을 다시 열고, 마르코 폴로와 그리스도교 선교사들로 하여금 아시아를 왕래할 수 있게 한 것을 들 수 있다. 동서양의 문화교류는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위구르문화를 사랑하여 아들들에게 위구르문자를 배우게 하였고, 국자로 채용하였다. 이 문자를 바탕으로 몽골문자와 만주문자가 만들어졌다. 1206년에 만든 법전은 상당한 권위를 지닌 것이었으며 몽골법과 통치방식은 초기 러시아 제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비록 여러 문화를 파괴하였지만, 종교나 소수 민족 문제 등에는 관대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평가는 상반될 수 있다. 오늘날 중국과 러시아는 그를 비난하지만, 몽골에서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로서 추앙하고 있다. 몽골제국과 원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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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을 선택하자면 칭기즈 칸이 1206년에 세운 몽골 제국이다.
![]() 칭기즈 칸
![]() 칭기즈 칸의 역사와 영토를 나타내고 있는 지도로 프랑스 역사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동해를 한국해(Mer De Coree)로 표기하고 있다.
거대 제국을 세운 몽골의 전성기는 원나라를 수립한 쿠빌라이 시대로 알려져 있다. 중국을 기반으로 한 원나라는 중국식 연호를 사용했으며 1279년에 남송을 정벌하고 중국대륙을 지배하게 된다. 이후 1368년 주원장이 이끄는 반란군에게 원나라는 멸망하게 된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의 역사관이 반영된 것으로 몽골제국의 후예들은 20세기까지 존재하였다. 몽골제국은 기본적으로 부족사회로 중앙집권 체제를 가진 국가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칭기즈 칸이 죽고 부족연합이 느슨해지자 각각의 칸국으로 나뉘게된다. 각각의 칸은 몽골제국의 후예로 서로 협조하기도하고 대립하기도 하며 몽골제국을 이끌어 나가게 된다. 원나라는 쿠빌라이때 최전성기를 지내긴 하지만 이러한 칸 국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이러한 원나라조차 1368년 주원장이 이끄는 반란군에게 멸망당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몽골고원으로 물러난 것이었다. 이후 명나라의 영락제는 수차례 원나라를 정벌했지만 완전히 토벌하는데 실패한다. 특히 1449년 원나라의 예센은 명나라에게 엄청난 타격을 가하여 명나라 군대 10만을 섬멸하고, 영종황제를 포로로 잡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1635년 원나라는 멸망하게 되는데 명나라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후 청태종이 되는 홍타이시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명나라와 원나라는 이백여년 동안 싸웠지만 결국 10여년의 기간을 두고 청나라에 의해 멸망당한다. 이후 청나라는 몽골제국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나선다. 몽골제국이 북방민족의 연합이라고 보았을 때 청나라도 자격이 있었던 것이었다. 중국의 서쪽을 보면, 몽골 왕실의 후예였던 티무르가 1369년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에 제국을 세운다. 나라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편의상 티무르 제국이라 부르게 된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제2도시인 사마르칸트는 고대에 실크로드의 교역기지로 중국에서는 강국이라 불리우는 곳이었다. 티무르제국은 서아시아 일대에서 패권을 잡고 있는 오스만 투크크를 격파하고 중앙아시아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며, 사절을 영국과 프랑스에 파견하여 그 위력을 과시한다. 티무르는 제위시절 명나라를 정복하려 하지만 정복 길에 오른지 얼마 후 사망한다. 그 당시 명나라는 최대 전성기였고, 만약 티무르와 명나라가 싸웠더라면 세계 역사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티무르 제국은 이후 1500년에 거듭된 내전으로 우즈베크족에게 멸망당한다. 지금의 인도에서 칭기즈 칸의 후손인 바부르가 1526년 무굴 제국을 세운다. ![]() 바부르
바부르의 손자 악바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벵골 만에 이르기까지, 또 남북으로는 구자라트에서 데칸까지 영토를 확장해 무굴제국의 기초를 다졌다. 무굴제국은 1857년 멸망하게 되는데, 무굴제국이란 페르시아어로 몽골제국을 의미하며, 기존의 몽골제국과 이름이 같기 때문에 후대사람들이 편의상 무굴제국이라 부르는 것이다. 러시아 지역에서는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황금오르도의 영역이 있었으며, 1783년 에카테리나 2세가 크리미아를 멸망시키면서 끝나게 된다. 특히 러시아의 짜르는 몽골 혈통만이 정통성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1575년 이반 4세 같은 경우 몽골 황족을 짜르에 앉힌후 그 다음해에 양위를 받아 짜르가 될 정도였다. 특히 17세기 로마노프 왕조에는 몽골계 귀족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 사회과부도를 보며 시간을 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제국들의 영토를 보며 가장 강대한 나라였던 몽골이 불과 100년만에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의아해 했던 기억이 있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했는데, 세계 최강국이었던 몽골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리가 있겠는가. 몽골은 세계사에 획을 그은 국가였고, 단순히 몽골제국의 한 지역이었던 원나라가 무너진 것을 몽골제국이 무너진 것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는 중국의 25사 중 '원사'에 기초한 교육을 받은바가 크다. 중국의 역사는 중국 대륙 이외의 역사는 기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는 어느 한 사람이나 한 나라의 것이 아닌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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